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135)
낭선기환담-134화(135/600)
낭선기환담 – 134화
그야말로 무아지경이었다.
사형들이 변한 네 개의 검은 산군의 몸속으로 침투했다.
그들이 수행한 세월, 검술의 대한 묘리, 그리고 생전의 기억.
모든 것이 머릿속에 뒤섞여 뒤죽박죽으로 뒤엉켰다.
-어렸을 적 마을에서 총명함을 타고났으나 곤륜파의 권력 다툼에서 퇴출당하고 백년해로를 약속한 여인까지 동문에게 빼앗겼다. 수월문은 내가 알지 못하는 비밀을 감추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 또한 문파의 의지.
“크으으으으르르륵.”
잘 만들어진 거미줄을 막대기로 휘저어 뭉쳐놓는 것처럼 기괴한 감각. 산군의 눈이 뒤집히고 입가에 선혈이 주르륵 흘렀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으나 우습게도 쓰러지지 못했다.
무형의 기운이 자신을 꽉 붙들어 매는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수행을 갈고 닦아 날 길러준 문파에 이바지할 것이다. 그러니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검령도에 들어가 반드시 검술을 대성해 곤륜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가 잃은 것을 되찾겠다.
-수월에 몸담은 이상 그것은 당연하다. 대도의 길이 멀고멀다지만 텅 비어버린 것은 썩은 것보다 못하니.
사부님이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를 나의 사부라 칭할 수 있을까.
“으아아악!!”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십해만척귀들의 세력이 더 커졌다. 이번에는 동맹문과 합세해 막아냈지만 다음에는 어떻게 할지 걱정이 많다. 세상은 결국 힘 있는 자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도는 무엇이고 협이 무엇인지 난 아직도 모르겠다.
도를 닦는 것이 하늘을 거스르는 일이라지만 불행은 첩첩산중이다. 그러니 내가 해야만 한다.
머릿속에서 그들의 염(念)이 몇 겹으로 겹쳐져 속삭였다.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딱딱딱 이가 부딪쳐 소리 났다.
멈출 기세는 없다.
오히려 더 거세진다.
그들의 염원.
그들의 바람.
그들의 이상.
정혈이 발작한다.
북을 두들기듯 거침없이, 또는 유순하게 튀어 올랐다.
뼈가 뒤틀렸다.
우드득 섬뜩한 소릴 내며 작아졌다 커졌다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
피부가 찢겼다.
순식간에 아물고 찢어졌다.
이 사람에게 저 사람으로, 저 사람에게 이 사람으로.
정신을 옮겨 타듯 수십 번을 왔다 갔다 하니 종잡을 수 없었다.
-1000년이 지났다. 이제는 희망이 없어 보인다. 만극일검의 주인은 나타나지 않는다.
-곤륜의 그녀는 잘 살고 있을까. 날 잊어버리지는 않았을까. 사부님은 잘 지내고 계실까? 아니, 이미….
-꼬박꼬박 사저라 부르니 흐뭇하다지만 육사인 것이 마음에 걸린다.
어지럽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들의 기억이.
감정이 맴돌았다.
그것이 꼭 내 것 같다.
먼발치서 구경하는 듯 하다가도 정신 차리면 내가 되어 있다.
몸은 수십 번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며 터질 듯 하다가도 쪼그라들 것처럼 어마어마한 고통을 선사했다.
슬프면서 화가 났고.
두려우면서도 측은했다.
그들의 목소리가.
그들의 기억이 메아리친다.
몇 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수백 년은 지나지 않았을까.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고 싶다.
그때였다.
풍경이 뒤바뀌고 하늘과 땅이 뒤집혀 그리운 광경이 나타났다.
“오늘은 또 무슨 생각을 하더냐. 아니면 내가 보고 싶어 왔더냐?”
싱긋 웃어 보이는 여인.
교양 있게 땋은 머리는 매화로 치장된 장식품을 매달고 있었고 연분홍 궁장을 입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이다.
저도 모르게 그리 생각됐다.
그녀의 이름은 화란.
그래. 화란이었다.
* * *
같은 시각.
장천은 뭐가 어찌된 영문인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갑자기 검진이 미쳐 날뛰기 시작하더니 건곤오봉의 태선들이 검으로 변해 사라져버렸다.
그 뒤로는 뿌연 안개 속에 가려져 어찌됐는지 알 수가 없다.
신식으로 살펴보려 했으나 검진이 아직도 강력한 금제를 발산해 알아볼 수도 없었다.
“방도가….”
없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검진에 관해 견문이 있었다면 몰라도 장천은 그런 것이 없었다.
탈의 도사로 나고 자라 웬만하면 살생을 저지른 적이 없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검술은 강력하나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죽이기 위한 것이다.
그렇기에 장천은 검령도에 와서도 검술을 배우지 않았다.
그저 올곧이 자신이 믿는 것을 실천하며 수행을 거듭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믿음에 조금 금이 갔다.
아예 알지 못하는 것과 알고서 하지 않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장천은 그 차이를 부정했고, 부정한 결과가 지금의 무력함이었다.
“귀율 소저.”
귀율이 날카로운 눈으로 장천을 바라봤다. 돌연 살기를 뿜어내는 것이 더 말을 걸었다가는 칼부림이라도 할 분위기였다.
장천은 입을 다물었다.
대호 육사에게나 으르렁거리지 다른 이들은 곧장 죽이려 드는 귀율이다.
장천은 고소를 머금으며 검진을 응시했다. 작고 큰 갑골문자들이 살아 움직이듯 주변을 맴돌며 움직였다.
말이 갑골문자지 생전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온갖 경전을 습득한 장천마저도 처음 보는 글자.
이것이 정녕 글자가 맞는지도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 같다가도 수시로 글자가 바뀌고 있었다.
꼭 겹겹의 글자를 하나로 함축시키기라도 한 듯 말이다.
으아아아아아아!
돌연 검진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또다.
또 비명이다.
일정 시간마다 참을 수 없다는 듯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장천은 침음을 삼켰다.
그때였다.
숲이 일사분란하게 휘청거렸다.
구부들이었다. 그 난리가 났으니 모여드는 것도 일은 아니다.
그 뿐만 아니라 다른 검도자들 또한 무슨 일인지 호기심에 몰려들었다.
거기까지는 나쁠 것 없다.
하지만 악재는 겹친다 하던가.
그들 사이로 거대한 기운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 상황이 만족스럽기라도 한 듯.
아주 천천히.
장천의 목울대가 고저를 그렸다.
말도 없이 봉을 들었다.
그러자 검도자들이 너도나도 몸을 빼기 시작했다.
구부들 또한 마찬가지.
눈 몇 번 깜빡인 사이에 원래 없었던 것 마냥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나타났다.
“하늘이 도우시나보군. 자꾸 태선들이 사라지는 걸 보면 말이야.”
검령도의 유일한 영겁 육사.
지충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머리는 어지러웠으나 마음은 조금 편해지기 시작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나는 상처 입은 호랑이다.
그리고 화란은 나의 은인.
날 보살펴주는 여인이다.
처음에는 경계했으나 이 낯선 곳에서 날 지탱해주는 여인이다.
그녀에게 의지하는 게 편해졌다.
“상처의 회복이 빠르구나.”
화란이 나의 상처를 보며 말했다.
사냥꾼에게 열댓 발을 맞았던 상처였다. 죽음을 느꼈으나 살아있다.
곧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처였으나 그녀의 환약은 신묘했다.
한 알을 먹으면 힘이 솟고, 새 피가 생겨나고 새 살이 돋았다.
“참 신기하지. 네 눈을 보고 있으면 꼭 내게 대답을 하는 것 같아.”
화란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온화한 음성.
그리고 따스한 손길에 나는 점점 잠에 빠져 들었다.
포근하고 편안한 감각이었다.
“장문. 종남파의 장문이….”
“또? 그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또 성희롱이나 해대려고 왔구나.”
날 선 목소리.
“어쩔 수 없잖아요. 십해만척귀가 갈수록 세를 부풀리고 있습니다.”
“누가 모르겠느냐. 그 영감탱이가 자꾸 나와 백년가약이 어쩌고 하는 헛소리를 늘여놓으니 그러지. 천년도 넘게 살아놓고 백년가약은 무슨. 정말 개뿔 같은 소리잖느냐.”
“어쩔 수 없죠…. 태선이었던 대장로님이 40년 전부터 행방이 묘연하니 종남파 놈들이 기를 피는 것이죠.”
“이쪽도 적 저쪽도 적이구나.”
알 수 없는 대화를 들으며 스르륵 눈이 감겼다.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내 상처는 완치됐다.
아픈 곳이 아무 곳도 없었다.
아직도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어쩌다 책 속에 빠져 호랑이의 몸이 되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내가 느끼는 감각이 꿈은 아니라 말하고 있으나 그녀와 지내는 시간은 꿈일지도 모른다 말하고 있었다.
“뭘 그리 핥는 것이냐. 내 손은 먹는 것이 아니다만.”
화란은 손을 빼고는 손가락으로 내 볼을 콕콕 찔렀다.
그녀와 함께하는 나날은 즐거웠다.
심신이 편안해진다는 말이 무엇인지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나는 내가 화산파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화산파에 다가올 파국 또한 알지 못했다. 나는 말도 하지 못하는 호랑이였을 뿐이었다. 그것도 화산파 장문의 애완호(愛玩虎).
아니, 모르는 척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곳이 어디인지.
내가 알던 세상인지.
외면하고 있었다.
그럴 리 없다면서 부정했다.
그녀와 함께하는 것이 너무 편해서.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고, 다시 봄이 오고.
수십 번이 반복됐다.
그녀와 함께 목욕을 즐기기도, 사냥을 하기도 하는 즐거운 나날.
나는 항상 그녀의 곁에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기꺼워했다.
나는 그게 좋았다.
항상 웃고 있으나 그녀의 낯빛에 드리운 그림자를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항상 함께하려 했다.
그녀의 사정을 모른 척하며.
“장문….”
“알고 있으니 나가.”
화란의 음색이 좋지 못했다.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하염없이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귀동냥으로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종남파의 장문인은 화란을 원했다.
십해만척귀가 지척에 다가왔음에도 화란과의 혼인을 원한다 한다.
“어이가 없지 않느냐.”
돌연 혼잣말을 했다.
아니, 내게 하는 소리였다.
이따금씩 그녀는 내게 혼잣말,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나는 묵묵히 들었다.
지금 나는 들을 수 있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최선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화봉 언니라도 있으셨으면 본문이 이런 치욕은 입지 않았을 것을.”
나는 오늘도 묵묵히 그녀의 혼잣말을 듣다가 그녀의 손을 핥는다.
나는 호랑이니까.
말 못 하는 짐승이니까.
그리고 또 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밤마다 고뇌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이름뿐인 장로들을 불러 모아 암담한 심정으로 말했다.
“혼인을 하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기뻐했다.
노인네들은 기뻐했으나 젊은 시비들이나 제자들은 슬퍼했다.
종남파의 장문은 부인이 넷이나 있는 노괴였다.
쌍수공법을 익혀 남녀간의 정을 통해 수행을 증진하는 도사였다.
무엇인지 몰랐으나 후에 방중술에 근간을 둔 것이라 듣게 되었다.
나 또한 슬펐다.
그러나 그녀는 후련해보였다.
그것으로 문파를 지킬 수 있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혼잣말 했다.
내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되새기는 말이었다.
나는 슬펐다.
그리고 혼례의 날이 왔다.
그녀는 이 세상 누구보다 아름답게 치장하고 있었다.
붉은 천으로 몸을 두르고 치장한 그녀는 가히 경국지색의 미모였다.
나 또한 눈을 뗄 수 없었다.
“대호야.”
그녀가 날 불렀다.
“네가 보기엔 어떠더냐.”
아름다웠다.
나도 모르게 답해주려 입을 벌렸다.
그러나 짐승 울음소리만 맴돌았다.
하지만 그녀는 화사하게 웃었다.
마치 알아들었다는 듯.
“고맙구나.”
그 뒤, 곧장 혼례가 치러졌다.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수많은 인파에 어지러웠다.
그러나 난 그녀를 쫓아다녔다.
그냥.
그냥이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녀가 혼약의 술잔을 나눌 때에도.
그녀가 노괴와 나란히 섰을 때도.
나는 곁에 있었다.
그리고 혼례가 끝나고.
합방을 치르게 되는 날.
첫날밤.
그곳에도 나는 있었다.
“대호야. 이제 물러가.”
화란이 슬픈 눈으로 날 보내려 다독이고 있었다.
그러나 노괴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냥 두시오. 구경꾼 하나 있어서 나쁠 것은 없겠지!”
노괴가 날 보며 말했다.
주름진 얼굴이 입꼬리를 올리니 더 흉측한 몰골이었다.
아름답게 치장된 신혼방이었으나 놈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그놈만 별 세상의 것 같았다.
화란은 몸을 떨며 눈을 감았다.
놈이 화란의 어깨를 잡았다.
음흉한 눈빛과 미소였다.
그러나 나는 방관했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지려 하는지 알면서도 나는 방관했다.
그리고 일은 벌어졌다.
푸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