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362
제 361화
113장. 신을 죽여라 – 1화
침묵을 깨고 내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무리 봐도 한국인의 모습을 한 남자였다.
동양인이 아닌 한국인이라는 말을 감히 할 수 있을 만큼 전형적인 한국인의 외모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반갑군.
“당신이…… 조력자?”
-맞아. 장황한 인사는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본론부터 얘기할까 하는데 어때?
“나 역시 바라는 바라서.”
성격이 뭔가 비슷한 면이 있어 보였다.
나도 구구절절한 말을 싫어하는데, 조력자도 마찬가지인 모양.
-나는 차원계 ‘지구 3013’에서 온 박도혁이라고 한다. 출신은 그곳이고, 넓게는 차원의 관리자지.
“박도혁……. 정말 한국인이네. 그런데 지구 3013이라고? 나도 지구에서 온 사람인데?”
-후후. 이 넓은 우주에 지구가 하나일 것 같아? 그건 지나친 자원 낭비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나, 신태풍 씨?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야?”
-알 수밖에. 내가 사는 ‘지구 3013’에 너랑 똑같이 생긴 신태풍이라는 녀석이 있거든.
“뭐?”
-난 네 본질이 보여. 이 세계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본질은 너도 대한민국 사람이잖아.
“…….”
내심 많이 놀랐다.
박도혁의 눈에는 내 전생이 보인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이었다.
그는 조력자로서 차원계를 넘어 내게 영향을 준 사람이었다.
앞서 시련에서 얻은 보상은 박도혁이 설계해 놓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나중에 너도 지구에 가면 한번 찾아봐. 나랑 똑같이 생긴 박도혁이라는 놈이 있을 거다.
“뭘 하고 있는데?”
-그건 나도 모르지. 내가 사는 지구의 신태풍은 재무 설계사거든. 넌 아닐 텐데?
“맞아.”
-우주는 매우 넓어. 평행 우주, 평행 세계도 셀 수 없이 많이 존재하지. 우린 그중 하나일 뿐이야.
“믿기지 않는군.”
-어쨌든 핵심만 말하자면 난 조력자이기는 하지만, 너를 직접 도울 수는 없다.
겨우 빈틈을 찾아내서 네게 영향을 줄 수많은 방법을 고려해서 심어 두기는 했지만.
직접 개입하는 순간 차원의 균열이 아예 무너지고 말아. 지금도 모래성처럼 매우 위태롭지.
“그 말은…… 로케발은 결국 나 혼자의 힘으로 직접 막아 내야 한다는 소리로군.”
-그럴 수 있을 만한 안배를 해 줬잖아? 물론 신에 맞선다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만약 당신이 개입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로케발은 막을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균열이 생기면서 바로 다른 차원이 붙을 거다.
그리고 그 차원이 어떤 차원이 될지는 나도 알 수가 없어. 바로 네가 사는 세상이 불바다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지.
“한 가지 더 물어보고 싶어. 그렇다면 내가 로케발을 죽인다면, 얼마나 상황이 좋아지는 거야?”
-차원의 균열값을 계산하면 로케발을 죽이고 정상적으로 균열을 매듭지으면…….
음, 향후 최소 500년은 평온하겠군. 아무 일도 없을 거다.
“하지만 내가 사는 대륙에는 내가 예전에 살던 지구와 연결되도록 만들어진 차원문이 있어.”
-그런 종류는 균열이 아니라 통로일 뿐이다. 좀 더 쉽게 설명을 해 줄까?
“해 주면 좋지.”
-나스 대륙의 사람들은 그 통로를 이용해서 지구로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반대는 불가능해.
“아……. 지금처럼 각 차원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는 안정적인 틈이라는 건가?”
-빙고. 정답. 이해가 빠르군. 편하네. 멍청하면 설명하는 데 한세월인데 말이야.
“일단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리고 고마워. 당신 덕분에 분에 넘치는 힘을 얻었어.”
-글쎄. 샴페인을 아직 딸 시점은 아닌 듯한데. 결국 고생해야 할 건 너니까.
“이 차원계가 무너지더라도 크게 영향은 없는 모양이지?”
-없지. 왜냐하면 네가 죽는 순간, 차원 베디세트라고 불리는 이곳과 네가 사는 대륙을…….
“대륙을?”
-날려 버릴 거거든. 데우스 님께 보고를 올리고, 통째로 흩어지게 할 거야.
“왜?”
-지금 너희 두 차원은 몸으로 따지자면 고름과 같아.
짜내지 않으면 언젠가는 터지게 되고, 그 악영향이 또 다른 차원의 붕괴까지 유도할 것이라서.
마지막 기회를 줬지만, 지켜내지 못한다면 미련 없이 날려야겠지. 냉정하게 말이야.
“다음이 없네, 다음이.”
-네가 죽으면 어차피 끝이야. 다음을 생각할 필요도 없다.
박도혁의 냉정한 말에 나도 정신이 번쩍 드는 듯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결론은 사실 간단했다.
내가 로케발을 죽이면 된다.
그럼 나도 살고, 나스 대륙도 살고, 문제도 해결되고, 아무도 이 세계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준비하자. 임시 신격을 획득하긴 했지만, 처음이라 그런지 활성화를 못 하고 있군.
그때, 박도혁이 내 몸 위로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분명 닿는 촉감은 있었지만, 박도혁의 모습은 홀로그램 영상처럼 실체가 없었다.
신기했다.
평행 우주나 평행 세계에 대해서 생각을 못 했던 것은 아니지만.
다른 세계에서 온, 그것도 차원의 관리자라는 사람이 한국말을 하는 사람일 줄이야.
박도혁의 말대로 이 일을 잘 끝내고 나스 대륙을 거쳐 지구로 가서 가족을 찾게 된다면.
꼭 박도혁이라는 이름의 남자도 찾아보고 싶었다.
그의 말처럼 똑같은 얼굴을 한 채,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 궁금했다.
“하아아…….”
박도혁이 만들어 낸 백색의 기운이 몸 여기저기를 감쌀 때마다 폭발적으로 기운이 솟구쳤다.
신음 비슷한 소리가 튀어나온 것은 기운이 솟구치면서 느껴지는 일종의 극치감 때문이었다.
마치 몸의 모든 구멍이 뻥 뚫리면서 시원하고 상큼한 바람을 맞이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모든 것이 선명해지고 명확해지고 있어.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어…….’
자연스럽게 나는 인간을 뛰어넘은 초월적인 경지에 빠르게 진입하고 있었다.
물론 ‘임시 신격’이기에 이런 내 변화가 오래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안배에 따라 로케발과 한바탕 싸움을 벌일 수 있도록 신에 준하는 조건을 맞췄을 뿐이겠지.
‘아.’
그 순간, 먼 거리를 훌쩍 뛰어넘은 광경이 마치 바로 내 눈앞에서 펼쳐지듯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것은 대양을 가로지르며 계속 서진하고 있는 증강우의 전함이었다.
아마도 후속 부대로 출진한 군함들이 내 시야에 들어온 듯했다.
“내가 여기서 나가면 끝이지?”
-첨탑을 벗어나기만 해도 네게 부여된 신격이고 뭐고 다 사라지게 될 거다.
“하긴.”
-오직 눈앞의 적만 생각해.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안타깝지만 필연적으로 벌어지는 일이야.
냉랭하게 깔리는 박도혁의 목소리에서는 차가움이 짙게 묻어났다.
그런 선택을 해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닌 것처럼,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목소리였다.
-할 수 있다. 가능성이 있어 보이니까 차원의 까마득한 차이를 넘어서 도움을 주려 한 거다.
“원래 내가 마주친 시련은 정말 시련만 있는 거였지?”
-그렇지. 로케발이 만들어 놓은 침입자를 죽이기 위한 함정이지. 물론 빈틈이 많았지만.
“차원의 관리자에게 간파를 당하는 신이라……. 신도 그렇게 생각하면 참 별것 아니네.”
-후훗. 신이랑 관리자랑은 원래 한 끗 차이라고. 데우스 님도 나를 함부로 대하진 못해.
“멋지네.”
-자, 직전에 보상으로 안배한 것 중에 신의 숨결과 강제 소환이 있을 거야.
나는 박도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금 조력자의 보상으로 얻은 내용을 확인했다.
이미 기억은 명확하지만, 혹시나 놓친 것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다.
[조력자의 보상 – 신의 숨결 : 신에게 직접적인 위력을 가할 수 있는 특수한 힘을 얻게 됩니다.] [조력자의 보상 – 강제 소환 : 지정한 ‘신’을 정해진 공간으로 강제 소환할 수 있습니다.]선명하게 보인다.
이 보상들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도 충분히 예상이 되고.
-강제 소환을 발동하면 로케발을 이 첨탑에 불러낼 수 있다. 벗어날 수 없는 결계도 생기지.
“그리고 신의 숨결을 이용해서 직접 신을 타격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한다?”
-맞아. 임시 신격을 획득하긴 했지만, 신들은 그 존재 자체로 고유한 역장이 있거든.
신의 숨결이 없으면, 네가 공격하는 화력의 1%도 로케발에게 미치지 않을 거다.
“로케발은 지금 이 상황을 알고 있을까?”
-그럴 리가. 애초에 여기서 벌어진 일도 로케발의 수많은 유희 중 하나였을 뿐이야.
누군가에 의해 불려 올 거라는 생각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을 거다.
이런 악독한 짓을 저지르는 악신을 네 손으로 직접 단죄할 기회를 주는 거야, 신태풍.
“신태풍…….”
귓가에 또렷하게 들리는 내 원래의 이름을 듣고 뭔가 가슴이 뭉클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항상 떠오를 때마다 전생이라 치부하고 묻어 둔 내 본질을 되새기는 느낌이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최종 보스 몬스터를 잡는다고 생각해. 신이니 뭐니 하는 단어에 정신 팔리지 말고.
다만 로케발이 차원 베디세트에서 일어난 문제를 인지하기까지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 전에 우리가 선수를 쳐야 해. 놈이 알고 대응하면 그때는 늦는다. 지금은 우리가 유리한 상황이고.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박도혁의 말대로 감상적일 필요도 없고, 지레 겁을 먹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나도 임시 신격과 신의 숨결을 통해 신에 준하는 힘을 얻은 초월적인 능력자다. 그게 지금이다.
“잠시 마지막으로 집중할 시간을 줘. 내가 모든 힘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얼마든지.
나는 두 눈을 감고 집중했다.
인간 자레드 – 혹은 신태풍 – 가 아니라, 신(God)이 된 자레드라고 생각했다.
내가 보고, 움직이고, 듣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을 아득히 높은 세계의 것으로 치환했다.
[신의 숨결이 발동됩니다.] [신의 숨결은 자신의 죽음 혹은 대상의 죽음과 동시에 자동으로 사라집니다.]신의 숨결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첨탑에 있으면서도 마치 하늘 높은 곳에서 온 세상을 관조하는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실제로 첨탑에 가려진 모든 지형지물까지 꿰뚫어 보듯 모든 것이 보였다.
-불러. 네 무대로 신을 데려오는 거다. 쓰레기 같은 신. 악신. 아니 X신.
“X신, 그거 좋네.”
박도혁의 말에 웃으며 나는 이어서 바로 강제 소환을 발동했다.
그리고.
쿠우우우우!
저 멀리 하늘에서 붉은 점이 굉음을 내며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악신 로케발.
녀석이 강림하고 있었다.
쿠우우웅!
이윽고 첨탑으로 강제 소환된 로케발은 희뿌연 연기를 일으키며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말이 좋아 첨탑이지, 이곳은 특수한 확장형 공간이었다.
어림짐작으로 축구장 10개 정도를 합쳐 놓은 크기의 공간 정도는 됐다.
그 말은 움직일 폭이 제한적이라는 뜻도 되지만, 바꿔 말하면 로케발의 동선이 제한된다는 뜻도 됐다.
같은 무대이기에 제한을 받는 것도, 이점을 누리는 것도 서로 동일했다.
그 순간.
“……감히 원석을 부수고 함부로 나를 불러낸 놈이 누구냐. 증강우, 네놈이냐?”
이내 걷혀 가는 연기 속에서 온통 검은 피부를 한 채, 붉은 안광을 폭사하는 초월적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악신 로케발.
그와 나의 최종전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