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54
제 54화
21장. 저는 왕국의 신하가 아닙니다 – 2화
왕성의 대연회장.
과연 국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답게 온갖 귀빈들이 참석한 자리였다.
고관대작들은 모두가 데커드 9세를 찾아가 인사를 올리기 바빴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왕국의 실세라 불리는 자들과 교류를 위한 대화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
나는 조용히 연회를 즐기며, 네 왕자의 모습을 살피고 있었다.
국왕 데커드 9세에게 올리는 인사는 진즉에 했다.
이즈엘의 요청으로 마지못해 나를 초청한 것이 틀림없었는지, 데커드 9세는 내게 의례적인 말만 하고는 대화를 끝냈다. 완벽한 들러리 취급이었다.
사실 나도 국왕과 하고 싶은 얘기가 달리 없었기 때문에 피차 귀찮지 않게 잘된 셈이었다.
“하하하! 왕국을 향한 카프리 백작의 충심을 내가 모를 리 있겠소? 왕국이 그대의 능력을 높이 쓸 때가 올 것이오.”
“신, 카프리. 왕자님과 국왕 전하께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내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제2 왕자 프탈린과 카프리 백작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광경이었다.
여기서 카프리 백작을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제2 왕자의 라인을 탄 모양이다.
지극히 정상적인 판단이기는 했다. 지금은 누가 봐도 제2 왕자 프탈린이 왕위 계승 싸움에서 선두에 서 있으니까.
“콜록콜록, 콜록.”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오래된 감기라 기침은 친구와도 같으니, 신경 쓸 것 없다.”
바로 옆에는 제1 왕자 이안이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안색이 창백해 보였는데, 아키의 말에 따르면 희귀병을 앓고 있다고 한다.
당장 죽을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쉽게 낫는 병도 아니라서 꽤 고생을 하고 있다는 후문이었다.
사실 이안 왕자가 적장자(嫡長子)로서 당연히 왕위 계승권자가 되는 것이 이치에 맞았다.
정상적인 흐름이면 일찌감치 이안 왕자가 왕세자로 책봉되고, 후계 싸움은 조기에 끝나야 함이 맞았다.
하지만 데커드 9세는 병약한 제1 왕자 이안보다는 매사에 의욕이 넘치는 제2 왕자 프탈린과 덕이 많고 현명한 제4 왕자 이즈엘을 총애했다.
그래서 왕세자 책봉을 차일피일 미뤘고, 그 과정에서 신하들의 지지 세력이 나뉘어 버렸다.
무난히 정리될 수 있었던 후계 구도가 세력 간의 대결 구도로 바뀌게 된 것이다.
연회의 모습만 봐도 확실한 힘의 차이가 느껴졌다.
제1 왕자 이안의 근처에 보이는 것은 노령의 가신이나 왕실의 종친이 대부분이었고,
왕자 중에 가장 평판이 안 좋은 제3 왕자 제스 곁에는 주류에서 밀려난 비주류 귀족들이 많았다.
‘제스가 프탈린에 비해 인기가 없긴 하지만, 저 비주류 귀족들이 가진 군세도 무시할 수가 없지.’
나는 꾸준히 기억을 되짚었다.
왕자의 난이 일어나면 제2 왕자와 제3 왕자가 전면전을 벌인다.
두 형제의 사이가 가장 안 좋기 때문이다. 게다가 야심이 가장 큰 두 사람이기도 하고.
제1 왕자는 자기 자신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왕위에는 별 관심이 없다.
실제 스토리상에서도 이안 왕자는 유배형에 처한 이즈엘 왕자와 달리, 별궁을 하사받고 조용히 살다가 병사했다.
‘이즈엘의 힘이 너무 약해. 후견 세력이 되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프탈린 왕자의 위세가 워낙에 대단하니까 눈치를 볼 수밖에 없지.’
판세가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제4 왕자를 그야말로 ‘빤스 벗고 시원하게’ 밀어 주려면, 지금의 세력으로는 힘들다.
최소한 소영지 10곳 이상은 다스리고 있는 쓸 만한 군벌이 되어야 한다.
바로 그때.
“오호?”
프탈린과 내 눈이 마주쳤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시선을 정확히 교환하게 된 것이다.
짧게 자른 머리에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얇고 가느다란 입술.
관상을 믿지는 않지만, 프탈린의 외모는 분명 신뢰보다는 모략이나 배신에 더 가까워 보이는 얼굴이다.
실제로 국왕이 된 직후, 일등 공신들을 역모 혐의로 몰아서 모조리 숙청하기도 했고.
또각. 또각.
묵직한 구둣발 소리와 함께 프탈린이 점점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프탈린 – Lv. 77] [근력 : 242][체력 : 88] [마력 : 13][지혜 : 33] [민첩 : 39][매력 : 101] [물리 방어력 : 99] [마법 방어력 : 24] [특수 성향 : 신데르스 비전 검술 A / 움브라 신학 B] [일반 성향 : 왕좌, 야망, 견제]‘검술 특화에 움브라 신학을 연구한 마도 추종자라니……. 용케도 국왕이 죽기 전까지 자신의 종교를 완벽하게 숨겼군.’
심안으로 프탈린의 상태를 살핀 나는 그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직감했다.
단순히 마도를 따르는 정도가 아니라 직접 연구하고 믿는 신실함마저 가지고 있었다.
즉, 이즈엘 왕자와는 완전 상극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온 프탈린이 들고 온 와인 잔 하나를 건네며,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시오, 자레드 영주? 아니, 자레드 자작이라고 부르는 게 편하겠소?”
“왕자님께서 편하신 대로 불러 주십시오. 편히 자레드라고 부르셔도 상관없습니다.”
“한잔하겠소?”
“예.”
짠.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알 수 없는 와인을 들이켰다.
살짝 시선을 돌려 보니, 이즈엘이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현재 실세인 자신의 형에게 내가 포섭될까 싶어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즈엘의 초대로 왔다고 들었소. 녀석에게 꽤 많이 칭찬을 해 줬지! 나도 자레드 영주를 보고 싶었던 터라 어떻게든 초대할 구실이 없을까 싶었는데, 녀석이 글쎄 과감하게 아바마마를 설득한 것 아니겠소?”
“이름 없는 영주에 불과하온데, 이리 관심을 가져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겸손은 됐소. 지금 우리 왕국에서 가장 이슈 몰이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자레드 영주라는 것을 모르오?”
“글쎄요. 영지의 경영에만 집중하다 보니, 외부의 소식은 관심도 없고 잘 모르는 편입니다.”
“흐음, 외부 소식에 관심이 없는 것치고는 마요르카 영지를 합병할 때, 정말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던데 말이오? 그 정도의 움직임은 사전에 정찰을 끝내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움직임이거든.”
프탈린의 말이 예리하게 정곡을 찔렀다.
“운이 좋았던 것이지요.”
“글쎄, 내 생각은 다르오. 마요르카 영지의 소식을 듣는 순간에 느꼈지. 자레드 영주는 뭔가 나와 통하는 구석이 있는 상당한 야심가다, 그리 생각을 했단 말이오.”
“그저 이웃 영지의 침공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을 뿐입니다.”
“겸손은 그만두시오. 오랜 시간 발톱을 숨기고 칼을 갈아 왔던 함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렇습니까. 왕자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그렇다고 해야겠지요.”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프탈린과는 결코 엮이고 싶지는 않았다.
를 하는 내내 마왕군을 극도로 혐오했고, 주인공을 집요하게 괴롭히는 그들을 미워했던 나다.
그런 내가 마왕군의 하수인이 될 세력과 손을 잡는다? 생각도 하기 싫었다.
무엇보다 여전히 나스 대륙은 라디우스 교를 위시한 신성 연합의 세가 확고한 세계다.
굳이 악의 편에 서서, 미래를 고생길로 만들고 싶진 않았다. 마왕에게 영혼을 팔고 싶지도 않고.
“오늘은 만나 봐야 할 사람이 많아서 아쉽지만 와인 한 잔이 끝이겠군. 조만간 자리를 한번 만들도록 합시다. 그대와 나누고 싶은 얘기가 많소, 자레드 영주.”
“예, 왕자님. 잘 마셨습니다.”
나는 조용히 예를 갖추며, 뒤로 물러났다.
단지 자기 힘만 믿는 야심가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생각보다 능구렁이 같은 기질도 보였다.
‘왜 스토리에서 제2 왕자가 즉위했는지 알 것 같아. 다른 왕자들에 대한 조사도 이처럼 전부 끝난 상태겠지. 나름대로 견적도 다 내어놓았을 테고.’
꽤 능력 있는 적수가 등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즈엘 왕자가 세밀하게 만들어진 하나의 붓이라면, 프탈린 왕자는 날카롭게 벼린 한 자루의 검 같았다.
‘주사위를 곧 던져야 하는데……. 일단 지금으로서는 무조건 1이고, 그나마 잘 나와야 2겠군.’
나는 냉정히 상황을 판단했다.
아직은 많은 부분에서 이즈엘이 뒤처지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내가 주도적인 킹메이커가 될 수만 있다면, 미래는 극적으로 달라지게 될 거야.’
나는.
이즈엘과 함께 이 세계의 주류로 한층 거듭나느냐, 아니면 철저하게 엑스트라에 머물게 될 것이냐의 기로에 서 있었다.
* * *
자레드는 그 뒤로 다른 왕자와도 만남을 가졌다.
이즈엘은 마지막 차례를 기다리는 듯이 거리를 두었고, 그사이에 이안과 제스가 왔다 갔다.
이안은 잘 알려진 대로 몸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몇 번이나 고통스럽게 기침을 했고, 결국 연회가 끝나기 전에 자리를 뜨고 말았다.
자레드를 귀찮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제스 왕자였다.
그는 형인 프탈린 왕자에 비해 자신의 세가 약하다는 사실에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는지, 적극적으로 자레드에게 구애를 해 왔다.
“내가 군부에 인맥이 꽤 있소이다. 마음만 먹으면 그대의 영지에서 생산하는 군수품들을 비싼 값에 사도록 지시할 수도 있소.”
“왕자님, 실무자의 협의에 따라 합의된 고가라면 몰라도 외압에 의한 거래는 원치 않습니다.”
“자레드 영주, 프탈린 형님은 인맥이 넓은 분이시오. 줄을 대려는 귀족들이 줄을 섰지. 형님에게 아무리 잘 보이려고 해 봤자 돌아오는 것은 크게 없을 거요.”
제스는 완전히 번지수를 잘못 짚고 있었다.
프탈린과 자레드가 나눈 대화를 보고, 두 사람 사이에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세 왕자의 관심이라니 이렇게 인기가 많아서야.’
자레드는 웃었다.
어쩌다 보니 세 왕자의 관심은 물론이거니와, 덩달아 왕자들과 연계한 귀족들의 관심도 받고 있었다.
달리 신경을 쓰지 않고 있을 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많은 귀족들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었다.
살짝 관심을 기울이니, 그들의 대화도 제법 들렸다.
“저 영주가 자레드지? 마요르카 영지를 합병하고 난 뒤의 영지 발전이 눈부시다고 하던데.”
“로넬라 병 치료제 독점 공급으로 금화를 쓸어 담고 있는 모양이야.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군사가 200명을 겨우 넘기던 곳이 지금은 5천에 육박한다지?”
“군대가 5천이 넘는다고? 그 정도면 거의 닥치는 대로 병력을 끌어모으는 수준 아닌가? 용병은 기본이겠고! 예산이 되나?”
“당연히 되지! 치료제, 지뢰, 농약, 마정석 판매, 거기에다가 던전 입장 수입까지……. 앉아서 돈을 쓸어 담고 있는데!”
‘소문 참 빠르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소식이 쫙 퍼진 모양이었다.
군의 규모를 키우는 작업은 사실 마요르카 영지를 합병한 이후로 꾸준히 해 왔다.
영지 내에서의 모병만으로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기에, 웃돈을 주고서라도 용병과 외인부대를 고용하기까지 했다.
다음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로넬라 영지.
카프리 백작의 권고로 정전협정을 맺기는 했지만, 곧 만료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자레드는 정전협정을 연장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 기류를 읽었는지, 로넬라 영지의 바트만 영주도 일찌감치 군을 끌어모으고 있는 상태였다.
“자레드 영주, 내 말 듣고 있소?”
잠시 다른 곳에 관심이 팔린 차라 제스의 말을 놓쳤다.
자레드는 제스와도 아예 엮이기 싫었다.
그는 왕이 되면 십중팔구, 아니 열에 열! 폭군이 될 요소만 골고루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자님,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왕국의 신하가 아닙니다. 그저 초대를 받고 온 이방인일 뿐입니다. 마음 쓰지 마시지요.”
“허허, 나를 부끄럽게 할 셈인가? 이렇게 내가 먼저 그대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도 말이야.”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왕자님이 아니라 오히려 접니다. 별것 아닌 지방의 영주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주시는군요.”
“나와의 인맥은 원치 않는다. 그렇게 내가 받아들여도 되겠나?”
목소리는 높아졌고.
말투는 차가워졌다.
자레드는 이참에 제스의 속이나 시원하게 긁어 놓기로 했다.
프탈린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제스에게 불을 붙일 수 있다면, 제2 왕자와 제3 왕자의 갈등의 골도 훨씬 깊어질 것이다.
제4 왕자인 이즈엘이 어부지리로 이득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왕자가 서로에게 으르렁거릴 필요가 있다.
“예, 아무래도 제게는 제스 왕자님보다 프탈린 왕자님께서 더 많은 것을 주실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뭐라? 이 새끼가!”
그 순간.
제스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자레드의 멱살을 붙잡았다.
순간 연회장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