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ilding a human empire by creating a clan RAW novel - Chapter (27)
권속 생성으로 인류 제국 건설 29화(29/185)
“나는 이 땅의 정당한 주인이며, 이는 곧 너희의 주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너희의 주인이 고하노니, 지금 부로 너희를 노예에서 해방한다. 너희는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내 영지에 살게 될 것이며 이를 원하지 않는다면 떠나도 좋다.”
정신이 무너진 노예들 사이에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다른 노예들과 달리 정신이 온전했다.
그의 이름은 딜런이었다.
“자유······.”
딜런은 노예가 되기 이전에 올리머스의 대장장이였다.
올리머스에 정착하기 이전에는 꽤 큰 도시의 도제였다.
또 그 이전에는 도시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자랐다.
12살에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고 길드에 속한 대장장이의 시동으로 들어가서 10년이 조금 넘는 시간을 뒷바라지로 흘려보냈다.
“예?”
“그간 배운 게 있으니 알아서 할 수 있겠지. 수고했다.”
하지만 26살의 겨울이 끝나가던 때에 길드에서 쫓겨났다.
그가 잘못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길드는 머리가 큰 도제보다 밥값이 싼 시동을 원했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장인이 될 것이란 희망 하나로 살아왔던 인생이었다.
그것이 한순간, 예고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스물여섯, 이룬 것 하나 없는 그에게 남은 것은 부업으로 모았던 푼돈 몇 닢과 보이지 않는 잡기술이 전부였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그 땅을 무상으로 가질 수 있소!”
마침 서드렛 공작가에서 꾸리는 개척단이 보였다.
‘개척지로 가자.’
돌아갈 고향이 없고 찾아주는 사람도 없는 그였다.
이대로 굶어 죽느니 무어라도 해야지 않겠나.
그는 개척단에 들어가 쇠를 다룰 줄 안다고 소개했다.
“야장일을 하실 줄 안다고요?”
그렇게 올리머스에 단 한 명밖에 없는 대장장이가 되었다.
장인이 직접 사사한 것은 없어도 곁에 있던 시간이 10여 년.
개척촌에서 요구하는 기술이 엄청난 것도 아니었고, 그마저도 못하는 이들뿐이었기에 그의 재주는 돋보였고 극진한 존경을 받았다.
아내를 얻었고, 자식도 생겼다.
“······.”
딜런은 행복했었다.
날려버린 청춘을 보상받는 것 같은 삶이었다.
잃어버린 10년을 뒤늦게 돌려받는 10년이 이어졌다.
장인 밑에 있을 적엔 느끼지 못했던 행복을 느꼈다.
개척촌은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마음만큼은 부족함이 없었다.
부족한 것은 채워질 것이라고 믿었다.
삶은 점점 좋아지기만 할 것이라고,
그는 이대로 살다가 여기서 내 삶을 마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던 딜런은 지금,
외발 광산 노예였다.
인간의 신
보리 이삭이 피어올라 그 냄새가 향긋하게 풍겼다.
밭에 나간 개척민은 풍작에 흥이 겨워 절로 콧노래가 나오고,
저마다 웃음꽃을 피우며 허리 숙여 수확이 한창이던 그때,
지평선 너머에서 작은 인형이 무리를 지어 나타났다.
오크, 그리고 고블린.
보리가 불타고 귀를 찌르는 비명이 울렸다.
고블린 무리가 토굴에 숨은 아내를 끄집어내는 광경.
안 돼, 소리치며 아내에게 달려가지만 고꾸라지는 시야.
종아리 깊은 곳에 박힌 녹슨 단도.
괴석을 든 고블린이 팔을 치켜드는 모습,
“······헉!”
딜런은 눈을 떴다.
“꿈···?”
멍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면 그는 마차를 타고 있었다.
평야에 도로가 없어서 흙길을 달리는 마차가 덜컹거렸다.
몸이 충격에 들썩일 때마다 감각이 하나씩 돌아왔다.
딜런은 왼손을 들어서 얼굴을 쓸었다.
‘꿈이었어.’
안도의 한숨조차 덜덜 떨렸다.
“으, 으으으···!”
악몽을 꾸는 것은 딜런만이 아니었다.
마차에 탄 모두가 눈은 감고 이를 악물며 떨었다.
‘드디어 해방되었는데, 정신은 여전히 속박되어 있구나.’
떨림이 멈추지 않는 두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데도 떨림은 멈추지 않고 팔을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아, 우···.”
딜런은 그의 품에서 뒤척이는 아내, 마야를 보았다.
얼굴은 생채기투성이, 머리카락은 한 올 없이 뜯긴 모습.
두 팔과 두 다리는 붙어 있었으나 발목 인대가 끊어졌다.
그나마 이런 꼴도 다른 이들에 비하면 나은 편이었다.
사지가 없는 이들이 태반이었으니.
하지만 딜런은 운이 좋았다고 자신을 달랠 수 없었다.
“웅···.”
마야가 왼손가락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딜런과 재회했을 때, 그녀는 실성한 상태였다.
갓난아이가 된 것처럼 이지를 잃고 광인처럼 웃었다.
혐오스러운 족속이 그녀의 마음을 부순 것이라.
딜런은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조심스레 아내를 안았다.
“우···.”
이튿날이 되자 올리머스에 도착했다.
인세 지옥이라 여겼던 바구쿠의 주둔지에서 고작 하루 거리.
그 하루 거리에 매일매일 수없이 떠올린 장소가 있었다.
‘많이 변했어.’
딜런은 올리머스의 모습을 보면서 자못 놀랐다.
그가 기억하는 올리머스의 모습은 소박한 농촌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올리머스는 소박함도 농촌의 모습도 없었다.
작은 도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직 성벽은 없지만···.’
도시, 하면 떠오르는 모습은 높은 성벽.
그리고 성벽 안에 형성된 농촌과 다른 생활권.
올리머스는 그 점에서 도시는 아니었다.
하지만 딜런이 도시 같다고 느낀 이유가 있었다.
규모와 규격이 도시처럼 바뀌었으니까.
‘이주민을 받은 건가.’
올리머스의 인구는 약탈을 여러 차례 겪으면서 감소했었다.
딜런이 사냥당하던 때에 인구는 약 200명 남짓이었다.
언뜻 보이는 가구의 수가 그때의 배로 늘어난 듯했다.
‘우리까지 더해지면 1,000명은 넘겠어.’
딜런은 고개를 돌려서 마차 행렬을 보았다.
줄이 정말로 길었고, 짐마차 하나하나에 사람이 꽉꽉 찼다.
눈대중으로 보아도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의 수가 수 백이라, 올리머스가 이들 모두 수용할 수 있을지 불안했다.
– 너희는 올리머스에서 살 것이다.
올리머스의 주인이자 그들을 구한 인간 영주의 말을 떠올렸다.
그 무시무시한 오크 대장과 몬스터 무리를 괴멸시킨 영주.
그러한 능력을 갖춘 존재가 헛된 소리를 하진 않았으리라.
딜런은 그 말을 믿었고, 그리되기를 바랐다.
‘똑같은 일은 겪어선 안 돼.’
대평원에 있는 이상, 지옥은 그리 멀지 않음을 딜런은 알았다.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영주의 비호 아래 있어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영지에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다리는 하나 잃었지만, 두 손은 무사했다.
집게를 쥐고 망치를 휘두를 수 있다면 괜찮았다.
지옥 같던 노예 생활을 견딘 정신력도 있었다.
‘다행히 사람이 많이 필요해 보여.’
거주지, 작업장, 경작지 등 직선으로 딱딱 나누어진 구역과 그 구역 안에서 바쁘게 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이처럼 발전하고 있는 올리머스라면 그가 더욱 필요하리라.
“앞으로 여기서 생활하시면 됩니다.”
마차에서 내린 그들은 임시 가옥을 배정받았다.
작고 허름했지만, 시체를 끼고 잘 때 비하면 천국이었다.
거기에 그날 구운 빵을 삼시 세끼 배급해주기까지 했다.
딜런은 걷지 못하는 마야를 안아서 방에 눕혔다.
“아··· 우, 아.”
침을 질질 흘리며 방긋 웃고 있는 마야.
딜런은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는 아내를 보며 감정이 일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그녀를 따라 애써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더는 노예가 아니니까, 그는 웃을 수 있었다.
똑, 똑
이튿날에 익숙한 얼굴이 찾아 왔다.
키슬러, 올리머스의 촌장이었다.
“잘 돌아왔어.”
“한창 바쁠 텐데, 이런 꼴로 돌아와서 미안하네.”
“살아 있다면 된 거지. 그게 중요한가.”
키슬러는 맑게 웃는 마야를 보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힘들겠군. 보살필 사람이 없어서.”
“괜찮아. 마야는 얌전해.”
“우, 아아!”
그 말을 반박하듯이 마야가 소리를 질렀다.
“그럼 일을 다시 할 수 있겠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자네의 도움이 필요해. 영주님이 대장장이를 몇 명 데려오긴 했지만, 수가 너무 모자라거든.”
“내가 하지.”
딜런은 대장간에 복귀했다.
이전에 그가 지었던 공방은 철거되었다.
엘프가 찾아와 부수었기에 구역을 정리하면서 옮겼다고.
자신이 한때 이곳에 남긴 흔적이 사라진 것에 아쉬움이 일었다.
하지만 금방 잊고 일에 집중했다.
당장 그에게 중요한 것은 대장장이로 정착하는 것,
그가 영지에 필요한 사람이란 것을 입증하는 것,
그래서 영주의 비호를 받는 것이었다.
“오··· 솜씨 좋네요.”
“적당히 적당히 합시다.”
대장간에는 딜런처럼 도제 출신 대장장이가 둘 있었다.
둘은 형제였으며 활기가 넘치는 청년들이었다.
“어르신, 다리 그거 높이가 안 맞네. 새로 만들죠?”
“그게 좋겠어.”
“아니, 자재만 주게. 내가 만들지.”
“어르신은 앉아 계십쇼. 저희가 기갈나게 뽑아드릴 테니.”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낮에는 대장간에서 일해야 했지,
밤에는 잠을 설치는 아내를 돌봐야 했지.
그나마 낮 동안 아내를 돌보지 않아도 되어 조금 나았다.
영주의 가신이 마야와 같은 사람들을 돌보기로 했다.
“걱정하지 말고 일 보세요. 부인은 제가 돌봐드릴게요.”
딜런은 그녀가 라헬이라는 이름을 가졌고, 주둔지에서 영주 곁에 있던 가신 중 한 명이란 것을 기억했다.
수도자처럼 수도복을 입은 그녀는 낮이 되면 마야와 같은 정신 나간 사람들을 모아서 영주관 가까이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그 건물이 본래 창고로 쓰일 예정이었단 것은 들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딜런은 몰랐다.
캐묻기에는 겸연쩍고, 공방일에 바빴다.
낮에는 공방에서 일을 보고 저녁이 되면 맡겨둔 아이를 찾으러 가는 것처럼 마야를 데려왔다.
“아우!”
확실한 것은 마야의 모습이 밝아졌다.
그렇기에 딜런은 걱정하지 않았다.
“영주님은 참 대단한 분이신 것 같군.”
휴식 시간에 문득 그런 말을 했다.
여러 공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기에 휴식 시간이면 모든 장인이 한자리에 모여 쉬고는 했다.
장인들은 딜런의 말에 입을 다물고 그를 보았다.
“어떤 영주가 노예에게 이런 대우를 해주겠나. 집, 밥, 옷 거기에 자유까지. 나는 항상 영주님께 감사하며 사네.”
“아, 그쪽인가.”
무두장이가 수염을 긁적이며 머쓱하게 웃음 지었다.
다른 장인들도 비슷한 반응을 했다.
“뭐어··· 정말 그런 점도 대단하시긴 하지.”
“난 그보다 어떻게 그런 기술을 가졌는지 모르겠어.”
“괜히 이 친구가 불카니스토스의 화신이라고 난리 쳤겠나.”
“이봐.”
불카니스토스.
영주를 찬양했더니 대뜸 기술의 신이 튀어나왔다.
딜런이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자 한 장인이 도면을 집어왔다.
“영주님이 그린 걸세.”
“영주님이?”
양피지에 흑연으로 그린 도면은 비전문가가 그렸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내용이 자세하고 꼼꼼했다.
물품의 전체적인 형상, 물품을 구성하는 각 부품의 형상, 물품의 기능과 작동 원리 그리고 취급 방법에 이르기까지 모두 도면에 담아 두었다.
‘각각의 기능을 가진 쇳조각을 여러 개 붙여서 한 번에 여러 작업을 이루도록 한 건가.’
“선 자리에서 바로 쓱쓱 그리시더군.”
“허어···.”
“그리고 저게 그 완성품이야.”
도면에 있는 쟁기를 실물로 보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이렇게 효율적인 물건을 구상하다니 대단하다 싶었다.
“대단하군.”
“그리고 이걸 손수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셨지.”
딜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직접? 만드셨다고?”
설마, 싶었다.
평생 쇠를 만져온 그였기에 과장이려니 싶었다.
그러나 장인들의 눈은 진지했다.
“야장일만이 아니야. 무두질이건 석공예건··· 모두 영주님보다 한참 아래지. 우리 스승들도 영주님을 기술로 따라가지 못할 거야.”
“······.”
한 번의 인생에서 여러 개의 기술을 익히는 것이 가능한가?
취미나 견습의 수준이 아니라 장인 이상의 숙련도로 여럿을.
딜런은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다, 무언가 착각이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장인들이 농을 하는 것은 아니라 보았기에 침묵했다.
“내가 말했지. 불카니스토스가 깃드신 거라고!”
목수가 답답한 듯 무릎을 탁 치며 소리쳤다.
‘불카니스토스라···.’
그 누구보다 자신의 기술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 장인.
장인이 다른 이를 가리켜 불카니스토스의 화신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정말 인정 안 할 수 없는 뛰어난 재능이란 소리다.
‘영주님은 인간이실 텐데.’
딜런은 올리머스의 영주를 존경했다.
그와 마야를 지옥에서 구하신 은인.
자신들에게 무상의 베풂을 주시는 자비로운 분.
그러나 신으로 추앙할 정도는 아니었다.
‘인간이 신이라니.’
하지만 불현듯 그런 생각도 들었다.
신이 있다면 차라리 영주가 신이기를 바란다고.
호르비드니 불카니스토스니 그에게 단 한 번의 도움도 주지 않은 신은 믿을 수 없었으니까.
‘벌써 시간인가.’
어느덧 노을이 지고 있었다.
공구를 정리하고 마야를 데리러 갔다.
조금 일찍 도착한 탓에 창고는 아직 문이 닫혀 있었다.
딜런은 밖에서 기다리다가 안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
대도시에서 도제로 지낼 적에 매일 듣던 곡조.
하지만 올리머스에서는 들을 수 없던 곡조였다.
‘성가···?’
살짝 문을 열고 안을 보았다.
맨 먼저 보인 것은 단상, 그 위에 홀로 서 있는 라헬이었다.
라헬이 가녀린 목소리로 성가를 불렀다.
‘······.’
단상 앞에는 사람들이 눕거나 앉아 있었다.
모두 마야와 같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
멍한 표정으로 라헬을 올려다보거나 성가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마야···.’
마야는 맨 앞줄에 있었다.
인대가 끊어졌기에 무릎 꿇고 선 그녀.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성가를 따라 불렀다.
아니, 따라 부르려고 애쓴다는 말이 옳으리라.
“아··· 우, 우아···!”
나오는 것은 옹알이였지, 성가가 아니었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네.”
돌아보니 키슬러가 서 있었다.
“놀란 것 같군.”
“조금··· 자네는 알고 있었나.”
키슬러는 뭘? 이라고 묻는 대신 미소를 지었다.
“내가 부탁드렸지.”
“괜찮은 건가? 호르비드를 믿는 게 아닌 것 같은데.”
또한 불카니스토스를 찬양하지도 않았다.
제르마니아와 왈로키아가 국교로 삼는 호르비드 교.
호르비드가 이단이 아니라고 인정한 신은 몇 없었다.
“이단으로 지정될 수 있어.”
“자네가 이단을 걱정할 줄은 몰랐는데.”
“내가 아니라 자네가···.”
“호르비드의 수도사였다고?”
키슬러는 씁쓸한 표정으로 한때는, 이라고 중얼거렸다.
“인간은 섬기거나 섬기지 않거나. 그리고 섬긴다면 인간을 섬겨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네.”
“······.”
그 독실했던 친구가 맞나 싶어서 딜런은 입을 벌렸다.
“자네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보는군. 자네가 원한다면 마야는 따로 분리하도록 하겠네. 돌보는 것은 똑같지만 예배에 참석시키지는 않을 거야.”
키슬러의 제안에 딜런은 마야를 보았다.
되지도 않는 발음을 꼬아가며 성가를 부르려는 모습.
여느 때보다 밝은 웃음을 띠는 모습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신은 우리에게 관심조차 없을 것을.’
성가가 끝나고 마야를 데려오면 라헬이 따라 나왔다.
“부인이 많이 나아지셨어요.”
“그렇습니까?”
“예.”
라헬은 옷깃으로 마야가 흘리는 콧물을 닦아 주었다.
여전히 이지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마야가 나을 수 있을까요?”
“그럼요.”
마야가 배시시 웃고 라헬은 따라 웃으며 답했다.
“부인은 머리를 다친 게 아니에요. 마음을 다친 것이죠. 겪은 일이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그것을 떠올리면 견딜 자신이 도저히 없어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옳고 그름도 따지지 않는 순수한 시절로 돌아간 거죠.”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겠습니까?”
“기다려야 합니다. 시간이 망각을 불러와 고통을 잊을 때까지.”
실망한 딜런에게 라헬이 덧붙였다.
“아니면, 더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죠.”
그게 가능할까?
딜런은 목젖 아래 걸린 말을 삼켰다.
“아버지가 말씀하셨지요.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인간은 부서질 순 있어도 패배하진 않는다고요.”
아버지는 올리머스의 영주를 말하는 것이겠지.
딜런은 그에 대해 생각하다가 소문을 떠올렸다.
– 영주의 가신은 인간이 아니다.
영주가 신의 화신이 아닌가, 하는 소문과 맞물려서 가신도 인간이 아니라 신의 사도가 아닌가, 하는 소문이었다.
마침 외모로는 나이 차이가 없는 라헬이 영주를 아버지라 부르자 묘하게도 그 소문이 기억났다.
‘설마.’
“그나저나, 오늘은 아버님이 오실 것 같네요.”
영주님이?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인가?
딜런은 갸웃했지만, 라헬은 싱긋 웃을 뿐이었다.
라헬이 돌아간 뒤에 딜런은 마야를 안았다.
요새 부쩍 살이 찐 그녀는 예전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얼굴의 흉터는 그대로였지만, 머리카락이 조금 자랐다.
칭얼거림도 줄었고, 밤을 설치지도 않았다.
“우아!”
‘정말 시간이 해결해주는 건가.’
하지만 마야가 이지를 보이는 모습은 없었다.
그녀의 마음에서 악몽이 흐릿해지고 상처는 아물어가지만, 스스로 일어서고 이지를 되찾으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마야, 자?”
평소였다면 그의 볼을 잡고 장난쳤을 그녀의 침묵에, 딜런은 혹시 자고 있나 싶어서 품을 내려다보았다.
마야는 자고 있지 않았다.
조용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딜런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가 보는 곳을 따라 보았다.
“노을이네. 아름답지?”
“응.”
유난히 아름다운 노을이었다.
지상은 해가 지며 까맣게 그림자 지고 있었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땅을 대신해 주황빛에 물들고 있었다.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 한숨을 쉬었다.
‘사람?’
노을 속에 사람이 있었다.
광야에서 말을 타고 있는 사람.
그 뒤로 빛을 받아 앞이 까맣게 그늘졌다.
– 오늘은 아버님이 오실 것 같네요.
딜런은 몸을 떨었다.
노을, 이제는 다 꺼져가는 불빛처럼 흐릿하게 일렁이던 그 주황빛이 까맣게 물든 광야에 날개를 펴듯 퍼지다가 지평선 너머로 수그러들었다.
“······!”
그것은 찰나였고 실체였는지도 모를 현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마음 한편에 거대한 흔적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마음에만 흔적은 남겨두지 않았다.
“딜런.”
딜런은 숨이 멈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이름을 또렷이 부른 아내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담긴 광기가 가라앉고 있었다.
광기가 떠난 자리에 이지가 돌아오고 있었다.
“해가···.”
해가 뜨는 것 같다고.
딜런은 그녀가 말을 마저 잇지 못해도 알았다.
그 또한 보고 있었으니까.
노을이 지고 찾아오는 저녁 아래 밝은 해가 뜨고 있었다.
해가 비록 실체가 아니고 마음이 만든 환상임을 알아도, 그의 존재가 빛이 되어 밤이 저를 두렵게 하지 못했으니.
딜런은 다시 행복을 느꼈다.
성벽을 올려라
‘이름이 딜런이었지.’
나는 올리머스의 들목에서 우두커니 있던 부부를 떠올렸다.
그 중 딜런이라는 남자를 내가 알아보는 이유는, 그가 바구쿠의 주둔지에서 몇 안 되는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장인이라서 대우가 최악은 아니었을 테고, 노예 생활이 길지 않았기에 정신이 무너지지 않았겠지.
나는 그가 미쳐버린 아내를 부둥켜안고 울던 모습을 기억했다.
‘정신을 차렸군.’
나를 올려다보던 그녀의 눈동자에 광기가 사라졌다.
광기 대신에 내게 익숙한 눈빛을 또렷이 보냈지.
‘신앙을 깨우쳤나.’
그 눈빛이 신앙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녀는 내게 신앙을 품었고, 그것이 그녀를 치유한 것이라.
현실의 잔혹함을 깨닫고 숨은 마음을 믿음으로 일으킨 것이다.
내 존재가 그녀의 두려움을 막아주리란 믿음에서.
‘너무 이른데.’
내가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매 회차 반복된 것이었다.
플레이어는 NPC와 전혀 다른 존재니까.
엔딩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업적이 남다를 수밖에 없지.
그런데 나는 아직 대평원의 일개 영주에 불과하지 않나?
이전 회차에서 칭송받기 시작하던 때와 비교하면 볼품없었다.
‘라헬··· 때문만은 아니겠군.’
그녀가 창고를 예배당으로 쓰고 있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예배당에 해방 노예들을 모아 보살피며 선교하는 것을 알았다.
‘믿음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지.’
한데, 벌써 나를 신앙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은,
‘격 때문인가.’
철인 특성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
[철인]당신은 마지막 업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장 나약한 자가 되었습니다.
당신의 위대한 의지는 이 땅의 어떤 존재보다 높은 격을 가집니다.
당신의 격은 상대가 누구든 당신이 평정을 유지하게 합니다.
정신 계열의 간섭에 면역이 됩니다.
레벨이 오르지 않습니다.
————————————
‘철인이라.’
철인이란 특성을 처음 보았을 때, 레벨이 오르지 않는다는 것과 정신 계열의 공격에 면역이라는 것에 주목했다.
그러다가 대의제에서 강자들의 압박을 간지럼보다 같잖게 받아들이는 상황을 겪으며 평정이란 효과에 주목했고, 라에라곤이나 블라드, 고타바가 내 허세에 넘어가는 것을 보고 격이란 것의 진가를 깨달았다.
대의제가 내 입담에 쉬이 놀아날 족속인가? 아니다.
키슬러나 딜런 같은 이들이 곧장 내게 신앙을 품은 것도.
나는 볼 수 없는 철인 특성의 영향 탓이 분명했다.
그리고 내가 볼 수 없는 영향은··· 격 밖에 없었다.
‘생각 이상으로 효과가 크다.’
고작 레벨 1이 절대 강자들을 압박하고, 다른 신을 믿던 수도사에게 감응을 주어 자발적으로 개종시키는 것까지 격이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겠지.
“내키지 않으십니까?”
내 옆을 따라 걷던 칼리오페가 물었다.
격이라는 포장에 대한 나의 사념을 읽은 것이라.
“글쎄.”
방금 내가 격을 포장이라고 비유했는데, 다른 말로 허세다.
내 본질은 한낱 인간에 불과한데, 남들 앞에서는 강자인 것처럼 신인 것처럼 허세 부리는 것이지 않나.
천성 사기꾼이 아니고서야 기쁘지 않지.
‘사기꾼은 맞다만.’
대의제에서 저지른 허세를 떠올리고 싱거운 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사기꾼이 된다면 위대한 사기꾼이 되어 주지. 그깟 신 노릇도. 나에 대한 믿음이 인간을 강하게 만든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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