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culus of Joseon RAW novel - Chapter 251
251화 deus ex machina (2) (完)
민현준 선생님은 사실…… 제 새어머니의 전남편이었어요. 선생님께서도 민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고 계시죠?
제 새어머니와 민 선생님은 결혼 생활 내내 갈등이 많았던 모양이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이혼하셨죠.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새어머니는 제가 살아있는 동안 민현준 선생님에 대해 좋은 쪽으로만 말씀해주셨거든요. 재혼해서 남편이 전처 사이에 낳은 아들에게 자신의 전남편을 이야기해준다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제가 새어머니랑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고, 궁금하기도 해서 집요하게 물어봤었거든요.
“병진이 너처럼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무척이나 잘 했던 사람이야. 그 사람은 들어가기 힘든 학교를 나와서 교사를 하고 있어. 그뿐이겠어. 자기가 목표로 하는 바가 있으면 최선을 다해서 노력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그리고…….”
“그러면 어머니는 왜 이혼하셨어요?”
“…… 그건 내가 부족해서 그래.”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대화 자체가 영 새어머니와 아들의 대화는 아니었던 것 같네요. 갖은 모욕과 무시, 욕설, 폭력에 시달렸음에도 새어머니는 끝내 민현준 선생님을 좋게 말하셨죠. 지금 생각해도 새어머니가 왜 그러셨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제가 율근 과학고에 진학하려 했을 때,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반대하셨습니다. 그때는 그 이유를 몰랐어요. 알고 보니 민현준 선생님이 율근 과학고에서 재직했기 때문이더라고요.
어쨌든 저는 제 고집으로 율근 과학고에 입학했습니다. 다행히 제가 과학고에 입학했을 때는 이미 민현준 선생님이 구속된 뒤였고요.
물론 그때까지도 저는 민현준 선생님과 새어머니와의 관계를 몰랐어요. 민현준 선생님을 알게 된 건, 제가 죽고 난 뒤 영혼이 되어 학교에 드나들면서부터예요. 너무 유명인사더라고요. 그 사람이 제 새어머니와 관련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죠.
민현준 선생님에 대해 알고 나서 제가 느낀 감정이 뭔 줄 아세요? 분노? 아니에요. 연민이었어요. 새어머니에 대한 연민이요.
새어머니는 왜 자신의 전남편을 욕하지 않았을까요? 왜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만 돌렸을까요? 지금껏 모든 괴로움을 스스로 꾹꾹 눌러 삼키고 있는 새어머니가 그저 가련하고 불쌍해 보였어요.
새어머니가 왜 그러신 건지 그 이유를 지금도 알 수 없어요. 그렇지만 딱 한 가지. 새어머니는 자신의 전남편을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조금 더 억지스러운 추측을 하자면, 민현준 선생님도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냐고요? 새어머니의 그런 마음을 감히 짐작할 수 있는 날이 오게 되거든요.
저는 제가 죽은 뒤에 신에게 소원을 빌었어요. 제발 부탁이니, 다음 생에는 건강한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요.
그랬더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더라고요. ‘건강한 자’의 몸속으로 들어가게 해주겠다고요.
대신 조건이 있다고 했어요.
그 첫 번째가 선생님이었어요. 선생님을 황인규, 이명준, 정중덕, 위상현, 나경현 선배와 함께 조선 시대로 보내겠으니, 선생님을 필두로 나라를 구하라고요. 그리고 모든 결정은 선생님 ‘스스로’ 하도록 도와주라고요.
정기룡의 몸에 들어간 선생님은 저를 알아보시고 앞으로의 행동 방침에 대해 저와 한참이나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셨었죠. 그때 제가 신립 장군님을 따라가면 어떻겠냐고 물었잖아요. 그때 선생님은 잠시 고민하셨고, 제가 신립 장군님 곁으로 가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때 저는 짤막하게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었죠.
“상의하자고 하지 않았니?”
“네, 그랬죠.”
“어제부터 고민했다면서? 그러면 네 의견도 있겠네. 맞지?”
“물론 있죠.”
“그런데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니?”
“선생님 생각이 맞을 테니까요. 그리고 전 앞으로도 선생님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를 생각입니다.”
“왜? 혹시 내가 학교 선생이라 말하기가 부담스러워서? 그런 거라면 전혀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은 전쟁이야. 죽고 사는 문제라고! 계급장보다는 각자의 솔직한 의견이 더 중요한 시기야!”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러면?”
“그냥…… 선생님은 특별한 분이시잖아요. 그러니 선생님의 결정을 신뢰하는 겁니다.”
선생님을 존경했던 마음도 있었지만…….
사실 제가 말한 선생님의 ‘특별함’ 속에는 신에 대한 조건이 깔려있던 거예요.
신립 장군님을 어찌할 건지만 물었던 건데, 선생님은 제 예상대로 곧바로 행동방침을 정하시더라고요. 실상 신의 첫 번째 조건은 거의 있으나마나한 것이었어요.
물론……, 선생님이 추풍령 전투 이후에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거동이 힘드셨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조금 느슨해져서 문제였지만요. 당시에서 선생님은 저를 지리산으로 보내 무기를 연구하게 하셨지요.
여기로 오게 되면서 선생님께서는 많은 규칙을 깨달으셨지만, 아무래도 민현준 선생님의 존재를 영 모르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지리산에서 제가 편지를 보냈던 거예요. 일본군 중에도 현대에서 넘어온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고요.
신이 제게 제시한 두 번째 조건은 황인규, 이명준, 정중덕, 위상현, 나경현 선배와 함께 선생님을 이 나라 왕으로 만들라는 것이었어요. 이때 신은 제게 선생님을 왕으로 만드는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관망하라고만 하셨죠.
제 나름 이 부분을 상당히 고민했던 부분이었는데, 마침 이명준 선배, 그러니까 김세빈 형님이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주더라고요. 민현준, 쿠리야마 토시야스와 처음으로 만나기 전(당시에 선생님은 그 정체를 모르고 계셨지만), 일본 척후를 돌려보내면서 저와 선생님, 세빈 형님이 나란히 걸어오던 날 기억해요?
세빈 형님은 이미 그때부터 선생님을 왕으로 만들 생각을 했던 모양이더라고요. 하지만 세빈 형님은 방법을 전혀 모르기도 하거니와, 정밀한 계획을 짜는 것에도 다소 어려움을 느꼈던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세빈 형님도 현대에서 이쪽으로 넘어오기 직전 나이나, 지금 여기에서의 나이나 비슷하잖아요? 아직은 사회 경험이 충분치 못한 다소 어린 나이였기도 하고, 성격상 장대한 계획을 구상하기에는 역부족임을 스스로도 알았겠죠. 물론 정승이 된 지금이야 다르겠지만.
아무튼 ‘왕’이란 호칭은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그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니 신이 제게 내건 두 번째 조건도 클리어한 셈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조건은 누군가 다른 한 사람을 조선으로 데려가는 것이었어요. 처음에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그렇지만 그것이 민현준 선생님을 말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죠. 제가 온전히 ‘환생트럭’으로 이 시대에 보낸 사람은 민현준 선생님이 유일합니다.
그런데…… 이상하잖아요. 왜 갑자기 민현준 선생님을 이쪽으로 보내나요? 그것도 일본군으로?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새어머니의 소원이더라고요.
새어머니는 왜 민현준 선생님을 다시 태어나게 해달라고 했을까요? 저는 그것이 무슨 동화책에 나오는 것처럼 악인에게 시련을 주어 선인을 만드는 것으로 이해했죠. 그것이 새어머니의 전남편에 대한 소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새어머니가 전남편인 민현준 선생님을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지요. 물론 결과는……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요. 씁쓸한 현실입니다.
민현준 선생님이 하도 요리조리 잘 피해 다닌 덕분에 잡아내기가 무척이나 어려웠었죠. 결국 제 손에 잡혔지만요.
새어머니에 대한 제 짐작이 확실치도 않고, 새어머니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민현준 선생님이 일본군에 속해있던 탓에 전쟁이 쉽지 않았던 것만은 확실해요.
아무튼…….
민현준 선생님이 이쪽 세계로 오는 바람에 원래는 행복한 기억만 갖고 있어야 할 선생님과 황인규, 이명준, 정중덕, 위상현, 나경현 선배가 모두 민현준 선생님과 관련된 기억을 되찾게 된 거예요. 물론 슬프지 않은 기억이라 원래부터 민현준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었을지 모르지만요.
어쨌거나 이명준(김세빈), 정중덕(윤업) 선배가 민현준 선생님에 대한 모든 기억을 하나하나 간직하고 있던 것이었지요.
꽤 말이 길어졌는데,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보인 문제가 뭐냐고요?
그건…… 환생한 소희 선배가 또 다시 죽고, 그 모습이 전생의 모습과 매우 흡사 하자, 선생님께서는 간헐적으로 잃었던 기억을 되찾는 모습을 보이셨거든요.
그래서 살아생전에 수업했던 기억과 죽고 난 뒤에 수업했던 기억이 서로 교차되면서 헷갈려 하셨잖아요. 그때마다 혼절하시고도 했고요. 선생님은 활기찼던 수업했던 기억과 침울하게 수업했던 기억 사이에서 많이 혼란스러워하셨던 것 같아요.
이런 현상은 유독 선생님께만 나타났죠. 저는 그것이 소희 선배의 두 번째 죽음과 관련 있을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고요.
그리고 제게는 선생님께서 이런 혼란을 겪으시면 혹여 대의를 저버리진 않을까 많이 걱정했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더군요. 매번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만약 신이 내건 조건을 완수하지 않으면……, 저는 또 다시 아픈 사람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다행히 그럴 일은 없어졌네요.
그렇다면 조건을 완수할 경우, 무슨 특전이 주어지느냐 이건데…….
황인규(여대세), 이명준(김세빈) 선배는 당분간 정적이 없는 정적이 없는 정치인이 될 테고……. 정중덕(윤업) 선배는 원하던 대로 허준을 만나 의학 발전에 보탬이 되도록 활동할 테고……. 위상현(노함) 선배는 향후 거침없는 연구를 할 수 있을 테고요. 거기에 평생 단 한 번도 없었던 애인, 아내가 생겼고요. 나경현(최윤) 선배는 앞으로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고요. 선생님은 생전의 가족과 똑같이 생긴 아내와 아들을 얻으셨지요.
그럼 저는요? 음……. 저는 건강한 몸을 얻었고…….
다시 가족을 얻었어요. 무슨 말이냐고요?
민현준 선생님이 처형되셨을 때, 저는 조금 심장이 아팠거든요. 그때 신이 또 다시 귓가에 속삭였어요. 앞으로 이전 세계의 얼굴로 돌아갈 수 없다고요. 그러니까, 저는 추후 선생님과 다른 선배들과 다른 능력을 가질 수 없다고 했어요.
대신, 가족을 주겠다고 했지요. 그때 깨달았어요.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이전 세계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을요……. 그리고 두 분이 이 조선 땅 어딘가에 오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문제는…… 어디에 계신지 모르겠어요.
저는 두 분을 찾으러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전후 사정을 선생님께 말씀드리는 것이고요.
선생님! 저는 늘 선생님을 응원하겠습니다. 늘 감사했어요. ―
“…….”
장문의 편지를 읽고 난 뒤, 나는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이희춘에게 답장을 보낸 건, 며칠이나 지난 후였다.
― 희춘아, 아니 병진아.
네가 한 말들을 한동안 되새김질 하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네 말이 맞다. 난 너를 의심했었지.
체격에 맞지 않는 고강한 힘과 강인한 체력.
아무리 서울대를 나왔다지만(서울대 입학도 영혼이 된 이후였겠구나!), 사료를 하나하나 전부 기억해내는 비정상적인 기억력 까지.
무엇 하나 의심되지 않는 건 없었지. 하지만 나는 너를 나쁘게 생각한 적이 없단다. 네가 누구에게도 해를 입힌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나를 신뢰하는 것만큼은 확실했으니까.
어쩌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구나. 교사로 임용된 뒤, 내가 꿈꿔왔던 수업을 했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나는 만족한단다.
똑같이 생겼고, 비슷한 성격이라고 해서 같은 사람일 수 있겠냐만. 어쨌든 이전 세계의 아내와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만났다. 네 말대로라면 지금의 내 아들 영운이가 이전 세계에서의 아들 영운이와 똑같이 생기고 똑같은 성격이라는 건데……. 맞니?
어쨌거나 나는 그조차도 모두 만족한다. 이전 세계도 이전 세계지만, 지금 세계에서의 생활도 중요해. 나는 지금을 열심히 살아갈 생각이다.
그리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니 이전 세계의 아내와 아들은 잊어버려야 마땅하겠지. 그들도 나름대로 잘 살아갈 게야.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니까.
다른 녀석들도 구체적으로 어떠한 보상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나와 비슷하겠지. 녀석들도 각자의 삶이 있을 테니, 다들 만족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구나.
너도 마찬가지야. 네가 그토록 가족을 그리워했는지 나는 몰랐단다. 가끔은 나는 내가 참 무심하구나 싶을 때도 많아. 내가 과연 가까이 있던 너와 제대로 대화를 나눴던 적이나 있었는가 싶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오히려 내가 남에게 무심할 정도로 이기적인 놈일지도 모르지.
용기 내어 사실대로 말해줘서 고맙다. 나는 언제나 너를 응원한다. 꼭 가족을 찾아 행복하게 살길 기원한다.
현대에서 넘어온 분들을 찾는 일이니 마음껏 사람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겠지? 어서 두 분을 찾아 돌아오렴. 나는 늘 기다리고 있을게. ―
***
1605년 12월.
“이 나라의 안녕을 위해서는 저같이 각종 실무에 능한 자가 필요합니다!”
광화문 앞에서 김세빈은 그렇게 외쳤다. 이 자리에는 조정 대신들은 물론, 유생들과 일반 백성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다. 김세빈은 차기 총리로 자기만한 사람이 없음을 열심히 알리는 중이다.
일전에 배를 가라앉혀 댐을 만드는 치수 사업에 성공한 뒤로, 김세빈에 대한 역량이 돋보이기 시작했다. 그 뒤로 국내 정치계에 김세빈의 영향력은 상당해져 갔다. 그러더니 이근영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차기 총리 후보에 나선 것이다.
1590년대 말, 만력제의 시신이 발견됨으로써 중국과의 전쟁은 종결되었다. 계속된 도망자 생활에 지친 만력제의 수하들이 그를 죽이고 그 목을 정기룡에게 바쳤던 것이다.
그 뒤부터 정기룡과 그의 수하들은 한반도와 만주, 구(舊) 일본과 구 중국 대륙을 빠르게 안정화시키는 일에 매진했다. 민심 안정과 제도 정비는 물론, 각종 개발과 발전을 이루었다.
한반도에서부터 만주와 중국 대륙까지. 곳곳에 철길이 이어졌고, 그 위를 기관차가 달려갔다. 비료 공장이 건립된 뒤로 농업 생산력은 극대화되어져갔고, 방직공장이 만들어지면서 사람들은 그 파생 사업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 파생 사업이란 원재료와 생산된 물품을 운반하는 유통업, 다른 나라와 교류하는 무역업 등이었다.
“…… 일처리는 계통이 있어야 합니다. 하여…….”
그리고 그 일의 중심에는 여대세가 있었다.
이희춘이 정기룡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했듯이, 여대세와 김세빈은 별다른 정치공세를 받지 않고 쭉쭉 성장해 나갔다. 그들이 원래부터 소질이 있던 것인지, 아니면 이쪽 세계로 보낸 신이 내린 선물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윤업은 각지에 의료시설 확충에 힘썼다.
“제가 이전 세계에서 가장 불만이 뭐였는지 아십니까? 지역마다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정도가 다 다르다는 것이었어요. 이를 빈틈없이 메꿀 생각입니다.”
윤업은 의욕에 가득 차 있었다. 아마도 정기룡 일행 중에서 가장 바쁜 사람은 윤업인지도 모른다.
노함은 연일 실험으로 바빴다.
“평구야, 이걸 이렇게 하고…….”
“아하! 이런 방법도 있었군요.”
그는 정평구와 함께 비거에서 한참이나 높은 기술력을 요구하는 비행기를 만든다고 열을 올리고 있었다. 늘 그렇듯, 그들이 새로운 시도를 할 때면 한가득 웃음을 머금었다.
한편 정기룡은 이희춘과 아내 권씨와 함께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들은 여의도에 건립된,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인 ‘학술원’의 초대 상임위원이다. 그리고 정기룡은 초대 학술원장이 되었다.
그는 총리 임기를 마치는 즉시, 모든 사람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재임을 거절했다. 그리고는 학술원장이 되어 이공학 전파에 여생을 다 바치겠다고 했다.
“형님. 이대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이희춘은 무려 5년이나 헤맨 끝에, 이전 세계의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찾아냈다. 그들은 다행히 그동안 조용히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 뒤로 이희춘은 부모님을 모시고 정기룡에게로 돌아왔다.
“뭐를 말이더냐?”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고, 왕처럼 평생 군림할 수도 있었을 텐데, 다 버리고 학술원장으로 오셨잖아요. 이대로 괜찮으시겠냐고요.”
그 말에 정기룡은 빙긋 웃는다.
“내가 늘 하던 말 기억하니?”
“네?”
“내가 늘 소망하던 삶 말이다.”
그제야 이희춘은 정기룡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고는 자신도 정기룡과 같이 살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평범하게요?”
“그렇지. 무사, 무난, 무탈. 평범하게.”
경현아, 보고 싶구나.
네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날, 그 소식을 늦은 저녁에서야 간신히 들을 수 있었단다.
늘 장난기가 많았던 너였기에……, 소식을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지.
네 번호로 전화를 거니까 네 누나가 받으시더라. 누나가 네 부고 소식을 전하는데 잠시 멍해졌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지.
추석 바로 전날이라 어른들께 인사드리고 저녁을 먹던 중이었다. 식사 도중에 핸드폰을 만지지 않는데, 그날따라 만지고 싶더라. 카톡이 와 있기에 열어봤더니 네 부고소식이었어. 나는 다시 밥 먹으러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계속 울고 있었다.
아…… 2년 전쯤이었나. 간만에 모두 모이기로 했었잖아. 그렇게 계획까지 다 잡아놨었는데, 코로나 터져서 약속을 취소했잖니. 그 뒤로 계속 코로나로 만나지도 못했고.
그렇게 아프고 힘들었으면서, 왜 형이 간다고 했을 때 거절했었니? 코로나라도 네 병문안 정도는 갈 수 있었을 텐데…….
네 누나께서 네 핸드폰에 남아있는 전화번호가 5명이었다는 소리를 듣고 또한 멍해졌었다. 이미 죽음을 준비했었구나, 그래서 전화번호까지 전부 지워가며 정리하는 중이었구나 깨달았지.
장례식은 가까이 사는 중덕이만 갔다. 발상이 추석 당일이기도 했고, 코로나 때문에 집합 금지를 어길 수 없다고 판단했지. 명절 전날, 그것도 저녁에 갑작스럽게 소식을 접해 당황한 부분도 없잖아 있다.
장례식에 다녀온 중덕이가 그러더라. 경현이 네가 한우 사달라고 졸라댔던 것이 자꾸만 떠오른다고. 못 사줘서 미안하다고. 계속 눈물나고 믿어지지 않고 그랬다더라.
나도 마찬가지야. 네가 늘 그랬잖니. 코로나 끝나고 네가 몸 괜찮아지면 와서 오마카세인지 뭔지 사달라고. 이번에 처음으로 오마카세가 뭔지 검색해봤다. 그까짓 것이 뭐라고 그걸 못 사줬나 싶은 후회가 밀려오더라.
네 발상이 끝나고 누님께서 유골이 안치된 사진을 보내주셨어. 그걸 보고 한참이나 말이 나오지 않았고 며칠간이나 앓아누웠었다. 온몸이 불타는 통증에 일어설 수조차 없었지.
원고는 마저 쓰지 못했고, 이미 써놨거나 개요를 써놨던 것도 죄다 지웠다. 당연히 며칠이나 휴재를 해야만 했지.
왜 지웠냐고? 중덕이가 그러더라. 어쩌면 경현이 네가 내 소설 속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말이야. 도무지 원고가 써지지 않더라고.
이미 폐기한 원고 중, 200화의 에 너와의 대화를 넣으려고 했었지. 네가 그랬잖아. 아직도 쓰고 있었냐고. 중도 포기하지 않았었냐고.
애초에 즉흥적으로 시작한 소설이었잖니. 내가 무슨 재주가 있었겠어. 장르소설을 알지도 못했고, 더군다나 대체역사가 뭔지도 몰랐잖아.
읽어본 장르소설 하나 없이……, 아니, 활자로 된 소설은 22년 전에 읽은 삼국지연의가 마지막이었던 나였다.
타자가 하도 느려 생각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다보니, 한 문장을 쓰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생각이 바뀌어서 주어와 술어도 이상하고, 조사 사용도 어색했지.
트렌드는 알지도 못했고, 너한테 요즘 장르 소설에서는 반드시 회빙환이 들어간다고 들어서 그렇게 썼을 뿐이야.
비루한 문장력과 미천한 필력으로 꾸역꾸역 어떻게든 여기까지 왔다. 내 스스로 생각해도 참 무모한 일이었어.
기억나니? 너와 중덕이, 천남이가 무협지와 판타지 소설, 대체역사 가지고 토론을 했던 거. 그 날 내가 그랬잖아.
“그거 내가 한 번 써보지.”
하고 쓴 글이 이 소설의 프롤로그와 1화였잖아.
10화만 써야지 했던 것이 20화가 되었고, 20화만 써야지 했던 것이 50화가 되었고, 50화만 써야지 했던 것이 100화가 되었고, 100화만 써야지 했던 것이 200화를 넘겨 250화가 되었다.
“잘 해보슈.”
프롤로그와 1화를 한 번 읽어본 너는 내게 그리 말했지.
200화가 넘어갔을 때, “형! 완결되면 꼭 말해줘요. 읽어볼게요.”라고 말했잖니? 왜 그 약속 못 지켰니. 형 속상하게.
네가 떠난 날, 우리 모두 슬퍼했어. 꽉 막혀서 답이 없다던, 그래서 네가 좋아하지 않았던 병진이와 명준이, 혜성이, 민규가 가장 많이 슬퍼하더라.
당연히 나와 중덕이 말할 것도 없고, 상현이와 천남이는 계속 욕만 했었다. 명절이 지나고 나서야 소식을 들은 영운이 형과 성윤이 형, 인규도 어찌할 바를 몰라 했지.
한편으로는 작가가 되어버린 내게 무거운 책임감과 후회, 죄책감이 들기도 하다. 병상에 누워있던 네가 그나마 삶에 위안을 얻었던 것이 소설과 만화였다면서?
내가 쓰는 글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과연 내가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쓸 수 있을지, 써도 되는 것인지 염려스럽기도 하다.
어쨌거나 난 다시는 내 주변 사람들을 모티브로 글을 쓰지 않으련다.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거든.
경현아. 이제 저 세상에서는 아프지 않길 바란다. 형은 늘 네가 건강해지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해보련다.
***
안녕하세요. 율근입니다.
그동안 ‘조선을 미적분하다’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뭔가 글을 급하게 마무리 짓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합니다.
이 글에서 저는 제 주변 사람들의 성격과 말투를 그대로 가져와 사용했습니다. 심지어 민현준에 대한 부분도요.(민현준의 스펙과 호프집 사장 이야기는 실제 주변에서 있던 일이예요.)
그런데…… 2021년 9월 20일, 나경현(최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동안 아프다고만 했지, 정말 저리 급하게 세상을 떠날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습니다.
소설은 200화 즈음에 계획했던 분량보다 한참이나 일찍 종결하게 되었네요. 죽은 사람이 소설 속으로 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정중덕의 말에 함부로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힘들어졌습니다.
1. 후반부에 급작스러운 전개와 개연성 부족을 인정합니다. 완결에 목이 말라, 급하게 이야기를 전개했고, 그로 인한 구멍이 상당합니다. 그 부분은 인정하는 바이며, 독자님들께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어떤 물매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2. 당초에는 “소설 속에서 편미분을 풀고 있는, 아주 혐오스러운 글을 쓸 거야!”라고 기획했지만, 수식이 반영되지 않아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제목은 조선을 미적분하다인데, 미적분 부분이 다소 없었네요. 마지막 부분에 정말 재미없고 따분하게 느껴지실 수 있는 수학과 과학 이야기는 초반 기획을 수행하지 못한 제 한(恨)이었다고 너그럽게 받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3. 초반 부분에 거창에 진입하는 부분까지는 대부분 ‘매헌실기’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매헌실기 내용 자체가 여간 믿어지지 않는 내용으로 범벅되어 있었지요.
4. 장르소설을 읽어보지 않아 약점이 많았습니다. 특히 대체역사소설은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독자님들이 원하는 바를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제대로 성실하게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5. 정기룡의 무위 능력은 어느 정도 확실해 보입니다. 그것은 여러 사료에서도 확인됩니다. 특히 단기로 조경을 구해낸 일은 매헌실기 뿐 아니라 다른 사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정기룡은 통솔 능력에 있어서 다소 다른 부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전공을 세워도 일약 승진하던 시절에 실적에 비해(실기나 다른 기록이 사실이라면) 다소 늦게 승진합니다.
따라서 임란 초에 신창에 갔던 것도 군사를 통솔해 달려갔던 것이 아니라 척후장으로써 정찰만 하고 왔던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그렇다면 거창으로 8명만 갔던 것이 이해되지요.)
6. 초반 기획을 할 당시에 무협 설정을 넣을 것인지를 놓고 한참이나 고민했었습니다. 하지만 정기룡을 놓고 논하면서 무협 설정을 빼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보니 전투가 다소 길게 늘어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7. 조경에 대해서는 조금 더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임란 초에 의병이 일어난 곳은 대부분 영남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기적으로 처음부터 관군의 통솔을 받을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그 부분을 지금도 의문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에 작가로써 상상을 하자면, 조경이 서인과 관련(1591년에 정철을 우대해 준 일)되었기에 영남 쪽에 있던 동인들이 도와주지 않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합니다. 이는 소설 속에서 정인홍, 김면, 곽재우가 초반에 그러했던 것으로 표현했지요.
8. 마지막 회차 바로 전 회차에 ‘김소희’를 언급했는데, 이는 원래 기획 당시에 넣었던 설정이었습니다. 다만 역량 부족으로 어느 타이밍에 넣을지 몰라 못 넣었습니다.
애당초 조선으로 넘어온 회귀자를 더 넣으려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많았고 받았고, 그래서 그 수를 줄여 이렇게 7명으로 정해진 것입니다.
9. 프롤로그에 선생 최광호와 과학고 학생들의 대화는 십 몇 년 전에 우연히 과학고 학생들을 데리고 강의를 하러 갔던 제 경험을 쓴 겁니다. 당시에 정말 충격적이었죠.
10. 제가 이공계 출신이지만, 작게나마 역사 동호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의 등장인물은 그 동호회에서 만난 사람들의 성격과 이름을 차용하였습니다.
저와 독자님들 간에 못다 한 이야기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독자님들과 만나 정말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잊지 못할 겁니다.
차후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글로 보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