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396
제 395화
124장. 최종전 – 1화
말 그대로 깽판을 쳤다.
어차피 내가 사는 세계도 아니었으니까.
나스 대륙도, 지구도 아닌 이곳은 철저하게 적의 공간일 뿐이다. 그러니 망설일 것도 없었다.
물론 죽여 봤자 아무 의미도 없는 행성의 다른 생명을 건드리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한다면야 하겠지만 해 봤자 결국 찝찝함만 잔뜩 남는 일방적인 학살이기 때문이다.
대신 주요 시설은 집요하게 공략해서 완전히 해체시켰다. 다시 복구할 엄두도 안 나도록.
쿠구구구…….
주변을 둘러보니 하늘 높이 피어오르고 있는 검은 연기의 향연만 수십 개에 달했다.
지구와 연결하기 위해 엔드리스 행성에서 불철주야 가동되고 있었던 차원 연결 장치가 박살이 난 것이다.
사실상 95% 이상의 동력을 상실한 상태.
하지만 글래버가 살아 있으면 그 5%의 동력이 다시 되살아날 수 있는 만큼, 나는 녀석을 열심히 도발하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
나는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던 공간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이것은 일종의 직감이었다.
이유나 근거를 쉽게 댈 수 없기에 오로지 경험에 기댈 수밖에 없는 감각.
파앗!
이성적인 판단보다 거의 본능적으로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나는 텔레포트로 자리를 벗어났다.
다음 순간.
콰드드드득!
“미쳤네.”
방금까지 내가 있던 공간을 포함한 반경 100m의 공간이 종이처럼 구겨졌다가 원상 복구되었다.
공간 왜곡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것도 ‘디멘션 브레이크’ 같은 공간 왜곡 마법의 위력을 아득히 뛰어넘은 대규모 왜곡이었다.
후드드득. 후득. 후드득.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단단한 바위, 거대한 나무, 제법 넓은 언덕이 있었던 자리.
하지만 공간 왜곡이 한 번 휘몰아치고 지나가자,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왜곡에 휘말린 자연의 지형지물들은 마치 믹서에 갈린 것처럼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고오오오!
멀리서 화염의 꼬리를 달고 날아든 기체 하나가 나와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한 번도 그를 만난 적이 없었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살기로 모든 설명을 대신할 수 있었다.
“글래버.”
“네놈이 불청객이군.”
“와우, 이런 형태의 적수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뭐라고 불러야 하지? 아티팩트 맨이라고 불러야 될 거 같은데?”
“난 글래버다.”
“아니, 그건 아는데. 이건 네 몸이라기보다는 수많은 아티팩트를 갖다 붙인 형태잖아?”
“동시에 네 목숨을 가져갈 파괴의 조합이기도 하지!”
콰드드득!
내 말이 고깝게 들렸는지 글래버는 손에 끼고 있던 묵빛의 건틀릿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검은 섬광이 사방으로 뻗어져 나옴과 동시에 아까와 같은 공간 왜곡이 일어났다.
‘까다로운 놈이군.’
즉각 텔레포트를 전개했다.
무려 지름 200m에 달하는 거대한 공간을 단숨에 왜곡시키다 보니, 블링크로는 무리였다.
끼르르륵.
내가 현장을 벗어났을 때, 방금까지 묵빛이었던 글래버의 건틀릿이 어느새 붉게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탁!
손가락을 튕기자, 내 앞에서 작은 붉은 점이 맺히더니 머리카락이 앞으로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흡공인가?’
경험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변수에 대한 임기응변에 능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내 머리카락이 살짝 휘말린 것만으로도 다음의 레퍼토리를 예측할 수 있었다.
구우웅!
그래서 코앞에서 헬파이어 마법을 전개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흡공에 내 몸 대신에 끌려갈 ‘제물’을 만들기 위해서다.
콰아아!
“역시.”
잡아당기는 흡공이었다.
미리 발견하고 대응하지 못했더라면 꼼짝없이 몸이 통째로 끌려갔을 기습적인 수였다.
물론 글래버의 노림수는 빗나갔고, 녀석은 나 대신 뜨겁게 타오르는 화염을 받아들였다.
“어림없다!”
슈우우우웃!
“이런 씨X……?”
실로 오랜만에 원초적인 욕설을 내뱉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내가 상대했던 적들 중에서 가장 황당한 방법으로 내 마법에 대응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흡수였다.
글래버의 심장부에 위치한 아티팩트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하더니, 이내 마법을 ‘먹어 버린’ 것이다.
끄으으윽-.
기분 나쁜 트림 소리는 덤이었다. 아티팩트 사이를 비집고 나온 혓바닥이 간교하게 끝을 놀렸다.
‘……쉽지는 않겠다만.’
그래도 참 재밌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다 보니, 목숨이 눈 깜짝할 사이에 왔다 갔다 하는 전장에서 나는 ‘흥미’를 느꼈다.
헤이즈가 이런 내 반응을 알았다면 미쳤다고 등짝을 쳤겠지! 그 정도로 나는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글래버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것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문득 소설 원작의 문구가 떠올라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박도혁이 왜 그런 표현을 썼나 했더니 세상의 온갖 진귀한 아티팩트들은 다 가진 것이나 다름없나 보다.
‘몇 개야, 도대체?’
글래버의 전신을 에워싸고 있는 빛의 향연 속에서는 셀 수 없이 많은 아티팩트가 있었다.
단적인 예로 팔 한쪽만 봐도 손바닥, 손목, 팔꿈치, 어깨 언저리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가 달랐다.
전부 다 아티팩트이고, 각각 다른 성질과 형태의 아티팩트라는 뜻이었다.
“내가 무섭나?”
“무섭긴 해. 만약 죽어서 내 손에 그 아티팩트들을 다 넘겨주면 네 속이 뒤집힐 것 아니야?”
“그럴 일은 없다.”
“왜 없어? 차원 연합의 맨 뒤에서 비겁하게 숨어 있던 네 녀석을 내가 여기까지 찾아왔잖아.”
“날 이길 수 있다고 보나?”
“그렇게 말하던 놈들이 지금 다 저승에 가 있다니까?”
“……하찮은 놈들과 나를 비교하려고 하는군.”
“하긴, 걔네들은 너처럼 이렇게 호화찬란한 아티팩트로 떡칠을 하진 않았지. 그건 인정.”
“참으로 오만하기 짝이 없군, 불청객. 하찮은 네놈의 저주 받은 이름은 무엇이냐?”
“거, 그냥 이름만 물어보면 될 것을 앞에 수식어를 붙여도 그 따구로…… 자레드 폰 유칼레스다.”
내가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녀석의 속을 살살 긁자, 글래버의 양미간에 주름이 잔뜩 잡혔다.
그나마 얼굴도 투구 형태의 아티팩트로 감싸고 있어, 눈과 코 주변의 T존이라고 불리는 부분만 아슬아슬하게 보일 정도였다.
“자레드, 어떻게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각 행성을 격파하면서 온 거지?”
“좋은 질문이야. 다만 답변 한 번에 아티팩트 하나, 어때?”
“천박하군.”
“협상 결렬이네.”
“더 이상 말을 섞는 것은 의미가 없겠군. 널 제압하고, 네 정신을 장악하며 모든 것을 갖겠다.”
위이이!
글래버의 오른손 건틀릿에 위치한 손바닥 부위에서 보랏빛의 기운이 점멸하듯 반짝였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왠지 그 기운에 닿으면, 앞서 뱉은 말대로 내 정신을 ‘갖는’ 모양이었다.
정신을 교란, 혼란시키거나 제압하여 꼭두각시로 만드는 흑마법은 매우 많다.
그런 흑마법이 깃든 아티팩트라면, 녀석의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게 된다. 방심은 금물이었다.
‘유일한 약점은 해체인가.’
원작 내용을 다시 떠올렸다.
‘글래버는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그런 만큼 역설적으로 언제든 모든 것을 다 잃을 수 있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원작의 글만 봐서는 잘 몰랐는데, 현실을 보니 이해가 갔다.
저 아티팩트들을 몸과 분리시켜야 헐벗고 볼품없는 글래버의 알몸이 드러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기가노스의 몸에 기생하면서 정신을 지배하고 있던 모이라트와 같다.
본체(아티팩트)에 문제가 생기면 자신(알몸)만 남는 셈이다.
‘결국 글래버가 아니라 글래버의 아티팩트랑 싸워야 하는 셈이군. 바짝 긴장해야겠다.’
꿀꺽-.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자신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두려움을 걷어 낼 수 있을 뿐이지.
글래버는 차원 원정의 끝에 자리하고 있는 차원 연합 세계관의 ‘최강자’다.
마왕 레크나트가 그랬고, 악신 로케발이 그랬듯이……. 녀석도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다.
* * *
탐색전은 없었다.
애초부터 서로를 전력으로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시작부터 전투는 불타올랐다.
자레드는 탐색을 위한 방어전보다는 글래버를 몰아붙이기 위해서 매우 공격적으로 나섰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티팩트라는 선택지를 너무 많이 갖고 있는 글래버에게 시간을 주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보통 이런 강자들의 싸움에서는 선택지가 많은 쪽이 시간이 흐를수록 우위를 점하게 된다.
왜냐하면 선택지가 적은 쪽은 점점 패를 잃게 되면서 자신의 레퍼토리가 노출되는 반면.
선택지가 많은 쪽은 넉넉한 패를 바탕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충격과 변주를 상대에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아티팩트의 개수 자체는 자레드가 가진 마법 수보다 많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문제는 아티팩트 여러 개를 조합해서 사용하는 경우였다. 전혀 다른 시너지 효과가 나오니까.
자레드는 그 점을 경계했다.
어느 정도 자신에 대한 계산이 서기 시작하면, 글래버는 그에 맞는 최적화된 방법을 만들어 낼 것이다.
티잉! 타앙! 티이잉!
“빌어먹을.”
생각한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는 않았다.
자레드가 데큐플 트랜센던스 매직 미사일을 활용해, 가장 화려하게 포문을 열었지만!
글래버가 흉곽 부분에 위치한 갑옷 형태의 아티팩트를 이용해서 마법을 받아 쳤다.
막아 낸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날아온 경로 그대로 자레드에게 되돌려 보낸 것이다.
팟! 팟! 팟!
결국 3단 블링크를 활용,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실드 계열의 마법을 쓰지 않은 것은 이미 글래버가 방어 마법을 파훼할 수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 개의 아티팩트를 한데 뭉쳐 만들어 냈던 날카로운 바람의 창이 앞선 전투에서 자레드의 퍼펙트 실드를 박살 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을 수 있는 창’처럼 느껴졌다. 적어도 자레드에게는 그랬다.
‘이 녀석이 지구에 강림했으면, 그 즉시 전 인류가 몰살이었겠군. 진짜 끝판왕이네.’
전투를 통해 실감했다.
자레드는 차라리 글래버가 지구에 마수를 뻗치기 전에 지금 만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은 글래버의 음모를 거의 분쇄했음은 물론이고, 확실하게 붙잡아 둔 상태였기 때문이다.
다음 순간.
“죽어라.”
글래버가 양손 건틀릿의 손바닥 부위를 교차해 비비는 동작과 함께 붉은 안광을 폭사했다.
“……?”
자레드의 두 눈에 물음표가 찍히는 순간, 거대한 손바닥이 자레드의 양옆에 활성화됐다.
거리는 10m도 안 될 정도로 가까웠지만, 손바닥의 크기는 무려 수십 미터에 달했다.
“……!”
물음표는 곧장 느낌표로 바뀌었다. 반사적으로 블링크와 텔레포트를 쓰려던 자레드는 이내 생각을 접었다.
자레드의 회피 레퍼토리를 숙지한 글래버가 일찌감치 아티팩트로 ‘마력 교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칫 잘못하여 이동 마법을 썼다가는 교란에 걸려들어 몸이 제멋대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머리는 북쪽, 다리는 남쪽, 다시 말해서 즉사로 이어지는 상황인 셈.
결국.
‘리버스 그래비티!’
비상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
중력 뒤집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