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364
제 363화
113장. 신을 죽여라 – 3화
‘타고난 감각이 있어.’
자레드와 로케발 사이에 벌어진 혈투를 지켜보는 내내, 박도혁은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자레드는 난생처음 상대해 봤을 것이 틀림없는 신을 상대로도 전혀 밀리지 않고 맞서고 있었다.
특히 역가속의 능력을 활용하여 계속 시간의 흐름을 비틀고.
그렇게 얻어 낸 아주 작은 실낱같은 시간의 이점을 집요하게 활용했다.
지금껏 수많은 차원을 넘나들면서 이런 분쟁에 개입하곤 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악신이라 불리는 존재들에 의해 차원의 균열이 여기저기서 쉴 새 없이 터지고 무너지기 시작하면.
종국에 이르러서는 차원계 전체를 구성하는 차원단(次元團)이 붕괴하기 때문이다.
홍수에 제방이 일단 터지기 시작하면, 그 빈틈을 파고든 물살이 제방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전지전능한 신, 데우스(Deus).
그에게 일부 차원의 조율을 위임받은 박도혁은 오늘처럼 수많은 영웅들을 지원해 왔다.
직접 개입할 수는 없기에 ‘영웅’들이 획득하여 스스로 강해질 수 있는 안배를 이곳저곳에 해 두었다.
하지만.
요 근래는 연전연패였다.
붕괴로 이어질 수 있을 정도로 지나친 개입이 아닐까 싶을 만큼 뒤를 힘껏 밀어 줬지만.
인간의 영웅이라고 불리던 존재는 악신의 현란한 공격 앞에서 덧없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벌써 그렇게 여덟 개의 차원이 네 군데서 부딪혀 서로 뒤섞여 아비규환이 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바로 여기.
차원 ‘나스’와 차원 ‘베디세트’가 충돌한 위치가 최후의 마지노선이었다.
이곳마저 무너진 차원의 균열을 회복하지 못하면…….
‘최악의 경우에는 차원단 전체를 소멸시킬 수밖에 없다. 절대 쓰고 싶지 않은 권능이나 그래야만 한다.’
데우스가 자신에게 준 ‘파멸’의 시동 주문을 외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차원계에서 차원단, 차원단에서 차원 전체가 무너지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돌이킬 수 없는 부상으로 썩어 들어가는 신체 부위를 절단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사실 박도혁은 기대를 접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후원했던 수많은 영웅들 중에서 가장 부실한 힘을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더 많은 ‘조력’을 해 줄 수도 있었지만, 앞서서 많은 조력을 소모한 탓이었다.
그래서 거의 기대를 하지 않고 이곳에 왔건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자신의 실력에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전혀 자만하지 않고 있어. 오래된 생각인 듯하다.’
박도혁은 자레드에게서 침착성과 냉정함, 그리고 겸손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지금껏 만났던 ‘영웅’들은 이상하리만치 자신의 힘에 대한 확신이 강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어느 순간부터인가 정점에 오른 자신의 힘을 지나치게 맹신했다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되는 신과 맞서는 과정에서도 곧잘 빈틈을 드러냈다.
하지만 자레드는 전투를 하면서 아주 약간씩 로케발의 공격에 의해 드러나는 빈틈이 생길 경우.
다음에 똑같은 상황이 벌어질 때는 반드시 그 빈틈을 수정해서 임했다.
전투를 치르는 와중에도 실시간으로 자신을 업그레이드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로케발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재미를 본 패턴이 있으면.
다음에 또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변주를 가해 보다 향상된 레퍼토리를 만들어 냈다.
그러다 보니 로케발도 계속 업그레이드되는 자레드의 공격 패턴에 고전하는 중이었다.
비록 임시 신격을 획득한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신이 인간을 상대로 여러 번 뒷걸음질치는 놀라운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월과 열화의 힘을 극단적으로 아끼고 있다. 자레드에게 위기가 몇 번 있었지만, 녀석은 전혀 노림수를 쓰지 않았어.’
박도혁은 묵묵히 버텨 내는 자레드의 모습에 감탄했다.
분명 노림수가 있는 것은 맞다.
핵심은 그 노림수를 꺼낼 확실한 기회가 마련되기 전까지 아주 작은 기척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
심지어 방금은 목이 통째로 날아갈 뻔했던 대위기가 있었지만, 자레드는 끝까지 숨겼다.
‘한 방의 노림수가 먹히지 않으면 어차피 죽을 테니까, 어설프게 쓰지 않겠다는 걸까?’
흥미로웠다.
숨을 죽이고 고인 침을 꿀꺽 삼켜 가면서 전투를 집중해서 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박도혁이 차원의 관리자가 되기 전, 모든 것을 초월한 신에 가까운 인간이 되었을 때도…….
이 정도로 완벽하지는 않았다.
지금의 자레드가 100점의 모습이라면, 그때 자신의 모습은 많이 쳐줘야 85점이었다.
‘할 수 있다, 자레드.’
박도혁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녀석이 살아남기만 한다면 차원단의 붕괴도 막을 수 있고.
더 나아가, 녀석이 사는 세상의 평화도 지킬 수 있다.
아울러 본인의 의사만 확고하다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차원의 관리자인 자신을 대신해서.
일부 차원을 관리할 대리자로서의 자리를 마련해 줘도 될 듯싶었다. 물론 본인이 받아들여야겠지만.
바로 그때.
쿠콰콰콰쾅! 콰쾅! 콰콰쾅!
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으며 떨어지는 수많은 운석이 지면을 강타하며 뿌옇게 연기를 불러일으켰다.
메테오 스톰.
전력으로 모든 힘을 다 개방한 자레드는 초월 마법을 거리낌 없이 퍼부었다.
구구구궁! 꾸르릉! 쫘아아악!
이에 질세라 로케발은 땅 전체를 가르고 찢으며, 천지가 격동하는 지진을 만들어 냈다.
딛고 선 땅.
숨 쉬는 공기.
평온한 하늘.
그 모든 것을 대재앙의 구렁텅이로 만드는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자레드와 로케발이 최대를 뛰어넘은 한계에 가까운 출력으로.
서로를 죽이기 위해 악으로, 깡으로 싸우고 있었다.
* * *
“하악. 하악.”
심장이 터질 듯 가쁜 숨이 쉬어졌다. 그 숨조차도 달랠 시간 없이, 황급히 상공으로 날아올라야 했다.
우르르르! 쿠르르!
내 아래의 땅은 마치 물이 된 것처럼 흐물거리며 출렁이고 있었다.
로케발이 절멸의 불길로 만들어 낸 엄청난 화염구를 땅 깊숙한 곳까지 밀어 넣는 순간!
더 이상 땅이 아니게 됐다.
덕분에 지금은 전부 녹아내려서 용암이 들끓는 생지옥이 된 상태였다.
‘젠장.’
왼팔에 감각이 없었다.
절멸의 불길, 아니 정확히는 불씨 하나만이 톡 튀어서 왼팔에 잠깐 닿았다가 떨어졌을 뿐인데.
마치 왼팔이 잘려 나가고 없는 듯, 감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물론 마법을 캐스팅하고 시전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감각에 심각한 교란이 생겨 마법의 미세한 활용과 응용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로케발의 약점은 얼굴이야. 얼굴 아래의 상체와 하체는 빈틈을 찾을 수가 없어.’
나는 앞서의 공방전에서 목숨을 담보 삼아 악착같이 수집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있었다.
이 전투는 로케발도, 나도 노림수가 없으면 결코 끝을 낼 수 없는 승부라고 생각했다.
내가 로케발과 싸우면서 끊임없이 오류와 빈틈을 수정했듯이.
로케발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어떻게든 찾아낼 수 있었던 작은 빈틈이 모조리 사라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특히 장기전은 내게 불리하다고 봤다.
부여된 임시 신격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24시간 한정이기 때문이다.
만약 로케발이 극단적으로 시간을 끌기로 마음먹는다면?
계속 휘둘리기만 하다가 종국엔 신격을 잃고 목숨까지 잃을 수 있었다.
신격을 잃은 인간은 신이 가벼운 재채기만 해도 몸이 터져 나갈 만큼 하찮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초월과 열화의 힘은 같이 들어가야 해. 나눠서 쓰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 역행까지 묶어서 세 가지 능력을 한 번에 써야 한다.’
[열화(烈火)의 힘 : 25만의 마력을 소모하여 모든 것을 녹이는 불길을 만듭니다.] [초월 : 단 한 차례에 불과하지만,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는 힘을 낼 수 있습니다.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찢고, 깨부수고, 박살 낼 수 있는 초월적인 힘으로 차원의 힘입니다.] [역행 : 단 한 번, 10초 내의 과거로 시간의 위치를 되돌릴 수 있습니다.]
다시금 능력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내게 이 능력들을 적절히 ‘분배’해서 쓰라고 제공해 준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아니었다.
신이라는 절대 존재를 무너뜨리는 데 능력을 분배해서 쓰는 일 따위의 ‘안배’는 절대 통할 리 없었다.
일격, 그리고 필살.
통하지 않으면 죽을 뿐이다.
나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로케발은 작은 허점은 몰라도, 치명적인 빈틈을 드러내지는 않았어.’
문제는 이 부분이었다.
아쉽게 약점을 놓친 부분이 있다면 ‘역행’을 사용해서 과거로 돌아간 후.
그 약점을 재차 보강한 확실한 일격으로 노릴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로케발이 빈틈을 보여 주지 않으니, 역행을 활용할 가능성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콰쾅! 쾅! 콰콰쾅!
물론 이런 와중에도 로케발과 나의 공방전은 계속됐다.
대자연을 파괴하며 주변의 모든 것들을 황폐화시키는 난투극에 질서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미끼로 삼아 기회를 만들었을 때 훨씬 확실한 반격의 그림이 그려질지도.’
번뜩이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계속해서 로케발의 약점을 찾기 위해 노력할 게 아니라.
반대로 내 허술한 틈을 보여 주면서 로케발을 확실하게 끌어들인 뒤, 이를 반격하는 수였다.
전투에서 약점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것은 방어이고.
공격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빈틈이 생겨날 수밖에 없어서다.
상대를 확실하게 노리는 만큼 정비례해서 늘어날 수밖에 없는 약점!
나는 그것을 노릴 생각이었다.
내게는 역행이 있으니, 한 번은 죽을 위기에 빠지게 된다고 하더라도 되돌릴 방법이 있다!
‘그렇다면……!’
미련 없이 승부수를 던졌다.
의미 없는 공방전보다 확실하게 설계된 노림수가 훨씬 더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음 순간.
퍼억!
“크으윽!”
나는 로케발에게서 날아온 검은색 구체들 중 하나를 일부러 한쪽 팔로 받아 냈다.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고, 피격을 허용한 부위는 감각이 마비된 왼팔이었다.
굳이 아래를 내려다보지는 않았지만, 반쯤 넝마가 되었을 왼팔의 상태는 안 봐도 뻔했다.
‘역시!’
내가 끝내 빈틈을 보이면서 공격을 허용하자, 로케발이 망설일 것 없이 바로 쇄도해 들었다.
로케발이 멍청해서가 아니었다.
공방전을 확실하게 종결하고 싶은, 드디어 기회를 잡은 공격자의 당연한 반응이었다.
애초에 섬세하게 마법을 컨트롤해야 하는 마법사가 왼팔의 기능을 완벽하게 잃었으니.
내가 로케발이었어도 지금의 이 순간만큼 확실한 기회는 없어 보였다.
“…….”
프스스스!
구체의 파괴력에 의해 뒤로 쭉 밀려나는 동안.
마지막으로 마력의 상태를 점검했다.
초월과 열화의 힘, 역행을 사용하기에 딱 알맞은 마력이 남아 있었다.
‘내 목숨을 노릴 로케발의 일격에서 반드시 빈틈을 찾고, 시간을 되돌려 확실하게 반격한다.’
계획 속에 선명해진 미래.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내 목숨을 끊기 위해 매섭게 쇄도하는 로케발을 보며 전의를 불태웠다.
할 수 있다는 믿음!
나는 지금껏 어떤 고난과 시련이 있어도 현명하게 극복해 온 나 자신을 믿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