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ilding a human empire by creating a clan RAW novel - Chapter (175)
권속 생성으로 인류 제국 건설 177화(177/185)
룬드링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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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 눈이 내렸다. 만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따사롭게 내리던 햇빛이 구름에 막히고, 찬바람과 함께 눈이 내렸으니 숲은 곧 하얗게 물들었다.
맹렬한 추위 속에서 눈은 녹지 않고 쌓이기만 했다. 단 한 그루의 나무를 제외한 모든 나무가 눈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쓰러지고, 그 위로 다시 눈이 쌓였다.
수년이 지나자 숲이 사라졌다. 멀리서 보면 평야에 눈이 내린 것처럼 보였는데 그러고도 눈은 계속 내렸다.
세계수는 숲 가운데 있었다.
숲이 사라져 가는 와중에도 세계수는 굳건했다. 쉴 새 없이 내리는 눈이 세계수에 닿자 증기가 되어 날아가고, 바람도 그 주위에선 잔잔해졌다.
“으으음.”
옛 신, 에테모스는 세계수 아래에서 고개를 높이 들었다. 그의 시선이 세계수 가지에 맺힌 열매를 훑었다. 수백 미터에 이르는 고목 높이 만큼 가지의 길이도 길었고, 가지에 맺힌 열매의 수도 무수했다.
툭—
열매 하나가 가지에서 떨어졌다.
에테모스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저 높이에서 떨어지면 무사하지 못할 터. 그러나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열매가 떨어지는 속도가 굼떴으니까.
스스스···
세계수가 발하는 마력이 주변 환경을 왜곡한 것이라. 열매는 마치 나뭇잎이 바람에 살랑이듯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땅에 살포시 내렸다.
“참 재밌는 걸 만들었어.”
에테모스는 피식, 웃었다.
열매는 계란형의 반투명한 막이었다. 양수가 찬 막 안에 태아처럼 움츠린 생명이 있었다. 수년 전까지 그 생명은 엘프였다. 세계수가 열매로 엘프를 맺었으니까.
“우리를 죽일 수 없으니까, 별 방법을 시도했단 말이지.”
세계수 그늘 밑에서 흐느적흐느적 서성이던 무리가 열매를 향해서 달렸다. 이들은 옛 신의 마력으로 변이를 겪은 엘프였다. 아름답지 않고, 이지적이지 못한 괴물이었다.
“열매!”
“떨어졌다!”
괴물은 손톱으로 열매를 찢어서 안에 있던 생명을 끄집어냈다. 엘프가 아니었다. 아이도 아니었고. 다 자란 인간이 웅크린 채 눈을 떴다.
“쿨럭!”
거친 호흡을 토하는 인간을 괴물이 안고 숲을 빠져나갔다.
“오늘은 51마리.”
에테모스는 오늘 하루 떨어진 열매의 수를 세고 혀를 찼다.
“생산량이 늘지 않잖아. 거름이 부족한가?”
그때, 마력이 거세게 움직였다.
에테모스는 고개를 돌렸다. 로드의 육신을 빼앗은 카르카스가 멀리서 날아오고 있었다. 그는 힘껏 날갯짓하고 에테모스의 뒤로 착지했다.
쿵—
세계수 가지에 맺힌 열매가 후두두 떨어졌다.
“조심해!”
에테모스는 인상을 와락 구겼다.
“필요하면 부를 것이지 왜 온 거야?”
– 티아마르가 움직였다.
“그게 뭐? 알고 있던 거잖아.”
– 혼자가 아니더군.
“뭐?”
화를 삭이고 눈매를 좁혔다.
“인간을 부리고 있단 소린 아닐 테고. 너나 티아마르 외에 다른 용이 있단 소리야?”
– 그래. 이 몸에 비하면 열등한 것 같지만.”
“번식이라도 했나? 자웅동체가 아니라서 불가능할 텐데.”
그는 그래서? 라고 물었다.
– 저것들, 용과 싸울 수 있나?
카르카스의 시선이 떨어진 열매를 향했다.
“날개가 없는데 될 리가?”
열매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마침 괴물 한 마리가 열매를 뜯고자 손을 뻗은 순간이었고, 그 손을 잡아서 안으로 당겼다. 괴물은 당황했으나 미처 반응하지 못한 채 끌려갔다.
와작, 하고 씹는 소리가 났다.
피가 열매 밖으로 튀었다. 인간이 괴물을 잡아먹은 것이라. 너무 이르게 세계수에서 떨어진 탓에 굶주렸으니까. 와작, 와작, 괴물을 먹어서 모자란 영양을 보충했다.
“캬아아아악!”
다른 괴물이 성을 내면서 인간을 공격했지만, 인간은 그마저 사냥하고, 세 마리를 더 잡아먹은 뒤에야 온순해졌다.
“굳이 저거로 잡을 필요도 없잖아?”
에테모스는 열매에서 기어 나오는 인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창조엔 이유가 있는 법이라고. 저건 날벌레를 잡기 위해 만든 게 아니야. 황제의 인형을 잡으려고 만든 거지. 날벌레잡이는 따로 보내줄게. 그걸로 충분할 거야.”
– 가능하면 저것도 확인해보고 싶은데 봉우리로 보낼 수 있나?
“뭐, 그 정도야. 다른 곳은?”
– 필요 없다.
그는 고개를 주억였다.
“심장은 어때?”
– 만족스럽군. 완벽하진 않지만.
“진짜가 아니니까 어쩔 수 없어.”
시선이 카르카스의 가슴을 향했다. 겉으로 보면 그저 비늘로 덮여 있을 뿐이지만, 마력의 흐름에 집중하면 불안정한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용의 심장이 뛸 때마다 흐름이 마구 흔들렸다.
“어차피 죽은 거나 다름없는 몸이니까, 심장 따위 만들면 그만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로드에게 한 방 먹었어.”
에테모스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대체 어디 숨긴 거야? 드래곤의 심장, 그 숨기기도 힘든 그걸 어디에 꿍쳤는지 도통 못 찾겠어. 정말로 숨긴 게 맞겠지? 처음부터 없는 걸 찾는 게 아니고?”
– 아니, 있다. 로드는 필멸자로 떨어졌으니까. 심장마저 없다면 버티지 못했을 터. 그랬다면 알레온이 진즉 들고 일어섰겠지.
“알레온이 활동한 시기를 생각하면··· 로드는 최근에 심장을 떼어 냈다고 봐야 하는데.”
그는 혀를 찼다.
“그래도 티아마르를 상대하기엔 충분할 거야. 애초에 그걸 목적으로 네가 거기 깃든 거잖아? 쓸데없이 힘쓰지 않으면 문제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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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 펑, 하고 포성이 울렸다.
“막아!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
산 위에 자리 잡은 드워프 무리가 산을 오르는 인간 무리를 향해서 포구를 겨누었다. 다시 포성이 발하고 회색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망할!”
바람에 연기가 날아가자 드워프 지휘관은 욕지거리를 뱉었다. 인간 무리가 여전히 다가오고 있었다. 분명 포탄에 맞았을 터. 여기저기 상처 입은 모습이나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다음!”
포병대 앞으로 머스킷을 든 드워프들이 나섰다.
“쏴!”
타당, 타다다당!
변화는 없었다. 반백 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일제사격을 감행했어도 총탄은 갑옷을 뚫지 못했다. 적이 두른 갑옷이 미스랄 혹은 오리칼쿰이란 것을 깨달은 지휘관은 이를 깨물었다.
“다음!”
지휘관은 피를 토하듯 소리를 질렀다.
끼에에에에에엑!
그러자 괴성이 터졌다. 드워프였으나 드워프가 아니게 된 이들이 권속에게 달려갔다. 그들이 모습을 보이고서야 권속은 걸음을 멈추었다.
“황제 폐하를 위하여!”
권속과 괴물의 난전을 드워프는 구경만 했다. 가뭄 속에 비가 내린 것처럼 짧게 한숨을 내쉬고 재정비를 했을 뿐, 난전에 끼어들지 않았다.
“가까이 가지 마라! 휩쓸린다!”
머리에 피가 오른 괴물은 동족이란 개념이 없으니까.
괴물과 함께 돌격한 적도 있었으나 그 결과가 참혹했다. 함께 달려가던 도중에 괴물이 동족에게 달려든 탓에 큰 피해를 보았다. 그 뒤로 연계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개 같은 괴물 놈들.”
권속과 옛 동족 모두를 가리키는 욕이었다.
“됐다! 사격 준비!”
드워프들은 사격태세를 갖추었다. 괴물은 금세 도륙당할 테니까, 난전이 끝나자마자 화력을 쏟아낼 셈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세를 잡았을 때, 하늘에서 또 다른 괴성이 들렸다.
“흐, 흩어져!”
화염이 그들을 덮쳤다. 하늘에서 와이번이 날아들며 브레스를 내뿜었다. 마치 선을 긋듯이 불의 벽을 세우고 와이번은 빠르게 날아 올랐다.
쾅! 콰광!
화약통에 불똥이 튀었다. 브레스를 가까스로 피한 드워프들은 폭발에 휘말렸고, 전투를 속행할 수가 없었다. 살아남은 드워프는 뒤이어 닥친 권속에게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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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순조롭진 않습니다.”
게하르드는 고개를 저었다.
“저쪽에서 소모전을 바라는 것 같습니다. 대규모 회전은 피하고, 봉우리마다 저항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난쟁이들은 지하에 거점을 마련하고 있기에 하나하나 점령하려면 시간도 피해도 클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와이번은 지시에 잘 따르나?”
“예. 다행스럽게도.”
활활 타오르는 산 비탈길을 보았다.
직전에 와이번이 브레스를 내뿜고 간 장소였다.
“광산 안까지 데려가지 못하는 것이 아쉽습니다. 그게 가능했다면 피해가 많이 줄었을 텐데요.”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지. 몸집을 줄일 수 없는 노릇이니까.”
게하르드는 드워프의 거점을 공략하고 있었다.
판토니아 중부에서 알레온과 회전을 치른 직후부터 봉우리, 라고 부르는 드워프의 영역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있었다.
봉우리는 산 하나를 가리키는 말 같지만, 실제로는 드워프의 영역 전체를 아우르는 말이었다.
드워프는 광산에 거점을 두는 종족이고, 이곳은 여러 산맥이 만나는 곳이니까. 무수히 많은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대신 봉우리라고 불렀지.
“많긴 많군.”
나는 내가 깃든 권속의 눈으로 경관을 보았다. 봉우리보다 십만대산, 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어땠을까 싶을 정도로 봉우리가 많았다.
서른 개가 넘는 봉우리를 점령했는데도 고타바의 거점, 적색 산에 도달하지 못했을 정도니.
“다른 곳은 어떻습니까?”
제국군은 나가, 리자드맨도 동시에 정리했다.
두 종족은 판토니아 회전 이전에 원정군을 보낸 바 있었다. 옛 신과 그들 사이에 제국이 있기에 옛 신의 영향을 덜 받고 있었으니 정리가 수월했지.
“신경 쓸 필요 없다. 더는 인간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할 테니. 이제 역사에서 볼 수 있을 거다.”
“과연···.”
두 종족은 사실상 멸망했다.
생존자가 있어도 산란장을 잃었고, 산란장을 만들 거점도 없는 마당에 어떻게 재기하겠나. 천천히 말라죽을 뿐이다.
그나마 나가는 심해로 도망칠 수 있기에 아주 작은 희망이 있을지 몰라도, 리자드맨은 희망조차 없었다. 티아마르가 갔으니까.
“티아마르가 꽤 날뛰었다고 들었습니다.”
“오랜 기간 억눌려 있었으니까.”
“몸풀기, 라고 했던가요?”
티아마르가 우아칸 왕국으로 가겠다며 한 말이었다. 봉인에서 해방되고 얼마 되지 않았기에 힘을 주체하지 못했을 터.
그리고 리자드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봉우리 정복을 돕기 위해 남긴 여섯 마리의 와이번을 제외하고, 그녀가 수십 마리의 와이번과 함께 리자드맨의 터전에 들이닥쳤으니.
결과는 뻔하디뻔하지.
“율리아에게 바로 이곳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나가와 달리 소탕전을 벌일 필요도 없었다.
“티아마르··· 인간 티아마르 말입니다.”
게하르드의 목소리에 우려가 담겼다.
“만나게 하실 생각입니까?”
누구와? 라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언젠가는.”
사룡 티아마르와 인간 티아마르.
내가 만난 티아마르는 셋이지만, 블라드의 육신을 빼앗은 티아마르는 소식이 끊겼다. 확인할 필요는 없다. 본체를 찾아갔겠지. 봉인을 풀고 자신을 드러낸 시점에서 세상 곳곳에 흩어진 영혼이 모여들었을 터.
본체를 따르지 않은 조각은 인간이 된 티아마르뿐일 거다.
“조심하십시오, 폐하.”
“그녀가 배신할 거라 생각하나?”
“아닙니다. 그녀가 제 의지로 폐하의 믿음을 저버리진 않겠지요. 하지만 의지가 아니라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저희와 같은 존재가 되었어도 영혼은 다르지 않습니까?”
다르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니.
“그녀가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더라도, 영혼은 본체에 이끌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될 수 있으면 둘을 만나게 하지 않는 것이···.”
“괜찮다.”
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이끌림이 항상 한쪽으로 향하지는 않아.”
“예?”
“뒤집힐 수도 있지. 때론 작은 것이 큰 것을 삼키기도 하듯.”
“그 말씀은···.”
게하르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무어라 말하려던 차에,
“폐하.”
시종이 나를 찾았다.
봉우리가 아니라 올리머스의 황궁에서.
“손님입니다.”
시종의 사념을 읽고 나는 일순간 멈칫했다.
“손님이라.”
뜻밖이었다. 아니, 뜻밖이라는 말은 맞지 않는다. 생각, 기대, 예상, 무엇 하나 하지 않은 손님이었다. 존재 자체를 기억 깊숙한 곳에 담아두고 있었을 뿐.
그런 존재가 손님으로서 나를 찾아오다니.
“티아마르는 어디 있지?”
“칼리오페와 함께 있습니다. 부를까요?”
“그래, 그러는 게 좋겠어.”
손님은 룬드링겐이었다.
로드 아일레트리오네가 육신을 빌린 늙은 엘프.
생색
룬드링겐.
이종족에게 특별한 이름이다. 옛 신이 세상을 지배할 적에, 로드 아일레트리오네는 룬드링겐이란 이름으로 프로메테우스가 되었다.
이종족이 문명을 세울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고, 그때 로드가 자칭한 이름이 룬드링겐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룬드링겐, 이라는 이름을 가진 엘프의 육신을 빌렸지.
드워프가 엘프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로드가 가장 먼저 손을 뻗은 종족이 엘프였으니까. 드워프는 엘프 다음이었고, 그 외 종족은 한참 뒤였다.
‘룬드링겐이라.’
나는 그를 잊고 있었다. 잊을 수밖에 없지. 로드가 깃들지 않은 그를 본 적이 없었으니. 내게 룬드링겐은 껍데기였기에 로드가 활동할 때에도 관심 밖이었다.
그런데 그가 나를 찾아왔다.
“로드일까요?”
스카디가 물었다.
“글쎄.”
“육신은 빼앗겼어도 영혼은 남았다, 라고 할 수도 있잖아요?”
육신은 장식에 불과한 옛 신이라면 그럴 수 있다. 허나 로드는 필멸자다. 육신을 잃으면 영혼은 이지 없는 마력 덩어리에 지나지 않을 터.
“일단, 직접 보도록 하지.”
늙은 엘프가 근위병과 함께 알현실로 들어왔다.
“······.”
엘프의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다. 불로불사에 가까운 삶을 사는 종족이어도 결국 가까울 뿐, 세월을 이겨낸 것은 아니다.
하물며 그는 만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았을 테니.
그는 깡 마른 두 손으로 곱게 포장한 함을 들고 있었다. 근위병이 알현실로 들어오기 직전에 내용물을 확인하고자 했으나 그가 거부했다. 내게 줄 선물이라고.
저벅, 저벅···
룬드링겐은 옥좌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많이 변했군, 인간 에다르.”
변했다는 것은 영혼을 말하는 것이겠지.
나도 그의 변화를 알아챘다. 그에게 항상 깃들어 있던 로드가 없었다. 로드가 깃들어 있을 때, 룬드링겐은 마치 거인처럼 느껴졌는데 이젠 그저 늙은 엘프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룬드링겐이네. 자네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로드의 종복이었지. 흡혈귀의 종복, 그런 것이 아니라 그분의 시종이라는 의미로.”
“나는 찾은 이유는?”
“그분의 유산을 네게 전하려고 왔네.”
유산.
“로드는 정말로 죽었나.”
그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셨지.”
“······.”
“그분은 지치셨네. 살고자 한다면 살 수 있었지만, 그렇게 사는 삶은 맥이 없으니까. 그럴 바엔 끝을 맺기로 하셨지.”
“그렇군.”
나는 그가 들고 있는 함을 보았다.
“유산이 그건가.”
룬드링겐은 함의 포장을 풀고 뚜껑을 열었다. 함에 담긴 물건은 구였다. 색깔이 없는 투명한 구였다. 그러나 나는 그 안에 깃든 마력을 느꼈다.
“기억하나? 그분이 자네를 상속자로 지명하셨음을?”
구가 함에서 나오는 순간, 마력도 함에서 터져 나왔다. 바람이 훅 불듯이 마력이 불어닥쳤다. 내 영혼마저 자극하는 강렬한 마력의 흐름이었다.
“이것은 그분께서 직접 본인의 심장을 정제한 것이다. 알레온이 대의제를 선동하여 그분을 붙잡기 직전에 떼어 만들었지.”
“과연.”
나는 카르카스에게서 느낀 이질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마력의 흐름이 불안정한 이유가 이 탓이리라. 육신에 심장이 없으니까, 가짜 심장을 달았을 테니.
“물질은 정신에 비하면 하찮네. 허나 그분은 육신만으로도 위대한 분. 신이라 추앙받는 족속조차 그분의 육신을 탐해서, 불멸의 영혼을 육신에 가두길 망설이지 않았으니.”
룬드링겐은 계단을 올라와 내게 구를 든 손을 내밀었다.
“받아라. 이제 네 것이다. 상속자.”
나는 가만히 앉아서 구를 보았다.
블라드의 영혼 조각이 담긴 반지나, 티아마르의 펜던트처럼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력을 힘껏 발하고 있을 뿐.
구는 그저 로드의 마력을 담고 있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로드가 내게 전해주라고 했나?”
“아니. 내 뜻이네.”
늙수그레한 얼굴이 웃음을 지었다.
“그분께서 내게 심장을 가지라고 하셨지. 보상으로 말이야. 그분에게 헌신하여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킨 종자에게 주는 보상이었다.”
보상이 심장이라니.
로드가 그에게 어떤 감정을 품었는지 알 수 있었다. 티아마르, 알레온조차 배신한 마당에 그를 지키고 있던 시종이다. 만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육신을 빌리기도 했고.
“다만.”
“다만?”
“티아마르와 거짓된 신에게 넘기지 말라고 당부하셨지.”
“지당하군. 그런데 왜 내게 넘기기로 했지?”
동족을 구해달라는 것이냐고, 물으려던 차에,
“바라는 건 없다. 이게 옳다고 생각했을 뿐.”
그는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내 종족에게 자비를 내리지 마라. 그들은 죄를 지었고, 그 대가를 치러야지.”
일순간 그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동족을 혐오하나?”
표정에 담긴 감정은 혐오였다. 제 동족을 혐오하는 것이라.
“내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알잖나. 나는 역사보다 오래 살았다. 그분이 세계수를 만드는 것을 보았고, 세계수가 처음으로 열매 대신 엘프를 맺는 것도 보았지.”
말했듯 족히 만 년이 넘는 삶을 살았으니까.
룬드링겐이 괜히 프로메테우스에 비유되겠나.
“그리고 그때마다 내 몸은 내가 아니라 그분이 이끌었다. 자네는 이해 못 할지도 모르겠군. 자네도 타인의 육신을 빌리는 입장이니까.”
“음.”
“다른 의지가 내 몸에 깃들어 나를 부리는 건 겪어 봐야 알아. 며칠이 아니라 수 천 년 동안 그리된다면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알고 있나?”
그가 말하는 바를 이해했다.
아무리 확고한 자아를 가지고 있어도, 자아는 경험에서 비롯되니까. 제 의지로 살았던 삶보다 수백 배는 긴 삶을 타인의 의지를 품고 산다면 자아도 바뀌기 마련이지.
“로드에게 감화되었다는 건가.”
“함께한 시간이 너무 길었어. 어느 순간 나는 동족에게서 멀어졌고, 로드와 나를 동일시하면서 그와 같은 사고를 하기 시작했지.”
“······.”
“물론 나는 로드가 아니네. 하지만 로드라면 어찌 행동했을지 알아.”
룬드링겐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구가 발하는 마력이 그를 휘감았고, 로드가 깃들었을 때처럼 위압을 만들었다.
“그리고 로드가 말했지. 내 뒤를 누가 이을지 관심 없다. 그러나 내가 쌓은 업적이 덧없이 사라지는 것은 두고 보기 어렵다고.”
그는 자신도 마찬가지라고 말을 이었다. 로드가 쌓은 업적은 그를 부려서 쌓은 것이니까. 그의 업적이 사라지는 것 같다고.
“가져라.”
나는 구를 잡았다.
사아아, 소리를 내며 마력이 나를 휘감았다.
“내 덧없는 생명을 유지하는 것보다 알차게 쓰겠지.”
마력은 내가 대응하지 않자 금방 사그라들었다. 알현실을 꽉 채웠던 마력이 구로 돌아갔다. 나는 구를 함에 도로 넣어두고 스카디에게 건넸다.
“그런데.”
룬드링겐은 수염을 쓸면서 물었다.
“손님을 언제까지 서 있게 할 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