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17)
낭선기환담-16화(17/600)
낭선기환담 – 16화
스으윽.
스윽.
무언가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졌다.
무슨 소리인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빼꼼 내민 여우 한마리가 엄청난 크기의 범 한 마리를 보고 화들짝 놀라 수풀로 달아났다.
다른 짐승들도 마찬가지.
하지만 나무에 있던 까마귀 한 마리는 범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범은 눈을 감고 있었고, 뒷다리를 질질 끌고 있었으니까.
저 혼자 움직인다기보다는 꼭 무언가가 들고 가는 것 같달까.
“으윽.”
그때, 범의 곁에서 웬 여인네가 힘겨워 하는 신음이 들려왔다.
“왜 이리 무거우신 겁니까.”
그녀는 산군의 창귀.
화란이었다.
그녀는 산군을 업은 채 숲속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한걸음 한걸음이 힘겨워 보였다. 산군의 무게가 무게인 만큼, 그녀의 발자국은 지면을 내리 누르고 깊게 파고들었다.
한걸음 떼기가 무섭게 그녀의 몸이 흐려졌다.
산군의 상태도 상태였지만, 그녀 역시 몸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녀의 주위로는 사기가 몸 곳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고, 흐릿한 그녀의 몸은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 워 보였다.
“후우.”
화란은 크게 숨을 내뱉고 다시 한걸음을 내딛었다.
여기서 멈춰서면 안 되니까.
산군이 위험하니까.
하지만 그 순간.
“윽!”
쿵!
몸이 기울어짐과 동시에 옆으로 쓰러져 버렸다.
갑자기 왜 이러나 했더니, 그녀의 오른발이 사라져 있었다.
형체를 유지하는 것도 한계에 달한 것이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베어 물며 기를 썼지만 다시금 몸이 재생되지는 않았다.
[으윽.]“산군! 정신이 드십니까?”
그때 쓰러진 충격 탓인지 산군이 침음성을 흘리며 슬며시 눈을 떴다.
서서히 초점을 되찾는 그의 적안을 걱정스런 안색으로 살피는 화란. 그리고 그것을 본 산군이 눈을 번쩍 뜨며 놀랐다.
[너! 몸이 왜 그래!?]“그것은 됐습니다. 몸은 어떠십니까. 성공하신 겁니까?”
[아, 그래.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상은 치료했고, 위험한 고비는 넘긴 것 같다.]화란은 산군의 몸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는 어느새 멎어 있었고, 상처도 서서히 아물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도봉환을 얕본 모양이구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어……. 그렇지?]“예, 저는 산군이 삼도천을 건넌 게 아닌가 불안했습니다.”
[그래. 그리고 너도 고생시켜 버렸지.]산군은 곧 사라질 것처럼 일렁이는 화란을 보며 착잡한 얼굴로 자책했다.
화란이 왜 저리 위태롭게 되었겠는가. 너무 깊게 잠이 들어버린 자신 탓이겠지.
생각해보니 도봉환의 영기를 흡수하려고 했을 때, 일순 영기가 흐트러져 어디론가 빠져나갔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화란이 가져다 쓴 것 같았다.
그리 무리를 하였으니 몸 상태가 저리 된 것도 단박에 이해가 됐다.
귀신의 몸으로 영력을 끌어다 썼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아무래도 시간은 없을 듯합니다. 간단히 말할 테니 잘 들어주십시오.”
산군은 얼굴을 굳히고 그녀의 이야기를 한 치도 빠트리지 않고 귀담았다.
한동안 화란은 그가 잠든 이후의 일들을 설명하고 자신이 걸고 있던 공정강을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
“됐습니다. 더는 여한이 없습니다.”
화란은 그리 말하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꼭 떠날 것처럼.
“그동안 산군과 함께 했던 지난날들……. 참으로 즐거웠습니다.”
[농으로라도 그런 소린 하지 마라! 조금 잠들어 있으면 될 것을, 꼭 그리 놀려야겠더냐!]빙그레 웃은 화란은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려 하다, 손까지 사라지는 것을 보고는 쓰게 웃었다.
“아시겠지만, 무리한 탓에 회복에 전념해야겠습니다. 산군의 품에 안길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몸이 달아오르네요?”
[쓸데없는 소릴 할 거면 빨리 치료나 해라.]산군은 툴툴 댔지만 눈빛만큼은 미안함으로 가득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화란도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죽지 마십시오.”
[빨리 몸이나 회복해라. 네가 없으면 불편하니까.]“어머. 소녀를 그리 의지하셨는지는 몰랐습니다.”
산군은 그녀의 놀리는 말투에도 잠시 말이 없다, 고개를 슬쩍 돌리며 입을 열었다.
[……너와 난 일련탁생(一蓮托生)하는 사이가 아니더냐.]놀리려고 했는데 설마 저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 화란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곤 이내 눈을 초승달처럼 휘며 입꼬리를 올리고 답했다.
“낯간지럽습니다. 게다가 일련탁생은 아니지요. 산군이 흙으로 돌아가면 저 또한 윤회의 길로 들어서겠지만, 제가 죽는다 해도 산군은 살아가실 것 아닙니까?”
[꼭 그리 꼬집어야겠더냐. 시끄럽다! 어서 잠이나 자라!]큭큭, 웃은 화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연기처럼 흩어지더니 산군의 몸속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아마 그녀는 꽤 오랜 시간 잠을 자며 몸을 회복할 것이다.
산군은 착잡한 눈으로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빨리 오너라. 기다릴 터이니.]* * *
우둔산의 우둔지우.
우단은 밤하늘의 서늘한 공기를 맞으며 우수에 찬 눈으로 달빛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정녕 그대의 말이 사실인가.]그의 음성은 퍽 차분해 보였으나, 그 속엔 길길이 날뛰는 분노 또한 내재되어 있었다.
누군가 콕 찌르면 펑! 터져버릴 것처럼.
[그렇소.]그의 앞에 있는 것은 멋들어진 날개와 단단한 부리를 가지고 있는 독수리 영물.
모두가 전투에 임할 때 그는 높은 하늘 위에서 모든 것을 주시하며, 우수들이 전사했다는 것과 도봉환 또한 가져오지 못했다는 것을 하나도 빼지 않고 알렸다.
우단은 지나던 구름이 달을 가리고, 그 달이 다시 모습을 보일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장로, 어찌하실 텐가.]정적을 참지 못한 독수리 영물이 고요함을 깨트리고 물었다.
당연, 산군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수들의 목숨 값은 받아야겠지.]어찌됐든, 우수들의 목숨 값으로 산군이 도봉환을 탈취한 것은 사실. 그것을 그가 갖게 할 수는 없었다.
그저 앞뒤 안 가리고 날뛰는 재주만 있는가 했더니, 아무래도 놈을 너무 과소평가한 모양이다.
‘그 난리판에 도봉환을 모두 훔쳤다라.’
재주도 좋지.
쓴웃음을 지우고 얼굴을 굳힌 우단은 곧장 우둔산에 있는 우수들 전부를 불러내 명했다.
[놈은 도선과의 전투에서 깊은 상처를 입었다. 아무리 놈이 맹호(猛虎)라지만 그 상처를 어찌하지는 못했을 것이다.]이미 벌어진 일.
놈이 상처를 회복한다면 반드시 자신을 죽이러 올 것이다.
상처를 회복하고 도봉환을 복용해 영화로 거듭난다면 일은 걷잡을 수 없다.
그 전에 미리 싹을 잘라야 함이 옳았다.
그리되어 도봉환까지 얻을 수 있다면 자신은 새 생명을 얻고, 우수들 중 뛰어난 이에게 도봉환을 내릴 수도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둔산은 이, 벽 남 지방에서 천년은 평안할 수 있을 것이다.
[찾아라! 반드시 찾아내 죽여라!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가 놈에게 죽을 것이다!]* * *
한편.
지끈거리는 머리와 욱신거리는 몸뚱이.
하지만 산군은 그것을 참아내며 힘겨운 발걸음을 이어가고 있었다.
화란의 이야기가 그를 걸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녀는 말했다.
추살조 중, 한명을 사로잡아 역근환을 만들고 그에게 빙의해 산군의 몸과 흡사하게 만들어 죽였다고.
처음 그 소리를 들었을 때는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의아했으나, 그녀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머리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역근환을 먹고 몸을 변화시켜도 그 상태가 지속될 줄은 몰랐군.’
검선 하나를 잡아 자신의 모습으로 둔갑시키고 말뚝들을 박아 완벽히 위장했다.
애초에 역근환은 갖가지 영초가 가득 들어가는 환단. 먹은 직후, 바로 죽였으니 남아도는 영기가 절로 그 모습을 유지했을 것이었다.
역시 화란이라며 산군은 흡족해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산군은 자신을 쫓아올 놈들을 생각하며 얼굴을 굳혔다.
아무리 역근환으로 위장했다지만 약효가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 된다면 산군의 죽음이 들통 나는 것은 순식간.
‘길어야 이틀이나 사흘.’
어쩌면 그보다 빠를 수도 있다.
그러니 산군이 해야 할 일은, 어서 빨리 백산으로 돌아가 남겨두고 온 것들을 챙기고 미처 아물지 못한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었다.
[염병할 돼지 새끼들.]요상하게 돌아간다 싶었는데 결국 당해버리고 말았다.
산군은 핏물을 떨어트리면서도 빠드득 빠득, 이를 갈았다.
이제 좀 살 만하니 자신을 이리 만든 놈들이 하나둘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도선 놈과 이번 일의 원흉 우단!
[우단 이 개새끼.]산군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넘실거렸다.
그러자 주위의 새들이 그의 살기에 놀라 날개를 퍼덕이며 도망갔다.
천근만근 같은 몸을 이끌며 산군은 돼지 새끼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우둔산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정말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돼지 놈들이었다.
어쩌다 그딴 돼지들한테 당해버렸는지 제 처지가 다 서러워졌다.
하지만 이내 그는 살기를 걷었다. 그나마 위로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얻었으니까.
‘도봉환을 얻은 건 그나마 다행이다.’
하나는 상처를 치료하는 데 사용했으나 그것을 제외하고도 다섯.
산군은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이 녹아 물이 되는 것처럼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영화 영수만 된다면…….’
영화만 이루게 된다면 우둔산 놈들은 모조리 몰살시킬 수 있는 힘을 얻을 터.
게다가 역근환도 몇 개 만들어져 있으니 무서울 게 없음이었다.
당금에 필요한 것은 오로지 몸을 회복시켜줄 안전한 장소.
하지만 그마저도 산군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산해발산고의 세계에 그런 장소 하나 없겠는가? 산군이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산군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힘겹게 몸을 옮겼다.
그로부터 사흘.
백산의 천호군에 누워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흑범이 돌연 몸을 일으켰다.
“주인님.”
어느새 옆에는 검은 소복을 입고, 머리를 곱게 틀어 올린 창귀 또한 함께였다.
[산군이 왔구나!]한쪽 눈가에 3개의 발톱자국이 선명한 흑범이 희색에 젖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연신 히죽거리는 것이, 오매불망 기다리던 낭군님이라도 돌아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틀림없다. 산군의 냄새야.]얼씨구나! 하며 주인 없는 백산에 자리 잡았던 거뭇산의 흑범. 까망호리가 기쁨에 젖어 달려갔다.
여인은 그 어린아이 같은 뒷모습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머금다, 이내 표정을 고치고 주인을 뒤쫓았다.
그리고 잠시 후.
기쁜 마음으로 산군을 향해 뛰어갔던 까망호리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이내 이맛살을 와락 찌푸리더니 노기를 드러내며 외쳤다.
[산군! 네놈……. 어느 놈에게 당한 것이냐!]그 뒤에 서있는 창귀 여인의 얼굴도 의아함이 깃들었다.
백산의 산군이 저리 상처 입고 돌아오다니?
하지만 산군의 모습은 사경을 헤매다 겨우 돌아온 것처럼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던 털들은 메마른 영초와 같았고, 털 곳곳에 들러 붙은 피딱지와 총기 가득했던 그의 적안 또한 흐렸다.
[네놈이 무슨 상관이더냐.]까망호리의 질문에 산군은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다는 듯 뚱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 그야! 내가……. 그, 뭐냐. 그래! 나랑 싸우기 전에 다른 놈한테 얻어맞고 와서야! 이 까망호리님과의 정정당당한 대결을 치를 수 없지 않더냐!]산군은 버벅거리며 말하는 까망호리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피식 웃었다.
[별 미친놈 다 보겠네.]원체 이상한 놈이긴 했지만 대체 왜 저러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할일이 태산이기도 하니, 놈과 어울려줄 정신은 없었다.
[어, 어딜 가나 산군!] [바쁘다. 다음에 놀아줄 테니 나중에 다시 찾아와라.] [다, 다음에 언제! 지금까지 네놈만 기다렸거늘!] [지금까지 기다려?]대체 왜?
[그래! 네놈이 떠나기 전 내 창귀를 시켜 전하지 않았더냐! 못다 한 자웅을 겨루자고! 헌데……. 헌데! 네놈은 이 까망호리가 무서워 도망가 놓고 어딜 가서 두들겨 맞고 온 것이냔 말이다!]창귀를 시켜 전해?
잠시 곰곰이 생각해본 산군은 그제야 기억이 떠올라 탄성을 자아냈다.
[아…….]생각해보니 그랬다.
주인 잃은 창귀를 내쫓고 까망호리의 창귀가 나타나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훗, 이제 생각났더냐??]까망호리는 입꼬리를 꿈틀거리며 무어가 그리 좋은지 큭큭거렸다.
[이 까망호리님이 무서워 도망친-] [그래. 잊어버리고 있었다.]잊어버리고 있었다.
담담한 산군의 대답에 까망호리는 고깝게 그를 바라보고는 자신의 창귀를 쳐다봤다.
“저도 잊어버려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무표정한 낯으로 가볍게 사과한 창귀는 돌연, 등을 돌려 어깨를 들썩거렸다.
큭큭 거리는 소리도 조금 들려오는 걸 보니, 창귀가 제 주인을 놀린 듯 싶었다.
[이익……!]까망호리는 창귀를 바라보며 입을 달싹달싹 거리다 고개를 홱! 돌려 애꿎은 분기를 터트렸다.
[네 잘못이다! 백산의 주인이란 놈이 약속하나 지키지 못하다니! 창피하지도 않느냐!]산군은 멀거니 까망호리를 응시하다 몸을 돌렸다.
[멍청한 놈 상대해줄 시간 없다. 그리 싸우고 싶다면 곧, 백산으로 찾아오는 놈들이 있을 것이니 그놈들과 싸우거라.] [그게 누군데?] [글쎄. 도선일 수도 있고, 우둔산의 우수들일 수도 있겠지.] [도, 도선!? 네놈 도선과 싸우고 온 것이냐?]창귀도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제 입을 가렸다.
“놀랍네요. 도선과 겨루고도 살아 돌아오시다니.”
산군은 더 지체할 수 없어 그들을 무시하고 수풀로 들어갔다.
[자, 잠깐만 산군! 우수들은 어찌 널 노리는……. 어라, 없어졌네.]더 할 말이 남아있었는지, 까망호리가 바로 그를 쫓았지만 어느새 희뿌연 안개가 보임과 동시에 냄새 또한 모호해지더니 사라져버렸다.
“역시, 저 환진은 산군이 만드셨나 봅니다.”
[뭐? 환진? 이게 환진이었어? 난 그냥 안개 끼는 곳이구나 했는데……. 왜 말 안 해준 거냐!]“묻지 않으셨잖습니까.”
[이, 이익!]까망호리는 다시금 분통을 터트리고 창귀는 큭큭 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