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41
제 41화
16장. 호랑이 사냥 – 1화
그날 밤.
늘 그래 왔듯이 아침부터 시작된 고된 훈련은 깊은 밤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드르렁, 푸우. 드르렁, 푸우.”
훈련이 끝남과 동시에 엘라의 품을 떠난 레나는 별장에 마련된 자신의 방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
하지만 여전히 쌩쌩한 엘라는 훈련장에 놓여 있는 작은 테이블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매일 습관처럼 즐겨 왔던 하루의 마무리 의식! 와인 한 병의 행복을 누리기 위함이었다.
보통은 훈련이 끝나면 엘라 혼자 남는 자리인데, 오늘은 어찌 된 영문인지 클로이가 있었다.
엘라가 물었다.
“클로이, 왜 쉬지 않고?”
“잠시 바람이나 쐴까 해서요.”
“오늘 훈련하는 내내 집중이 좀 흐트러져 있는 것 같았는데, 영지의 전쟁이 신경이 많이 쓰였니?”
“자레드 영주님이 왜 스승님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는지 궁금했어요. 솔직히 얼마든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자레드는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분하는 사람이잖아. 날 교육의 목적으로만 초대했으니, 전쟁은 아니라고 생각한 거지. 손님에게 집을 지켜 달라는 주인은 없잖아?”
“하지만 자칫 영지가 적의 손에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지 않았나요?”
“글쎄, 결과만 놓고 말하자면 자레드 영주는 오래전부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하긴…… 처음 만날 때부터 느꼈지만, 자레드 영주님은 뭔가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 느낌이에요.”
“그 생각, 나도 했어. 한 수 앞, 그 이상을 보고 생각하는 사람 같았거든. 게다가 아는 것이 많아. 보통의 지식 소유자가 아니야.”
클로이의 말에 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라는 레나를 교육하면서, 자레드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종종 있었다.
레나의 성취를 점검하기 위해 이따금씩 자레드가 별장을 방문하곤 했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자레드는 날카롭게 레나의 성취 상태를 파악하고, 조심스럽게 엘라에게 조언을 덧붙이곤 했었다.
처음에는 검의 ‘검’ 자도 모르는 영주가 함부로 자신에게 훈수를 두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 보니 아니었다. 그는 생각보다 검술에 식견이 높았던 것이다.
특히 실전(失傳)된 검술이나 희귀한 검술에 대해서도 꽤 많이 알고 있었다.
게다가 검술에 대해 아는 수준인 것만이 아니라, 어떤 것이 ‘방어형’으로 육성하고 있는 레나에게 맞는 검술인지도 의견을 냈다.
의미 없는 조언이 아닐까 싶었지만, 놀랍게도 자레드가 꺼낸 말은 99%가 정답이었다.
엘라도 반박을 하려다가,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클로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 갔다.
“사실 스승님께서 레나에게 방패 방어술을 가르치시는 동안, 저도 쉬면서 자레드 영주님과 대화할 기회가 꽤 있었어요.”
“그래, 뭐라 하디? 내심 무슨 말을 나누는지 궁금하긴 했었어. 젊은 놈이 우리 그레이 엘프 제자를 냉큼 꼬시려고 하는 건 아닌가 해서!”
“아! 그건 아니에요.”
“조심해. 남자는 예쁜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거든. 웃으면서 순수한 척 얘기해도, 뒤로는 옷을 벗고 있는 너를 상상하곤 하지.”
“…….”
순간 자신도 모르게 같은 상상을 해 버린 클로이가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기억을 되짚어 보면, 자레드는 그 정도의 호색한으로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생각 이상으로 차분하게 진지한 얘기를 해서, 본인이 깜짝 놀랐을 정도니까.
“제게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어요. 그레이 엘프의 전사들은 보통 그들의 터전에서 안전하게 성장하는 방식을 택하는데, 왜 거친 세상에 나와 고생을 하냐고 묻더군요.”
“흥, 오지랖하고는.”
엘라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나갔다 싶었는지, 짧게 말을 덧붙였다.
“나름 멋은 좀 부린 멘트네. 우리 클로이를 꽤 걱정해 주는 것 같은걸?”
“자레드 영주님은 알고 있었어요. 블랙 오크에게 참혹한 최후를 맞이한 저희 아버지에 대해서요.”
클로이의 말에 엘라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레이 엘프의 이야기를? 그건 그레이 엘프 출신이 아니고서는 쉽게 알 수 없을 텐데? 나도 클로이, 네게 들어서 안 사실이잖아?”
“네, 그래서 놀랐어요. 그리고 제게 말하더군요. 냉정함을 잃지 말라고. 블랙 오크에게 복수할 수 있을 정도의 성장만을 꿈꾸지 말고, 더 높이 먼 곳을 보라고요.”
클로이가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자레드와 나누었던 말이 떠오르며, 아버지의 죽음으로 느꼈던 증오와 분노가 다시금 솟구친 탓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표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자레드의 조언을 핑계로 감정을 냉정하게 컨트롤해 본 것이다.
“자레드 영주, 참 신기한 사람이네. 우리를 술집에서 본 처음부터 알아봤던 것도 그렇고, 어떻게 다 알고 있는 걸까?”
“지금껏 저는 스승님 외에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졌던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궁금한 사람이 하나 더 생겼어요. 이 사람이 누군지 좀 더 속을 살펴보고 싶다고 할까? 알아보고 싶어졌어요.”
“그 사람이 자레드?”
“네.”
엘라의 반문에 클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그가 남자로 느껴지니? 생각해 보니 평소에 말수가 적은 네가 오늘은 유독 말이 많은걸?”
엘라가 정곡을 찔렀다.
이렇게 클로이와 대화를 길게 나눈 것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관심사가 아니면, 도통 말을 하지 않는 침묵의 여인이었으니까.
하지만 클로이는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에게서는 스승님과는 또 다른 통찰력과 직관이 느껴져요. 예리하게 과거와 현재, 미래를 꿰뚫는 느낌이 있어요.”
“나도 그런 기분을 느꼈지만, 한 가지 의문이 늘 있었지. 왜 이런 사람이 지금까지 북부의 작은 영지에 틀어박혀 있었던 걸까?”
“저는 자레드 님이 조용히 날아오를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해요. 오늘의 전쟁처럼.”
그녀가 차가운 눈빛을 빛냈다.
스승 엘라와 함께 이 도시, 저 도시를 오래도록 누비고 다녔지만 호기심이 들었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그레이 엘프의 터전을 떠난 이후의 유랑에 살짝 지겨움과 무료함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자레드를 만나면서, 새로운 전환점이 생겼다.
누군가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싶은 상대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이성으로서의 호감이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호감이었다.
“그 사람에게 관심이 간다면, 쭉 지켜보렴. 어차피 크리비아 영지에서 보낼 시간은 아직도 한참 남았으니 말이야.”
“네, 스승님.”
“다만! 다른 마음이 생기면 꼭 내게 얘기하고.”
“네?”
의미를 알 수 없는 엘라의 말에 클로이가 되묻자, 엘라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조만간 술 한 잔 마시자고 할 생각이거든. 우리 젊은 영주님과 말이야. 사람은 술을 마셨을 때, 진가가 드러나는 법이잖니?”
“스승님, 또…….”
“호호, 자유로운 건 이래서 좋아. 누구에게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얽매이지 않을 수 있잖아? 나도 궁금해졌어. 자레드라는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말이야. 깊이 들어가 보고 싶어졌다고 할까?”
은근한 목소리로 내뱉는 엘라의 말에 클로이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간 숱한 염문(艶聞)을 뿌리고 다녔던 스승의 레이더망에 한 남자가 걸려든 듯한 느낌이었다.
* * *
4월의 마지막 날인 30일 새벽이 됐다.
불과 어제 새벽까지만 해도 크리비아 영지에 있었던 나였지만, 오늘은 마요르카 영지의 영주 저택에 있었다.
이제 막 로넬라 영지와의 정전협정을 마무리하고 온 터라, 영주 저택을 보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와……. 아방궁이 따로 없군.”
크리비아 영지의 내 저택과 비교했을 때, 10배는 족히 넓은 것 같은 저택의 규모에 깜짝 놀랐다.
이 저택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영지민들의 고혈을 짜냈을까 싶을 정도로 호화찬란했다.
저택을 이렇게 짓게 된 배경에는 호르구스 영주의 의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가족의 입김이 컸다고 한다.
사실 호르구스보다 아내와 자식들이 더 많이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고, 영지의 돈을 펑펑 가져다 썼다는 것이다.
덕분에 이미 목숨으로 죗값을 치른 호르구스를 제외한 그의 가족들은 모두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최대한 빨리 국문을 열어서 그들의 죄목을 낱낱이 밝힌 뒤, 가석방 없는 징역에 처할 생각이었다.
물론 호르구스 가문의 가산은 모두 몰수했고, 내 소유가 되었다.
일단은 비상금의 개념으로 가지고 있어 볼 생각이지만! 필요하다면 영지의 재정으로도 얼마든지 가용(加用)할 계획이었다.
“라키스가 늦는군.”
나는 라키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그 혼자만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라키스와 그가 이끄는 치안대가 와야 했다.
오늘 새벽, 나는 마요르카 영지에 있는 모든 범죄 조직을 발본색원할 계획이었다.
이미 썩을 대로 썩은 마요르카 영지의 상황을 뒤엎기 위해서는 범죄와의 전쟁이 반드시 필요했다.
마약, 불법 노예 거래, 납치, 인신매매. 영지의 상태는 막장의 끝을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영주로 있던 놈이 자기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바쁜 놈이었으니, 영지가 제대로 돌아갔을 리도 만무했다.
나는 우선 마요르카 영지의 상태부터 파악하기로 했다.
[영지 정보 – 마요르카 영지] [등급 / 소속 국가 : F / 없음] [내정 – 농업 : 011 / 050] [내정 – 상업 : 027 / 050] [내정 – 치안 : 013 / 100] [내정 – 과학 : 023 / 100] [내정 – 충성 : 014 / 100] [군사 – 총원 : 현재 403명(크리비아 영지군 제외)] [특수 상황 1 : 마요르카 영지에는 마약 카르텔 ‘데트라헤레’의 거점이 있습니다.데트라헤레의 대부로 불리는 프루아는 현재 ‘크리비아 영지’를 타깃으로 한 공격적인 사업 확장을 추진 중입니다.]
“호르구스 놈! 영지 관리를 얼마나 개판으로 했길래 스탯 상태가 죄다 이렇게 거지 같은 거야?”
심각했다.
내가 막 눈을 떴을 당시, 즉 처음 각성했을 때의 우리 영지를 보는 것 같았다.
아니, 그것보다 심했다.
개판인 영지의 농업, 상업, 과학 내정 수치는 그렇다고 치고 치안과 충성이 아주 엉망이었다.
이유는 명확하다.
특수 상황 1번에 적혀 있는 놈들 때문이다.
‘데트라헤레의 시발점이 여기였구나. 여기서 5년만 지나도, 나스 대륙 북부는 전부 데트라헤레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게 되지. 성마 대전이 발발하면, 아예 이놈들은 마왕군의 앞잡이가 되고.’
나는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마약 카르텔의 무서운 점은 내가 살던 전생의 경우처럼, 경찰권과 행정권에 마수를 뻗친 뒤.
이를 바탕으로 세력권의 행정과 치안을 좌지우지하며 입맛대로 상황을 바꿔 나간다는 것이다.
나는 프루아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성마 대전 발발과 동시에 프루아는 마왕군에게 투항했고,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활약했다.
워낙에 프루아가 마약 사업으로 많은 돈을 벌었던 터라, 전신이 고가의 아티팩트로 떡칠이 되어 있어 공략하기가 더럽게 힘들었던 네임드였던 걸로 기억한다.
‘프루아는 결단을 내리면 실행이 빨랐던 것으로도 유명해. 날이 밝기 전에 어떤 형태로든 결론을 낼 거다. 아니, 이미 냈을지도.’
나는 오늘 새벽에 프루아를 칠 생각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놈을 잡을 기회는 없다.
차라리 내게 정면 승부를 걸면 다행이지만, 아마도 거점을 다른 곳으로 옮길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되면 카르텔의 뿌리와 잔여물들이 여기저기 남은 상태에서 애매한 청산을 하게 된다.
지도층에 있는 간부급의 목을 날리지 않으면, 조직은 언제고 다시 부활할 것이다.
‘사실 프루아가 가지고 있을 아티팩트가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정의 구현의 대의도 있지만, 나는 프루아가 가지고 있는 아티팩트를 꼭 손에 넣고 싶었다.
‘마하트 3세의 눈물.’
펜던트의 이름이다.
마하트 3세가 누구인가 하면, 마요르카 영지의 지하에 위치한 고대 무덤에 묻혀 있는 주인이다.
고대 무덤은 내가 예전부터 마요르카 영지를 손에 넣으면, 반드시 공략하고자 했던 지하 던전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나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고대 무덤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워낙에 지하 깊은 곳에 묻혀 있는 데다가 입장 절차가 매우 까다롭기 때문이다.
고대 무덤의 위치가 알려진 것은 성마 대전 직후. 그러니까 앞으로 10년 후다.
그때.
프루아는 자신이 걸고 있던 펜던트, ‘마하트 3세의 눈물’이 고대 무덤의 입장에 필요한 아티팩트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부하들과 함께 무덤에 진입한다. 펜던트를 유일한 열쇠로 이용해서 말이다.
그 결과, 프루아는 무덤을 도굴하는 데 성공하고 양질의 아티팩트를 모조리 손에 넣었다.
그다음……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괴물이 되어, 다시 나스 대륙에 나타났다.
그래서 스토리 초반, 의 주인공은 이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야말로 개고생을 한 셈이다.
그래서 통곡의 벽이라 불렸던 레나와 더불어, 프루아는 ‘폭군의 재림’이라 불리며 유저들의 욕을 아낌없이 먹는 빌런이 되었다.
바로 그때.
“영주님! 찾았습니다! 프루아가 거점을 빠져나와 동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로넬라 영지로 가려는 것 같습니다!”
라키스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려와서는 긴급 보고를 올렸다.
나는 바로 퀘스트를 활성화시켰다.
호르구스 밑에서 완전히 개판이 된 마요르카 영지의 치안과 충성,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즉각적인 선택이었다.
[퀘스트 ‘호랑이 사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범죄 조직의 두목을 제거하여, 그 일당과 조직을 와해시킵니다.두목을 제거할 경우, 영지민의 심리적 안정을 유도하여 영지의 치안과 충성도를 최대치로 상승시킵니다.
단, 퀘스트 요건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직의 두목이 당신보다 레벨이 30 이상 높아야 합니다.]
‘오늘 밤, 사냥을 나선다!’
두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마요르카 영지를 점령한 이후.
이제는 내 사람이 된 영지민들에게 처음 선보이게 될, 새 영주로서의 공식 데뷔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