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1)
낭선기환담-0화(1/600)
낭선기환담 – 서장(序章)
백산 꼭대기.
그곳에 자리 잡은 거대한 동굴 속.
집채만 한 호랑이 하나가 엎드려 있었다.
[벌써 100년인가.]-백산의 산군이 된 것은 50년 정도지요.
고개를 주억이며 산삼 한 뿌리를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씁쓸하면서도 약간 단맛이 나는 게 간식거리로는 딱이었다.
-사냥꾼에게 쫓겨 숨넘어가던 게 엊그제 같은데 감회가 새롭습니다.
[시끄럽다.]산군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여인의 이죽거림을 무시하며 옛일을 회상했다.
뜬금없이 산해발산고(山海撥刪叩)란 소설을 보다 빠져든 세계.
뭐가 뭔지 몰라 어슬렁거리다 사냥꾼에게 죽을 뻔하고 지금까지.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100년을 살아왔고, 앞으로 그가 살아갈 세월은 아득했다.
그러나 그는 그게 그다지 싫지 않았다.
나름 한적하고, 근심거리 없이 백산의 산군으로 살아가는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나쁘지 않다.]-그렇지요. 저도 썩 나쁘지 않습니다.
피식 입 꼬리를 올린 산군은 못 들은 척 눈을 감았다.
* * *
상투머리에 초가집이 줄지어 이룬 마을의 저잣거리.
“이보게, 오늘이 ‘그 날’이라면서?”
막걸리를 내려놓은 사내.
누가 들을까 소근소근 말하는 장씨가 연신 눈치를 보며 속삭였다.
젓가락으로 전을 짚으려던 김씨가 눈동자를 굴렸다.
입을 쩌억 벌려 빛깔 좋은 전 하나를 쏙 넣고 말했다.
“크흠…. 오늘 밤이라더군. 그……. 백지자댁 노비 하나가 있지 않은가. 새파랗게 어린년이 머리는 허옇고 눈은 푸른 귀신같은 년.”
백지자.
백마을에서 최고의 부자로 통하는 백지자댁.
이 마을에 사는 사람은 모를 수가 없는 집안이다. 몇 년 전 그 집안에는 노비가 새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 생김새가 하도 기이하여 많은 이들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했다.
백발에 푸른 눈.
귀신과도 같은 생김새에 모두가 치를 떨며 그 노비 곁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쯧쯧. 그 어린 것이…….”
“어쩔 수 있나. 요전번에 천지에 다툴 자가 없다던 사냥꾼이 산군에게 당하지 않았나. 아주 비참하게 명을 달리했더군.”
생각만해도 오금이 저리는 듯 뾰족한 수염을 기른 사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웬만한 초가집 정도로 커다란 대호.
백산을 주름잡고 있는 엄청난 크기의 범이 산군이었다.
몇몇 호승심 강한 사냥꾼들과 무인들이 백산으로 기세 좋게 올라갔건만 멀쩡히 살아 돌아온 이는 없었다.
산군의 화만 돋궜을 뿐.
“백마을이 먼저 사냥꾼으로 산군의 심기를 거슬렀으니…… 쯧쯧, 애꿎은 아이만 죽어나가겠구나.”
“그러게 말일세, 어디 사람 욕심으로 백산을 뒤엎어버리려 한단 말인가. 난 오히려 산군님이 떡 하니 자리 잡고 있어 다행이라 보네!”
“뭐… 그건 그렇네만……. 크흠, 그렇다 해도 ‘산 제물’은 조금…….”
그때, 곁을 지나던 선비 하나가 크게 노하며 끼어들었다.
“어허! 어디 산 제물인가! 말조심하시게!”
“아, 아이고 백지자댁 도련님 아니십니까!”
화들짝 놀란 사내 둘이 벌떡 일어나 허리를 접고 인사했다.
백지자의 아들, 백지종은 기분이 몹시 언짢다는 듯 ‘크흠!’ 기침을 했다.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았으면 하는군. 그 아이는 백산의 주인에게 시집가는 것뿐이야. 한번만 더 ‘산 제물’ 소리가 나오면 내 경을 칠 테니 그리 알게!”
장씨와 김씨는 백지종이 갈 때까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주모가 눈치를 주자 그제야 굽혔던 허리를 피며 자리에 앉았다.
“옘병, 저놈이지?”
“백도련님이 사냥꾼으로 산군을 노하게 만들어 큰 피해를 입었다지. 그렇기에 산제…… 아니, 시집 보내는 게 아닌가.”
“방귀 뀐 놈이 성 낸다더니 지랄은 하이고.”
김씨와 장씨는 한참이나 막걸리를 부어라 마셔라하며, 백씨 집안을 안주거리 삼아 연신 씹어댔다.
오늘 밤 산군에게 시집갈 아이의 명복도 빌면서.
* * *
어느덧 해가 달에게 자리를 비켜 주고 푸르스름한 어둠이 천지에 깔렸다.
“가자꾸나.”
몸과 얼굴을 소복과 천으로 가린 작은 아이가 꽃신을 신고 길을 나섰다.
연신 두 손을 꼼지락거리는 작은 아이.
그 고사리 같은 손은 험한 일을 해서인지 여기저기 갈라지고 굳은살이 박혀있었다.
“뭐하느냐 어서 가자니까!”
“예, 예!”
고운 천으로 얼굴을 가린 아이는 사내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빨빨거리며 뛰어갔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화려한 꽃가마에 올라탄 소녀. 말 없이 그것을 들어 올리는 사내들.
서로 이질적이기 그지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누구 하나 들여다보지 않고 쥐죽은 듯 조용했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호랑이에게 시집가는 것이 그 ‘귀신같은’ 아이라는 것을.
덜컥.
그때 꽃가마가 멈춰서고,
장정들이 꽃가마를 놓자마자 번개처럼 산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흰 소복의 계집아이는 떨리는 몸을 제 손으로 툭툭 두들겨 진정시켰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눈먼 짐승에게 물려가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 어서 빨리 산군의 곁으로 가야 했다.
그리 생각하고 고개를 드니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동굴 하나가 아이를 반겼다.
암벽으로 이루어졌지만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은 아닌 듯 했다.
이 정도라면 호랑이가 아니라 용이 살아도 될 것 같았다.
“진짜 크다아…….”
경이로운 동굴의 크기에 입을 벌리고 감탄하던 계집은 ‘아이코!’ 하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제 곧 산군님을 만날 텐데 이런 멍청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자신은 산군의 신부가 될 사람이다.
그가 노하지 않도록 행동거지를 바르게 해야 한다. 그것으로 마을에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고 들었다.
계집은 두 손을 불끈 쥐고 성큼성큼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한발짝 내딛기 무섭게 무분별한 두려움이 가슴에 피어났다.
“으으……”
두려웠다.
어린 계집이 견디기에 동굴 속의 어둠은 칠흑처럼 너무나 짙었다.
어둠 속에 삼켜진 채 이대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다.
푸른색 눈동자에 이슬이 맺히고 울컥울컥 가슴이 벌렁거렸다.
그때.
짙은 어둠 속에서 심장을 울리는 목소리가 날아왔다.
동굴 전체를 울리는 낮고 낮은 목소리.
웬만한 사내가 들었어도 진즉에 실금해버릴 만한 음성이었다.
꼴깍.
계집은 떨리는 몸을 지탱하지 못하는 듯 털썩! 무릎을 꿇었다.
흰 소복의 계집이 머리에 덮은 천을 벗어 던졌다.
계집의 이질적인 푸른 눈이 어둠 속에 번득이는 붉은 눈을 바라봤다.
“사, 산군님을 지아비로 섬기려 시집 온 초아에여!! 서, 서……서방님!!”
서방님?
몸을 웅크리고 있던 산군이 머리를 갸우뚱하며 일어났다.
그 몸집은 실로 거대해서 엄청나게 크게 보였던 동굴이 비좁아 보일 정도.
쿵.
쿵.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거대한 앞발에 의해 동굴이 얕게 진동했다.
이윽고 달빛이 비추는 곳까지 모습을 드러낸 산군. 물끄러미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계집을 내려다봤다.
백발 벽안.
흔치 않은 생김새였다.
자신을 초아라고 말한 소녀는 높게 봐줘도 7살을 넘길까 말까한 어린 소녀였다. 산군이 한입에 삼켜버릴 만큼 작고 작은 여자아이.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라만 보고 있어서일까. 소녀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두 팔을 벌리며 소리쳤다.
“서, 서방님! 져를 잡수셔요!!”
두 눈을 꼬옥 감고.
“아, 아픈 건 싫으니까…… 될 수 있으면 사, 살살…… 언니들이 그랬서요! 처, 처음에는 아프다고! 신부가 대려면 참아야 한대요!”
[…….]이것이 백산을 주름잡는 대호(大虎) 산군과 그 산제물의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