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53
제 53화
21장. 저는 왕국의 신하가 아닙니다 – 1화
가신들을 모두 물리고 VIP를 모시기 위해 만들어 둔 특별 응접실로 온 나는 제4 왕자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제4 왕자 이즈엘.
문학, 과학, 수학 할 것 없이 모든 학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왕자들 중에서 가장 신앙심이 돈독한 사람이었다.
의 역사대로면 그는 왕자의 난에서 다른 왕자들과 달리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왕자의 난이 벌어지기 전까지 형제들을 말리고 또 말린 쪽이었다.
워낙에 많은 백성들이 이즈엘의 덕망을 칭송하고 따랐기 때문에, 이후 즉위한 제2 왕자 프탈린은 그를 외지로 유배를 보내 버렸다.
이후, 이즈엘은 유배지에서 평생을 나스 대륙의 신성 교단 중 하나인 라디우스 교의 성서(聖書)를 집필하는 작업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자연사한다.
그런 이유로 에서 내가 기억하는 이즈엘의 모습은 유배지에서 교리를 강론하고.
신데르스 왕국의 새로운 국교로 지정되는 움브라 교를 우회 비판하던 모습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스토리상의 비중은 꽤 낮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퀘스트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몇 번 만나 대화를 나눴을 때, 정말 예의가 바르고 박식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이 사람이 신데르스 왕국의 국왕이 되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던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제2 왕자 프탈린이 즉위하겠지. 뒤를 봐주는 움브라 교의 힘이 가장 강성한 왕자니까.’
제2 왕자 프탈린이 즉위하는 순간, 국교가 바뀐다.
하루아침에 신성을 추구하던 국가가 마도를 추종하는 국가로 변질되는 것이다.
문제는 나스 대륙 북부에 위치하는 내 영지의 특성상, 가장 가까이 있는 신데르스 왕국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는 점이었다.
체급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아직까지 나와 내 영지는 어느 국가에 종속된 세력은 아니다.
지금이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우리 영지도 어느 왕국이나 제국에 종속된 관계였겠지만…….
5제국, 16왕국의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며, 나와 같은 독자 세력이 각지에서 난립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모두가 군주의 자리를 꿈꾸는 군웅할거의 시대인 것이다. 《삼국지연의》의 그 시대처럼.
비록 내가 독자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고는 하나, 내게 즉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국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신데르스 왕국이다.
만약 그들이 우리에게 움브라 교의 추종을 강요하면, 십중팔구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움브라 교는 철저하게 이단을 배척하고, 완벽한 신정일치를 추구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안 받아들이면, 바로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어쨌든 이 사실 때문에 성마 대전이 발발하는 순간, 움브라 교를 국교로 한 모든 국가가 마왕군의 전초기지가 된다.
‘골치가 아파졌군.’
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하지만 이내 자세를 가다듬고,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제4 왕자 전하께서 들어오십니다!”
이즈엘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 * *
“처음 보는군요, 자레드 영주.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4 왕자 이즈엘이에요.”
“자레드 폰 유칼레스, 왕자님께 인사 올립니다.”
자레드와 이즈엘 사이에 인사가 오갔다.
자레드는 신데르스 왕국의 신하가 아니었기에, 신(臣)이라는 단어를 붙이지는 않았다.
당연히 이즈엘 역시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이즈엘이 마련된 상석에 앉은 뒤, 자레드에게도 앉으라는 손짓을 건네자 그제야 그가 옆에 놓인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바마마께서 친서를 보내셨습니다. 곧 있을 아바마마의 탄신 경축 행사에 자레드 영주도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남기셨지요.”
“읽어 봐도 되겠습니까?”
“그러라고 가져온 것이니까요. 읽어 보세요, 자레드 영주.”
나긋나긋한 이즈엘의 목소리에 자레드가 친서를 빠르게 읽어 나갔다.
내용의 대부분은 의례적인 것들이었고, 요지는 일주일 뒤에 있을 경축 행사에 자레드가 참석하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이유가 뭘까?’
자레드는 그것이 궁금했다.
엄밀히 따지면 자레드의 영지는 어느 국가에도 소속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이런 왕국의 행사에 참여할 이유도, 합당한 연관 관계도 찾기 힘들었다.
바로 그때.
이즈엘이 바로 말문을 열지 않는 자레드의 모습을 보고 그의 속내를 읽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분명 살짝 앞서 나간 부분이 있는 서신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자레드 영주를 초청하자고 아바마마께 부탁했어요. 직접 보고 싶었거든요. 로넬라 병의 치료제와 자레드 지뢰라는 군사 무기를 개발하고, 농약 제작으로 레트리아 농사의 성공률을 대폭 높인 자레드 영주의 모습을.”
“왕자님께서 말입니까? 저는 대륙 북부의 한지 두 곳을 관리하는 이름 없는 영주일 뿐입니다. 대단치 않음에도 그리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자레드가 웃으며 답했다.
제4 왕자까지도 자신에 대한 소식을 듣고 올 정도라고 하니, 기분은 정말 좋았다.
신데르스 왕국의 상류층에서 자신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단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꼭 와 주세요. 궁에서 자레드 영주와 가볍게 술도 한 잔 마시고,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왕자님, 굳이 이렇게 먼 걸음을 하실 필요가 있었는지요? 수행원도 거의 붙이지 않으시고, 지방의 한지까지 찾아 주시니…….”
“보고 싶었거든요. 처음으로 이 사람이 누군지 직접 내 두 눈으로 보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이 바로 자레드 영주였습니다.”
이즈엘의 말은 부드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힘이 실려 있었다.
외유내강.
자레드는 이즈엘의 부드러운 말 속에 숨겨져 있는 강렬한 속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금발 머리, 갈색으로 반짝이는 눈. 그리고 가녀리게 보이는 턱선에 호리호리한 체형까지.
누가 봐도 피로 얼룩진 혈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순하디순한 인상이다.
이즈엘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네 왕자들 중에서 후견 세력이 가장 약한 이즈엘이 백방으로 인재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카프리 백작이 긴급히 나서서 제동을 걸었어야 할 정도로, 내가 보인 힘의 수준은 결코 낮지 않았고.’
지방의 젊은 영주인 자신이 보여 준 임팩트는 이즈엘에게 꽤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자레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나 역시 왕자의 난에 휘말릴 수밖에 없게 된다는 건데.’
데커드 9세의 죽음은 막을 수 없다. 아울러 제2 왕자의 주도 아래 벌어질 왕자의 난도 불가항력의 미래다.
굳이 누군가의 편에 서야 한다면, 자레드는 제4 왕자 이즈엘의 편에 서고 싶었다.
사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저마다 야심은 다를지언정, 제1 왕자부터 제3 왕자까지는 모두 움브라 교단의 열렬한 추종자니까.
제4 왕자를 제외하면 누가 왕위를 계승하더라도, 왕국은 마도 국가로 변질된다.
그러면 이웃 영지의 영주인 자신이 정복의 타깃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신중해야 해. 감시의 눈은 어디에든 있을 수 있어.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는 상황을 내가 주도해야 한다.’
무어라 대답을 하려던 자레드는 말을 아꼈다.
당장에 응접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즈엘의 수하들도 완벽한 그의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으니까.
자칫 노선을 조기에 확정 지었다가 일이 꼬이게 되면, 그때는 자신의 목숨으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자레드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왕자님, 저는 한미(寒微)한 영지의 영주일 뿐 왕국의 신하는 아닙니다. 왕자님의 마음은 감사하지만, 저는 이런 대화가 매우 불편합니다.”
“아…….”
그 순간, 이즈엘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자레드의 반응이 싸늘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영민한 이즈엘은 곧 자레드의 말 속에 숨은 의도를 알아차렸다.
‘마음이 앞서 내가 경솔했구나. 자리도, 상황도…… 모두 그에게는 분명 불편한 상황일 것이다.’
설령 진심이 말한 것과는 다르더라도,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없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자레드와 이즈엘 사이에 묘한 눈빛이 오갔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마음을 교감을 하기에 충분한 눈빛이었다.
드르르륵!
이윽고 이즈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화가 난 듯, 친서를 자레드의 앞으로 쓱 밀어내고서는 밖으로 돌아섰다.
“내가 괜한 발걸음을 했군. 다만 아바마마의 친서를 욕보이는 일은 없길 바라오.”
“국왕 전하의 친서를 무시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왕자님.”
자레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멀어져 가는 이즈엘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똑똑하시군요, 이즈엘 왕자님.’
그리고 그의 뒷모습을 통해, 심안으로 스탯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즈엘 – Lv. 59] [근력 : 42][체력 : 38] [마력 : 18][지혜 : 122] [민첩 : 21][매력 : 322] [물리 방어력 : 9] [마법 방어력 : 24] [특수 성향 : 제왕학 S / 라디우스 신학 A] [일반 성향 : 학문, 과학, 탐구] [특수 성향의 강력한 시너지효과로 매력 스탯이 대폭 상승하였습니다.]‘확실히 왕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 인재야. 게다가 마도국과는 정반대의 개념, 신성 국가의 밑거름이 될 수 있는 신학적 지식도 탄탄해.’
자레드는 이즈엘이 가진 두 개의 특수 성향에 매우 놀랐다.
제왕학이 S등급의 판정을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오랜 시간 공들여 공부했고, 스스로 깨우친 점이 많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성군(聖君)의 보증수표일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폭군(暴君)은 되지 않는다는 보증수표는 될 수 있었다.
‘양자택일의 선택지가 주어졌군. 대륙 북부의 신흥 군벌로 떠오르느냐……. 아니면 나스 대륙 1414년 역사에 한 줄로 적힐 사형수가 되느냐의 선택지.’
다시금 지끈거려 오는 관자놀이 양옆을 꾹꾹 눌러 주며, 자레드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간 막힘없이 쭉쭉 추진해 왔던 계획에 변화가 생겼다.
오늘의 고민은 생각보다 꽤 길어질 것 같았다.
* * *
닷새 후.
나는 헤이즈, 아키와 함께 신데르스 왕국의 왕성으로 출발했다.
마요르카 영지에서 왕성까지는 마차로 넉넉하게 이틀 정도가 걸렸기 때문에 일찌감치 출발한 것이다.
헤이즈는 수행원으로서 나와 함께했고, 아키는 업무차 동행을 하게 됐다.
아키는 요즘 나보다도 훨씬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는데, 온종일 상단 일에 관련된 사람을 만나느라 바빴다.
이번에는 신데르스 왕국의 피터 백작가와 미팅이 있다고 했다.
백작가에서 대규모로 추진하는 지하 던전 공략에 상당한 화력이 필요한데, 그 수단으로 내가 개발한 지뢰가 낙점됐다는 것이다.
한편 나는 마차 안에서 곤한 잠에 빠진 헤이즈와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아키를 번갈아 보다가, 아키와 눈이 마주쳤다.
“이렇게 셋이 가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나네. 산적에게 잡혀서 뒷간 옆에 갇혀 있던 아키, 네 모습도 떠오르고 말이야.”
“영주님, 그거 제 흑역사입니다. 제발 그 말씀만은…….”
“하하하, 그래도 이렇게 멋진 상단주가 되어서 영지 운영에 힘을 보태 주고 있으니 항상 고마울 따름이야. 고생이 많다, 아키.”
“아닙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영주님을 위해서 살기로 결심했는걸요. 영주님이 없는 삶은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지그시 나를 바라보는 아키의 눈빛이 영롱하게 반짝였다.
한데 바로 그때.
아키가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는 듯, 손가락을 튕기며 화제를 급히 돌렸다.
“영주님, 혹시 프탈린 왕자님에 대해 아십니까?”
“알지. 신데르스 왕국의 제2 왕자.”
“얼마 전에 거래처로부터 들은 말인데, 제2 왕자님께서 영주님에게 무척 관심이 많으시다고 하던데요?”
“제2 왕자님께서?”
“네. 선대 영주이신 바렛 자작님은 물론이거니와, 영주님의 가계도까지 관심 있게 알아보신 모양이에요.”
“…….”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가장 관심 받고 싶지 않았던 놈의 깊은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