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328
제 328화
102장. 특이점, 나스(Nars) – 1화
화염의 정령왕 이그니스.
바람의 정령왕 비에나.
물의 정령왕 나스리가.
대지의 정령왕 렌디로스.
뇌전의 정령왕 카슈타.
이렇게 다섯은 사실 오래전부터 각자의 영역을 구축하며 살았던 정령들이었다.
그나마 이그니스와 비에나가 서로를 향한 연정(戀情)으로 엮여 있었을 뿐, 나머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자레드 덕분에 이그니스와 비에나가 그토록 고대하던 해후를 누리게 된 이후.
현명한 비에나는 정령들의 단합을 추구했다.
중간계, 즉 인간의 세계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령들의 힘이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이그니스는 비에나의 권유에 떠밀리는 형태로라도 그녀의 뜻에 동의했지만.
다른 정령왕 셋은 지금까지도 아무런 문제도 없이 잘 지내왔는데, 새삼 왜 힘을 합쳐야 하냐는 식이었다.
특히 중간계의 성마 대전마저도 남들의 일로 치부했던 그들이었기에.
정령의 힘을 하나로 통일한다는 것은 뜬구름이나 잡는 허튼 이상론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비에나의 끈질긴 진심은 마침내 통했다.
정령의 힘을 하나로 합칠 수 없다면, 그 힘을 갖출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가호 정도는 몰아주자는 것이었다.
가호는 얼마든지 정령왕의 뜻에 따라 거둘 수 있는 일종의 계약된 힘에 가까우니까.
오늘의 자리는 바로 이 가호를 통합하는 것에 대한 논의를 하는 자리였다.
비에나는 내심 자레드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당연히 내색하지는 않았다.
온몸이 화염으로 이글거리는 이그니스가 옥좌를 내려와 자레드에게 물었다.
“자레드, 어쩐 일이지?”
“인간의 세계에 잠깐이나마 여유가 생겨서 이그니스 님과 비에나 님께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팔자가 좋구나, 인사라니. 그렇게 할 일이 없지는 않을 텐데?”
“맞습니다.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요. 앞으로는 더 바빠질 것 같기에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마치 노린 것처럼 이 시간에 찾아왔구나.”
“단언컨대 의도한 것은 아닙니다. 우연의 일치 같습니다만.”
“으음.”
“다른 분들께도 진심으로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합니다. 나스 대륙의 크리비아 제국을 통치하고 있는 황제, 자레드 폰 유칼레스라고 합니다.”
자레드가 다른 세 정령왕을 향해서도 예를 올렸다.
생각지도 않은 만남을 가지게 된 정령왕 셋은 어정쩡한 자세로 자레드의 인사를 받았다.
다들 정령의 속성에 완벽히 어울리는 외형을 갖춘 자들이었다.
자레드는 혹여 자신의 행동이나 말이 그들에게 영향을 줄까 싶었고, 그래서 최대한 말을 아꼈다.
그러자 비에나가 구원투수로 나섰다.
“자레드 황제! 반가워요!”
“비에나 님,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이렇게 또 뵙는군요.”
“잘 지냈지요. 성마 대전이라 불리는 대전쟁에서 인간의 승리는 정말로 인상적이었어요.”
“감사합니다.”
“우리 정령의 힘이 자레드 황제에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물론입니다. 두 분이 내려 주신 화염과 바람의 가호는 제 마법의 원천이 되어 수호의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 정령은 인간, 드래곤, 마왕 할 것 없이 사실 그 어디에도 접점을 두지 않았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중립을 원칙으로 해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오해가 없으면 해요.”
“오히려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성마 대전으로 인해 정령계에 아주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쳤다면, 모든 책임은 제게 있습니다.”
“책임 여부를 따지자는 건 아니에요. 다만 우리의 중립성에 대해서 자레드 황제가 이해해 주길 바랄 뿐이죠.”
“너무 당연한 말씀입니다.”
확실히 비에나와 자레드가 대화를 이끌어 가니,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미아는 잘 지내나요?”
“잘 지내다마다요! 여왕께서 보살펴 주신 덕분에 지금 대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바람의 마법사가 되었습니다.”
“호호, 조금이나마 미력하게 후원했던 후원자로서 뿌듯한 소식이네요.”
그때.
“반쪽짜리 가호에 대해서 따지러 온 것이냐? 온 목적이 확실히 있을 텐데.”
이그니스가 비에나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감싸더니, 짙은 열기를 뿜어내며 대화에 합류했다.
그것을 묻는 것이 자레드의 주목적은 아니었지만, 분명 궁금하기는 했다.
이그니스가 자신에게 내릴 수 없었던 사라진 반쪽의 가호는 도대체 누구에게 가 있었던 걸까?
“이곳에 온 목적은 두 분에게 안부를 묻기 위함이었습니다. 진심입니다. 물론 온 김에 가호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만…….”
“대상이 죽지 않았다면 말을 아꼈겠지만, 이제는 확실하게 말해 줄 수 있겠군. 내가 내린 화염의 가호 반쪽은.”
“예.”
“인간 마법사, 이카젤라가 가져갔었다. 네가 날 찾아오기 전, 아주 한참 전의 이야기다.”
“역시…… 그랬군요.”
이카젤라라면 이해가 간다.
어렸을 적부터 두각을 드러낸 마법사니까. 그가 변절하지만 않았더라면, 미래는 달라졌을 것이다.
“보여 주지. 내게는 중요했던 기억이라 그때의 기억을 화염에 새겨 놓았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그니스가 허공에 손을 휘저어 거대한 불의 화면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마치 영화같이 구현된 것이었는데, 주요 매개체가 불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똑같았다.
‘저는 화염이 좋습니다! 불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마법사가 되겠습니다!’
‘교단은 저의 신념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암흑’ 교단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빛’에 가까운 교단임을 자신합니다!’
영상 속에서 청년 마법사 이카젤라는 자신감에 가득 찬 당돌한 목소리로 이그니스에게 자신을 어필하고 있었다.
분명 그때의 모습은 이후 마탑의 흑막이 되어 미치광이가 됐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카젤라도 여길 찾아왔었던 자레드가 그랬듯 시험에 통과했고, 가호를 얻을 자격을 취했다.
아마 자레드처럼 ‘가호’의 유무에 대해서 알고 온 것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나는 이 인간 마법사가 화염 정령의 힘을 세상에 알릴 멋진 마법사가 되리라고 믿었다. 네게 가호를 내렸을 때와 마음이 같았다.”
“하지만 절반만 주셨군요.”
“그것은 녀석의 순수해 보이는 눈빛에서 너무나도 이질적인 기운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 악에 심취한 나머지 악을 선이라고 착각하게 되어 버린 자의 눈빛이었다.”
“그래서…… 절반의 기대만 하셨던 것이군요.”
“맞아. 남은 절반의 기대는 나중에 찾아올 새로운 도전자에게 하기로 했지. 그게 바로 너였다.”
이제야 이해가 가는 앞뒤의 사정에 자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카젤라는 자신과의 전투에서 화염 계열의 마법을 잘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화염의 가호를 받은 것치고는 활용도가 너무 낮았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충분히 추론 가능한 다른 대상이 있었다.
‘암흑 기.’
바로 레크나트를 통해, 암흑 제단으로부터 얻게 된 암흑 기였다.
모이면 모일수록, 더 강력한 흑마법의 힘을 발휘하게 만드는 암흑 기.
그것이 가져다준 힘의 쾌감은 이그니스의 반쪽 가호에 비할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젊었을 때의 순수했던 그 기억을 모조리 잊어버리고, 화염을 멀리했었던 것일 터.
“어쨌든 모두 지난 일이 됐다. 내게는 반쪽짜리 가호가 있지만, 그 가호가 네 것은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진지해진 이그니스의 말에 자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호는 당연히 취해야 할 자신의 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정령에게 신뢰로 얻어 내야만 하는 계약의 힘이자 그들의 숭고한 영혼이었다.
“솔직히 말해라. 단순히 안부를 묻기 위해서 찾아왔다고 하기에는 인간의 황제인 네 어깨에 지워진 짐의 무게가 가볍지 않다.”
속마음을 꿰뚫는 이그니스의 말에 자레드가 살짝 숨을 죽였다.
퀘스트는 단지 인연의 매듭을 지으라는 추상적인 안내만 한 상태였지만.
자레드는 어느 정도 유추하고 있었다. 앞으로 다가올 동방 대륙과의 충돌을 대비하려면.
무엇을 생각하고 있건 간에 그 이상의 만반의 준비를 갖춰 두어야만 한다는 것을.
이를 위해서 이그니스의 남아 있는 화염 가호의 절반도 자레드에게는 소중한 힘이었다.
“인간의 세계가 또 한 번 대전쟁에 휘말리려고 합니다. 이번에는 다른 차원의 존재와 엮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자레드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그리고 제법 긴 이야기가 시작됐다.
* * *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어떤 힘을 가지고 있으며, 나스 대륙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짐작할 수 없는 적의 존재에 대해.
이그니스와 비에나를 포함한 모든 정령왕이 내 말을 경청했다.
그들에게 있어 나스 대륙의 인간이나 드래곤, 마족들은 예측 가능한 존재였다.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원 베디세트’라고 불리는 동방 대륙에 대해서는 나와 똑같이 그들에게도 미지의 세계였다.
나스 대륙의 인간과 드래곤은 정령의 영향력과 독립성을 인정하고, 그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극단적인 예로 만약 동방 대륙이 나스 대륙을 정복하게 된다면?
그들이 지금의 나스 대륙의 문명처럼 정령의 독립성을 인정해 줄지는 의문이었다.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감은 비단 나만의 감정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도 정령 일족을 이끄는 수장이기에 걱정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얘기였다.
“제게 정령의 힘을 빌려 달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계약의 힘을 빌려 감히 여러분의 고귀한 능력을 발현할 수 있도록 제게 힘을 실어 주십시오.”
나는 정중하게 부탁했다.
애초부터 이런 말을 준비하고 온 자리는 아니었지만, 퀘스트가 나를 그런 방향으로 인도했다고 여겼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 퀘스트.
이것은 과거에 대한 매듭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래를 여는 뜻도 내포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때, 뇌전의 정령왕 카슈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향해 단숨에 날아왔다.
섬광이 번쩍하자, 이미 그는 내 눈앞에 도착해 있었다.
과연 정령왕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그의 움직임은 신출귀몰하고도 빨랐다.
“나스 대륙이 망한다고, 정령의 세계가 무너질 것 같은가?”
“바로 무너지진 않겠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네게 작은 도움이라도 줄 이유는 없는 것이 아니냐?”
카슈타의 날 선 한 마디에도 분명 일리는 있었다. 나는 차분하게 그의 말에 답을 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존재하는 그 자체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숨을 쉬는 공기도 그렇지요.”
“…….”
“그간 정령계가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그것은 단언컨대 인간의 세계가 거대한 방파제의 역할을 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공을 인정이라도 해 달라는 것이냐?”
“아닙니다. 상호 공생 관계. 인간은 정령을, 정령은 인간을 떼어 놓고 미래를 논할 수 없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상당히 발칙하군. 네가 인간들을 다스리는 황제라고 해서 우리의 황제라도 된다고 착각하는 것이냐?”
날이 바짝 선 카슈타의 반응이 매섭게 돌아왔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다른 정령왕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저마다의 속성을 상징하는 눈빛을 뿜어내며, 나를 향해 짙은 적의가 담긴 눈빛을 발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