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172)
낭선기환담-171화(172/600)
낭선기환담 – 171화
산군은 심드렁한 낯으로 가락지를 바라봤다.
가락지는 흑빛을 띠는 물건으로 보통의 가락지는 아닌 듯 했다.
순간 그의 동공이 확장되며 단령금정이 펼쳐지자 가락지가 뿜어내는 금신통 특유의 기운이 엿보였다.
“네가 만든 것이냐?”
“그, 그런 것이다!”
반응이 퍽 대차다.
노을빛처럼 붉어진 얼굴이 무언가를 대변해주는 듯했다.
“본녀가 퍽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으니 편하게 손에 끼고 다니면 편하기도 편하고…. 어, 언제고 한 번 네 목숨을 지켜줄 수도 있겠지!”
호리가 부리는 사철 비슷한 것으로 만든 가락지인 모양이다.
“그거 말고 다른 건 없냐? 영 쓸모가 없어 보이는데.”
“이, 이거 말고는 없다!”
슬쩍 홍연을 바라보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 있는 게 영 마음이 찝찝하기도 했다.
‘상관없나.’
그러나 가벼운 내기일 뿐이다.
이런 걸로 고민해서 무얼 할까.
호리의 부탁이라면 딱히 내기를 논하지 않더라도 들어줄 의향이 있다.
“그래 좋다.”
“정말인 게지? 무르기 없기다?”
“고놈 참. 내가 누구라 생각하느냐.”
백산의 주인.
백산파의 장문.
산군이다. 입으로 뱉은 말조차 지키지 못한다면 어찌 제자들을 볼 면목이 있을까.
“대호. 네놈의 신통이 아무리 대단 하다지만 머리는 여전해 다행이다. 백산이 아무리 융성해졌다 한들 우리 홍해의 귀수들을 넘어설 수 있을까!”
호리는 일곱 꼬리를 살랑였다.
상기된 얼굴은 벌써부터 내기의 승리를 장담한 듯 싶었다.
“백산이 융성해졌듯이 우리 홍해 또한 독염이 사라져 비대해졌다! 나 구귀의 밑에 있는 귀수들의 수는 모두 일천 이백에 다다랐으니 대호 놈은 어서 패배를 승복해라!”
일천 이백.
꽤 숫자가 늘어났다.
이전에 들렸을 때 구백 정도였으나 독염이 사라지고 많은 귀수들이 밑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늘어난 숫자에 자신의 조력이 숨어 있음을 모르지 않은 산군은 순수하게 기뻐했다.
“잘 됐구나.”
그러나.
“승리를 선언하기에 일렀다.”
산군의 입꼬리가 둥글어지며 턱이 조금 올라가 그녀를 내려다봤다.
“어째서냐? 설마 백산의 제자가….”
호리의 낯이 진중해졌다.
설마하는 얼굴이었다.
산군은 의기양양한 낯으로 말했다.
숨길 게 무엇일까.
“백산의 제자는 일천 육백이다.”
“뭐, 뭐야?!”
한껏 호기를 담아 말하니 믿을 수 없다는 경악성을 내질렀다.
“그럴 리가 없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사, 오백에 이르는 수준이라 들었거늘 어찌 일천 육백이 됐단 말이냐!”
“이런 저런 일이 있었다.”
“거, 거짓은 아니겠지…?”
그러자 산군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아악! 아프다 이놈아!”
이마를 얻어맞은 호리가 두 손으로 감싸며 울상을 지었다.
“금세 들통 날 말을 뭐 하러 하느냐. 전부 사실이니 결과에 승복해라.”
육동과의 선도전에서 많은 제자들을 포용했던 백산이다.
그 정도 숫자가 되지 않는 게 이상하다 할 수 있었다.
‘육동을 대표하는 문파 다섯을 없앤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죽는 것보다야 백산에 들어오는 것이 그들에게도 이로운 일이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네 말마따나 차 한 잔 대접하지 못해서야 백산파 장문의 이름이 울겠지.”
장로들과 몇몇 제자들에게 구귀 일행을 정중히 뫼시라 명했다.
이내 장로와 백산파 제자들이 그들이 지낼 곳과 거처로 안내했다.
그렇게 잠시 뒤.
“정말 오랜만이구나! 내가 이곳에서 지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많이도 변해버렸어!”
호리는 천호군을 둘러보며 짤막한 감상을 전했다.
이전에 그녀가 백산에서 지냈던 기억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산군도 그제야 그때의 일을 상기시키며 옛 추억에 젖었다.
우둔산 놈의 계략에 휘말려 도선과 싸우고 겨우겨우 살아났던 때였다. 그때 호리는 백산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아마 자웅을 겨루려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일도 있었지.’
그 시절에는 고작 도선에게 죽을 뻔하기도 했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찢어 죽일 수 있는 게 도선인데 왜 안 그럴까.
산군은 그땐 그랬지 하며 술병을 들어 호리의 잔에 가득 부어줬다.
“한데 백산의 제자들이 언제 그렇게 늘었는지 의문이다. 정말이더냐?”
“그럼 거짓일까.”
산군은 하는 수 없이 자초지종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술맛도 좋고, 달도 좋고, 모인 얼굴들 또한 좋으니 봇물 터진 것처럼 선도전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뭐? 육동과 선도전을 벌여 그들의 제자들을 외문제자로 들여?
그 미친 소리를 내가 믿을 거라 생각하느냐?!”
허나 호리에게는 도통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반응이 꽤 격했다.
“육동이라 함은 태안의 여섯 문파가 뭉쳐 만든 세력으로 도사들의 총 수는 삼천에 육박한다 들었다. 게다가 그들의 수장인 뇌 선사라는 놈은 그 신통이 지선에 이르렀다고….”
놈은 태선 후경에 이르렀다 들었는데 어찌 영겁 초경인 그가 그들을 전부 격살했다는 말이던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허나 산군께서 이리 계신다는 것이 그 증거가 될 수 있겠지요.”
홍연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녀 또한 연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으나 이내 고개를 주억이며 역시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역시 산군이십니다. 제 안목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산군은 그저 말없이 웃으며 호리에게 받은 반지를 만져보았다.
호리의 금신통인 사철로 이루어진 반지였는데, 그것을 보패화시켜 반지의 모양으로 만든 것이었다.
반지를 매만지던 산군이 영력을 주입하니 돌연 가루로 변하여 손가락에 모여 끼워졌다.
“음…. 이건 왜 만든 게냐?”
딱히 이렇다 할 쓸모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냥 한 번 만들어봤다. 싫으면 내놓거라. 내겐 소중한 물건이니!”
“손에 쥔 걸 어찌 내놓을까. 됐다.”
하지만 어떤 쓸모가 있는지는 산군도 예측하기 어려웠다.
보다 못한 홍연이 입을 열었다.
“호신을 위한 것입니다. 끼고 다니 시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언제고 불의의 습격을 막아내 줄 테니 속는 셈치고 항상 지니고 계셔주세요.”
“그런 것이었나.”
산군이 자신의 봉악청화로 갑옷을 만들거나 하는 것처럼 신통 특유의 정수를 담아 만든 보패인 모양이다.
자세한 내력을 알지는 못하겠으나 지니고 있어서 나쁠 건 없어 보였다.
“근데 내기에서 이기면 내게 부탁할 게 있다고 했지? 그게 무어냐. 너와 내 사이니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으니 기탄없이 말해봐라.”
허나 호리는 눈동자를 굴리며 왠지 쭈뼛거렸다.
산군은 또 시작이구나 싶어 홍연을 바라봐 대신 답해줄 것을 바랐다.
“자웅을 겨루고 싶으다 하셨으나… 뇌 선사를 꺾으셨다 하셨고, 내기에서도 졌으니 말하기 꺼리는….”
“호, 홍연! 뭘 그리 미주알고주알 다 말하고 그러는 것이야!”
“우물쭈물 거리시기에 제가 대신 말해주길 바라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 게 아니다! 그리고 우물쭈물이라니! 본녀가 언제 그랬느냐!”
“아니면 아닌 거지 왜 화를 내고 그러십니까. 산군님 앞인데 창피하지도 않으신 겁니까.”
“뭐, 뭐 어때! 그럴 수도 있지!”
“예. 그렇기에 저도 다 말한 겁니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기에.”
또 티격태격 싸우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호리는 분통이 터졌으나 언변에 재주가 없었다.
화를 삭이려 술잔을 꺾으니 화는 이내 취기로 변해 가는 듯했다.
“자웅? 그러고 보니 검둥이 넌 심심하면 싸우자며 덤벼들었었지.”
그러고 보니 예전엔 그랬었다.
호리가 거뭇산의 까망호리였고, 산군이 백산의 산군이었던 시절.
호리는 자주 산군에게 시비를 걸며 자웅을 가리자 했었다.
“항상 꼬리 말고 도망가던 게 무슨 자웅은 자웅이냐. 술이나 처먹거라.”
“내가 언제!! 도망은 갔을지언정 꼬리를 만적은 없었다!”
그게 그거가 아닌가 싶으나 그녀에겐 퍽 다른 의미인 듯 했다.
“한데 갑자기 자웅은 왜.”
“크흠. 이미 지나간 일이니 됐다.”
말해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싫으면 됐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으니.
산군은 술을 한 모금 머금고는 표정을 달리해 물었다.
“백귀야행은 어찌 됐느냐.”
그러자 호리도 술상에 올라온 꿀떡을 하나 집어 먹으며 말했다.
“음, 안 그래도 말하려 했었다.”
호리가 홍연을 바라보며 턱짓했다.
그러자 홍연이 품에서 서찰을 꺼내 산군에게 건넸다.
곧장 서찰을 펼치니 그 안에는 여러 이야기가 담겨 있었는데, 대부분은 십해만척의 전황들이었다.
산군은 빠르게 읽어보고는 한 가지 걸리는 점을 발견했다.
대부분의 내용에 꼭 등장하는 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 인상착의와 신통이 퍽 익숙한 것이었다.
“뇌신통 도사이며 태선 중경이지만 지닌 보물들과 신통이 역천의 힘을 지녀 귀왕 셋이 중상을 입었다라….”
선도문과의 전쟁 중, 도사 한명에게 귀왕 셋의 합공이 물거품이 되고 큰 피해를 입었다는 이야기였다.
각별히 주의하라는 당부와 함께 놈의 용모파기와 직책과 이름 또한 적어져 있었다.
“일월문 대장로. 유정이라…”
십해의 귀왕 셋이 합공했어도 역으로 중상을 입힌 실력자.
중상을 입은 귀왕들 모두 영겁 후경에 달했기에 더욱 놀라웠다.
“안 그래도 그놈 덕분에 난리도 아니다. 아마 이번 백귀야행에서도….”
놈의 이야기가 나올 거란 얘기였다.
‘하긴 400년이 지났으니 놈이 다시 활개를 칠 때가 왔구나.’
잠시 잊고 있었으나 이곳은 산해 발산고의 세상 속.
산군의 개입으로 많은 것이 파도 앞 모래성처럼 허물어졌으나, 일어나야 할 큰 줄기는 일어나기 마련이다.
‘놈은 귀수는 물론, 영수 또한 좋아하지 않는 놈이니 당연한 수순이지.’
유정과 십해만척과의 충돌은 진즉에 예상하고 있던 일이다.
‘하필 이 시점이라는 게 문제지만.’
산군이 귀왕이 되려는 시기에 유정이 활동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이번 대 귀왕 선출 후. 대대적으로 방곡에게 선전포고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되면 당연히 도계에 피바람이 불겠지요.”
“피 냄새를 맡은 마도나 사도 놈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군.”
그리되면 대대적으로 혼란이 야기되어 오래토록 전쟁이 이어질 것이다.
“이 시기에 귀왕이 된다는 건….”
하나의 좌를 차지하는 귀왕으로서 전장에 참가할 수밖에 없다.
“판이 커진다면 흘러야 할 피 또한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겠지요.”
“대호야. 잘 생각해 봤느냐? 나 또한 구귀로서 전쟁에 참가할 수밖에 없으나 넌 아직 아니다.”
산군은 아직 귀왕이 아니다.
십해만척에 속하지 않으니 곧 펼쳐질 혼란에 섞이지 않아도 될 터.
호리와 홍연은 그것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이다.
“확실히….”
그리된다면 이야기가 또 다르다.
산군이 귀왕이 되려는 것은 오귀와의 마찰을 빚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영원에 오를 때를 대비해 백귀야뢰겁을 보장받기 위함이다.
‘그러나 전쟁이 터진다면.’
오귀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놈 또한 전쟁 준비로 자신에게 신경 쓰지 못하지 않겠는가.
도리어 그 틈을 노려 놈의 숨통을 끊어 놓는 것도 가능할 터.
‘더불어 유정 그놈이라면….’
익히 알고 있던 세상과는 많은 게 달라졌으나 유정 그 놈이라면 십해만척을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영수와 도사가 함께 있는 백산파 또한 가만두지 않겠지.
산군은 자신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호리를 보았다.
이 세상에 얼마 없는 벗이다.
그녀에게 도움 받은 것을 어찌 셈을 치룰 수 있을까.
‘도를 향하는 길에 정을 멀리하라는 게 이런 뜻이었을까.’
고민하던 그는 이내 결단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