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96
제 96화
36장. 원하신다면, 있어 드리죠 – 1화
‘트리스티스 아일랜드는 나도 물음표가 참 많은 곳이었는데…….’
에서 모든 플레이어의 관심을 받고, 도전 정신을 무한히 자극하는 곳이라면 단연 트리스티스 아일랜드를 꼽는다.
줄여서 ‘트리 랜드’라고도 부르는데, 이곳에 있는 나스 대미궁은 악명이 높은 던전이었다.
우선 지하 던전을 광적으로 좋아했던 개발진의 취향에 맞게 지하로 내려가는 구조다.
게다가 지하 1층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차원문이 있는데, 이 차원문의 색깔이 1분 단위로 바뀐다.
무슨 말인가 하면 1분 전에 들어간 미궁과 지금 들어가는 미궁이 다르다는 뜻이다.
차원문과 연결되는 미궁의 시작점이 1분 단위로 계속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스 대미궁은 공략이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지하 1층의 A나 B타입의 미궁에 맞춰 공략을 준비해도, 재수가 없으면 Z타입의 미궁으로 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차원문의 색깔과 타입을 일치시킬 수 없다는 것.
어제는 붉은 차원문이 A타입이었다면, 오늘은 검은 차원문이 A타입일 수도 있었다.
한데.
[미궁 층계별 날짜 및 차원문의 색깔과 미궁 타입의 상관관계]지도의 첫 번째 장에는 이 부분에 대해서 해석을 달아 놓은 내용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꽤 길었다!
마치 이 던전을 직접 설계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 쓸 수 없을 일목요연하고도 자세한 정보였다.
‘일급 기밀 정보다!’
나는 본능적으로 정보의 중요성을 직감했다.
물론 지도가 있다고 해도, 지금 나스 대미궁의 공략에 나서는 것은 무리다.
애초에 지하 1층부터 5층까지는 이미 공략이 많이 되어 있어 보상이 시원찮은데, 그런 반면에 공략 시간은 꽤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나스 대미궁을 공략하려면 최소한 2개월 이상의 시간은 비워 놓고 움직여야 한다.
내부에서 길을 잃고 헤맬 수도 있기에, 변수를 고려하면 여유 기간은 정확히 2배를 더해야 한다.
‘그리고 나스 대미궁은 온갖 모략과 뒤치기가 난무하지. 이미 들어와 있는 팀이 새로 들어온 팀을 공격할 함정을 파기도 하고.’
영지에 속한 던전이 균형 잡힌 질서 아래 꼼꼼히 관리되는 안전지대라고 한다면, 나스 대미궁은 야생 그 자체였다.
어느 영주에게도, 어느 국가에도 소속되지 않은 자유 섬으로서 관리 체계가 없어서다.
이는 헌터들이 바랐던 바이기도 했기에 지금까지 바뀐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스 대미궁에 관련해서는 대륙 헌터 협회에서 지정한 딱 하나의 법 조항밖에 없었다.
[나스 대미궁 선언] [나스 대미궁은 나스 대륙인 모두의 것으로 특정 세력, 특정 국가에 소속되지 아니한다.이를 어기고 나스 대미궁을 차지하려는 세력과 국가에 대해서는 일치단결하여 침입자를 몰아낸다.
아울러 그들을 탐욕스러운 악의 무리로 규정하여, 명예에 금 가는 일 없이 그들에게 무자비한 테러를 가할 수 있다.]
촤륵!
나는 일단 지도를 접었다.
분명, 아주 중요한 정보다.
훗날 나스 대미궁을 공략할 때, 초기에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지식을 얻은 셈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공략 불가!
적절한 때를 기다려야 하지 싶다.
“그나저나 클로이가 올 때가 됐는데…….”
시계를 봤다.
나야 잠이 없으니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데, 클로이가 유독 새벽에 만날 것을 고집한 탓에 만나는 시간이 꽤 늦어졌다.
그녀를 부른 이유는 하나.
엘라와 사제 계약이 끝나고 자유로워진 그녀의 거취를 정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목표는 하나다.
그녀를 내 가신으로 만드는 것.
클로이는 훗날 그레이 엘프의 여왕이 되는 이로, 스토리상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사실 클로이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내 머릿속에는 ‘가신’ 두 글자밖에는 없었다.
* * *
“후우. 후우.”
영주 저택 안으로 들어온 클로이의 숨소리가 좀 더 거칠어졌다.
정식으로 자레드와 독대를 하며 대화를 나눌 생각을 하니, 괜히 가슴이 떨리는 탓이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마음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자레드의 눈에 자신은 항상 강인하고, 냉정하며, 차가운 그런 사람이었으면 했다.
그것이 바로 그레이 엘프의 모든 여성에게 요구되는 절제된 모습이기도 하고.
“떨려.”
클로이가 연신 주먹을 접었다 펼치기를 반복했다.
바로 잼잼!
긴장을 달랠 때 주로 쓰는 그녀의 감정 컨트롤 방법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습관이 돼서 그런지, 무의식중에 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마침 새벽이라 저택 안팎으로는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앞뒤 보지 않고 열심히 주먹으로 잼잼을 하고 있는데?
“어머, 클로이! 언제 왔어?”
“앗.”
등 뒤에서 반갑게 자신을 맞이하는 목소리가 들려, 클로이가 황급히 손을 거뒀다.
돌아보니 헤이즈였다.
요즘 새벽 늦게까지 치유술 공부를 하느라 정신없다더니, 정말 이 시간에도 자지 않고 있었다!
“바, 방금. 방금 왔지.”
“그럼 바로 영주님이 계신 집무실로 가야지! 왜 여기서 서성이고 있는 거야?”
“서성인 것까지는 아니고.”
“이제 9월이라 밤에는 제법 쌀쌀하잖아! 그런데 이렇게 배와 허리를 내놓고 있으면, 몸이 차가워져 안 나던 배탈도 난다고요!”
터업!
“윽!”
헤이즈의 장난기 가득한 배 터치에 클로이가 짧게 신음을 토해 냈다.
몸을 따뜻하게 감싸는 겨울용 메이드복을 입고 있는 헤이즈와 달리, 클로이는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얇고 노출이 많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춥기는 했다.
“얼른 들어가 봐. 영주님이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신단 말이야!”
“저기, 헤이즈.”
“응? 갑자기 지그시 내 이름을 부르니까 왠지 무서운데…….”
아이콘택트까지 하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클로이의 모습에 헤이즈가 흠칫했다.
확실히 두 사람은 성격부터 말투까지 많은 점에서 달랐기에, 진득하게 단둘이서 대화를 나눌 일이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단둘이 있는 것도 꽤 어색했다. 헤이즈가 분위기를 띄워 주기는 했지만 말이다.
“물어볼 게 있어.”
“응! 얼마든지! 클로이의 질문이라면 언제든 좋아! 목소리 듣기가 워낙 어려워야 말이지? 호호.”
헤이즈가 클로이의 어깨 언저리로 귀를 가져다 댔다.
혹시 모르니 비밀을 위해 작게 말해도 알아듣겠다는 제스처였다.
덕분에 클로이는 목소리를 낮추고, 그녀에게 물어볼 수 있었다.
“오늘 영주님이 왜 나를 보자고 하셨는지 알아?”
그러자 헤이즈가 피식 웃었다.
“나야 모르지! 내가 어찌 영주님의 속마음을 짐작하겠어? 그런데 왜? 걸리는 게 있음 말해 봐!”
“만약에, 아주 만약에 영주님이 나보고 영지를 떠나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난 영주님께 아직 배우고 싶은 게 많은데.”
“바보.”
“……응?”
클로이가 털어놓은 장문의 고민에 돌아온 헤이즈의 대답은 두 글자, 바보였다.
클로이가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헤이즈를 향해 가늘게 눈을 떴다.
“질문이 너무 바보 같아 그래! 클로이, 그 말을 그대로 영주님에게 하면 되잖아? 솔직해야지. 진심은 원래 숨기면 안 되는 거야.”
힘주어 말하면서 헤이즈는 잠시나마 가슴 속 어딘가가 뜨끔하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 보니 자신에게도 숨기고 있는 진심 – 혹은 애정 – 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래 내 실수는 안 보여도 남의 실수는 잘 보인다지 않는가! 헤이즈가 목소리를 높였다.
“영주님은 가식적인 사람을 싫어하셔. 그러니까 네 마음을 숨기지 말고 전부 보여 드려. 괜히 밀당 같은 거 할 생각 하지 말고! 알았지? 그럼 나, 간다! 수련해야 해!”
“헤, 헤이즈!”
클로이가 이렇다 할 질문을 할 틈도 없이, 헤이즈가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멀어져 갔다.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물론 걸어가다가 잠시 멈추는 듯하기는 했지만.
“음.”
짧고 굵은 말이었지만, 헤이즈의 말은 분명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속마음을 드러내어 표현하는 것이 클로이는 영 익숙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형제자매로부터 강요받다시피 했던 절제된 감정 표현 때문이었다.
클로이가 자신의 웃는 모습을 거울에서 볼 때마다 미워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이 절대 아니었다!
“망할.”
클로이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다시금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어쨌든 이제는 피할 수 없는 만남의 시간이었다.
* * *
나와 클로이의 대화가 시작된 시간은 새벽 2시 30분.
확실히 젊은 남녀가 대화를 나누기에 적절한 시간대는 아니었다.
침대 위에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것이라면 모를까.
어쨌든 영주 저택은 안팎 할 것 없이 조용했다.
불이 켜진 곳도 내가 있는 집무실과 헤이즈가 훈련하고 있는 수련실로 단 두 곳뿐이었다.
“클로이.”
“네.”
“요즘 개인 훈련은 어때? 지난번에 내가 짚어 준 은신을 가장한 기만술, 연습해 봤어?”
“네.”
“음……. 다른 문제는 없었고? 속임수에 필요한 심리전이라든가, 전략 전술에 대한 질문이라든가 궁금한 건 없었어?”
“네.”
“클로이 멍청이!”
“네.”
“……앞으로는 너를 클로이가 아니라 네네 봇이라고 부를까 심각하게 고민을 좀 해야겠다.”
“마지막 대답은 아닌 걸로.”
실없는 농담이 오갔지만, 나와 클로이는 서로를 보며 웃었다.
오랜 교감의 증거다.
아직도 나는 클로이를 처음 만났던 날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때 엘라와 함께 있던 클로이의 모습은 얼음 그 자체였다.
말 한마디 붙이기 힘든 차가운 눈의 여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장난을 치더라도, 서로 웃고 넘길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물론 클로이의 미소는 웃는다기보다는 연기에 좀 더 가깝긴 했지만 말이다.
“거두절미하고.”
“네.”
그녀에게는 이런저런 미사여구를 덧붙이는 것보다는 본론에 빨리 들어가는 게 좋다.
옛 스승인 엘라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부분으로 허례허식이나 간 보기를 정말 싫어했다.
“오늘 널 부른 건 말이야.”
“네.”
“내게 있어 앞으로 네 실력이 꼭 필요해서야. 우리 영지에는 클로이 너 같은 잠재력 있는 인재가 많이 필요해.”
“…….”
“알아. 네가 그레이 엘프 출신이고, 언제든 일족의 땅으로 돌아가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걸 알면서도 제게 제안을?”
“응. 어차피 인간 세계의 경험을 쌓으려고 정든 고향을 떠나 온 거잖아? 앞으로 영지 안팎에서 벌어질 일은 네 견문을 극적으로 많이 넓혀 줄 거야.”
나는 열심히 영업을 했다.
엄밀히 말하면 전부 사실이다. 절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영지 운영도 운영이지만, 공략해 보고 싶은 던전이 무척 많았다.
나스 대미궁은 던전 공략의 화룡점정으로 언젠가 찍어 줄 것이다.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는 던전에서 클로이와 같은 암살자 계열의 직업군은 매우 큰 도움이 된다.
암살이란,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몬스터를 상대로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엘라를 통해 살짝 떠본 것도 있고, 나는 클로이가 일단은 승낙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한데 바로 그때.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라……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요. 내일쯤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응?”
이상하다.
분명히 어제 헤이즈를 통해 들은 얘기만 해도 헤이즈, 이자벨, 레나와 함께 악몽의 숲을 공략할 준비 중이라고 들었는데?
설마, 너.
몸값 올리기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