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ilding a human empire by creating a clan RAW novel - Chapter (138)
권속 생성으로 인류 제국 건설 140화(140/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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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식은 당일에 끝나도 축제는 며칠 더 이어졌다.
하지만 나는 개선식을 마치자마자 집무실로 향했다.
“인생을 너무 재미없게 사는 거 아니에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스카디가 투덜거리며 뒤따랐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어쩌겠나, 이게 내 성격인 것을.
“뭐, 아버지가 이럴 줄은 알았지만요.”
스카디는 작게 한숨을 쉬고 서류를 내게 건넸다.
“핵심적인 것 몇 가지만 보고하자면, 먼저 제르마니아 총독부를 해산시켰어요. 왈로키아 총독부를 해산시킬 때와 마찬가지로 귀족의 특권은 모두 폐지했으며 반발하는 귀족도 처분했고요.”
반년이 넘는 원정 기간.
그 동안 제국은 또 변화를 겪었다.
가장 큰 변화 하나를 꼽자면 총독부 해산이었다.
“사실상 세 개의 정부가 있던 제국이 드디어 중앙 정부 하나만 남은 셈이지요.”
스카디가 슬쩍 라헬을 보았다.
라헬은 공교회의 수장. 공교회는 행정부가 아니라 황제의 직속이었는데, 그 규모 탓에 독립 정부에 가깝게 운영되었다.
행정부 수장에 속하는 스카디가 꺼림칙하게 볼 법하지.
“저희는 행정부 산하가 아닐 뿐, 행정부에서 요청하는 건 다 해주고 있는데요···.”
그러자 라헬은 목을 움츠리면서 불평했다.
스카디에게 당한 것이 많은 듯 저자세였다.
“아무튼, 이제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귀족은 사라졌어요. 귀족 출신은 존재하고 그들은 여전히 토지를 소유하고 있지만, 봉건 영주 시절처럼 법을 제정하지도 행하지도, 군을 모으지도 못하는 지주에 불과하죠.”
“생각보다 빨랐군. 쉽지 않았을 텐데.”
진압을 상정한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다.
반란을 막으면서 특권을 빼앗아야 하기에 어려웠지.
스카디의 수완이 보통이 아니었기에 성공한 것일 터.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쉽지 않았죠. 하지만 뭐, 저들이 어쩌겠어요? 전에도 말했잖아요. 인제 와서 반란을 일으키고 이종족의 도움을 기다릴까요?”
제국의 위세도 한몫 거들었겠지.
사방에서 싸우면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었다.
대의제의 지원을 받는 교국, 남부 소국부터 나가의 속국인 공화국과 오크, 고블린이 내려오는 대평원에 이르기까지 제국이 건국된 이래 쉬지 않고 싸움이 이어졌는데 한 번의 패배가 없었다.
거기에 인류 최초의 원정마저 승전보가 이어지는 상황.
유전자 단위에서 이종족의 노예가 되기를 갈망하는 족속이 아니라면 제국의 위세에 올라타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나.
“올라타지 않은 노예는 누아딜이 처리했죠.”
보안군은 이처럼 보이지 않는 장소에서 제 역할을 했고.
나는 다음 서류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뢰제네가 줄을 잘 탔군.’
제국이 귀족의 특권을 빼앗기는 했으나 당근 없이 채찍만 휘두르지는 않았다. 상대에 따라서 여러 혜택을 주면서 특권을 내려놓도록 유도했다.
뢰제네 후작은 특이하게도 자발적으로 특권을 내놓은 경우였다. 스카디가 당근을 제시하기도 전에 귀족 신분을 포기하겠다고 통보했다고.
‘역시 눈치가 빨라.’
뢰제네 후작가.
한때 내 약혼녀였던 율리아의 가문.
율리아는 특권 폐지 이전에는 라헬과 함께 늑대교의 봉기를 진압하며 전과를 쏠쏠하게 올렸다.
후작가의 사병을 이끄는 터라 정식으로 창설한 제국군에 합류하지 않았으나, 서류에 따르면 이제 막 신설한 군사 학교에 입교 신청을 넣었다고 한다.
“제 아버지 못지않게 대세를 보는 눈이 탁월하다고 할까.”
나는 웃음기가 도는 입술을 만지면서 서류를 넘겼다.
총독부 해산 다음은 공화국 포로에 관한 보고였다.
“나가의 아종이 되겠다던 이상한 꿈을 꾸던 양반들도 대부분 개종을 밝혔습니다. 원정에서 꽤 충격받은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눈앞에서 도마뱀 사냥을 봤을 테니.”
공화국의 포로는 전원 시민 출신이었다.
공화국의 시민은 공을 세운다면 나가의 아종이 될 기회를 얻었고, 그렇기에 늑대교 신도 이상으로 맹목적인 믿음을 품었지.
이들은 개종이 거의 불가능한 족속이었고, 따라서 나는 이들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다. 티시레돈을 공략할 때 강제 동원한 것이나 원정군의 지원 부대로 동원한 것이나 그들의 목숨에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광신에 눈이 멀어도 현실을 완전히 무시하지 못하나 보다. 인간의 영역 밖으로 나가서 오크, 고블린 그리고 리자드맨까지 사냥하는 모습을 보았으니.
그 충격이 상당히 컸나 보다.
“재무대신 프란츠가 아쉬워하더군요.”
스카디가 쓴웃음을 지었다.
무상으로 굴릴 수 있는 인력을 잃은 셈이니까.
재무부의 요술봉이 사라진 느낌 아니겠나.
“어쩔 수 없지. 그들이 진정 인간으로서 살기를 원한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나. 제국은 용서를 모르지 않아. 인간에 한해서.”
그 외에도 변화는 많았다.
농업은 리자드맨의 영토에서 감자와 순무의 종자를 구했고, 산업은 기계설비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특히 기계설비는 나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지.
농상공부에서 파시메아는 그녀처럼 연구, 개발에 재능이 있는 권속을 모아서 연구소를 꾸리고 여러 설비를 만들었는데, 그 결과물이 하나둘 나오고 있었다.
대표 업적은 제철소와 증기기관.
둘 다 실증을 위한 단계였기에 사용처는 제한되었다. 제철소는 소형 용광로를 운영하는 기술과 주철 대포를 양산하기 위한 전 단계. 증기기관은 탄광의 배수펌프에 설치하여 채광 효율을 조금 높이는 정도.
“개인적으로는 제철소나 증기기관보다 방직, 방적기가 더 마음에 들어요. 기존에 있던 것을 개량해서 8배의 생산 효율을 낼 수 있다고 하거든요.”
방적기는 섬유를 가공해서 실을 만드는 기계.
방직기는 실을 얽어서 천을 짜는 기계.
그 둘의 개량이 뜻하는 바는 하나다.
“산업 혁명의 시작이군.”
“네?”
혼잣말이라고 손을 흔들었다.
용광로를 통해서 강철을 만들고, 석탄을 사용해서 증기기관을 작동시키고, 방직기와 방적기로 방직물의 생산량을 증대한다, 이는 모두 지구의 산업 혁명에서 보인 징조 아니냐.
인류 제국이 산업 혁명의 초입에 들어간 것이다.
‘남부에서 나타난 난쟁이의 공성포. 그것이 기술적으로 어떤 수준인지 확인이 필요하겠으나, 얼마나 개량을 거쳤건 우리를 앞서가지는 못했을 터.’
기술하면 드워프를 떠올리기 마련.
그러나 사실 드워프의 기술은 그리 높지 않다.
기술이라는 포괄적인 말보다 손재주라는 말이 맞았다.
‘그리고 그 못지않게 장인 정신이 대단해서 말이지.’
개인의 재주는 대단히 높았으나 예술가로서 자존심이 지나친 종족이었다. 분업이나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을 혐오하는 기질이 강했으니.
제국의 조병창이 분업을 통해서 머스킷을 뚝딱뚝딱 찍어낸다면, 난쟁이들은 자기 공방에 틀어박혀서 한 땀 한 땀 깎아낼 족속.
그뿐이 아니라, 똑같은 설계로 머스킷을 깎다가도 여유가 있으면 수작업으로 무늬를 새겨서 다른 장인과의 차별을 두려고 할 거다.
‘다른 종족은 그런 거부감이 덜 할 테지만, 녀석들이 마법이 아니라 과학을 받아들일 때 즈음이면 제국은 몇 단계 앞서 있을 거다.’
따라서 남부에서 출현한 공성포는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메르세포네를 누가 기르느냐, 가 더 큰 문제지.
“폐하.”
서류를 향했던 시선을 들었다.
집무실 문을 열고 라이몬도가 들어왔다.
“혈족인가.”
“네.”
반지가 떨고 있었기에 듣지 않아도 알았다.
블라드의 영혼이 담긴 반지는 혈족과 종복에 반응하므로, 주변에 모기가 있다는 의미였고 반지는 제 혈족이라고 내게 속삭였다.
“블라드의 사신을 자청하는 흡혈귀가 폐하를 뵙고자 합니다. 불러들이시겠습니까? 원치 않으신다면 처분하겠습니다.”
“이야기는 들어볼 법하지. 데려와라.”
사신이랍시고 보낸 이유야 뻔하다.
내게 도움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겠나.
블라드도 슬슬 한계에 달했을 테니까.
미케나 제국이 아무리 거대해도 제국을 지탱하던 기둥을 여럿 잃었다. 본인도 영혼을 일부 빼앗겨 약화하였을 터.
그런 상황을 수습할 여유도 없이 대의제의 공격을 받았는데 어찌 버티겠나.
‘다만, 어떤 도움을 구할지를 모르겠군.’
군사 파견을 원한다면 받아들일 수 없다.
이는 대의제와 전면전을 벌이라는 소리 아니냐.
블라드가 이를 모르지 않을 테니 간접적인 도움을 원할 터.
‘내가 오크를 부려서 귀쟁이를 친 것처럼 적의 군세를 물리게 하거나, 혹은 다른 지원을 요구할 수도 있다.’
다른 지원이라면 확실한 것이 하나 있고.
‘허나 그건···.’
곧 미케나 제국의 사신, 블라드의 혈족이 들어왔다.
【Lv. 76】
혈족으로서 수준은 고만고만하다.
이보다 높은 혈족을 보내기는 난감할 테니까.
한창 전쟁 중에 고위 혈족을 보낼 수도 없는 데다가 내가 사신을 죽일 가능성도 있었으니.
녀석으로서 나름 제일 나은 선택을 했다.
“소신의 이름은 미하이. 아버지 블라드의 쉰여섯 번째 자손입니다. 황제 폐하.”
미하이는 내게 절을 했다.
반지가 발하는 마력이 그를 옥죄였으니.
저도 모르게 목줄이 쥐어졌음을 깨달았을 터.
“나를 찾은 이유는?”
그는 바들바들 떨면서 얼른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폐하께 도움을 청하고자 저를 보내셨습니다.”
“도움이라. 그래, 무슨 도움을 바라지.”
“무기를 원합니다.”
잠시 들었던 이마를 다시 바닥에 찧었다.
“폐하께서 나가의 기생충을 정복하시고, 리자드맨의 화신을 벌하실 때 사용하신 무기를 저희에게 베풀어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가 위기를 견뎌낼 수 있습니다.”
역시인가.
나는 즉답을 피하고 턱을 쓰다듬었다.
머스킷을 넘겨주는 것은 별문제가 안 된다.
화약은 드워프도 알고 있기에 대단한 기술이 아니고.
블라드는 혈족, 종복을 각 종족에 심어두지 않았나.
얻으려 한다면 못 얻은 바 없었다.
‘하지만 내게 굳이 요구한다는 것은 그만큼 시간이 없다는 소리다. 고작 몇 달이라도 연구, 개발을 거칠 여유가 없어서, 실전을 경험하면서 개량을 거칠 여유도 없어서 내게 도움을 구하는 것일 터.’
시행착오를 몽땅 건너뛰고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
‘신무기로 상황을 뒤집으려 한다라.’
마치 나치 제국의 최후가 떠오르는 상황이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블라드가 착각하고 있군. 이것이 신의 병기라도 된다고 생각하나? 만약 그리 생각한다면 돌아가라. 너희의 애처로운 꿈을 깨뜨리고 싶지 않으니.”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화약은 본래 난쟁이가 놀잇거리로 쓰는 물건에 불과하는 것을요.”
“그런데도 원하나?”
“예. 그것이 저희의 약점 중 하나를 메꾸어 주기 때문입니다.”
약점.
나는 속뜻을 알기에 눈매를 좁혔다.
“저희는 살아 있는 노예 대신에 시체를 종자로 부립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입을 먹일 필요도 없지요. 또한, 살아 있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으면 시체를 남기는 법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세상에 값싸게 널린 것이 시체다.
블라드는 시체로 제국을 일구었다. 오크, 고블린이 괜히 블라드를 노리지 않았겠나. 시체의 제국을 노려봐야 먹을 것이 별로 없으니까 그런 것이지.
“물론, 시체를 부리는 술법은 제약이 많습니다. 약점도 무수히 많지요. 무엇보다 시체는 연약하고 멍청하니까요.”
시체가 없이 없어도, 태산을 덮을 만큼 많아도, 전력이 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단순 노동밖에 할 수 없고, 노동의 강도도 평범한 인간보다 못하니까.
썩어가는 시체나 스켈레톤을 군대로 부리는 행위는 레벨 1의 농민을 최전방으로 보내는 행위와 똑같다.
‘하지만 방아쇠를 당기라는 명령은 알아듣지.’
화포를 장전하는 행위도 어렵지 않고.
지금 미하이가 노리는 바는 명확했다.
‘내가 처음 징집병을 꾸릴 때, 라헬이 해방 노예를 대상으로 삼은 이유가 무엇이었나.’
맹목적인 충성을 가졌으니까.
주인에 대한 충성이 너무 커서 두려움조차 떠올리지 못했기에, 오로지 인류를 위해 제 목숨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에 적합하다 하여 그러했지.
해방 노예를 시체로 바꾸어 생각해보자.
두려움을 모르고, 수는 태산보다 많은 군대다.
이들을 화약 무기로 무장시켜서 대의제에 맞선다고?
“사자의 군대를 만들 셈이군.”
나는 검지에 낀 반지를 보았다.
블라드의 영혼이 저를 부리라고 내게 속삭였다.
뱀파이어 컨설팅(1)
“그렇습니다. 저희는 시체로 군대를 만들고자 합니다.”
사자의 군대라.
나는 검지로 의자의 팔 받침대를 두들겼다.
“대가는? 내가 너희에게 도움을 주면 너희는 내게 무엇을 줄 것이냐.”
“리자드맨의 목장을 해체하고 인간을 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또한 미케나 제국 내에 있는 모든 인간을 폐하께 돌려드리겠습니다.”
“음.”
흡혈귀에게 인간은 노예가 아니라 식량이다.
단순 작업은 언데드에게 맡기면 되니까.
인간의 사용처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거든.
“믿기 어렵군. 너희가 인간을 포기하겠다니.”
허나, 작업에 동원하지 않아도 인간의 가치는 높다.
블라드를 비롯한 주요 혈족이 인간 출신이라서 인간의 피를 좋아하고, 그 탓에 귀족을 위해 돼지를 기르듯 인간을 기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리자드맨보다 더한 족속이지.
리자드맨은 신을 위한 공물로 인간을 기르면서 단순 노동이나 화살받이로도 사용했지만, 흡혈귀는 오로지 식량으로서 인간을 대우했으니.
리자드맨의 인간 목장 같은 시설이 없을 뿐, 하는 짓은 리자드맨보다 독하다.
“저희가 그만큼 절박하다고 여겨주십시오.”
거짓이 아님은 보고를 통해 알았다.
누아딜의 보고에 따르면 전쟁은 일 년도 가지 못했을 터.
내가 엘프와 리자드맨의 원정군을 회군시켰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쯤 블라드는 무조건 항복을 택했다.
“인간 외에 저희가 폐하께 바칠 것이 없습니다. 오리칼쿰, 미스랄은 혈족조차 공급 받지 못하는 처지고, 영토는 드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음을 아시겠지요.”
오리칼쿰과 미스랄은 전략물자다.
화약 무기를 받아가고 둘을 넘겨주면 의미가 없지.
영토는 받아 봐야 유지할 방도가 없다. 두 제국 간의 거리는 멀고 바닷길도 막혀 있었고, 대놓고 두 제국의 연계를 보여주면 미케나 제국에게 집중된 대의제의 전력이 인류 제국으로 튈 가능성도 컸다.
“무엇보다 폐하께서는 저희가 대의제와 싸운다는 사실이 중요하시지요.”
그래, 그게 가장 중요하지.
당돌한 말에 나는 싱겁게 웃었다.
미하이를 내보내고 대신을 모아 의논했다.
“저는 찬성합니다.”
게하드르가 대답했다.
“이 제안이 블라드의 함정이 아니라면 미케나 제국을 지원해야 한다고 봅니다. 미케나를 지원해서 대의제가 전쟁을 더 오래 끌도록 말입—”
“잠깐만.”
농상공대신 파시메아가 말을 끊었다.
”모기들이 요구하는 물건이 화약 무기인데?”
파시메아는 이맛살을 팍 구겼다.
자신이 애써 만든 장비를 모기 따위에게 넘겨야 한다니.
그것이 못내 탐탁하지 않아 사념이 출렁이는 것이라.
“제국군에서 머스킷 총병의 수는 일 만도 안 돼. 원정 동안 제르마니아와 왈로키아에 생산 시설을 확충해서 쌓은 재고도 제국군을 절반도 무장시키지 못할 수량이야. 그런데 모기들을 지원한다고?”
그녀의 우려는 타당했다.
나도 하지 못한 무장을 남에게 시켜준다는 소리므로.
그러나 게하르드는 주장을 꺾지 않았다.
“흡혈귀가 우리를 대신해서 대의제와 싸워준다면 우리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지 않나? 같은 수의 총병을 훈련하는 것보다 득이 크다고 생각한다만.”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누아딜도 게하르드의 주장에 동의를 표했다.
“주인이 리자드맨에 원정을 간 이유 중 하나가 미케나를 돕기 위함이 아녔나. 미케나가 오래 버텨야 대의제의 전력을 깎아 먹는 셈이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다투어 전력을 깎아 먹는 것도 좋았지만, 대의제가 전쟁이라는 진흙탕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동안 인류 제국이 방해 없이 성장할 수 있다는 점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닐세. 우리가 미케나에게 제공한 화약 무기가 엘프나 드워프에게 유효한 타격을 준다면 놈들도 화약 무기를 달리 볼 테지.”
화약은 드워프가 오래전에 개발한 물건.
화포도 개념만 알면 뚝딱 만들 수 있는 병기다.
남부 국경에서 공성포가 등장한 것처럼 말이다.
“다른 종족은 제쳐놓고, 엘프와 드워프가 화약 무기를 사용한다고 해보게. 그러면 인간과 이종족의 격차는 대체 무엇으로 발생하겠나.”
이종족은 인간보다 마력에 민감하다.
마력에 민감하다는 말이 가리키는 바는 개인이 수백, 수천을 압도할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
이런 종족이 화약 무기의 편리함에 취한다면? 화약 무기가 오랜 기간 수련한 존재를 손가락 한 번 까딱하여 잡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면?
점진적으로 인간과 같은 무기를 쓰는 사람이 늘어날 터.
종족 간의 무력 격차도 조금씩 줄어들겠지.
“나는 여기에 고문단도 파견해야 한다고 보네.”
“무기만 제공하는 게 아니라?”
게하르드가 대신 대답했다.
“무기를 건네주어도 운용법을 모르면 안 되지. 머스킷의 조작법은 단순하다만, 머스킷을 쥔 군대를 운영하는 방법은 단순하지 않아.”
수 천정의 머스킷을 주어도 상대가 밀집 사격을 하지 않고 근접 보병과 뒤섞어 활용할 수도 있고, 포술을 몰라서 명중률이 바닥을 길 수도 있는 노릇.
이래서야 밑이 빠진 둑에 물을 붓기다.
낚싯대를 주었다면 낚는 법도 알려주어야지.
“아, 내키지 않는데.”
파시메아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게하르드와 누아딜, 제국 내에서 군권을 가진 두 사람이 찬성표를 던졌기에 그녀가 마냥 반대기도 어려운 상황. 힐끗, 나를 보면서 한 마디 해보라고 눈치를 보냈지만, 나는 무시했다.
나도 둘의 의견에 동의하거든.
“고문단이라.”
즉답은 하지 않고, 잠시 고민했다.
고문단을 보낸다면 당연히 권속을 보내야겠지.
평범한 인간을 보냈다가 무슨 변을 당할 줄 알고?
“괜찮은 인물이 몇 있습니다. 명단을 올릴까요?”
“아니.”
문득, 그보다 나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지.”
“예?”
저마다 의견을 내놓던 대신들이 모두 나를 보았다.
잘못 들었나, 싶은 표정이었고, 칼리오페조차 그랬다.
그럴만했다. 블라드는 한때 나를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그 탓에 몰락하게 된 적이었다. 그런 적의 아가리로 직접 들어가겠다는 소리니.
“위험합니다.”
칼리오페가 단호하게 반대했다.
“블라드는 에다르 님을 노릴 이유가 많습니다.”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말이 많았다.
“티아마르의 영혼과 블라드의 영혼. 그중 하나만 있어도 에다르 님을 노릴 텐데, 그 두 가지를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거기에 나와 녀석 사이의 앙금까지 있었고.
나는 집무실에 자리한 권속 한 명 한 명을 훑었다.
각자 할 말이 많은 듯 입을 간질거렸다.
“차라리 저희 중 한 명을 보내주십시오. 밑에 있는 형제자매가 모자란다고 생각하신다면 차라리 소신이 가겠습니다. 폐하.”
게하르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가슴을 쳤다.
“아버지는 신도나 권속에게 깃드는 것도 가능하시잖아요. 굳이 직접 가지 않아도 돼요.”
스카디도 거들었다.
나는 그 뒤로 내무대신 그리프, 사법대신 하버, 재무대신 프란츠, 심지어 추밀원에서 파견한 원로까지 이어지는 반발을 들으며 땅콩이 가득 들은 그릇을 만지작거렸다.
품에 안긴 메르세포네가 내가 까는 땅콩을 하나씩 집어다가 입에 넣고 오물오물했다.
“이야기는 끝났나.”
차례가 한 바퀴 돈 뒤에 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너희들이 우려하는 바는 이해한다. 나도 그렇게 되리라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가는 것이 맞아.”
“왜죠?”
“미케나에 티아마르의 타락과 연관된 물건이 있다.”
사룡 티아마르.
한참 잊고 있던 존재를 떠올리자 권속들이 눈을 깜빡였다.
“그 물건, 아티펙트에 영향받지 않는 존재가 나뿐이다.”
나는 펜던트를 꺼내 보였다.
티아마르의 영혼이 담긴 펜던트.
블라드의 반지와 달리 반응이 없었다.
“미케나로 가서 블라드와 마주하게 된다면 너희가 아티펙트 또한 보게 될 텐데, 그 영향을 받을지 받지 않을지를 알 수 없다. 만약 받는다면 큰 문제가 될 터.”
로드는 본디 펜던트가 말을 걸어야 한다고 했다.
펜던트에 깃든 티아마르의 영혼이 유혹한다고.
내게 말을 걸지 않는 이유는 내가 유혹당하지 않으리라 그녀의 영혼이 판단했기 때문이지. 본래라면 블라드의 영혼이 담긴 반지처럼 쉴 새 없이 상대에게 말을 걸어야 했다.
“그 아티펙트가 대체 뭐죠? 그게 권속마저 타락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말할 정도로 대단한 물건인가요?”
“대단한 물건이지.”
나는 스카디의 물음을 게하르드를 보며 답했다.
“게하르드. 너는 블라드를 신이라고 생각한 적 있더냐? 아니면 리자드맨의 화신에게서 블라드와 유사한 느낌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그저 강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게하르드가 블라드를 만났던 때가 수년 전.
왈로키아의 수도 소도모라에서 단 한 번이었다.
그 당시에 블라드는 목숨을 잃는 순간까지 호르비드나 리자드맨의 화신이 보인 능력과 조금이라도 유사한 능력도 보여주지 않았다.
자신의 육신을 안개로 바꾸고, 마력의 폭풍을 일으키고, 시체를 일으켰지만, 영혼의 마력을 사용하여 가호를 내리는 등의 모습은 전혀 없었다.
“당연하다. 블라드는 신이 아니니까. 흡혈귀란 그 수가 다른 종족에 비해서 적고, 블라드 자신의 영혼도 알량하기 그지없으니 도마뱀의 화신처럼 신 노릇도 못하고 있지.”
그런 모기가 어떻게 제국을 세웠을까.
심지어 엘프, 드워프와 어깨를 견주는 3강 체제의 한 축.
“블라드가 죽어도 되살아나고 제 영혼을 반지에 분리하고, 사자를 일으킬 수 있는 것. 그 모든 재주의 근원이 아티펙트에 있다.”
블라드가 가진 아티펙트의 힘은 티아마르를 타락시킨 힘과 근본이 같다.
“다른 종족이 사자를 부리지 않는 이유, 식량을 소비하고 늙으면 힘이 빠지는 인간을 부리는 이유, 그 이유는 단순하다. 흡혈귀를 제외한 종족은 사자를 부릴 힘이 없거나 있어도 제약이 심하기 때문이지.”
신이 내리는 힘이니까.
신을 믿지 않거나, 신의 관심을 받지 못하면 부릴 수 없는 힘이다. 늑대교 사제가 호르비드의 힘을 받아서 제 몸을 바꾸거나 강화했듯이.
“잊힌 끝에 죽어 가는 존재였으나 티아마르와 하나가 되어 다시 일어날 준비를 하는 악신이다. 블라드의 아티펙트는 녀석의 성물이고. 내가 굳이 미케나로 가려는 이유가 성물을 직접 보기 위함이다.”
“어째서입니까. 폐하?”
“티아마르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
로드는 티아마르의 영향력이 내게 미칠 수 있으니 멀리하라고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교국을 두고 볼 수 없는 노릇이지 않나.
나는 티아마르와 연결된 성물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녀의 영향력이 내게 얼마나 미치는가, 그녀가 힘을 얼마나 되찾았는가, 즉 티아마르의 상태를 알아보고자 한다.
‘경우에 따라 그녀와 직접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군.’
성물은 때로 접신을 일으키니까.
이런 가능성이 있기에 권속에게 맡길 수 없다.
내가 직접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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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나서 나는 제국 서부로 향했다.
바닷길을 통해서 미케나 제국으로 가기 위함이었다.
미하이가 인류 제국으로 잠입한 방식도 그랬다. 범선을 대의제 소속으로 위장하여 제국 서부 해안에 상륙했으니, 돌아가는 길도 똑같을 수밖에.
“기다려 주시면 저희가 배를 보내겠습니다.”
미하이는 내가 직접 가겠다는 말에 매우 놀란 모습을 보였다. 녀석이 듣기에도 말이 안 되는 소리, 지나치게 과감한 행동이었을 터.
마침 옆에 있던 스카디가 ‘거봐요.’라는 투로 나를 힐끗 보았다. 칼리오페도 말은 하지 않았으나 사념에서 책망이 조금 읽혔다.
“됐다. 필요 없다.”
“예?”
“배를 부를 필요 없다는 소리다. 내가 너와 같이 미케나 제국으로 갈 것이다.”
녀석은 잠시 머뭇대다가 말했다.
“폐, 폐하. 소인이 타고 온 배는 연락선입니다. 소인 외에 다른 사람이 타거나 물건을 적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아서 폐하와 일행분을 태울 공간이 없습니다.”
누가 네 배를 탄다고 했나.
나는 해군기지가 있는 티시레돈에 서신을 보냈다.
– 원정 함대를 꾸려라. 목적지는 미케나 제국.
해군총장 호레이쇼는 즉각 군함 3척과 수송선 10척으로 된 원정 함대를 조직했다. 수송선은 공화국 잔당으로부터 나포한 것, 군함은 원정 기간에서 새로이 진수한 것이었다.
총 13척에 이르는 원정 함대.
함대는 나가의 깃발을 올리는 단순한 위장으로 검문 한번 없이 제국 서부 해안으로 당도했다. 대의제가 동원할 수 있는 선박 다수가 미케나 제국의 해안을 봉쇄하고자 동원했고, 설마 인간이 바다로 나갈 줄은 몰랐던 탓이라.
“제국이 언제까지 육지에 있으리라 생각하나.”
“그,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폐하.”
미하이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연신 고개를 꾸벅였다. 혹여 내 기분이 상하지 않았을까, 걱정이 반이었고, 나머지 반은 신식 군함의 독특한 외형에 가진 호기심이었다.
“저 배가 무엇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프리깃이라고 하지.”
나는 선두에 선 프리깃의 자태를 보았다.
길이는 80m에 이르고, 양측 포문이 32문에 달하는 군함.
호레이쇼와 내가 구상한 전열함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지금 인류 제국을 제외한 국가에서 범선에 대포를 올린 경우가 있나?
없다.
대의제의 대형 전함에 비하면 높이는 한참 낮다. 그러나 측면에 붙는 순간 높이 따위는 넓은 표적지에 불과하지.
“···무서운 것을 만드셨습니다.”
대포의 성능을 알고 있는 미하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해상에서 이 배를 이기려면 심해에서 크라켄을 끌고 오거나, 육지에서 마법사를 데려와서 폭파하는 수밖에 없다.
“고작 이 정도로 놀라기는 이르다.”
공화국의 수도를 점령하여 해군기지를 확보한 뒤로 일 년도 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프리깃 3척을 건조한 것인데, 공화국이 내륙 식민지에서 적재해둔 건조 목재가 워낙 많아 덕을 보았다. 여기에 생산 계열 권속까지 동원해서 밤낮으로 건조하니 시간은 더욱 단축되었고.
3척에 불과한 군함은 계속해서 늘어날 예정이었다.
그 예정에는 전열함도 있었으니 시작에 불과하지.
“폐하께서 처음 탑승하시는 배가 전열함이 아니라는 점이 아쉽군요. 아무리 밤낮으로 만들어도 전열함은 손이 너무 가는 터라 시간을 줄일 수가 없었습니다.”
원정 함대의 임시 제독으로 임명된 해군부장 피셔가 말했다.
“이 배가 노후화되어 해체되기 전에 범선의 시대가 막을 내릴텐데, 프리깃이고 전열함이고 무슨 의미가 있겠나.”
나는 이 말을 미하이가 듣지 못하도록 사념으로 전했다.
피셔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뱀파이어 컨설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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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케나 제국으로 가는 길은 참 멀었다.
육지로 갔다면 그리 멀지 않았겠지. 네루프 평야에서 북동쪽으로 나아가면 되니까. 하지만 육로는 이종족의 영역권을 지나야 했기에 발각 위험이 컸다.
원정에 동행한 권속의 수가 560명.
이들을 어떻게 숨길까.
“바닷길을 통한다면 들키지 않습니다.”
바닷길을 택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하지만 바닷길은 시간이 꽤 걸린다는 문제가 있었다.
해안을 따라 북상하면 육지보다 빠르지만, 오로코 대평원의 해안을 지나면 바로 엘프의 영역에 이르니까. 발각되지 않으려면 원양으로 나가야 했다. 원양에서 크게 곡선을 그리며 미케나로 향해야 했지.
“항해술이 저급하다면 망망대해에 표류할 경로지요.”
그 이야기를 들은 미케나의 사신, 미하이는 우려를 표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저희가 배를 보낼 때까지 기다리심이···.”
미하이는 몇 번이고 내게 물었다.
블라드의 혈족이나 되면서 내가 직접 원양으로 나가 미케나로 향하겠다는 말에 겁을 먹었다. 나와 동행을 해야 하는데, 자칫하면 바다에 표류하지 않을까, 겁먹은 것이라.
녀석의 본래 계획은 혼자 돌아가고 차후에 위장 수송선을 보내어 물자만 받는 것이었으니, 굳이 원양으로 나갈 필요도 없었다. 위장한 범선을 타고 해안을 따라 이동하면 되니까.
“아니면, 원정 함대의 규모를 줄여서 해안을 따라가는 방법도 있습니다. 원양을 나가는 것보다 훨씬 안전할 겁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원양 항해가 뭐 별 겁니까.”
임시 제독으로 부임한 권속, 피셔가 코웃음을 쳤다.
“원양으로 나간 적이 없어서 겁먹었나 본데, 이 함대는 원양 항해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었습니다. 식량만 충분하면 세계 일주도 가능하지요.”
원양 항해에 필요한 것이 뭐가 있을까.
가장 먼저 원양에 나갈 수 있는 배가 필요하겠고.
나침반, 육분의, 지도 등 항해 도구도 여럿 필요하겠지.
원정 함대는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이 배의 설계는 해군처와 농상공부의 연구소가 합동으로 만들었고, 선체는 체세나 공화국 출신의 조선공이 만들었습니다. 사용된 재료도 공화국이 내륙에 보관하고 있던 목재를 그대로 쓴 것. 기술적으로 무엇 하나 모자람이 없습니다.”
항해술?
그 또한 문제없었다.
피셔는 항해술에 능숙한 권속이었고, 휘하의 장교도 해군처 소속의 권속뿐. 그들 모두가 피셔 못지않게 항해술에 뛰어났다. 선원도 바다에 친숙한 공화국 출신으로 이루어졌으니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물론, 공화국 출신이란 점은 위험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은 개종을 택한 포로였다. 리자드맨 원정까지 끌려갔다가 개종을 택한 경우이기에 오히려 일반 제국민보다 충성심이 높지.
선원의 수는 1,000명이 넘었다. 560명의 권속까지 포함하면 약 1,600명이 미케나로 향하는 셈.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까지가 그나마 하역을 시도할만한 장소입니다.”
기함 내에 있는 작전 회의실에서 미하이가 말했다.
녀석은 탁자 위에 펼친 지도 곳곳에 표식을 올렸다.
“으음.”
피셔는 고작 3개에 불과한 표식을 보고 콧등을 긁었다.
“다른 곳은 없습니까?”
원정 함대는 안전하게 원양으로 접어들었다.
그렇다면 상륙지를 정하고 이동해야 할 때.
문제는 상륙이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다른 곳은 어렵습니다. 미케나에 있는 항구는 점령당하거나 포위당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접근해도 상륙은 시도조차 못 해요.”
“그래도 어촌은 많을 거 아닙니까? 그런 곳에 새벽을 노려서 상륙하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없습니다.”
“없다고요?”
“예. 작은 어촌이라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요새로서 기능을 갖춘 항구 도시를 제외하면 해안가에서 수십 킬로미터까지 초토화된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대의제와 싸운다는 것이 그렇지.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내가 당한 방식이다.
일명 바다로의 진군이라고 하는 초토화 작전.
압도적인 해군력으로 해상을 장악하고, 해안에 있는 거점을 초토화한 뒤에 내륙으로 진출하는 전략이었다.
인류 제국과 체세나 공화국 간의 전쟁에는 해안이 초토화 당하기 이전에 티시레돈을 공격하여 전략을 무너뜨렸지만, 미케나는 그럴 방도가 없는 터라 내륙까지 밀리고 있는 상황.
“해안 전역에는 순찰선이 돌고 있습니다. 쥐새끼 한 마리도 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지요.”
“우리 쪽에 관심이 적을만했군.”
피셔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양으로 나가기까지 마주한 선박이 거의 없었지.
이종족의 해군력이 미케나 제국에 쏠려 있던 덕이었다.
“그쪽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배를 띄운 겁니까?”
“아버지께는 종복이 많습니다. 선장 한 둘 구하는 일은 쉽지요.”
흡혈귀의 이점 중 하나는 외모가 일반인과 구별이 안 된다는 점이다. 이를 이용하면 경쟁 조직에 첩자를 심는 것도 간단하고, 실제로 대의제에 혈족과 종복을 심어서 내부 정보를 얻거나 의제를 미케나에게 유리하게 조율하기도 했다.
그러니 선박 한 둘 빼돌리는 일이야 쉬울 수밖에.
본래 녀석이 선박을 보내려 한 방법도 이런 식이었을 터.
“지금 하역이 가능한 장소를 꼽으라면 이렇게 세 곳뿐입니다. 미케나의 영역권에 있으면서 하역을 위한 개활지가 있고, 주변에 적이 주둔하지 않는 장소지요.”
“이 중에서 굳이 꼽으라면 여기가 낫겠군.”
피셔가 셋 중 한 곳을 지목했다.
그곳은 두 개의 곶 사이에 있는 작은 해변.
원정 함대는 순풍을 받고 이동해서, 새벽을 틈타 해변에 하역을 시작했다. 부두가 없는 탓에 화물을 내리는 일은 고역이었다. 하나하나 보트에 실어서 해변까지 가져가야 했으니.
그나마 권속이 인간을 초월한 존재라 능력이 높았기에 다행이었다. 해가 뜰 무렵에는 하역이 거의 끝났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발각되었습니다.”
순찰선이 원정 함대를 발견했다.
단순히 순찰선이라고 말하면 부족하겠지.
순찰선은 4척으로 이루어진 소함대였다.
“대의제 소속이군요.”
미하이는 적선의 깃발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순찰선은 동체가 프리깃보다 훨씬 큰 군함이었다.
“적, 신호기를 올렸습니다. 뜻은 정선하라.”
순찰 함대는 원정 함대를 발견하자마자 뱃머리를 돌렸다.
의심을 품은 이상 조용히 물러나지는 않겠지.
하역 중이라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 하고.
도망가면 다음 기회를 잡기는 더욱 힘들 겁니다. 수상한 함대가 기웃거리는 상황을 목격한 셈인데, 순찰 빈도를 더 늘리겠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 아니라면 하역 기회는 없고 봐야겠지.
“어떡하시겠습니까.”
피셔는 답을 알면서도 내게 물었다.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나?”
피셔는 씨익,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의 사념이 발하는 자신감과 계획을 읽었다.
“잡아라. 지휘는 네게 맡기마.”
“감사합니다. 폐하.”
피셔는 곧장 몸을 돌려서 소리쳤다.
동시에 사념을 발하여 권속에게 지시를 내렸다.
“모두 안으로 들어가라! 선원은 전투태세를 갖추되, 나머지는 근위대만 남고 모두 갑판 아래로 내려가라!”
신호기는 올리지 않았다.
권속은 사념으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다.
각 함의 함장과 장교는 모두 권속이라 피셔가 입으로 명령을 내린 즉시 사념으로도 명령을 받았을 터.
괜히 신호기를 올려서 상대에게 원정 함대의 대응을 보일 이유가 없지.
나는 순찰선이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쪽은 조용하네요.”
라헬이 눈매를 좁히며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에 원정 함대 기함에 건 깃발을 보았다.
나가를 상징하는 깃발과 그 아래 공화국의 깃발이 걸렸다.
공화국은 사실상 멸망했지만, 어디까지나 사실상이다. 수도 점령 직전에 지도부가 도망쳤고, 잔존 세력이 여러 섬에서 저항의 불꽃을 키우는 중이었다.
덕분에 원정 함대는 괜찮은 가림막이 생겼다. 공화국은 남부 소국보다 먼저 이종족과 제한 없이 거래하던 족속이니까. 직접 마주하지 않는다면 의심받기 힘들거든.
“의심은 가지만, 적대는 하지 않는 것이지.”
“밀수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음.”
그렇겠지.
순찰선의 갑판 위에는 몇 안 되는 이종족이 서 있을 뿐.
전투태세와는 먼 모습이었다.
“좋네요.”
라헬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렸다.
갑판 아래에 장전을 마친 함포가 있을 터.
사상 최초로 함포가 불을 뿜는 모습을 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