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330
제 330화
102장. 특이점, 나스(Nars) – 3화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더욱 기뻤다.
나스와의 전투는 하나하나가 내게 살아 있는 교재이자 끊임없는 자극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레크나트에게 승리하고 나만의 차원에 격리된 이후.
1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업그레이드’는 이제 다 했다고 생각했다.
즉,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고 여겼다. 9클래스 위는 존재하지 않았고, 최종 보스와 같았던 마왕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어리석고도 오만한 생각이었다.
나스는 충분히 내 자신을 뛰어넘을 수 있는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 주었다.
무아지경.
나는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오로지 전투에만 몰두했다.
화염과 얼음, 대지와 뇌전, 물과 바람의 힘을 자유자재로 쓰는 나스.
녀석의 레퍼토리는 내가 완벽하게 모방하고 따라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최적화된 나스의 공격 패턴을 꾸준히 학습한 뒤, 거기에 나만의 변주를 섞어 되받아쳤다.
나 역시 5가지 속성의 힘을 최고의 숙련도로 다룰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전투의 중반까지는 호각세, 혹은 등가교환이 계속됐다.
서로 물러서지 않거나 한 대를 때리면 똑같이 한 대를 돌려주는 양상이 이어졌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팽팽했던 균형의 추가 점점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나스의 모든 공격 방식을 ‘흡수’하고 난 뒤였다.
‘시험을 위한 적으로 만났지만, 마치 내게 족집게 과외라도 해 주려고 나타난 선생님 같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스는 내게 끊임없이 의외성을 보여 줬고, 그 의외성을 당황하지 않고 흡수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험의 전투조차 버텨 낼 힘이 없었다면, 진즉에 무릎을 꿇고 피를 토해 냈을 것이다.
자화자찬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버텨 냈으니 학습할 기회도 얻을 수 있었던 셈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격리되었던 1년 동안 마법 훈련과 실험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 드디어 빛을 발하는 듯했다.
-크윽! 으윽!
-대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추적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디멘션 도어와 디멘션 브레이크를 위시한 공간 활용 마법을 극단적으로 이용하는 내 공격에 나스가 고전하기 시작했다.
공간이 왜곡되면서 주변을 구성하고 있는 마력의 힘에 변주가 생기자, 나스가 당황한 것이다.
특히 트랜센던스를 적극 활용하면서 왜곡을 일으키자, 나스는 더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퍼어억! 퍼억!
나는 집요하게 나스의 후방 포지션을 잡으며, 마법을 있는 대로 쏟아부었다.
가장 자신 있는 화염 계열의 마법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속성의 마법을 골고루 곁들여 썼다.
나스도 끊임없이 발악하며 내게 저항했지만, 갈수록 반응 속도가 더뎌졌다.
나스의 전투력은 그대로였다.
대신 끊임없는 공방전을 거치면서, 내 전투력이 향상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생각할 수 있는 존재, 인간 마법사로서 내가 보일 수 있는 강점이었다.
나스는 분명 나보다 뛰어난 존재였지만, 정령왕들이 만든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나진 못했다.
하지만 나는 빠르게 지식을 흡수하며 받아들였고, 나스의 경험과 대응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일방적인 타격이 몇 분쯤 이루어졌을까?
내 마력이 2할의 잔여 지점을 지나 그 아래로 떨어지려고 할 무렵.
-더 이상…… 더 이상의 전투가 불가능합니다.
나스는 무릎을 꿇고,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음을 스스로 시인했다.
“자레드 황제는 전부터 남달랐지만, 지금은 전보다 더 훌륭한 존재가 되었네요.”
“제법이군. 이렇게 빨리 나스의 모든 것을 흡수할 줄은. 솔직히 의외야.”
비에나와 이그니스가 나를 향해 박수를 치며, 찬사를 보냈다.
“크윽.”
뭐라고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이제야 뒤늦게 고통이 밀려와 신음을 토해 냈다.
나스와의 전투에 몰입하면서 깨닫고 배운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과정에서 입은 부상이나 신체의 과부하를 내가 인지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전투가 끝나며 긴장이 풀리자, 마치 갑자기 망치로 몸 전체를 두들겨 맞은 듯이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러자 지켜보던 물의 정령왕 나스리가가 나를 향해 단숨에 달려왔다.
혹시나 나스에 이어 결투라도 신청하려는 것일까 싶었지만.
“내가 회복을 도와주지.”
나스리가는 내 어깨 위로 손을 얹더니, 그만의 특별한 치유술을 내게 시전해 주었다.
몸 전체를 맑은 물방울이 감싸는 형태의 정령술이었는데, 마치 전신에 시원한 바람을 불어넣는 느낌이었다.
물방울이 내 살결과 피부에 톡톡, 하고 닿을 때마다 기분 좋은 쾌감과 함께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헤이즈의 치유술과는 발현 기전과 궤가 전혀 다른, 정령만의 특별한 치유술인 듯했다.
“어지간한 드래곤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설계한 나스를 무릎 꿇리다니. 인간의 한계를 얕잡아 본 듯하군.”
이어서 지켜보던 렌디로스가 말을 덧붙였다. 그 역시 나를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카슈타가 말했다.
“나스는 모든 정령의 지식과 경험이 결집된 존재다. 학습 능력은 없지만, 완전체라고 불릴 수는 있었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맞아. 쉬운 존재는 아니지. 하지만 너는 나스를 적으로 상대한 게 아니라 일종의 스승으로서 대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카슈타는 아주 정확하게 내 의도를 알아챈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몰라서 대응하기 바빴던 전투 초반을 제외하면, 내게 나스는 좋은 ‘스승님’이었다.
“맞습니다.”
“실력은 확실하게 알았다. 네가 충분히 중간계를 대표할 수 있으며, 평화와 전쟁의 균형을 맞출 수 있다는 것도.”
카슈타의 말에 다른 정령왕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생각도 같은 모양이었다.
그러자 카슈타가 말을 이어서 덧붙였다.
“다시 한번, 왜 우리의 가호가 네게 꼭 필요한지를 인지시켜 주었으면 한다.”
“이 세계 전체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인간뿐 아니라 수많은 이종족, 나아가 정령계와 드래곤까지 지키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강력한 힘이 필요합니다.”
“가호를 네게 준다면, 이 세계를 지킬 자신이 있느냐?”
“100%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을 겁니다. 저는 신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무엇이냐?”
“이미 저는 성마 대전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었습니다. 실제로 죽을 뻔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제가 태어난 순간부터 저는 이런 운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지켜 내기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수호자.”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물론 현생에 눈을 뜬 순간부터 저런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때는 망나니 돼지 영주로서 영지를 수습하기에도 급급했던 나였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나는 운명의 수레바퀴가 ‘자레드 폰 유칼레스’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무너지면, 이 넓은 세계의 그 어떤 것도 안전해질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때부터 마음을 달리 먹었다.
내게 주어진 거대한 운명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미래를 개척해 나가기로 말이다.
게임 의 메인 스토리였던 성마 대전이 1년 전에 끝나 버린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하루하루는 와는 연관이 없는 나만의 새로운 삶이었다.
나를 비롯한 모든 존재가 의 데이터 쪼가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나스 대륙’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모든 요소에 철저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아울러 더 강해질 수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그 힘을 취할 생각이었다.
“우리 모두가 네게 가호를 내린다는 것은 정령의 확실한 신뢰를 뜻한다. 그 말인즉, 배신을 용납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태초의 마법은 정령술에서 파생된 것이고, 인간의 뿌리는 대자연의 속성에 기반을 둡니다. 정령이 인간의 모태(母胎)와 같은데, 어찌 다른 마음을 먹겠습니까?”
나는 힘주어 말했다.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다.
정령을 제외한 인간의 삶은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가진 영향력을 무시하고 배척하기 시작한다면, 인간의 세계는 그야말로 지옥이 된다.
물이 말라 가뭄이 찾아오고,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아 모든 곳이 폐허가 될 것이며.
몰아치는 태풍에 모든 것이 무너지고, 쏟아지는 번개에 생지옥이 열릴 테니까.
거기에다가 신의 분노라고 불리는 지진까지 더해진다면?
인간은 단 일분일초도 안심하지 못하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지. 네가 가진 능력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다고 할 정도로 특이하구나.”
“운이 좋아 많은 능력을 과분하게 얻었습니다.”
“그 운도 실력이다. 마법을 초월한 그 능력……. 참 인상적이더군. 드래곤도 함부로 흉내 낼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보면서 이미 얘기를 나눴다. 자격은 충분하다고. 문제는 상호 간의 신뢰인데, 나는 이그니스와 비에나의 보증을 믿겠다.”
세 정령왕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는 이그니스와 비에나가 환한 미소를 짓고 웃고 있었다.
예전에 만들어 두었던 그들과의 인연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비에나와 이그니스의 금지된 사랑(?)을 이어 줬던 것이 지금까지 이렇게 좋은 영향을 미칠 줄이야.
뿌듯했다.
“모든 정령왕의 앞에서 맹세하겠습니다. 저, 자레드 폰 유칼레스는 다섯 분의 가호를 오로지 이 세계를 수호하기 위해서만 사용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렇지 않는다면?”
“모든 정령의 분노와 원망의 대상이 되어 갈가리 찢겨져 죽더라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후후, 말은 누구든 번지르르하게 잘할 수 있지. 되었다. 앞으로의 네 행보로 직접 증명해 보여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비에나가 내 곁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손길을 잡아끌었다.
“이제부터 자레드 황제에게 우리 모두가 가호를 내리게 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최상급의 정령까지 그대의 수호자가 될 겁니다.”
“정령술을 따로 학습하게 되는 것입니까?”
“아니에요. 자레드 황제가 구현한 5속성의 마법에 자연스럽게 정령술이 연계되는 것이죠.”
“가호 자체가 마법과의 연계로 이어진다는 말씀이시군요.”
“맞아요. 어떤 마법을 쓰건 정령들이 알아서 보조를 할 겁니다. 정령들의 분류가 등급으로 나누어져 있기는 하지만, 모두가 영민한 존재들이니까요.”
“그렇겠지요. 정령들의 높고 낮음을 하찮거나 보잘것없게 여긴 적은 없습니다.”
“호호, 그래요. 그리고 명심하세요. 정령이 황제의 곁에 있는 만큼, 우리도 늘 황제를 지켜보게 될 겁니다.”
“바라던 바입니다. 다만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혹시 이 대륙을 넘어 다른 세계로 가게 된다면……. 그때도 정령의 힘을 부릴 수 있을까요?”
“마왕군이 있던 마계처럼 전혀 다른 차원이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그대가 말하는 동방 대륙은 아니에요. 접점이 생겼으니까.”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군요.”
“자, 여기에 편하게 앉으세요. 그대에게 우리 모두의 가호를 내릴 시간입니다.”
나는 지면에 무릎을 꿇고 앉은 뒤, 고개를 반쯤 숙이고 눈을 감았다.
이제 모든 정령왕의 가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내가 사는 터전의 일부를 완벽한 안전지대로 만들 수 있는 방법도 생겼다.
오늘의 일이 끝나고 나면.
나는 베르하드와 함께 본격적으로 동방 대륙에 대한 전방위적인 탐사에 나서게 될 것이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나를 위한 ‘업그레이드.’
이 소중한 시간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나는 두 눈을 감은 채로 나스와의 전투를 꼼꼼하게 복기했다.
그리고.
“그대에게 가호를 내리노니.”
이그니스의 선창과 함께, 다섯 정령왕의 가호가 내게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