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16)
낭선기환담-15화(16/600)
낭선기환담 – 15화
같은 시각.
그 누구의 출입도 금하는 금제를 걸어놓은 방에, 은은한 녹색의 빛이 어른거렸다.
“후우우우.”
깊은 숨을 토해낸 사내는 산군과의 일전에서 중상을 입은 도선 녹방이였다.
운기를 끝낸 그는 가슴과 어깨의 상처를 매만지다 눈가를 씰룩였다.
까드득.
요수에게 당한 것도 아니고, 요수가 부리는 창귀에게 당하다니.
하지만 돌연, 도사의 안색이 묘연해졌다. 아무리 기습을 당했다고는 하나, 영기를 얇은 막처럼 만들어 몸을 보호하는 호신영기(護身靈氣)를 두르고 있었음에도 베였다.
‘설마 보패였나?’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다.
도사는 턱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곰곰이 생각하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끼익.
방문을 열자, 호법을 서고 있던 검선 사내 하나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괜찮으십니까.”
도사는 가볍게 주억이고 자신의 몸을 관조했다. 무리하게 끌어다 쓴 영력으로 인해 가벼운 내상을 입었다지만, 그것은 이미 해결됐다.
문제는 소비된 영력인데, 원래라면 삼일은 내리 운기를 했어야 했지만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니 어쩔 수 없다.
‘영성부(靈性符)도 하나 남았으니 상관없다.’
녹방은 품에 있는 마지막 하나 남은 부적 하나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찾았나?”
“추격대에서는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쓸모없는 것들.”
쯧.
혀를 찬 녹방도사는 팔짱을 끼고 잠시 고민하더니 돌연 사내를 보며 말했다.
“따르거라. 놈은 목신비소를 맞았다. 그것을 빼냈든, 빼내지 않았든 쉬이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닐 것이야.”
“예, 아무리 요수 놈 신통이 대단하다고는 하나, 그만한 상처라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겠지요.”
“그래. 하지만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그 창귀.”
검선, 유빙이 은연중에 의구심을 드러냈다.
범의 신통이 대단하다고는 하나, 그래봤자 일통 요수일 뿐이고 놈의 창귀라 해봤자 그보다 아랫줄인 게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년이 가지고 있던 보패가 보물인 것 같다.”
“!”
“그렇지 않고서야, 호신영기를 두른 본인의 몸에 상처를 낼 수 있을 리 없지.”
그리 단언한 도사의 눈에는 탐욕이 번득이고, 그의 뒤를 묵묵히 따라나선 검선 유빙은 자신의 칼자루를 매만졌다.
잠시 뒤.
마을 입구.
백발을 나부끼는 소녀 하나가 빛살처럼 마을을 빠져나갔다.
“이런! 비청! 어서 초아를 찾아라! 잠깐 한 눈 판 사이 사라졌다!”
“헛! 예!”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던 비청과 청도산은 초아가 마을 밖으로 나갔다는 것을 듣고 아연실색해 곧장 마을 밖으로 빠져나갔다.
* * *
혈향이 짙게 베인 산 속에서 두 명의 검선이 검을 바로 잡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무시하고 있던 창귀가 돌연, 눈빛이 달라지더니 방대한 기운을 폭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뿐이랴.
자색의 기류는 사방팔방으로 뿌려지더니, 하늘하늘 거리며 떨어져 내리는 매화 꽃잎으로 변했다.
‘미친……. 환계라니!’
환선만이 펼칠 수 있다던 환계를 어찌 창귀가 쓴단 말인가!
“이깟 환술 따위로 나 장패를 어찌할 수 있을 듯 싶더냐!”
“이보게! 기다-”
연푼이 맹호출림(猛虎出林)하는 사내의 어깨를 잡으려는 순간.
돌연, 매화 꽃잎 수십 장이 돌풍처럼 몰아쳐 장패를 스쳐 지나갔다.
“흥! 이깟 환상 따-”
후드둑.
“크으으윽!!”
연푼이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부여잡고, 장패는 순식간에 몸에 실금이 그어지더니 수십 조각으로 잘려나갔다.
검지와 중지가 잘린 연푼이 손을 부여잡고 대경실색해 소리쳤다.
“설마 살아생전에 환선이라도 됐단 말인가!”
온통 희뿌연 자색의 안개와 매화 꽃잎만 살랑이는 환계 속.
홀로 남겨진 연푼은 극도의 긴장감에 몸을 덜덜 떨었다.
[본녀가 환선의 신통을 쓸 수 있었다면 어찌 네가 것들에게 당하고 있었을까. 비록 환선의 환계는 아니다만 그렇다 해도 뭐가 다를까? 어차피 여기서 죽을 것을.]연푼은 무릎을 털썩 꿇으며 검을 내려놓았다.
무슨 신통인지는 모르나, 이 정도의 환상을 보여주는 신통력이라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하염없이 꽃잎만 내리는 곳에서 대체 무엇을 향하여 검을 휘두르겠는가.
[살고 싶으냐?]“그렇소…….”
……살고 싶었다.
검선의 경지에 올랐지만 항상 절망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살고 싶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일단 살아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지 않던가! 살고 싶었다. 아니,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사, 살려주시오! 살려만 준다면 내 이대로 어디로든 숨어 조용히 지낼 것을 약조하겠소!”
[하! 방금 전까지 창귀 따위라 욕하던 귀신에게 구차하게 구명도생(苟命圖生) 하겠다는 것이냐?]연푼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항상 입이 방정이었다.
연푼은 이제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살려주시오! 사과하겠소! 살려만……. 살려만 주시면 내 뭐든 하겠소!”
목숨만 부지할 수 있다면 정말 뭐든 하리라.
연푼은 그녀의 대답이 들려올 때까지 몇 번이고 머리를 박았다.
서서히 피가 나오고 정신이 혼미해질 때 즈음.
스르륵.
자색의 안개들이 걷어지고, 영원할 것 같았던 꽃잎들이 사라졌다.
매화 향이 사라지고 다시금 진득한 혈향이 코를 찔렀다.
피 웅덩이에 엎드려 있는 거대한 호랑이와 그 앞에 조금 흐릿한 모습의 창귀가 서 있었다.
“정말 뭐든 하겠더냐.”
“그, 그렇소! 뭐든 하겠소!”
연푼은 자신의 검을 옆으로 슬쩍 치워버렸다.
바로 옆에 동문이었던 사내의 육편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일초, 이초가 영원과도 같이 흐를 때.
“오냐. 정 그리 원한다면 살려주마.”
아아.
“대신! 네가 하나 해줄 것이 있다.”
“어떤 것이든 하겠습니다!”
몸 곳곳에서 거뭇한 사기가 기분 나쁘게 흘러나오는 창귀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연단에 재주는 좀 있더냐?”
연단?
갑자기 웬 연단이란 말인가.
연푼은 잠시 얼굴을 구기다 그녀의 눈초리가 가늘어지자 간이 콩알만 해져 답했다.
“하, 할 수 있습니다!”
“호오.”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흘리며 연푼에게 연단의 배합을 알려 주고 재료를 손에 쥐어줬다.
단약은 산군 탓에 화란 또한 만들어 본 적이 있기에 도구 또한 공정강에 전부 있었다. 화란은 그것들을 던져주며 사내에게 명했다.
“만들어라. 최대한 빨리.”
사내는 품에서 서둘러 금창약을 꺼내 자신의 손에 바르고는 천을 꺼내 둘둘 말았다.
“하지만 연단을 하려면-”
“닥치고 해라. 네놈이 먹을 것이니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야!”
* * *
탓!
나올 때는 해가 중천이었건만 벌써 노을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장삼을 펄럭인 녹방은 입을 꾹 다물고, 유빙은 추격대의 흔적을 쫓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도사님!”
유빙이 녹방을 불렀다.
뭔가를 발견한 듯한 유빙의 부름에 녹방이 허겁지겁 달려가자.
“놈입니다.”
그리고 다른 추격대의 발자국들까지.
녹방은 말없이 끄덕이며 품에서 녹빛의 영성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천천히 흔적을 따라가자, 코끝을 찌르는 혈향이 지독하다 못해 토할 지경이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자 수풀 여기저기 난자된 시신들이 즐비했다.
“마을에서 소집한 사냥꾼들과 무인들입니다.”
쯧쯧.
혀를 찬 녹방은 허리춤에 검까지 뽑아들었다.
영성부를 쓰는 것이야 상관없다.
그러나 이제 막 내상을 치료한 탓에 조심해야 했다.
섣불리 영력을 끌어올렸다간 자신이 더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도선들 대부분은 검 또한 능히 다루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사르륵.
우거진 수풀들을 지나고, 모퉁이의 거대한 나무를 지나쳤을 때.
“허허.”
집채만 한 범 한마리가 누워 있었다.
피 웅덩이에 엎드려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이미 숨을 거둔 듯 했다.
범의 등에는 말뚝까지 박혀있어 녹방도 그제야 한시름 놓으며 검을 내렸다.
그 앞에는 웬 난자된 고깃덩이가 있었는데, 유빙이 그것을 보고 장패의 것이라 말했다.
“유빙. 네가 가서 확인해 보거라.”
“……예.”
유빙은 슬금슬금 다가가 단칼에 범의 머리를 베었다.
희한하게 단칼에 베어져 유빙 또한 놀랐다.
녹방을 중상으로 몰고 간 요수라 몸 자체도 퍽 단단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갸웃거린 유빙이 뒤를 돌아 도사를 보았다.
“그래, 죽었군. 죽었어. 헌데……. 왜 그놈들은 보이지 않는 거지?”
범이 죽었는데도 보내놓은 놈들은 왜 얼굴을 비추지 않는 걸까.
잠시 후, 뒤늦게 녹방의 낯이 와락 구겨졌다.
“이, 고얀 놈이……!”
놈들이 도봉환과 창귀가 들고 있던 보패까지 들고 도망친 것이다!
“이리해서 외문제자를 받지 말자는 것을!”
녹방은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쥐어 뜯었다.
“으으으윽!! 제길!”
“연푼의 시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 빌어먹을 놈이!”
녹방은 발을 동동 구르며 화를 내다 유방을 데리고 다시 마을로 돌아갔다.
멀리는 못 갔을 테지만, 자신의 몸도 몸이고 일단 수가 많아야 놈을 잡을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시 뒤.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는 때에, 우거진 수풀 사이로 백발을 나부끼는 어린 소녀 하나가 서성거렸다.
소녀는 말이 없었다.
“…….”
머리가 잘려나간 범을 보며 천천히 다가가 자기 몸보다 커다란 머리를 들고는, 원래 붙어있어야 할 몸뚱이 가 가져다 댔다.
그리고 손을 놓자.
툭. 데구르르.
“아…….”
소녀는 몇 번이고 그 행위를 반복하다 털썩 주저앉았다.
“아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느새 그녀의 벽안에는 이슬이 맺히고, 그 이슬은 방울져 통통한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뚝뚝.
떨어져 내리는 눈물이 피로 얼룩진 웅덩이에 파문을 만들었다.
피 웅덩이 속에 비친 자신의 우는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초아는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다.
목이 갈라져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악을 지르고, 또 질렀다.
산 너머로 해가 숨고, 음침함이 감도는 산에는 소녀의 한 맺힌 비명이 멀리멀리 울려 퍼졌다.
목이 쉬어 쇳소리만 나오게 되자 소녀는 자신의 팔뚝을 붙잡았다.
그러다 문득, 엉금엉금 기어가 범의 품으로 파고들어 털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피로 얼룩진 털가죽에 손이 피로 범벅이 되고, 그 털에 얼굴을 비비는 얼굴 또한 피로 얼룩졌지만 초아는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허…….”
청도산과 비청이 참담한 광경을 보고 침음을 흘렸다.
잠시 더 걸어가자 머리가 댕강 잘린 호랑이의 품에서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초아를 보았다.
아직 어린아이가 이런 참혹한 현장을 보고도 범의 품에 기어 들어가 잠을 자다니.
청도산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뱉어 내고는 비청에게 말했다.
“초아를 데려오거라.”
“……예.”
비청은 초아를 업고, 청도산은 잠시 등을 돌려 죽어있는 범을 보며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다시 산길을 내려갔다.
소슬히 부는 밤바람은 오늘따라 유난히 서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