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ilding a human empire by creating a clan RAW novel - Chapter (50)
권속 생성으로 인류 제국 건설 52화(52/185)
###
“다 등신들뿐이야.”
귀빈실을 나온 후고 차이켄은 욕지거리를 뱉었다.
으드득으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복도에 퍼졌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것들이···.”
그 드센 성질에 벽 앞에 선 경비병들이 움찔했다.
혹여 시선이 마주칠까 봐 시선을 피했다.
‘한참 전에 처리했어야 하는 것을··· 돼지 새끼들이 꿈지럭거린 탓에 인제야 출진도 아닌 출석 명령을 내리다니.’
가슴이 답답해서 꽉 쥔 주먹으로 치고 싶었다.
귀족들은 북부를 점거한 외지인을 그저 애송이로 여겼다.
그러나 후고는 애송이가 무시무시한 녀석이란 것을 잘 알았다.
후고에게 다른 대귀족에게 없는 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인님께 얼른 보고해야겠군.’
목덜미를 벅벅 긁었다.
상처 하나 없는데도 목덜미가 욱신욱신했다.
수 년 전에 그 자리에 두 개의 구멍이 있었다.
뾰족한 송곳니에 물려 피를 빨리고 피를 주입 당한 흔적이.
그때, 후고 차이켄은 수 년 전에 흡혈귀의 종복이 되었다.
‘행동이 너무 늦어서 성을 내실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처음부터 오크는 허세고 놈이 서드렛의 장남이란 것을 밝힐 수도 없었으니까.’
대귀족은 탐욕스러워도 멍청이는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의심이 풀릴 때까지 물어 뜯었다.
자신이 모르는 정보를 쥐고 있다면 그 이유를 물을 것이었다.
서드렛의 장남이란 것을 밝혔을 때도 눈을 번뜩이지 않았나.
그나마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라 별 말 없었을 뿐이지.
‘그 늙은이도 그걸 아니까 내가 말한 뒤에야 패를 꺼낸 거겠고.’
기껏 만들었던 판을 무너뜨린 노인, 마젠킨 공작.
그들 중에서 가장 연로하지만 그만큼 존경 받는 대귀족.
다른 대귀족도 노인의 말은 쉬이 무시하지 않았다.
‘존경은 개뿔. 제르마니아에 빌붙었던 배신자가.’
블라드의 혈족으로부터 들은 사실이었다.
마젠킨 공작은 제 이득을 위해 기밀을 적국에 넘겼다.
6년 전에 제르마니아에게 패한 결정적인 원인이 그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넓힌 영지로 우리 중에 우두머리 행세를 하고 있는 주제에. 감히 혈족의 비호를 받는 나를 무시해?’
이가 갈렸다.
‘두고 보자고. 어르신이 이 땅에 당도하시는 날에 너희가 내 발아래서 목숨을 구걸하게 될 테니.’
후고는 왕궁 정문을 앞에 두고 걸음을 멈추었다.
햇볕이 살갗을 태울 듯이 쨍쨍하게 내렸다.
조심스럽게 맨손을 햇볕을 향해 뻗었다.
햇볕에 손이 닿자 극심한 고통이 일었다.
“망할···.”
화들짝 손을 뺐다.
손은 녹거나 불타거나 익지도 않았다.
햇볕에 닿기 전과 비교해 다르지 않았다.
극심한 고통은 정신이 일으킨 착각이었다.
그러나 이를 알면서도 후고는 고통을 지울 수 없었다.
혈족의 종복이 된 이래 그가 가지게 된 저주였으니까.
– 그 인간을 죽인다면, 아버지께 말씀드리겠다. 네게 피를 내리도록, 네가 종복이 아니라 혈족으로 되도록. 혈족이 된다면 아침이 되어도 밖이 두렵지 않으리라.
그의 주인이 전했던 말.
이를 떠올리며 장갑을 꼈다.
‘일단··· 놈을 어떻게 죽일지 생각하자. 어르신이 오시려면 방해꾼은 모조리 쳐내야지. 애송이 놈. 어르신께 무슨 죄를 저질러 밉보였는지는 몰라도 혈족이 선고한 이상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거다.’
죄악의 도시, 소도모라
###
“덥네. 더워.”
파시메아가 투덜거렸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제 여름이지 않느냐.”
나는 그녀가 어깨에 걸치고 있던 천을 받아 들면서 말했다.
그녀는 후우, 길게 숨을 내쉬고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올리머스는 시원했잖아.”
“지역마다 온도 차이는 어쩔 수 없지.”
그나마 한여름이 아니라 다행으로 여겨야 할 터.
한여름의 남부 왈로키아는 정말 무덥다는 말도 모자랐다.
겨울이 없다시피 한 곳이라 계절로 인한 휴경도 없는 곳이고.
오로코 대평원 못지않게 축복받은 땅이었다.
“하, 그나마 일찍 와서 다행이라니.”
파시메아는 가죽 주머니를 입에 대고 기울였다.
그러다 곧 진한 가죽 냄새에 으엑, 인상을 찌푸렸다.
조신하지 못하게 입 밖으로 주룩 물을 흘렸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소매로 그녀의 입술을 닦았다.
“엄살이 심하구나. 공방은 여기보다 덥지 않더냐.”
내 지적에 파시메아는 팔꿈치로 옆구리를 찔렀다.
“그건 그거. 이건 이거. 아무튼, 얼른 쉬고 싶다고.”
“······.”
칼리오페가 물끄러미 파시메아를 보았다.
언제나처럼 감정 한 점 읽히지 않는 무표정.
그러나 사념이 꽤 무섭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녀 나름으로 경고를 표하는 것이라.
“뭐.”
파시메아는 코웃음 치면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신경전을 보면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파시메아가 칭얼대고 틱틱대는 것은 의도된 연기였다.
내 관심을 갈구해서 연기하는 것임을 나는 사념으로 알았다.
칼리오페는 그것이 영 내키지 않아서 저리 견제하는 것이고.
‘권속들은 전부 애 같군.’
그리프, 게하르드도 그렇고.
“조금만 참거라. 이곳에 그리 오래 있지 않을 테니.”
“오래 있지 않는다고? 얼마나?”
“늦으면 며칠 빠르면 오늘.”
나는 뭐? 라고 묻는 파시메아를 무시하고 앞을 보았다.
왈로키아의 수도, 소도모라 남쪽 성문.
성문을 오가는 이들이 두 줄로 길게 늘어섰다.
경비병이 검문하는 것이 아닌데도 유난히 정체가 심했다.
듣자 하니 근래 반란으로 인해서 서쪽과 북쪽이 봉쇄된 탓이라.
성문이 수리되는 동안 남은 두 문으로 인파가 몰렸단다.
“반란이 꽤 컸나 보네? 수도까지 피해를 볼 정도면.”
그렇겠지, 내란이 끝났다고 용병의 몸값이 확 떨어지지 않았나.
반값도 안 되는 몸값을 받으려고 북부로 몰린 용병이 2만 명.
오지 않은 이들은 그 몇 배는 될 터이니 규모가 짐작 갔다.
“왈로키아, 라는 나라의 한계다.”
“그래?”
갸웃하며 이유를 묻는 파시메아에게 답을 말했다.
“왈로키아는 영주들의 연합체. 왕은 영주 중에서 가장 강한 인간에 불과하느니라. 왕이 약해지면 왕이 되려는 영주가 도전하는 것이 당연해. 이번 내란이 반란으로 불리는 것으로 보아 아직은 왕가가 자리를 지킨 것 같구나.”
왈로키아 왕국의 현 왕가는 쿠스로르프.
왈로키아의 제 3왕조이며 치세는 200년도 안 된다.
플레이 시점이 되면 사실상 제 4왕조가 들어선다.
아직은 그때가 오지 않았기에 간신히 숨은 붙어있지만.
“흐응. 우릴 부른 게 왕가 아니었어?”
“명목상 그렇지.”
“명목상? 그럼 실제로는?”
“왈로키아 귀족 의회의 명령이다.”
왈로키아 귀족 의회.
왈로키아 전역의 유력 귀족 133명으로 구성되는 통치 기구.
왈로키아는 왕정제 국가였지만 의회의 힘이 왕보다 강했다.
왕을 선출하는 권한만 없을 뿐, 그 외 모든 것을 가진 기구였다.
왕조차도 의회의 승인 없이 법률을 통과시킬 수 없었다.
“전쟁 선포, 특별세 심의, 장관 선출··· 모두 의회의 특권이지.”
“그 정도면 왕이 없어도 되지 않아?”
“극단적으로 보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나라다.”
처음부터 이렇게 왕권이 약한 나라는 아니었다.
귀족 의회의 시작은 왕권을 뒷받침하기 위한 통치 기구였다.
그러나 몇 대에 걸쳐서 무능하지만 야심은 많은 왕이 즉위했다.
‘왕이 무능하면 때때로 귀족에게 엎어지는 법이지.’
그렇게 왕조가 두 번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귀족의 힘은 강해지고 의회는 왕을 압도했다.
“귀족의 힘이 너무 강해진 탓에 한 명 한 명이 절대적인 힘을 갖게 되었다. 귀족 의회가 다수결이 아니라 만장일치제인 이유가 그것을 증명하느니라.”
“만장일치?”
“133명 중 단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안건은 통과되지 않아. 마찬가지로 기존의 법을 수정하는 것조차 133명의 동의가 필요하고.”
이 만장일치제 덕분에 귀족들은 왕이나 의회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독립을 강화할 수 있었지만, 그 대가는 국가가 치렀다.
“이런 나라는 뭐가 문제일 것 같더냐?”
“단합이 안 될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133명의 귀족 중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전쟁 선포를 할 수 없고, 특별세도 걷을 수 없고, 장관조차 세울 수 없다. 작은 마을의 주민들도 각기 말이 다른데, 통치자 133명이 한 소리를 내는 것이 쉽겠느냐?”
쉬울 리가 없다.
“왈로키아 귀족 의회는 그렇게 흘러간다. 그래서 내가 북부를 점거했는데도 몇 달이나 지체하다가 기껏 내린 것이 출석 명령이지.”
출석 명령은 귀족 의회에 안건이 상정되면 내려지는 것.
그리고 안건을 상정하는 것은 귀족 중에서도 귀족인 자들.
내 기억으로 그 특권을 가진 귀족은 일곱 명이었고, 대귀족 혹은 최고위 귀족이란 이명으로 불렸다.
작금에 그들 대귀족이 북부 왈로키아나 내게 관심을 가질만한 사안은 몇 없었다.
‘따라서 안건 상정은 굼뜰 수밖에 없었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외지인이 국가의 영토를 점유한 것이 아니냐.
왜, 귀족들이 외지인에게 반발해서 저항하려 하지 않느냐고.
‘국가, 애국심, 그러한 관념이 희박한 시대니까.’
영주에게 국가란 계약 관계에 불과하다.
국가라는 틀 안에 속한 것이 아니라 왕과 영주가 계약한 관계.
왈로키아의 귀족이란 것은 왕과 의회의 봉신이라는 뜻이지.
국가에 충성하는 신민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북부가 누구에게 먹히건 별 관심이 없었다.
북부와 직접 영지가 맞닿은 귀족이나, 내 출신을 아는 귀족이나, 대의제의 사주를 받아 적대하는 귀족이나 관심을 가지겠지.
그 외의 귀족들은 괜히 건드려서 세금 걷을 구실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뿐일 것이었다.
“정말 한심한 나라네.”
“하지만 무시해서는 안 된다.”
성문을 지나치자 높은 성벽에 가려있던 내부가 드러났다.
“왈로키아는 제르마니아에 버금가는 강국이니라. 스스로 손발을 묶고 제 살을 파먹고 있어도 규모만큼은 인류의 두 번째 국가다.”
“흐응.”
파시메아는 도시 경관을 보며 고개를 주억였다.
성문에서 왕궁까지 직선으로 이어지는 크고 넓은 길.
마차 여럿이 지나가도 되는 넓이인데, 사람으로 꽉 찼다.
등짐을 맨 행상인, 빈 그릇을 든 동냥아치, 깃발을 흔드는 호객꾼, 거리 공연을 하는 연주가, 행인을 그리는 화가, 타락을 경고하는 성직자···
그리고 대로 옆은 목수, 대장장이, 무두장이 등 온갖 공방과 가판대에 얹은 길거리 음식, 조잡한 세공품 그리고 필경사와 점쟁이, 약제사들의 천막이 늘어졌다.
올리머스에서 볼 수 없는 번잡한 모습.
“이런 말 하기 뭐한데, 올리머스는 멀었네.”
파시메아의 중얼거림에 칼리오페가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혓바닥을 짧게 내밀고 시선을 피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긍정했다.
“고작 몇 달 전까지 백 명 남짓이었던 촌락과 수백 년간 개발한 도시가 비교된다면 어느 쪽이 문제겠느냐.”
“아, 그랬지.”
파시메아는 볼을 긁적였다.
“여기 정도면 인간 세상에서 얼마나 큰 거야?”
“도시 중에서는 열 번째쯤 되겠지.”
“열 번째? 국력은 두 번째라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르마니아엔 이런 도시가 몇 개 더 있다. 내 본가인 서드렛 공작의 본 영지도 이보다 커. 그리고 교국과 공화국 같은 도시 국가도 고려해야 하지 않겠느냐?”
“갈 길이 머네. 우리 올리머스는.”
“걱정할 것 없다.”
규모는 크지만 내실은 허접스러운 도시다.
대로를 조금만 벗어나면 오물 천지였다.
오물이 진흙탕을 만들 정도라 걷다 보면 무릎까지 젖을 정도.
‘그저 더럽기만 하다면 다행이지.’
건물은 무질서하게 지어져 건물과 건물 사이가 너무 가깝거나, 길 한 가운데에 건물이 들어서서 길이 뚝 끊기거나, 건물 자체가 부실해서 쉬이 무너졌다.
수십만이 사는 대도시답게 나름대로 하수 시설을 갖추고, 도시 개발을 계획하는 부서를 두고, 인부를 고용해서 미관을 정돈하기도 했지만, 행정이 그리 잘 돌아가지 않았다.
우습게도 이런 도시도 잠시나마 깔끔해지는 시기가 있는데, 전염병이 돌아서 인구가 급감하거나, 화재가 번져서 구역 몇 개가 날아간 뒤가 그때였다.
‘이런 꼴을 보지 않으려고 도시 계획을 짠 거다.’
올리머스에 부임하고 즉시 도시 계획을 짠 이유가 이것이었다.
도시란 인구만 있다면 내버려 두어도 자연스레 형성되는 것이지만, 그리되면 이토록 허접하고 불안한 모습으로 완성되니까.
고치는 것은 어렵고 돈도 시간도 많이 필요하다.
그러니 시작부터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야 하지.
‘도시를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미 많이 해봤던 일. 했던 일을 또 하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지. 그저 손이 많이 갈 뿐.’
그리고 내겐 권속이라는 손이 아주 많다.
내가 큰 그림을 그리면 권속들은 이를 능숙하게 처리했다.
짜악—!
나는 잡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들었다.
길 한편에 사내아이가 고꾸라져 있었다.
그 뒤로 덩치 큰 남자가 채찍을 들고 씩씩댔다.
“멍청한 새끼!”
짜악!
팔을 높이 들어서 채찍을 휘둘렀다.
아이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채찍은 연약한 등가죽을 때리고 살을 찢었다.
“아악!”
“오빠!”
움츠린 채 바들바들 떠는 아이에게 또래의 여아가 달려왔다.
들고 있던 광주리가 땅을 구르며 내용물이 쏟아졌다.
채찍을 든 남자가 이를 보고 목청을 높였다.
“이 년놈들이! 똑바로 안 해!”
채찍이 다시 날아들었다.
그 순간 사내아이가 여아를 감싸 채찍에 맞았다.
이미 찢어져 피가 철철 흐르는 상처 위에 채찍이 들러붙었다.
“———!”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소리조차 뱉지 못하는 비명.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앞으로 나섰다.
“이봐.”
얼굴이 붉어진 남자가 내 부름에 얼굴을 돌렸다.
한껏 성이 나서 콧김을 내뱉던 남자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뭐요?”
“얼마지?”
“뭐?”
멍청한 물음에 아이들을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얼마지?”
눈을 깜빡이던 남자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두 손을 펼쳤다.
“열두 닢. 아니. 열 닢에 팔겠소.”
“싸군.”
“요즘 풍년이라서.”
풍년이라.
노예로 전락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가리켜 풍년이라니.
나는 기가 막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칼리오페가 금화를 꺼내어 남자에게 넘겼다.
남자는 금화를 확인하다가 흠칫했다.
“···오로코 금화군.”
손에 쥐어 무게를 재고 이빨로 깨물어 보고는 탄성을 흘렸다.
조금 전까지 보였던 거만한 태도가 한껏 누그러들었다.
“귀하신 분이셨군요. 실례를 범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로코 금화는 금 함유량이 거의 100%.
파시메아의 화폐 주조 공방에서 불순물을 최대한 제외한 양화였다.
왈로키아에서 통용되는 금화가 3할에서 4할을 밑도니.
단순 가치로 따지자면 두 배 이상에 달하는 화폐였다.
나는 그의 태도 변화에 입꼬리를 올리며 여아를 가리켰다.
“저 아이도 같이 데려가지.”
상인은 고민 없이 바로 끄덕였다.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값은 더 받지 않겠습니다.”
파시메아가 빠른 걸음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사내아이가 피와 땀을 흘리면서도 힘겹게 그녀를 보았다.
눈에 서린 것은 고통과 그보다 큰 불안과 공포.
‘고통보다 강한 것이 제 주인의 분노이니.’
노예란 제 아픔보다 주인의 기분을 더 신경 써야 하므로.
아이들은 저 어린 나이에도 바뀐 주인의 눈치를 보는 것이라.
남자, 노예 상인이 금화를 만지작거리면서 히죽였다.
“혹시 더 살 생각이 있으십니까? 저런 반푼이 보다 훨씬 나은 물건이 많습니다.”
“음.”
“있다면 매일 저녁에 경매가 크게 열리니까 언제든 오십시오. 제 이름을 대면 좋은 자리를 마련해 드릴 겁니다.”
상인은 이름을 밝힌 뒤 떠나고 관중들도 하나둘 떠났다.
나는 파시메아가 상처를 살피고 있는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보살핌을 받으며 안도가 일었던 눈동자에 다시 불안이 어렸다.
굳었던 표정을 풀고 눈웃음을 지으며 무릎 한쪽을 굽혔다.
“무서워 할 것 없다. 너희를 벌하려는 것이 아니니.”
손을 뻗어서 사내아이의 이마에 얹었다.
그러자 오돌오돌 떨던 아이의 몸이 떨림을 멎었다.
아이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상처가···?”
파시메아가 중얼거렸다.
상처가 아주, 아주 조금씩 아물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력이 일으키는 치유와는 다른 신비였다.
나를 놀란 눈빛으로 보는 권속과 아이들에게 웃음을 지었다.
“믿음은 때로 영혼에게 영향을 준다고 하지. 아무래도 내 영혼으로 향하는 믿음이 생각보다 깊은 것 같구나.”
나는 손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아물던 상처가 어느 수준에서 회복을 멈추었다.
믿음이 현실을 바꾸기엔 현실이 너무 강한 것이라.
더는 낫게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손을 떼었다.
“이 도시에 사는 자가 수십만에 달한다. 그들 중 몇이 시민이고 몇이 노예인 줄 아느냐?”
절반.
도시에 있는 인간의 절반이 노예였다.
그리고 이들은 극빈층에도 속하지 않는 가축이었다.
인간이 이종족에게 가축으로 취급당하는 것처럼, 바구쿠의 주둔지에서 인간이 착취당한 것처럼, 이들의 삶은 같은 인간에게 가축으로 취급받으며 착취당하는 것이었다.
“손바닥을 다 채우지 못할 금화 몇 닢에 팔리는 인생. 그런 인생 수십만을 바닥에 깔아 부를 누리는 인간의 천국이 이곳, 죄악의 도시 소도모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