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378
제 377화
118장. 또다시, 박도혁 – 3화
“헤이즈, 미안해.”
“왜요? 폐하께서 저에게 미안해야 할 일이 있나요? 전혀 없어요. 그런 말씀 마세요.”
“괜한 일에 휘말리게 한 것 같아서 말이야. 예전에도 지구에 가려고 할 때, 동방 대륙 일이 터졌잖아?”
“아, 그랬었나요?”
“그랬었나요…… 라니?”
“저는 그저 운명처럼 벌어진 일들이라고 생각해요. 폐하가 계시지 않았더라도 그 일은 벌어졌을 거예요.”
“하지만…….”
“폐하와 함께한다면 지옥불 속이어도 괜찮아요. 제게 마음 쓰지 말고,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헤이즈…….”
정말 무한대에 가까운 사랑,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 주는 헤이즈에게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나는 나스 대륙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명동의 거리는 매우 한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앞서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주변 건물들이 온통 폐허가 된 탓이었다.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다.
대다수의 시민들은 정부의 후속 발표를 기다리면서 집에서 나오지 않았고, 군과 경찰에 의해 긴급하게 치안이 유지됐다.
세계 각국에서 고조되는 불안감으로 인한 난동이나 폭동 소식이 간간이 터져 나오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우리나라는 성숙한 시민 의식 덕분인지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몇몇 멍청한 도둑들이 혼란을 틈타 한몫 단단히 잡으려다가 줄줄이 경찰에 체포됐다는 기분 좋은 소식만 전해질 뿐이었다.
“후우.”
다시 나스 대륙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니 한숨이 터져 나왔다.
처음 지구에 올 때는 정말 그리운 고향으로의 ‘여행’을 생각하면서 왔는데.
이제 다음번에 넘어올 때는 비장한 ‘사명감’을 가지고 다시 진입해야 할 판이었다.
파란만장한 인생.
나는 자신 있게 내 삶을 그렇게 평가할 수 있었다. 정말 한시도 쉴 틈이 없는 삶이다.
일단 준비는 해 뒀다.
박도혁의 소설을 모두 인쇄하고 복사해 챙긴 것은 물론이고.
다음에 다시 지구에 올 때는 좀 더 내용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요약해 줄 것을 부탁했다.
공략집을 숙지하지 않고는 공략에 임할 수 없으니 말이다. 박도혁은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아공간에서 꺼낸 수많은 금붙이들을 시장에서 팔아 목돈을 만들었다.
이것은 앞으로 아버지와 유희가 생활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넉넉한 자금이 될 것이다.
아울러 우리 집 근처에 마침 월세로 나온 집을 박도혁에게 계약해 주고 거기서 머물도록 했다.
혹시라도 박도혁의 신변(身邊)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현실이 된 소설의 원작자인 만큼 그가 죽거나 다치기라도 한다면, 새로운 변수가 생길까 봐 걱정이 돼서다.
‘지구로 온 김에 나 좀 즐겨 볼까 했더니 나중으로 미뤄야겠구먼.’
여유로이 쉴 틈이 없었다.
이제부터는 속도전이다.
“헤이즈, 가자.”
“네, 준비됐어요.”
나스 대륙으로의 귀환.
차원 대전을 마무리하고 마음의 짐을 편히 내려놓았을 동료들에게 다시 무거운 얘기를 꺼내야 한다.
* * *
다음 날 밤.
나는 지구로 가는 통로를 넘어갈 수 있는 최대 인원인 10명에 맞게 불러낸 동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전에 언질은 해 뒀다.
전부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나스 대륙을 잠시 떠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나, 헤이즈, 라키스, 레나, 엘라, 아슈르, 이자벨, 클로이, 베르하드, 카스트로…….”
열 명의 인원은 이렇게 짰다.
미아는 빠졌다.
마법사로서 분명 수준급의 실력을 가진 것은 맞지만, 여전히 어리기 때문이다.
피비린내와 비명이 난무할 전장에 미아를 데려가서 후에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이라 역시 오빠인 이즈엘과 함께 신데르스 자치령에서 잘 지내고 있는 만큼 굳이 부를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여기 있는 동료들에 비해서는 실력이 여전히 조금 부족한 것이 사실이기도 하고.
그렇게 보면 레나도 아직 어린 축에 속하기는 하나, 그래도 실전 경험이 많아서 상대적으로 걱정은 덜 됐다.
아마 나스 대륙을 통일하지 못했다면, 그리고 차원 대전을 마무리하지 못했다면.
이런 인원 구성은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산발적인 암흑 교단의 잔여 세력의 발호 정도만 제외하면 치안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만큼.
잠시 우리가 자리를 비워도 별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 내 판단이었다.
유사시에 행정은 율리안이, 그리고 방위 및 병력 운용은 마법사 단장인 나오미가 대신할 수 있으니까.
충분한 대안이 있으니까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이제 좀 쉬고 싶은데 말이야. 참 일이 꼬이니까 그렇게 하질 못하네.”
“폐하, 한 가지 옛날 얘기를 꺼내도 될까요?”
“얼마든지. 헤이즈가 해 주는 말이라면 욕이라도 기분 좋게 들을 거야.”
“……응?”
헤이즈가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다. 왜 얼굴을 붉히는지 모르겠다. 욕한 적이 있었나?
아……. 생각해 보니 욕은 아니더라도 함께 뜨거운 밤을 보낼 때, 조금 수위 높은 말을 주고받은 적은 있었던 것 같다.
워낙에 수많은 자극으로 가득했던 밤이라 어쩌면 그런 말들 중에 욕도 섞여 있었을지 모르겠다. 흠흠.
어쨌든 헤이즈의 말에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였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늘 제게 해 주셨던 말이 있어요. 자신을 찾는 사람이 있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건.”
“응.”
“세상에 빛과 소금처럼 쓰임새가 있기에 찾아오는 하늘의 뜻이자 운명이라고요.”
“좋은 말이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폐하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니라 이런 일이 있기에 폐하가 꼭 필요한 사람인 거예요.”
참으로 현명한 대답이었다.
설령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헤이즈가 해 준 것이라고 하더라도 의미 있는 말이었다.
“폐하께서 성마 대전과 차원 대전을 훌륭히 막아 내지 못하셨다면 지구로 돌아갈 기회도 잡을 수 없으셨겠죠.”
“그렇지.”
“그리고 이번 일이 벌어졌을 때 폐하가 없으셨다면, 아버님과 여동생은 희생되셨을 거예요. 나중에 왔다면, 두 분은 살아계시지 못했겠죠.”
“그것도 맞아.”
“이번에도 마찬가지예요. 늘 그래 왔듯이 폐하는 또 수많은 목숨을 구해 주실 거예요. 그리고 저는 그 숭고한 뜻에 반드시 동참할 거고요. 반드시.”
열의를 불태우는 헤이즈의 눈빛에는 전에 없는 비장함까지 짙게 묻어났다.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을 운명이니까. 혹 우리 둘만 가게 된다면 그거대로 내가 꼭 방법을 찾아볼게. 사비오에게 말해서 타트라 넥스도 최대치로 확보해 둬야겠어.”
“정말 현명한 생각이세요.”
“최대 화력으로 무장해야지. 어쨌든 고마워, 헤이즈.”
“우리는 부부잖아요. 살아서도, 죽어서도 함께할 거예요. 폐하.”
“걱정 마. 내가 있는 한 그 누구도 죽지 않아. 절대로.”
* * *
별도의 모임 장소로 마련된 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손님은 자레드의 예상과 달리 클로이였다.
약속 시간보다 훨씬 일찍 온 탓이었다.
다른 동료들이 시간 약속을 어긴 것이 아니라 클로이가 너무 빨리 온 것이다.
클로이는 오랜만에 만난 자레드와 헤이즈를 보고 그 누구보다 해맑게 웃었다.
과거의 클로이는 미소가 참으로 귀한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예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졌다.
그것은 그레이 엘프의 통치자로서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감정의 변화 때문인 듯했다.
특히 자레드보다 헤이즈와의 만남을 기뻐한 클로이는 한참 동안 둘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과거의 편한 동료에서 이제 여왕님과 황후라는 특별한 관계로 무게감이 많이 올라갔지만.
지금만큼은 모든 것을 잊고, 예전처럼 격의 없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자레드도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클로이.
우연히 크리비아 영지에 왔던 것을 계기로 맺어진 그녀와의 인연은 참으로 특별했다.
의 역사보다 훨씬 더 빠르게 능력을 개화했고, 암살자로서 극의에 다다랐다.
자레드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을 제외한 어지간한 요인(要人)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런 자레드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것일까?
헤이즈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클로이가 불쑥 자레드를 찾아와서는 요청을 했다.
“응? 뭐라고? 아니, 이게 아니지. 여왕님,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문득 옛날 생각에 편하게 말하던 자레드는 황급히 말투를 고쳤다.
그녀는 그레이 엘프 일족 전체의 존경을 받는 여왕이다.
예전처럼 편하게 말하는 것은 그녀뿐 아니라 그레이 엘프 일족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러니 아주 작은 말실수라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괜찮아요. 예전처럼 저를 편하게 부르고 말씀해 주셔도.”
“아닙니다. 지킬 건 지켜야지요. 그래야 모든 대화와 행동에 책임과 무게가 실리는 겁니다.”
“폐하, 요청이 하나 있어요. 다른 동료들이 오기 전에 사적으로 할 수 있는 요청이기도 하죠.”
“……괜히 불안해지는데요? 뭘까요? 그래서 더 궁금해지는군요.”
“한 수 가르쳐 주세요. 오랜만에 폐하께 전투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대련을?”
“네. 그간 스승님께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몇 번이나 손사래를 치시는데……. 아직 저는 부족한 것 같거든요.”
“그레이 엘프의 전사들 중에 여왕님을 상대할 실력 좋은 전사는 없습니까?”
“애석하게 가장 최고의 실력을 가진 근위대장도 제게는 10초 이상을 버텨 내지 못한답니다.”
차분하게 조곤조곤 말하는 클로이의 모습에서는 강한 ‘자극’을 원하는 전사의 열정이 느껴졌다.
포르미도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했다면 정말 극의의 끝까지 도달했다는 얘기다.
생각해 보면 자레드도 클로이와 대련을 해 본 게 과거에 한창 ‘친해지려고 하던’ 그 시절을 제외하면 없었다.
“저는 클로이 여왕님의 편에 서겠어요! 모든 각성술과 치유술을 여왕님께 보조해서 밸런스를 맞추죠. 어때요?”
헤이즈가 과감하게 남편이 아닌 절친한 친구의 편을 들었다.
자레드가 피식 웃으면서 헤이즈에게 농담을 던졌다.
“헤이즈, 언제나 함께라더니 이게 무슨?”
“클로이 여왕님과 함께 있을 때는 예외예요! 호호!”
유쾌하게 헤이즈가 농담을 받았다. 그러자 덩달아 살짝 상기되어 있던 클로이의 표정도 풀어졌다.
“여왕님, 대련에서 승패를 따지기보다는 서로의 빈틈을 찾아내고 파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동의하십니까?”
“맞아요. 다시 한번 한계를 느끼고 싶어요. 노력하고 도전해야 무너뜨릴 수 있는 벽 말이에요.”
자신을 수단으로 삼아 더욱 실력을 키우고 싶다는 클로이의 속마음이 자레드는 마음에 들었다.
진정한 고수는 결코 자신의 경지에 만족하지 않는다. 자레드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마법의 극의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빈틈이나 약점이 없는지 찾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집요하게 전투를 복기하고 연구하며, 찰나의 실수나 빈틈을 다시는 용납하지 않았다.
“좋아요. 그럼 극한까지 여왕님의 빈틈을 찾아서 괴롭혀 드리도록 하죠. 준비는 되셨습니까?”
“오늘 폐하께서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반드시 알게 되실 거예요.”
“오오!”
호전적인 클로이의 반응에 자레드가 자신도 모르게 목을 쓸어내리며 감탄했다.
오랜만에 마주한 클로이.
중요한 대화의 자리에 앞서 기억에 남을 대련의 장이 펼쳐지려 하는 순간이었다.
잠깐이지만.
자레드와 헤이즈, 클로이는 그렇게 몇 년 전 어딘가로 과거의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