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98
제 98화
37장. 야금의 아버지, 아세로 – 1화
아침이 밝았다.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겠지만, 내게는 그저 날이 밝았다는 것 외에는 다른 때와 똑같은 시간이었다.
이는 고르자스의 목걸이를 착용한 이후, 수면욕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자고 싶지 않기에 자지 않았고.
그래서 푹 자고 일어났을 때에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하고 상쾌한 기분도 느껴 보지 못한 지 오래였다.
물론 나쁘진 않았다.
그만큼 영지 내의 내정을 점검하고, 외부의 첩보를 수합해서 확인하고, 내 자신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으니까.
한편 나는 아침부터 찾아온 발데스와 함께 깊은 대화를 나누기에 여념이 없었다.
발데스가 쓰고 있는 내 자서전 내용이 제법 많이 쌓였기 때문이다.
내가 구술(口述)를 하면 발데스가 속기(速記)로 받아 적는 식이었는데, 호흡이 무척 잘 맞았다.
“난세가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수많은 백성이 원하는 것은 난세 속의 영웅들이 아니라 평화 속의 성군 하나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륙의 질서가 안정되어야 한다.”
“좋습니다, 영주님. 계속 말씀해 주십시오.”
“전쟁을 위해 백성이 무조건적으로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지도자로서 그들에게 노동력과 전력을 보태도록 지시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이 기나긴 전쟁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남아 있는 것이 폐허가 된 터전과 가난에 고통 받고 있는 자신의 가족이라면 그것은 비극이며 재앙이다.”
“좋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내치를 통해 안정을 꾀하고, 능률을 높여 생산의 증진을 유도하고, 체계적인 보급과 수송의 시스템을 갖췄을 때 비로소 지도자와 백성들이 한 몸이 되어, 국가 또는 영지의 전쟁을 대비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의 건강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좋습니다!”
“발데스, 계속 좋다고만 하는데 너무 입에 발린 칭찬만 하는 것은 아니오?”
“그럴 리가요. 제가 전에도 영주님께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는 마음에 없는 빈말은 할 줄 모릅니다. 굳이 해야 한다면, 차라리 침묵을 선택하는 편이지요.”
“알겠소. 이건 어디서 영감을 받거나 베껴 온 문구가 아니라 순수한 내 생각이오.”
“예, 영주님.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실제로 크리비아 대영지의 운영을 그렇게 해 오고 계시는 영주님이시니까요.”
발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사나레 성지의 개발 작업은 작업대로, 그리고 향후의 전쟁을 대비한 인프라 강화는 강화대로 착실히 추진하고 있었다.
특히 내가 많은 인력을 들여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은 바로 보급이었다.
전쟁은 장기화 되고 길어질수록 보급의 중요성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키보드와 마우스로 하는 게임에서의 영지 운영이야 보급이 뚝딱 자동으로 이루어지지만.
현실은 완전히 다르다.
1만 명의 병사를 배불리 먹일 식량을 보급하기 위해서는 최소 그 곱절의 인원이 필요하다.
또한 전쟁이 길어질수록, 그만큼 보급해야 할 식량과 수송대의 인원도 늘어나게 된다.
게다가 해로가 없으면 육로로 말과 수레를 이용해 수송해야 하니, 그만큼의 시간과 비용이 소모된다.
신경 쓸 것이 많은 것이다.
한편 얼마 전에 보고받은 바에 따르면, 나스 대륙 남부는 이제 막 우기가 시작됐다고 한다.
덕분에 마스터 포션은 불티나게 팔려 나가고 있었다.
로넬라 병 치료제와 더불어 마스터 포션 판매가 없었다면, 영지의 재정은 진즉에 바닥났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영지에서만 독점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두 녀석이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 준 덕분에!
영지의 곳간 속 금화는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계속 채워지는 중이었다. 참 잘된 일이었다.
[발데스가 당신의 신념에 크게 감화하여, 충성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충성도 45가 올랐습니다!충성도가 200이 되어 ‘1차 각성’ 상태에 돌입합니다!]
‘오!’
그저 내 신념과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한 것뿐인데, 발데스의 심경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확실히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나와 발데스는 생각하는 부분이 비슷했다.
또한 발데스가 내게 영감을 준 부분도 많았다.
전에 크리비아 펍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해군의 양성에 대해서 언급했던 것 말이다.
그 이후로 나는 전략적으로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부동항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바로 그때.
발데스가 은근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영주님.”
“음?”
“사실 제가 군사 전문가도, 담당자도 아니지만…… 인맥을 통해 은밀히 입수한 몇 가지 정보를 꼭 드리고 싶습니다.”
“어디 봅시다.”
발데스가 가져온 가방에서 꺼내어 내민 것은 바로 말루스 왕국과 보누스 왕국의 자료였다.
특히 내가 탐내고 있는 해안 도시와 항구, 그 일대를 관리하고 있는 육군과 해군 인사에 대한 정보였다.
촤륵. 촤르륵. 촤륵.
조용히 자료를 읽어 가는 동안, 나는 놀라고 또 놀랐다.
생각 이상으로 아주 디테일한, 기밀 정보가 꼼꼼하게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출처는 제게 묻지 말아 주십시오. 어둠의 세계에 몸을 담고 있는 인맥으로부터 은밀히 얻은 것이니까요.”
발데스를 처음에는 열정적인 선전가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은밀하고도 어두운 구석이 제법 있어 보였다.
하긴, 크리비아 펍에 단순히 문화 쪽의 관계자만 오갔던 것은 아니겠지.
분명 그 안에서는 내가 모르는 빛과 어둠이 공존했을 것이다.
“출처는 묻지 않도록 하겠소. 이 자료의 핵심은 두 왕국에서 외지인 취급을 받으면서 대우가 형편없이 떨어진 해군 장성들에 대한 얘기로군.”
“예, 그렇습니다. 해군이 이렇다 할 실적이 없는 것에 비해 유지비는 많이 들어가니…….”
“멍청한 두 국왕의 눈에는 탐탁지 않아 보였겠지. 돈 먹는 하마, 아니 돈귀신처럼 보였을 테고.”
“예, 그렇습니다.”
“그들은 금빛 왕관이 참으로 부끄러운 자들이지!”
나는 가감 없이 속내를 드러냈다. 발데스였기에 보일 수 있는 마음이기도 했다.
“그들의 충성심은 무너지기 직전의 모래성처럼 형편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나는 발데스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듣지 않고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계기와 명분이다.
소속된 국가로부터 마음을 돌리고, 새 주인을 선택해야 할 충분한 명분이 주어진다면.
그들은 미련 없이, 튼튼하고 든든한 배로 갈아탈 것이다.
발데스가 건넨 자료 속 정보와 그들의 은밀한 대화를 기록한 기록지가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그 뒤로도 나는 발데스와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눴다.
자서전을 함께 읽으며 부족한 부분은 보강하고, 신념을 추가할 부분은 새로이 고쳤다.
그렇게 해가 중천에 뜬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긴 검토가 끝났다.
“이제 거의 끝났습니다. 본 내용의 모든 교정을 마친 후, 유명한 명사들로 하여금 자서전을 미리 읽고 추천사를 남기도록 할 것입니다. 아, 물론 진심으로 남기고 싶은 명사들에 한정해섭니다.”
“좋소. 그 부분은 모두 그대에게 일임하지. 부족한 영주임에도 불구하고, 알찬 자서전을 만들어 줘서 고마울 따름이오.”
“제 머릿속은 오로지 영주님을 나스 대륙 최고의 영웅으로 만드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제 전부를 불태울 수 있도록, 영주님께서 끊임없이 장작을 넣어 주십시오.”
“하하하! 내가 영원히 꺼지지 않도록 든든하고 넉넉하게, 아낌없이 넣어 주지!”
“감사합니다, 영주님!”
그렇게 발데스와의 만남이 끝났다. 그리고 그가 나갈 즈음, 타이밍 좋게 아키가 찾아왔다.
“영주님! 찾았습니다! 아세로! 그 대장장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드디어 찾아냈습니다!”
“확실해? 정확하게 확인한 게 맞아? 동명이인이나 다른 사람은 아니고?”
“영주님, 절 못 믿으시나요? 맞으니까 제가 직접 여기까지 왔지요!”
아키가 펄쩍 뛰며, 내 합리적 의심을 빠르게 불식시켰다.
이 정도면 확실한 모양이었다.
철보다 강한 금속, 켈디아.
이 녀석을 물처럼, 공기처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대장장이 네임드 중 하나.
야금(冶金)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남자!
아세로를 찾아낸 것이다.
* * *
그날 저녁.
자레드와 아르케네스는 아세로가 있는 플레누스 광산으로 이동 중이었다.
플레누스 광산은 파우페르 왕국의 접경지대에 있는 초대형 광산이었다.
위치는 나스 대륙의 서부로 북부를 거점으로 두고 있는 자레드의 영지와는 거리가 꽤 됐다.
일반적으로 가장 빠른 이동 방법은 신데르스 왕국 북부에 있는 장거리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해서, 우호 관계에 있는 파우페르 왕국으로 넘어가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자레드에게는 남들에게 없는 또 하나의 이동 수단이 있었다.
바로 타트라 넥스였다.
본격적으로 기동도 해 볼 겸.
주변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산길을 따라 아르케네스를 끌어안고 계속 서쪽으로 비행 중이었다.
플라이 마법보다 속도도 훨씬 빨랐고, 초월체의 안정성 덕분에 아르케네스가 불편하지 않은 자세로 있도록 안고 갈 수도 있었다.
“영주님, 정말 신기해요. 어떻게 이런 물건, 아니 아티팩트라고 해야 하나? 골렘? 어쨌든 이런 걸 어떻게 얻으신 거예요?”
“뭐, 어쩌다가 주웠지.”
자레드가 대충 둘러댔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타트라 넥스를 얻기까지의 스토리는 알면 알수록 피곤해지니 말이다.
“기분이 뭔가 이상해요! 영주님이 위에서 이렇게 허리를 꼭 끌어안은 채로 저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날아가고 있으니…….”
아르케네스의 머리가 시원한 가을바람에 좌우로 흩날렸다.
외모와 패션에 항상 신경을 쓰는 아르케네스답게 그에게서 매우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애먼 생각 하지 마! 나는 남자 안 좋아한다. 남자와 할 수 있는 스킨십은 악수가 전부인데, 오늘만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가는 거야.”
“헤, 그럼 허리 스킨십을 시도한 남자는 제가 처음인가요?”
“인마! 위험 발언, 조심해. 자꾸 능구렁이처럼 함정 파지 말고!”
“크크큭. 영주님, 죄송해요.”
“어쨌든 고생 많았다. 이름이랑 두 줄도 안 되는 정보를 가지고 대륙 전체에서 사람을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사실 정보를 수집하는 사람이 열심히 발품을 팔아 주면 시간 단축이 되죠! 다만 그렇게 열정적으로 정보 수집을 하지는 않으니까, 시간이 걸릴 뿐입니다.”
“플레누스 광산에 있는 놈들이 워낙에 근무 조건이 열악해서 돈을 밝힌다고?”
“네. 광산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부터 총감독관까지 하나도 깨끗한 놈이 없었어요. 돈만 쥐어 주면, 역부들의 실적도 조작해 준다고 하더군요. 승진이 수월하도록 말이에요.”
“썩어 빠진 곳이군.”
“영주님도 아시다시피 파우페르 왕국은 부패 지수가 높은 곳이잖아요?”
“그렇긴 하지.”
자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누스, 말루스 왕국이 자격 미달의 국왕이 있는 곳이라면.
파우페르 왕국은 돈에 미친 관료들이 요직을 모조리 장악하고 있는 곳이었다.
매관매직(賣官賣職)을 기본 패시브 스킬로 장착하고 있는 썩을 대로 썩은 나라인 것이다.
당연히 그 꼭대기에 있는 국왕의 탐욕은 최고봉이고 말이다.
‘이런 나라들이 죄다 우리 영지와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나는 자레드였다.
이즈엘이 국왕으로 있는 신데르스 왕국을 빼면, 주변은 사실 죄다 적이 될 만한 곳밖에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