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145)
낭선기환담-144화(145/600)
낭선기환담 – 144화
적뢰가 내려쳤을 때는 산군이라도 해도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적뢰만으로 단정지을 수 없었으나 곧이어 나타난 여인의 생김새를 보고선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대가 이곳에 있다는 말은… 설마 네가 검둥이더냐?”
산군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구귀를 응시하며 물었다. 아무리 400년이 지났다지만 그 짧은 사이에 까망호리가 영겁에 올라섰을 줄은 몰랐다.
그 뿐이던가.
어느새 십해만척에 한자리를 꿰찬 구귀가 됐으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검둥이 자질은 극히 평범했는데….’
까망호리의 자질은 평범했다.
산군과 함께 진수명화해도 호리는 항상 두 배가 넘는 시간이 걸렸으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네놈은 누군데 나와 홍연을 아는 듯한 말투를 하더냐.”
호리도 그렇고, 산군도 그렇고 탈형을 이루어 모습이 바뀐 탓에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혹시 산군이십니까?”
역시 홍연이라고 해야 할까.
눈치가 퍽 빠르다.
그러나 호리는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비아냥거렸다.
“무슨 헛소리냐. 대호 놈은 날개도 없고 뿔도 없어. 아니, 있었나? 어쨌든 날개는 확실히 없다! 그런고로 놈은 대호일 리 없지 암!”
너무도 확신에 가득찬 말투.
어이가 없었으나 몇 마디 말보다는 눈으로 보여주는 게 빠르리라.
산군은 곧장 비운둔갑을 사용해 사내의 모습으로 변했다.
“이러면 믿겠느냐. 어쩐지 생김새가 이상하게 낯익다 싶더니….”
피식 웃으며 말하니 호리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치켜 떠졌다.
“저, 정말 대호더냐?”
“그럼 누구겠냐 멍청아.”
“정말 정말?”
“그래.”
호리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참을 수 없다는 듯 달려들었다.
이내 산군에게 와락 안겨들었다.
“이 나쁜 놈! 어디 갔다 이제 와!”
산군은 조금 당황했으나 이내 인자한 낯으로 등을 두들겼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 그러고보니 애적사가 사라졌었구나.”
천겁을 받을 때 사라진 것 같았다.
“혹시라도 네가 죽었을까봐 얼마나 가슴 조렸는지 아느냐! 못된 놈!”
호리는 두 주먹으로 애꿎은 산군의 가슴을 두들겼다. 산군은 울먹이는 호리를 안아들고 홍연을 바라봤다.
“적당한 곳이 있습니까.”
다른 영수들도 자리한 곳이다.
마땅히 회포를 풀 만한 곳은 아니다.
“물론이지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홍연이 적뢰를 번득이며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산군은 그것을 보다가 얼빠진 낯을 하고 있는 육사를 향해 명했다.
“응명천충의 혼아들은 네가 알아서 데리고 오너라.”
“조, 존명!!”
이내 호리를 안아든 산군이 푸른 빛줄기로 화해 사라졌다.
광장에 자리한 영수들만 어처구니가 없어 서로 눈치 보다 다시금 경매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응명천충의 혼아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육사 둘은 한숨을 내쉬다 소녀들을 모아 홍해의 서악화산(西岳華山)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 * *
화산 꼭대기에 자리한 고층 누각에는 만면에 미소를 띤 채로 술자리를 즐기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홍해의 주인 구귀.
그리고 그를 보좌하는 홍연과 함께하는 술자리였다.
“대호 네놈! 빨리 말해 봐라!”
호리는 한껏 술에 취해 뺨을 붉힌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뭘 말하라는 거냐.”
“빌어먹을 놈! 내가 네놈 따라 잡으려고 어? 황새 가랑이가 찢어지게 응? 막 이렇게 했는데 말이야! 젠장, 영겁 육사가 되어 아직 영명인 네놈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줄 생각으로 내가 천년이 넘게 수행만 했거늘!”
“무슨 말이야 그게….”
횡설수설하는 게 술이 많이 취한 것 같았다.
탈형을 이루면 대개 어린아이의 모습이 되고는 한다.
자신에게 맞는 적합한 신체 나이를 서서히 찾아가는 것이었으나 그 때문에 어린 외양으로 술 취한 모습을 보게 되니 보기 좋지는 않았다.
“주인님. 황새가 아니라 뱁새지요.”
“그거나 그거나! 저놈 때문에 내 가랑이가 찢어질 뻔 하지 않았더냐!”
호리는 술병을 손에 쥔 채로 주정뱅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저 혼자 울다가 웃다가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모두 미소 짓고 있었는데, 호리가 그러는 이유는 모두 산군이 살아있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오늘 산군과 재회하게 된 것이 기쁘셨던 탓에 이러시니 모쪼록 너그러이 이해해주십시오.”
“아닙니다. 그럴 수 있지요.”
“산군님, 제 주인의 벗인 분에게 존대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예전처럼 편하게 대해주세요.”
“음… 굳이 원한다면 그렇게 하지.”
“궁금한 게 많으실 테니 웬만한 건 전부 제가 답해드리겠습니다.”
산군은 쓰게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누각의 창문을 열어놓은 탓에 시원한 밤공기가 취기를 식혔다.
구름과 어울려 떠오른 초승달은 또 왜이리 운치 있어 보이는지.
반가운 벗을 만나 그래 보이는 듯했다.
“그러고보니 놀랐네. 검둥이가 여우였을 줄이야. 미리 알았다면 얼굴 붉힐 일은 만들지 않았을 텐데.”
처음 손속을 겨룰 때 사철을 꺼냈을 시점부터 의심하기는 했었다.
그래도 까망호리는 범이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이내 의심을 지워버렸지만.
“모르는 척 해주세요. 주인님은 그 누구보다도 산군에게 자신이 여우라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을 겁니다.”
누구든 비밀 한두 가지는 있는 법.
그리고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한데 호리는 어쩌다 구귀가 됐지?”
궁금한 것은 이쪽이다.
영겁에 오른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 쳐도 구귀가 된 것은 의아했다.
“제 추천이었습니다.”
“백귀야뢰겁 때문이었나?”
그러자 홍연이 씨익 미소지었다.
“제 주인님은 산군과는 달리 본래 자질이 형편 없는 분이시니까요.”
“그렇게 구귀가 되어 홍해를 위임받아 다스리고 있었다…?”
“위임이라니요. 떠넘겨진 것뿐입니다. 홍해는 점점 죽어가는 땅이나 다름 없으니까요.”
죽어가는 땅?
산군의 술잔에 술을 따르던 화란의 손이 멈칫거렸다.
“한 사백 년 전쯤이었나, 갑자기 불 바다가 되고 독기가 치솟아 많은 이들이 죽고 홍해를 떠났습니다.”
“만성독염 때문이었군.”
“알고 계시니 이야기가 빠르겠습니다. 놈 때문에 점점 땅 자체가 병들어가니 어찌할 수도 없는 게지요.”
만성독염의 특징 중 하나다.
강력한 화기와 독기.
애초에 독에서부터 태어난 불길이니 그 독성이 얼마나 독하겠는가.
산군도 그 독을 몸으로 받아들여 봤으니 잘 알고 있다.
범인은 한 호흡에 죽을 것이고, 영수들이라 해도 다를 건 없다.
“놈의 독염이 점점 확산되어 가고 있으나 마땅한 방법이 없습니다.”
불과 함께 상생하는 독이니 초목들을 집어삼키며 확산하는 듯 했다.
“놈을 잡으면 되지 않나.”
“잡을 수 있다면 고민할 것도 없지요. 놈을 잡으려면 북쪽의 불바다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 열기와 독기는 영겁이라고 해도 버티기 힘듭니다. 게다가 그 넓은 지역에서 영성을 얻게 된 불덩이를 어찌 찾을까요.”
그러고 보니 그도 그렇다.
놈이 나 잡아가라며 드러누워 있지는 않을 것이니 수색을 벌여야 하는데 그게 쉬울 리 없다.
‘어차피 만성독염은 내 손에 있던 것이니 내가 찾아야 함이 맞다.’
그쯤 되자 산군도 턱을 매만지며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산군이 고심하는 듯 보이자 홍연이 표정을 풀고 말을 돌렸다.
“귀한 분에게 괜한 근심을 안겨드린 것 같습니다. 그 보다는 산군의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검령도에 들어서 기연을 얻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만 어찌 날개가 돋으셨는지요?”
그러자 산군이 쓰게 웃었다.
“알면 나도 속 시원했겠지. 나도 자세한 것은 잘 모르네.”
‘어쩌면 궁비호의 시조가 나와 같은 쌍각부호였을지도.’
쌍각부호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지만 그마저도 확실치 않다.
시간이 생긴다면 쌍각부호와 관련된 경전을 찾아봐야 할 듯 싶었다.
“어쨌거나 감회가 참 새롭습니다. 상처투성이가 되셔서 백산에 당도하셨던 게 엊그제 같은데요.”
“아, 그때는 그랬지요. 저도 산군 덕에 애를 먹었던 때라서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홍연의 말을 화란이 받아치며 저 홀로 납득하고 있었다.
“란 소저도 참 고생이 많으셨어요.”
“네? 아닙니다. 제가 뭘….”
“겸손하실 필요 없습니다. 귀신의 테를 벗고 검령이 되셨는데요. 검령에 대해 견문이 얕으나란 소저의 기운이 영겁과 크게 다르지 않는데요!”
란은 홍연의 말에 겸양을 떨었다.
“제가 한 게 있나요. 다 산군이 알아서 해준 것입니다. 전 그냥 떠먹여 주는 밥만 먹었을 뿐이지요. 저보다는 홍 육사가 더 대단합니다. 까망호리님을 결국엔 영겁 육사로 만들고 구귀의 좌를 차지하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그에 비하면 저 같은 건 조족지혈, 세 발의 피나 다름없지요. 산군은 저 알아서 잘 하시는 분이니.”
그녀들은 서로를 치하하며 한참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검둥이가 키우던 복수를 죽였다던데 사실인가?”
“별 것 아니니 신경쓰지 마세요.”
“어찌 신경쓰지 않을 수 있나. 다른 놈이었으면 몰라도 그대와 검둥이에게 마음의 빚이 많은 편이니 다른 것으로 보답하겠네.”
모르는 놈이었으면 몰라도 호리의 것이었으니 그냥 입 닦을 순 없었다.
다행히 지충의 공정강에 금신통에 유용한 통술서나 금속이 많았으니 그걸 주면 좋아할 것이다.
“주인님이 그런 걸 신경 쓰실 분은 아닙니다. 정 그러시다면 화운반홍을 길들여 주인님과 함께 홍해를 한 바퀴 시찰해주시지요.”
“시찰?”
“예, 아무래도 오늘 주인님과 산군이 다투시는 모습을 보였었으니, 홍해를 돌며 친분있는 모습도 보여주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영겁의 기운이 맴도는 것만으로 헛짓거리 하는 놈들이 사라지기 마련이니 그것이면 족할 듯 싶습니다.”
하긴, 귀수들은 성정이 포악한 편이니 괜한 짓을 못하게 영겁의 기운을 흩뿌려주는 것이리라.
홍연은 산군이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이중 하나였고, 화운반홍이나, 응명천충의 혼아들을 억지로 데려온 경향이 있으니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뿐이면 내 마음이 편치 않겠군. 북쪽을 불바다로 만든다는 골칫덩이를 내 조금 덜어주지.”
“네?”
홍연이 화들짝 놀랐다.
항상 차분한 그녀였던지라 저리 놀라는 걸보니 나름 신선했다.
“산군. 만성독염은 그리 만만한 놈이 아닙니다. 물론 산군이 강력한 화신통 육사라지만 자칫 잘못하면 놈의 독기에 중독될 수도 있습니다. 운이 좋으면 화령만 살 것이고, 재수가 없다면 영면하게 되겠지요. 그 사실을 제대로 알고 말하시는 겁니까?”
“자네도 날 오래 봐오지 않았나.”
그리 말한 산군은 단번에 술잔을 들이키며 탁, 내려놓았다.
그 소음에 정신놓고 자고 있던 까망호리가 몽롱한 낯으로 고개를 들며 두리번거렸다.
“아무 생각없이 허투루 말을 내뱉는 성격은 아니지, 내가.”
그리 말한 산군이 자리에서 일어나 스르륵 허공에서 사라졌다.
[확실히 처리할 수 있다. 자신하는 것도 아니니 너무 기대하지는 말게.]그 뒤를 따라 화란도 고개를 숙이며 모습을 감췄다.
홍연은 쓰게 웃으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호리를 부축했다.
“으냐앙….”
“정신 좀 차리십시오. 산군님은 저리 훌륭해지셨는데, 주인님은 어찌 아직도 철이 덜 드셨답니까.”
“아 멀라아~”
술이 덜 깬듯 흐느적거리는 호리를 본 홍연의 한숨이 더 길게 이어졌다.
* * *
배정 받은 방으로 향한 산군은 침소 곁에 나란히 서 있는 소녀들을 보고는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소녀들은 붉은 밧줄로 온몸이 결박되어 있는 상태였다.
얇은 면사만 입은 상태로 속살이 그대로 비추어 보였다.
뭔가 단단히 착각한 모양이다.
“주인님 애들 먹어도 돼?”
“안돼.”
단칼에 말하니 입술을 삐죽인다.
산군은 탐화를 무시하고 이 아이들을 어찌할까 고민했다.
“영겁에 오르자마자 계집질을 하시는 겁니까? 그리 여인이 고프시면 제게 욕정을 푸세요! 흑흑.”
화란은 이러려고 검령화야의 경지로 만들었냐며 우는 시늉을 했다.
탐화는 뭐가 그리 재밌어 보였는지 화란 곁에서 똑같이 흉내 냈다.
산군의 한숨이 깊어졌다.
이내 품에서 공정강을 꺼내 장천과 만호를 꺼냈다. 그들에게 간단히 사정을 설명하고는 만호에게 명했다.
“넌 이들을 데리고 백산으로 먼저 가 있거라. 나 또한 곧 돌아갈 것이니 이 서찰을 가져가거라. 그리하면 의심 없이 들여보내줄 것이다.”
“예? 아… 알겠습니다.”
“왜 싫으냐?”
“아, 아닙니다! 다만 이곳이 홍해이고 백산으로 가는 것이면 이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것이 조금….”
“그도 그렇군.”
혼아들 경지는 도선 정도이니 먼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만호는 비선이나 저들을 모두 태울 둔보는 없으니까.
“탐화. 네가 고생해줘야겠다. 만호는 탐화를 타고 저들을 백산에 데려다주고 너도 그곳에서 대기해라.”
“존명!!”
만호 일행이 지네로 변한 탐화를 타고 곧장 길을 떠났다.
“저 아이들은 왜 거두셨습니까.”
화란이었다.
이번에는 장난칠 생각이 없는지 자못 진지한 어투였다.
“세상 일이 어찌될지 모르는 것이니 저 아이들이 내 목숨을 살릴지도 모르지 않더냐. 그리고 꼭 정을 통해야만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거다. 그리고 혹시 모르지, 저들이 수행에 힘쓴다면 신통을 발휘하고도 죽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정말입니까?”
“그래. 그보다는 어떠냐.”
“무엇을요?”
“화산에 다시 돌아온 기분 말이다.”
지금은 십해만척에게 지배당해 구귀인 호리가 기거하고 있다.
그러나 500년 전에는 산군과 화란이 지냈던 화산파 건물이니 감회가 새롭지 않을 리 없었다.
화란은 말없이 주변을 돌아보다 산군의 품에 안겨 말했다.
“두렵습니다.”
왜 그러느냐라 묻지는 않았다.
그저, 가만히 품을 빌려줬을 뿐.
둘은 밤이 새도록 옛 기억을 꺼내며 그 시절을 추억하고 담아 놓았다.
그 날 밤은.
유난히도 따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