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140)
낭선기환담-139화(140/600)
낭선기환담 – 139화
아무런 소리도.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적막한 고요함.
오직 그것만이 나를 감싸고 오로지 그렇게 존재하기만 했다.
정신은 몽롱하기 짝이없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있었다.
내가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관심도 없었다.
그저 이렇게 아무 생각도 없이 있는 것이 퍽 나쁘지 않았다.
* * *
사흘 동안 이어진 회색 범과 자룡의 접점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검령도의 검도자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며 자색의 운무를 보고 있었다.
콰앙!!
운무가 들썩이며 한 차례 굉음이 터져나왔다. 그 사이로 비늘이 상한 자룡의 모습이 언뜻 보였고, 피 투성이로 변한 회색 범이 보이다 사라졌다.
그때였다.
돌연 자색 운무가 엄청난 속도로 크게 팽창하더니 폭음과 함께 청염이 치솟았다.
[크아아악!!]자룡의 모습을 하고 있는 지충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 틈을 타 회색 범이 지충의 몸에 달라붙어 목덜미를 물었다.
콰드득!
지충이 지렁이처럼 몸을 꼬았다.
꽤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범의 이빨은 물론, 온몸이 검과 같이 날카롭고 단단하니 당연했다.
지충은 이를 짓씹으며 생각했다.
놈의 몸이 단단하다지만 금신통을 지닌 자신의 몸 또한 단단하다.
몸의 경도는 막상막하.
그러나 놈의 몸은 단단함 말고도 날카로운 예기를 지니고 있었다.
덕분에 꽤나 애를 먹고 있다.
사흘 동안 싸우고도 승부가 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고작해야 영명 놈에게 이런 수모를 당한다는 것이 참을 수 없었다.
[강체술(剛體術)로 상대해주려 했다만 어쩔 수 없지! 지금은 내 자존심보다는 해룡족의 원한을 갚아줄 때이니 말이야!]변명하듯 뱉어낸 지충은 돌연 기이한 주술을 외우며 정신을 집중했다.
지중의 머릿속에서 화령들이 사방이로 재빠르게 튀어나갔다.
그러자 운무 속에서 기이한 파장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변을 감지한 범이 물러서려 했다.
[이미 늦었다!]기잉.
기묘한 소리와 함께 파문이 일듯 자색 운무 속 공간이 일렁였다.
이내 천지가 반전되고, 풍경이 뒤바뀌며 온갖 금속 기둥들이 하늘 높이 치솟기 시작했다.
해룡족의 대장로 지충의 환계.
육계무고환(六界巫蠱幻)이었다.
이내 형형색색의 금속 기둥들이 가루처럼 변하고 가루들은 온갖 벌레들로 뒤바뀌었다.
벌레들은 크기가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덩치가 열 장에 이르는 것까지 퍽 다양했다.
지충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음산한 웃음소리만이 들려왔다.
회색 범은 잔뜩 으르렁거리며 경계했으나 환계를 빠져나갈 방법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지충의 낯에 희색이 만연했다.
[어디 한번 발버둥 쳐 보거라!!]* * *
나의 의식은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본래라면 더 가라앉을 수 없을 곳까지 진즉에 가라앉았을 것이다.
[네 여인을 찔러라.]하지만 자꾸 이 말귀가 내 머릿속에 울려퍼지며 안식을 방해했다.
나의 여인이라니.
누구를 뜻하는지 파악하기 힘들다.
그가 말하는 것이 화란일까.
아니면 차륙일까.
그도 아니라면 나의 제자일까.
그 또한 아니라면….
무시하려 했으나 잊을 만하면 자꾸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그래서일까.
자꾸만 그 아이가 떠올랐다.
한 겨울 설산처럼 새하얀 머리와 청렴한 호숫가와 같은 푸른 눈동자.
녹빈홍안(綠鬢紅顔)의 어여쁜 얼굴을 가진 그 아이.
그 아이가 자꾸만 떠올랐다.
불운한 운명을 지닌 아이였고, 감당할 수 없어 떠나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는 잠깐의 시간으로 온전한 여인이 되어 날 찾아왔다.
미안한 게 많았다.
엉겁결에 부부의 연을 맺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죄악감이었다.
내 탓에 모진 일을 겪었으나 그럼에도 나에 대한 애정이 아득했다.
신기할 따름이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해준 것이 없는데도 그 아이는 날 그리 애정했다.
나 까짓 것이 무어라고.
차마 보답할 수도 없는 애정을 그리 쏟아주는 것인지.
그래서 고민하고.
그럴수록 나는 더 미안했다.
내가 그녀에게 품은 이것이, 진정 애정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나 또한 애매하다 생각했다.
부부의 연을 맺었으나 내가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은 애틋한 것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그런 와중에 나는 화란을 살리기 위해 그 아이를 두고 떠났다.
애지중지했기에 그러했으나 다른 복합적인 이유도 함께였다.
그랬기에 미안했다.
범인들도 하는 혼례 또한 치루지 못했으니 내색하지는 않아도 적잖이 마음이 상하지 않았겠는가.
이러한 여러 가지 연유로 나는 그 아이에게 참으로 미안했다.
아아.
그래서였을 것이다.
‘서방님은… 절 사랑하십니까?’
마음 깊숙한 곳을 찌르는 말.
더군다나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아이가 하는 말이니 더욱 그랬다.
나는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품은 것도 사랑이라면 사랑이라 할 수는 있으나 차륙을 향한 애틋함과는 자못 달랐다. 게다가 그 아이가 주는 것이 너무 깊고 넓다 보니 내 것이 한없이 좁고 얕아보였다.
참 이상한 일이다.
여러 여인이 있는 데도 유독 애매하다 생각하는 그 아이가 자꾸만 눈에 밟히고 있었다.
그때였다.
투웅.
청명한 소리와 함께 내 몸을 휘감는 맑은 기운이 느껴졌다.
익숙한 울림과 기운이었다.
분명 항보사인검에서 흘러나온 항마의 기운이 틀림없었다.
그제야 나는 눈을 떴다.
눈을 부릅뜨자 나는 새하얀 공간에서 온몸이 검에 찔려있었다.
다양한 색상과 각기 다른 외형의 검들이었다.
[네 여인을 찔러라.]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어찌하여 환망이 그런 소릴 했는지.
내 눈앞에는 쯧, 혀를 찬 여인이 달라붙어 있었다.
“너는 화란이 아니구나.”
“내가 화란이 아니면 넌 뭘까. 네가 아직도 너라고 생각하더냐.”
목소리가 바뀌었다.
모습 또한 달라지며 새까만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나는….”
다양한 외양의 검들이 내 몸 곳곳에 박혀 있었다.
그것들은 점점 더 깊숙이.
내 몸을 파고들고 있었다.
순간 온갖 기억들이 요동쳤다.
내가 양소팽인지.
아니면 강룡인지.
화봉인지.
홍경인지.
나 자신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살아온 세월과 감정은 천년도 더 된 것들이다. 고작 몇 백 년의 삶을 살아온 네가 감당할 수 있나?”
알 수 없었다.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내 앞에 있는 화란.
화란의 모습을 한 무언가가.
그것이.
“심마(心魔)라는 건 안다.”
턱!
놈의 목을 붙잡았다.
화르륵!
푸른 청염이 놈과 나를 집어 삼킬 듯 치솟아 올랐다.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고 놈의 모습이 일렁거렸다.
“산군! 뜨겁습니다!”
놈은 화란이었다가.
“서방님! 저 죽어요 제발!”
초아였다가.
“범아!! 엄마를 죽일 셈이니?!”
그리고 만나 본 적도 없는 어머니의 모습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환망은 그때 이미 내 안에 있던 심마를 눈치챈 것이겠지.”
그랬기에 내게 주박을 걸어 몸을 움직이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네놈은 검이 들어온 틈을 타 내 몸을 빼앗으려던 것이고.”
“끼아아아아악!!”
가열차게 타오르는 청염 속에서 심마의 몸이 재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놈은 내가 만났던 모든 인물들로 변하며 날 회유하려 했다.
어찌하여 수도를 행하는 자들이 심마를 가장 두려워하는지 알았다.
가장 여리고 나약한 부분을 집어내 나타나니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소용없다.”
놈은 내가 무심코 담아두었던 후회와 한탄 속에서 빗어난 심마.
그것을 자각했으니 두려워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크아아아아아아악!!”
심마는 괴로운 듯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죽일 듯 날 노려보며 뼈에 사무친 원한을 토해내듯 말했다.
“이런다고 내가 사라질 것 같으냐! 난 네놈의 심마다! 언제라도 다시 태어나 네 목을 노릴 것이다!!”
“그러니 네게 내 몸을 상납이라도 하라는 말이더냐? 헛소리를!”
놈은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았다.
청염 속에서 일렁거리고는 있으나 아직 힘이 부족한 듯 했다.
결정타가 필요했다.
난 내 몸에 꽂힌 검을 빼내려 했으나 결코 빠지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느껴졌다.
내 곁에 우두커니 자리한 검을.
보이진 않으나 그녀는 항상 있었다.
난 허공을 움켜잡았다.
내 손이 닿은 칼자루부터 불길이 일어나며 검의 모습이 드러났다.
올곧게 뻗어있는 검은 그녀의 성격을 일러주는 듯 했고, 아름다운 외양은 꼭 그녀를 보는 듯했다.
나는 곧장 검을 휘둘러 심마의 목을 베어 버렸다.
청아한 검명이 들리고 한껏 일그러진 심마의 머리가 잘려 나갔다.
둔탁한 소음과 함께 놈의 머리가 재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새하얀 공간이었던 풍경이 크게 들썩이며 바뀌기 시작했다.
온갖 풍경들이 겹쳐져 시시각각 바뀌었다. 그곳에서 나는 대호였으나 양소팽이었고, 화봉이고 홍경이었으며 강룡이기도 하였다.
내게 꽂혀진 검은 완전히 몸속으로 침투해 칼자루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해야 할 일이 있다.
내가 무엇이든.
또 내가 누구이든.
내 손에 쥔 검은 화란이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모르나 그렇다 하여 달라질 것은 없다.
“계속 날 지키고 있었더냐.”
화란아.
그러자 검이 크게 박동하며 내 손을 빠져나가 주변을 선회했다.
그때였다.
내 몸에서 만극일검이 빠져나가 공명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312개의 검들이 물고기 떼처럼 허공을 유영하더니 돌연 하나로 합쳐져 눈부신 빛을 발했다.
하나의 검으로 합쳐진 것이다.
이내 검의 외양이 변하고, 허공에서 긴 머리를 휘날리는 여인이 내게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희색이 만연해 그녀를 받아들고는 눈을 맞췄다.
“기다리셨습니까?”
빙긋 웃으며 날 보는 눈빛과 입매가 참으로 반가웠다.
화란이었다.
나의 화란.
“왜 이리 늦었느냐.”
“애 좀 타라고 늦었습니다.”
나는 화란과 눈을 맞춘 상태로 한참이나 그윽하게 바라봤다.
할 말이 많았다.
네가 검으로 있는 동안, 나는 100년이 넘는 세월을 수행했다고.
너를 깨우기 위해 내 뿔을 스스로 잘라 머릿속에 넣기도 했다고.
이런저런 푸념을 늘여놓고 싶었다.
자랑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때가 좋지 않았다.
“묻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어찌 제가 검노탁생을 뛰어넘고, 검령화야(劍靈和惹)하여 검령이 된 것인지!”
나 또한 모른다.
허나 그것을 알기 위해 어찌해야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화란은 단박에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날 안쓰럽게 쳐다봤다.
이내 검으로 변한 화란을 쥐었다.
화란(禍亂)이 될지, 화란(花爛)이 될지는 주인에 따라 다르리라.
난 곧장 화란을 내 몸에 찔렀다.
푸욱.
그 뒤.
내 몸은 검들과 함께 허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