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386
제 385화
121장. 계속되는 성장 – 2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이어서 헤이즈의 광역 치유술이 전개됐다.
주문 어구만 들으면 사제나 성녀가 읊을 법한 대사였지만, 이것이 바로 헤이즈의 최대 강점인 광역 치유술의 전개를 알리는 신호였다.
파아아앗!
그녀가 기도하듯 모은 양손에 묵직하게 뭉친 백색의 치유 기운이 방출됐다.
그녀를 중심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나가는 기운은 언뜻 보기엔 기분 좋은 섬광처럼 보였지만.
크아아아! 끄아아아!
이에 노출된 투사는 전신이 활활 불타오르며 죽어 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놈들, 아주 깊고 음침한 암흑 기를 가지고 있당.
신성력에 상극의 개념으로 존재하는 암흑 기를 탑재했기 때문이었다.
암흑 기의 존재를 알고 전문적으로 연성했다기보다는 행성의 특성에 맞게 부여된 특징인 듯했다.
어쨌든 그래서 헤이즈의 공격은 투사들에게 더욱 치명적이었다.
치이이익! 치익! 치이익!
치유술의 기운이 닿은 모든 곳에서 투사들은 녹아내렸다.
마치 한여름에 아이스크림이 녹듯이.
순식간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녹는 데까지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어설프게 힘 뺄 필요가 없군.”
콰콰콰콰콰!
여기저기서 비틀거리는 투사들에게 베르하드가 날린 것은 매직 미사일과 포스 미사일의 혼합체였다.
마나 소모에 대한 부담은 전혀 없으면서도 충분히 타격을 줄 수 있는 마법들이었다.
비카르나 행성계 자체가 우리에게 너무 싸우기 좋고, 유리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게임으로 따지면, 숙련자가 경험하는 튜토리얼의 느낌이랄까?
일부러 실수하는 것이 아니라면 절대 질 것 같지 않는 상황.
그것이 강철 인간과 투사를 상대하는 우리의 마음이자 체감 난이도였다.
‘확실히 잘 썰리고, 잘 죽어.’
카스트로와 내가 부재중인 상황인데도 여덟 명이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투타타타! 투타타!
게다가 만약을 대비해서 보조로 뒤에 둔 타트라 넥스까지 집중 사격을 시작하자.
끄어어! 으어어!
마치 추풍낙엽처럼 적들은 쓰러져 나갔다.
투사들은 피를 토하고 절규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이런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발생하는지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지금껏 자기네들의 행성계 안에서는 투사, 강자, 용자 따위의 수식어로 서로를 치켜세웠을.
놈들의 민망한 자위(自慰)에 던지는 일침이었다.
“…….”
나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아래를 벗어나, 좀 더 북쪽으로 플라이 마법을 이용해 나아갔다.
이어서 투사 후속 부대가 도착하고 있었지만, 전의나 느껴지는 살기가 선봉보다 약해 보였다.
그중에는 이미 불안한 눈빛으로 전방에 즐비한 시체의 산을 살피는 녀석들도 있었다.
공포는 전염성이 빠르다.
누군가가 조기에 중심을 잡아 주지 않으면, 알게 모르게 그 감정이 바이러스처럼 퍼져 나간다.
그리고 놈들은 격차가 극복되지 않는 적의 존재에 이미 전의를 잃은 듯했다.
‘승부수를 던져도 되겠어.’
조기에 승부를 봐도 될 것 같다는 확신이 섰다.
여덟의 동료를 상대로 수백 배에 달하는 적들이 전혀 손을 못 쓰고 있었다.
무작정 돌격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치고 빠지는 전투를 겸하니 놈들은 더욱 고전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전열을 이탈한 내 존재를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투사 중의 누군가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내 위치를 찾기 위해 애쓸 법도 하련만.
이미 여덟 동료에게 온통 정신이 팔린 투사들은 그저 눈앞의 적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만만하게 보이는 것이 데리인지.
-으와아앙!
약 올리듯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꼬리를 살랑거리는 데리를 어떻게든 잡아 죽이려다가.
끄웩!
아슈르의 마법 화살 저격을 관자놀이에 정통으로 맞고 비명횡사할 뿐이었다.
‘어그로가 제대로 끌렸네.’
만족스러운 전황이었다.
북쪽으로 계속 이동하면서 아래를 살펴보니, 이쪽으로 향하는 후속 부대의 수도 많지 않았다.
아마도 급하게 연락을 받고 여기저기서 지원군을 파견하는 듯한 형국이었다.
그래서인지 질서도 없고 오합지졸처럼 보였다.
베르하드가 제1 동부 방어선을 단숨에 날린 데 대한 충격이 상당히 컸던 모양이다.
‘아무리 오합지졸이라고 하더라도 정신 차리면 까다롭지.’
나는 아직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크메르주를 직접 노릴 생각이었다.
원래 전쟁이란 기습적으로 벌어지는 것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
기습적으로 당한 전쟁이 초반에 상상도 못 할 정도의 패배와 피해를 안겨 준다는 사실은 이미 역사를 통해서 수없이 증명돼 왔다.
내가 그 증명을 한 번 더 해 줄 작정이다.
스르르르륵.
바람 소리보다도 더 낮은 소리로 나는 빠르게 북쪽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대단위 증원군은 없습니다. 충분히 각개격파 할 수 있겠어요.
-알았다. 적의 심장부를 바로 노리려는 것이냐?
-시간을 오래 끌 정도로 뛰어난 놈들이 아닙니다. 빨리 끝내고 쉬시죠.
-알았다.
막간을 이용해 베르하드와 통신석으로 대화를 나눴다.
거리가 멀어지면 기하급수적으로 마나 소모량이 급증하지만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베르하드도 만약을 대비해서 마력 회복을 보조할 수 있는 아티팩트를 잔뜩 끼고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행성 어디에서든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다.
게다가 텔레포트 혹은 가파지스의 날개를 이용해 동료나 헤이즈의 곁으로 바로 올 수도 있으니 이동에 문제도 없었다.
‘빨리 끝내자.’
혹시나 하는 걱정으로 시작했던 전투.
하지만 이제는 확실히 이길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섰다.
하긴 총 여덟 개의 스테이지로 이루어진 전장이 아닌가.
첫 스테이지부터 난이도가 높으면 그건 예의가 아니지.
* * *
“뭐? 또 졌어?”
“선봉으로 보낸 투사들이 모조리 전멸을 했다고 합니다.”
“진 것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아예 전멸을 했다고? 최정예를 편성해서 보내라고 했더니 조무래기들만 보낸 것이냐?”
“아닙니다, 전하……! 제1군이 동원되었는데, 제대로 손도 써 보지 못하고 당한 모양입니다.”
“적의 정체가 도대체 누구이길래 우리만 이리 속수무책으로 당한단 말이냐?”
콰앙!
열이 잔뜩 오른 크메르주가 주먹으로 내리치자, 그 자리에서 책상이 반 토막 났다.
강철로 만든 철제 책상이었지만, 무지막지한 크메르주의 완력 앞에서는 그저 무력할 뿐이었다.
“이놈들입니다.”
부하가 이제야 확보된 영상 자료를 내밀자, 크메르주가 성난 표정으로 자료를 훑었다.
처음에는 어떤 허섭스레기 같은 놈들에게 고전하나 싶어서 신경질이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봤지만.
“…….”
시간이 지날수록 크메르주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그들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빠르고 강했으며, 또한 날랬다.
영상이 그들의 움직임을 채 따라가지 못해 잔상이나 지직거리는 현상이 수시로 일어날 정도였다.
“적성 차원계에서 보낸 실력자들일 수도 있겠군. 어떤 차원계인지는 모르겠다만.”
크메르주는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고, 나름의 논리적인 판단을 내놓았다.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수준급의 실력자를 보내 자신의 행성계를 견제하려나 싶기도 했다.
그렇다면 현지에 파견된 투사들이 줄줄이 죽어 나가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크메르주에게도 아직 믿는 구석이 있었다.
아칼루스 종족의 투사들은 비카르나 행성에서 서열 3위에 해당하는 실력자들이었다.
그들이 아니더라도 서열 2위에 해당하는 ‘철십자단’이 있다.
크메르주 직속의 친위대로, 극한의 훈련을 수료한 엘리트들만 모은 조직이었다.
인원도 500명으로 결코 적지 않았다.
상대는 기껏해야 여덟.
철십자단의 일부가 희생될 수는 있겠지만, 여덟을 상대로 500명의 전멸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봤다.
한데 바로 그때.
우웅! 우웅! 우우우우웅!
“무슨 일이냐?”
크메르주는 방금까지 아무런 미동도 없었던 왕궁 전체가 들썩이는 느낌에 놀라 소리쳤다.
주변의 병사들 모두가 크메르주의 시선과 마주쳤지만, 이유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멀뚱멀뚱 쳐다만 볼 것이냐, 이 무능한 XX들아?”
크메르주의 불호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병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떤 목적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본보기로 흠씬 당하기 전에 재빨리 사라지는 일종의 도피처럼 보였다.
그래도 그중에 눈썰미 있는 병사 하나가 있었다.
지진계나 내부의 CCTV가 아닌 상공으로 시선을 돌린 병사 하나가 적을 탐지한 것이다.
“전하! 상공에! 상공에 적이 있습니다!”
“뭐라고?”
“소속을 알 수 없는 신원 미상의 존재가 상공에서 손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크메르주가 마침 옆에 있던 고배율 망원경을 이용해 시선을 공중으로 돌렸다.
그러자 과연 병사의 말대로 한 남자가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든 채 뭔가를 시도하고 있었다.
“……설마?”
왜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
크메르주는 상공에 있는 존재보다 그의 머리 위로 보이는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더 높은 하늘에서 활성화된 것은 마치 지옥문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한 검붉은 문이었다.
아니, 문이라기보다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 마구 소용돌이치고 있는 구름을 보고 있는 게 맞았다.
구르릉. 구릉. 구르르릉!
당장에라도 천둥 번개를 쏟아 낼 것 같은 먹구름이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불과 5초도 채 되지 않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슈아아아!
크메르주의 두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가져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비카르나 행성으로 추락하고 있는 운석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수를 세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방어! 방어 태세! 모든 차원석을 최대치 출력으로 올리고, 방어 결계를 활성화시켜! 어서!”
크메르주가 당황해 소리쳤다.
보자마자 즉각적으로 내린 명령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재앙의 도래가 훨씬 더 빨랐다.
쿠과과과과!
검붉은 먹구름으로 이뤄진 띠를 돌파한 운석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불의 꼬리를 달고 추락했다.
대각선으로 매섭게 떨어지는 모든 운석구의 종착점은 단 한 곳만을 노리고 있는 듯했다.
바로 크메르주가 머무는 왕성.
동시에 아직 출격하지 않은 철십자단 전원이 주둔하고 있는 왕궁이었다.
“씨X, 이런 정신 나간 짓을…… 말도 안 되는 일을…….”
크메르주는 넋 나간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주변을 호위하는 병사들뿐만 아니라, 왕궁과 왕성에 주둔하는 모든 전력이 마찬가지였다.
신기해서 쳐다보는 것이 아니었다. 보는 순간 체념한 것이다.
여기서 아무리 날뛰어 봤자, 현현하는 재앙의 구렁텅이를 절대 벗어날 수 없음을 인지한 것이다.
“모두 피해라!”
스스로의 외침이 공허하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소리쳤다.
지잉! 지잉!
여기저기서 위험 출력까지 높인 방어 결계가 활성화되었고.
꾸드드득! 꾸드득!
크메르주는 자신의 몸을 삼중으로 겹겹이 강철 형태로 둘러쌌다.
여기에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사중의 최종 방어막까지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태어나서 딱 두 번째로 사용해 보는 ‘육신 강화’의 한계점이었다.
“제발……!”
크메르주는 체면이고 뭐고 생각할 것 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간절히 소리쳤다.
자레드가 만들어 낸 재앙 앞에서는 비카르나 행성의 ‘왕’도 한낱 힘없는 피조물에 불과할 뿐이었다.
무기력함.
절망감.
그리고 좌절감!
최악의 감정이 한데 모여 크메루즈의 정신을 잠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