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401
제 400화
125장. 에필로그 – 3화
“낄낄낄! 진즉에 말년을 이렇게 보냈어야 하는데. 이 도마뱀 영감이랑 있으면 티격태격하기는 해도 재미가 있다니까.”
“영감? 나보다 먼저 죽을 놈이 얻다 대고 영감이야?”
“하, 갑자기 우울해지는구먼.”
대화의 꽃을 피우는 내내 베르하드와 카스트로의 농담은 끊일 줄 몰랐다.
확실히 처음 베르하드를 만났던 10년 전을 떠올려 보면, 지금의 베르하드는 많이 늙었다.
물론 팔순을 진즉에 넘긴 나이에도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오브렌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사람의 수명은 한계가 있고, 베르하드는 그 한계에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울적해졌다. 물론 옆에 카스트로가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실제로 드래곤의 레어는 그 신묘한 기운 덕에 드래곤의 장생(長生)에 많은 도움을 준다고 한다.
어쩌면 베르하드도 백 세를 훌쩍 넘어서도 살 수 있을지 모른다. 희망 사항이지만, 그 희망이 현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자레드.”
“네, 카스트로 님.”
“내가 나중에 차원 이동에 대한 연구를 확실하게 끝내면 말이야.”
“네, 말씀하시지요.”
“네 후손 중에 한 녀석을 연구 삼아서 이계로 보내 버려도 되나? 네 후손이면 어느 세계를 보내도 정말 잘 적응할 듯한데.”
“아유, 농담이라도 그런 섬뜩한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잘 부탁드립니다, 카스트로 선배님…….”
“하하하, 농담이다, 농담.”
카스트로가 웃었다.
최근 베르하드와 카스트로의 모든 연구는 ‘차원 이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동방 대륙 사건부터 차원 원정까지. 그들에게 영감을 준 일이 많았기 때문일 터다.
사실 나도 관심이 많았다.
어떤 신이나 절대적인 존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시공간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에 관련된 연구는 내가 감히 도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갖고 자레드로 환생한 것은 맞지만, 차원 이동에 대한 이론은 탑재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이 부분은 전적으로 내가 둘에게 배워야 할 몫이다. 평생을 공부해도 깨우치지 못할 수도 있다.
“베르하드 님.”
“왜?”
“전에도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다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크리비아 아카데미의 학장직을 맡아 주십시오.”
나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공식적으로 크리비아 아카데미가 출범한 지는 1년 정도 됐다.
좀 더 체계적인 마법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 설립한 것이다.
과거 전투 마법 위주로 가르쳤던 아카데미와 달리, 크리비아 아카데미는 분야를 다양화했다.
생활 마법, 농경 마법, 치료 마법 등등…… 여러 분야에서 다각도로 배울 수 있도록 했다.
“됐다. 학장 자리는 나오미로도 충분한데, 굳이 왜 나를 부르는 것이냐? 쉬고 싶은 늙은이 좀 그만 부르란 말이다!”
베르하드가 고개를 저었다.
사실 베르하드의 말대로 8클래스의 반열에 올라선 나오미도 그만한 자격은 충분히 있었다.
매번 이 제안을 할 때마다 나오미는 거절에 대한 좋은 핑곗거리가 됐다.
“그래도 아시다시피 많은 마법 학도가 베르하드 님을 존경한다는 사실을 아시지 않습니까?”
“정말 존경한다면 허리 굽은 늙은이가 편히 쉴 수 있게 해 줘야지. 고얀 놈들, 에이…….”
“좀 더 전향적으로 생각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정 그렇다면 일년에 한두 번 정도 출강 정도는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상은 안 돼.”
“자레드.”
“네, 카스트로 님.”
그때, 카스트로가 적절하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 늙은이는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하니, 내가 몰래 베르하드의 모습으로 폴리모프 한 뒤 강의에 꾸준히 참여하도록 하지. 어때?”
“오오! 그것 괜찮은데요?”
진심이었다.
드래곤이 인간에게 선사하는 마법 강의라니!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가능만 하다면 많은 배움의 기회가 될 것이다.
“이, 이, 미친 도마뱀이! 그건 절대 안 되지. 내 행세를 여기저기서 하고 다니겠다고?”
“그 모습을 안 보시려면…….”
“에, 에잇! 알았다! 한 달에 한 번 특강하는 정도면 내가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마!”
“확정을 해 주시죠.”
“검토를 해 본다니까?”
“여기 미리 강의 개설 동의서를 가져왔습니다만…….”
“이런 미친.”
빼곡하게 적힌 강의 개설 동의서를 내가 바로 꺼내 들자, 베르하드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베르하드도 계속 거절하고 싶진 않았는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말년에도 아주 가만히 두질 않는구나, 두지를 않아.”
“두 분과 떨어져 있어도 항상 함께하고 싶은 제 마음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알았다. 낯간지러운 말 그만하고 동의서에 서명했으니 어서 돌아가라. 좀 쉬자! 좀!”
“하하하,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베르하드 님, 카스트로 님, 다시 또 찾아오겠습니다.”
“아서라. 내가 갈 테니 오지 마라.”
“와서 이 귀찮은 인간 늙은이나 좀 데려가라. 아주 귀찮아 죽겠다, 매일매일.”
“정말 감사합니다!”
그 와중에도 티격태격하는 베르하드와 카스트로를 뒤로한 채.
나는 빠르게 레어를 떠났다.
매번 올 때마다 잘 지내는 둘의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5년 전보다 사이가 더 돈독해진 모습이다.
‘부디 오래 사셨으면…….’
바람은 오직 그것 하나뿐이다.
베르하드가 오래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고.
카스트로 역시 지금처럼 인간에게 거리감 없이 친근한 드래곤으로서 존재했으면 한다.
내가 그릇된 생각이나 돌발적인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이 관계는 영원할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 * *
이어서 내가 향한 곳은 마침 카스트로의 레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레이 엘프의 땅이었다.
불쑥 찾아간 것은 아니고, 사실 이번 기회에 한번 방문하겠노라고 전부터 언질을 해 둔 상태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현재 그레이 엘프의 땅에서 ‘이종족 대회의’가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레이 엘프, 다크 엘프, 레드 고블린, 그린 오크를 위시한 다수의 이종족이 모인 자리.
이 자리는 인간, 그러니까 우리 크리비아 제국과의 항구적인 평화를 논의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애초에 인간과 사이가 매우 좋은 종족만 모인 자리이기도 했다.
블랙 오크와 같이 적대적이었던 몬스터들은 지난 전쟁에서 대다수가 토벌되었으니까.
잔존 적대 종족은 대륙 외곽의 무인도나 지하로 사라졌으니 사실상 거의 씨가 마른 셈이다.
반가운 얼굴들을 제법 만났다.
레드 고블린, 하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레드 고블린 로드 이바니바도 거기서 만났고.
이제는 다크 엘프 종족의 핵심 과학자이자 개발자, 동시에 외교관 역할을 맡은 사비오도 만났다.
내게 호의적인 두 사람과의 대화는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고, 우리는 영원한 우정을 약속했다.
내가 죽기 전까지 그들이 딴마음을 먹는다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렇게 ‘1차 이종족 대회의’가 성황리에 끝나고, 2차 대회의까지 하루의 여유가 남은 동안.
나는 여기를 찾아온 목적이었던 그레이 엘프의 여왕, 클로이를 만날 수 있었다.
따각. 따각따각.
저벅. 저벅저벅.
향긋한 로즈마리 향이 그윽하게 깔린 산책로를 따라 클로이와 걷는 것은 즐거웠다.
“오랜만이네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닿을 수 있는 거리지만, 함부로 찾아올 수는 없기에 인사가 늦었습니다.”
“소식은 계속 듣고 있었으니 괜찮습니다. 사실 곁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미소가 익숙해진 클로이의 웃는 모습은 정말로 예뻤다.
의 역사대로라면 피의 복수로 얼룩진 여왕이 되는 그녀였지만…….
지금 클로이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성군이자 동시에 자애로운 군주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녀의 미래를 극적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은 나에게 항상 큰 자부심이었다.
“조만간 대규모 사절단이 방문할 예정인 것은 황제 폐하께서도 알고 계실 거예요.”
“그렇죠. 알고 있습니다.”
“그때, 사절단에 저도 직접 참여할 생각입니다. 사절단 참여를 핑계 삼아서 가장 반가운 ‘손님’을 만나 보고 싶기도 하거든요.”
“안 그래도 황후가 클로이 여왕님을 꼭 뵙고 싶어 합니다. 그 ‘손님’도 참 좋아할 겁니다.”
“호호호, 황후 마마를 뵙게 되면 정말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아요. 궁금한 게 너무 많거든요.”
클로이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사라질 줄을 몰랐다. 정말 한껏 여유가 묻어나는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여왕님은…….”
“아, 결혼요? 안 그래도 얼마 전에 황후 마마께서 보낸 서신에도 답변을 해 드렸었는데. 아직 그레이 엘프는 결혼 적령기가 아니에요.”
“아.”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에 아차 싶었다.
인간과 달리 150년 가까운 삶을 사는 그레이 엘프들은 결혼 적령기가 인간보다 늦었다.
정말 빨라야 삼십 대 중후반이고, 보통 사십 대에 결혼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클로이가 이제 막 삼십대 중반에 접어든 것을 생각해 보면 결혼 얘기는 아직 이른 셈이었다.
“제가 그만 실언을 했군요.”
“호호, 아니에요. 그레이 엘프 백성들에게 ‘아버지’의 자리를 마냥 비워 둘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딱히 생각이 없네요.”
클로이가 은회색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살짝 붉어진 얼굴에서는 ‘결혼’이라는 단어에 대한 그녀의 부끄러움 혹은 다양한 감정이 묻어나는 듯했다.
“다 왔네요.”
“생전에 직접 찾아와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늦었군요.”
클로이와 내가 멈춰 선 곳은 바로 클로이의 스승이자 멋진 어쌔신이었던 ‘포르미도’의 묘였다.
포르미도는 클로이의 곁에서 그녀를 최고의 실력자로 만들어 낸 것은 물론.
다수의 그레이 엘프 전사들에게 단검을 사용하는 방법과 개량된 병법을 가르쳤다.
그래서 그레이 엘프들 중에서 그를 존경하지 않는 엘프가 없었고, 모두가 그를 은인으로 여겼다.
그래서 클로이 역시 그를 기리기 위한 묘소를 만들고, 시간이 날 때마다 와서 참배를 하곤 했다.
나 역시 예를 올렸다.
포르미도도 내 인생에서 많은 전환점을 마련해 준 사람이었다.
또한 나와 좋은 인연을 맺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죽음은 늘 오브렌과 베르하드를 떠올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은 죽는다.
언젠가는…… 나도 죽겠지.
가끔 상상을 해 본다.
내가 평화와 번영의 기틀을 다져 놓은 우리 크리비아 제국은 과연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까?
오백 년? 천 년?
아니면…… 몇십 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지구의 역사에서도 강력한 통일 국가를 이루고도 그 번영이 오래가지 못한 사례는 많았으니까.
이런 걱정들 때문인지 나도 항상 죽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의 모든 힘과 지식을 가졌다고 한들, 내게 영생(永生)이 주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폐하, 언제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한때는 동료였던 엘프로서 그리고 영원한 우방국의 친우로서 폐하를 응원하겠습니다.”
나와 클로이의 눈이 마주쳤다.
서로를 마주 보는 시선 속에 결코 가볍지 않았던 과거의 인연과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찌 그녀를 잊을 수 있을까.
그녀의 말대로 나와 그녀의 우정은 영원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저도요.”
서로를 향해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신뢰와 믿음, 그리고 부탁이 담긴 인사였다.
클로이.
그녀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