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18)
낭선기환담-17화(18/600)
낭선기환담 – 17화
안개가 자욱이 깔린 환진 속을 거침없이 나가던 산군은 물 냄새를 맡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명화. 나와 보거라.]그리고 잠시 뒤.
그와 깊은 인연을 맺은 잉어 영물, 태양화리가 모습을 드러내며 흠칫 놀랐다.
[산군이시여! 그 몰골은 대체……!]산군은 간단히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그를 납득시켰다.
함정에 빠졌고, 격렬히 싸우다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렸다고.
[화란님이…….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네 알들. 소중하게 잘 사용했다. 벌써 하나밖에 안 남았어.]그러자 명화라 이름붙인 태양화리의 몸이 은은한 금빛을 빛내며 몸을 꿈틀거렸다.
‘기쁜가보네.’
[당장 준비를 하겠습니다. 헌데, 그러면 옆에 동자 놈도 데려가시는 겁니까.] [뭐, 그래야겠지. 내버려뒀다간, 도선 놈들한테 먹혀 버릴 테니.]명화는 잠시 말없이 뻐금거리며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침음을 삼켰다.
[너희들 사이가 좋지 않은 건 익히 알고 있으나, 좀 참거라. 상황이 상황이니.] [크흠……. 그리 말씀하신다면.]명화는 알겠노라 말하며 준비를 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 말하고는 호수로 들어갔다.
아마도 제 마누라와 자식들을 챙기고 오려는 것이겠지.
산군은 그리 생각하며 호수 옆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슬쩍 몸을 돌려 우거진 수풀을 지나자, 조그마한 공터가 나오고 청량 감이 맴도는 향기가 그의 핏물로 얼룩진 콧속을 어루만지는 듯 했다.
공터에는 균일하게 심어져 있는 산삼들과 각종 이름 높은 영초들이 한 가득 피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한가운데 은은한 빛을 내며 피어있는 보라색 꽃.
그것을 보며 산군은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파묻혀 있을 셈이냐. 갈 길이 바쁘니 어서 나오거라.]그러자 신기하게도 우득, 우드득.
소리를 내며 영초가 저 혼자 몸을 움직이는 게 아닌가! 초아가 있었다면 분명 깜짝 놀라 산군의 뒤에 숨었을 것이었다.
산군은 씁쓸히 미소 지으며 얌전히 기다렸다.
녀석은 천천히 흙에서 뿌리들을 걷어내며 밖으로 나오더니, 이내 서서히 인간의 모습으로 화하기 시작했다.
머리위에 은은한 보라색 꽃이 달린 동자로 변한 녀석은 산군을 보며 우다다 달려들었다.
[산군님!!] [붙지 마라. 피 묻는다.]산군은 달려드는 동자를 앞발로 밀쳐내며 막았다.
녀석은 만년 묵은 산삼이 영물화 한 것으로, 태양화리와 마찬가지로 그가 취하려다 불쌍해 거둔 놈이었다.
[그리고 만삼아. 내 말하지 않았더냐. 벌거벗고 안기려 하지 말란 말이다.]사내놈이 벌거벗고 안기려 하는 것만큼 두려운 일은 없었다.
만삼이라 불린 동자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다가 수풀로 폴짝 뛰어들더니 회색의 장삼 하나를 가져와 입었다.
[다 입었어요, 산군님! 이제 안겨도 되죠?] [피 묻어서 안된다니까? 그리고 갈 길이 바쁘니 어서 산삼과 영초들을 모으거라.]산군의 단호한 음성에 만삼은 입술을 삐죽이며 손을 영초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이 식물처럼 변하며 여러 갈래로 갈라져 흙속으로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심어두었던 산삼들과 영초들을 수거한 만삼이 산군에게 그것을 보이자, 산군은 그것을 쥐고 공정강 속으로 집어넣었다.
[가자. 명화 가족도 데려가야 하니.] [네? 그 생선 대가리도요? 그냥 버리고 가시지…….] [이놈아. 내버려두면 잡아먹힐 게 뻔한데 어찌 그러냐. 거참, 사이좋게 좀 지내라 했거늘…….]둘 다 비슷비슷한 놈들끼리.
산군은 그 말을 속으로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아! 같이 가요!]그리고 잠시 뒤.
티격태격하는 소음이 들린 후, 고요해진 환진 속에서는 오로지 산군의 발걸음만 들려왔다.
* * *
[홍연(紅緣)! 너라면 환진 부술 수 있지 않아?]환진 바깥에서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던 까망호리가 창귀를 보며 물었다.
홍연이라 불린 창귀는 검지로 제 입술을 톡톡 두들기다 고개를 주억였다.
“아마 그럴 것이옵니다.”
[그럼 부수자!]“……주인님. 그리하시면 산군께서 노하실 겁니다. 산군께 미움 받고 싶으시다면 그리 해드리죠.”
[앗! 그, 그건 안돼!]홍연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물었다.
“산군님이 걱정되십니까.”
[그, 그야……. 많이 다쳐서 왔잖아. 건드리면 픽! 쓰러질 것 같았어!]“예, 그러시겠죠. 상처는 아물어 가는 듯 싶었지만, 그렇다 해도 원래는 거동도 힘든 상태일 겁니다. 저리 돌아다니는 것이 용하더군요.”
[그러니까! 자빠져 잠이나 자면서 쉴 것이지, 뭐가 그리 바쁘다고…….]“잊으셨습니까. 인간들과 얽히고, 우둔산의 우수들에게 쫓기고 있다하지 않으십니까. 제발 생각 좀 하고 말해주십시오.”
[아, 알아! 깜빡했을 뿐이야!]영 못미덥다는 듯 제 주인을 흘긴 홍연은 돌연 고개를 돌려 환진을 바라봤다.
“그럼, 산군이 오시면 걱정된다고. 주인님이 도울 것이 있냐 물어보시지요.”
[그, 그치만 산군은 날 귀찮아하는걸…….]스르륵.
환진에서 홀연히 나타난 산군이 아직도 있는 까망호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간간이 나타나서 시비 거는 게 일인 놈이긴 했지만, 몸이 편치 않아서 그런지 묘하게 얼굴만 봐도 짜증이 났다.
[앗! 산군! 비, 비실대는 네놈을 보니 가, 가만있어도 배가 부르구나!! 으카카카!]홍연은 주인의 멍청한 짓거리에 대놓고 한숨을 쉬고, 산군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뭐래 병신이.] [벼, 벼 병신!? 어, 어떻게 그리 심한 말을!] [비켜 바쁘니까.] [모, 못 비킨다! 아직 내 말이 끝나지 않았어!]산군은 질색이라는 듯 까망호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죽여 버릴까.’
생긴 거랑 다르게 원체 빈약한 놈이니 청염호조 한방이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산군이 자랑하는 앞발차기로 저 멍청해 보이는 얼굴을 맞추기만 한다면 그리할 수 있을 터.
‘싸우자는 것도 아니고, 왜 이렇게 귀찮게 하는 거야.’
산군은 마음이 조급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한참, 놈들이 지척까지 다가왔는지도 모를 일인데.
어서 빨리 몸을 숨기고 상처를 완전히 회복해야 했다.
그 이후로도 도봉환을 복용하여 경지를 높이고, 역근환으로 둔갑도 해야 하고……. 할일이 태산이었다.
헌데, 이 검둥이가 제 앞을 막으니 짜증이 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하아, 관두자.’
몸 상태도 별로 좋지 않음은 물론이요, 청염호조를 빗맞히기라도 한다면 놈과 지금 곧장 싸워야 할지도 몰랐다.
그리 된다면 불리한 것은 당연 산군이었다.
게다가 까망호리는 자신을 귀찮게는 해도, 항상 정정당당한 승부를 요구하는 놈이었다.
산군은 그런 놈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제 욕심만 채우려 하는 놈들이 태반인 세상에 이런 단순한 멍청이는 보기 드물었으니.
[그, 그러니까 말이지- 엑!]“산군님. 소녀의 말을 한번 들어봐 주시겠습니까.”
까망호리가 뭐라 말하려는 찰나, 가만히 있던 창귀가 까망호리의 머리를 엉덩이로 밀치며 산군의 앞에 섰다.
[뭐지?]“산군님은 적들에게 쫓기고 있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산군님은 혼자시고, 몸 또한 성치 않으시죠.”
[근데?]“그러니, 제 주인님과 동행하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뭐?] [어?! 내, 내가 산군이랑!?]홍연은 말없이 까망호리를 닥치라는 듯 내려다봤다. 까망호리는 꼬랑지를 내리고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산군은 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그것을 바라보다 창귀를 바라봤다.
“까망호리님은 산군님과 자웅을 겨루고 싶으신 것뿐입니다. 물론, 몸을 전부 치료하신 이후에 말이죠.”
그녀의 말이 끝나자 산군의 낯이 묘해졌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창귀가 뭔가 수를 쓰는 것 같아 보였지만, 그래봤자 까망호리는 산군의 아랫줄이고 저 멍청한 녀석이 그리 나쁜 놈이 아니라는 것은 산군 또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저쪽에서 먼저 함께 하자는 말에 나쁠 것은 없었다.
‘망수단까지 가는 것이 조금 먼 길이기는 하지.’
망수단(望守團)
백산에서 남동쪽으로 열흘 거리에 있는, 산군만이 알고 있는 비동이었다.
지하에 만들어진 곳으로 몸을 숨기기에 이만한 장소가 또 없었고, 무엇보다 백산에 제일 가까운 위치에 있는 곳이다.
하지만 제일 가까운 거리가 열흘거리.
그 사이에 적들에게 기습을 당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다.
산군으로서는 수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그가 손을 벌려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어떠십니까. 주인님은 적당한 때에 산군님과 자웅을 겨룰 수 있으니 좋고, 산군님은 적의 위협에서 무사히 바라는 곳까지 닿을 수 있으시겠지요.”
하지만 산군은 침묵했다.
조건은 더 없이 좋다. 그러나 산군의 눈은 깊게 가라앉아 까망호리와 창귀를 바라봤다.
‘너무 조건이 좋다.’
그것이 오히려 수상하다면 수상했다. 아무리 놈을 오래 봐왔다지만, 그렇다 해서 놈을 믿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저 얼빠진 얼굴을 보면 이런 의심을 하는 것이 무의미해 보이긴 했으나 무턱대고 놈을 믿기엔 확신이 부족했다.
산군은 이미 우단의 함정에 빠졌었고, 그것으로 그는 죽기일보 직전까지 갔다 왔다.
쉽사리 믿을 수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었다.
굳이 이들과 함께하지 않아도 산군은 망수단까지 갈 자신이 있었다.
화란의 기지로 시간은 벌어놨고.
그 이후로 지체 없이 백산으로 달려왔으니 놈들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을 것이다.
[뭐, 뭐야! 내가 어디가 못 미덥다고-]“그렇담 이리 하시지요.”
또 다시 제 주인의 말을 막은 창귀가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순간 소매 속에서 익숙한 빛이 산군의 눈에 비쳤으나, 그는 짐짓 모른 척 가만히 기다렸다.
[이건…….]“혹, 이것을 아십니까?”
모를 리 없다.
그녀가 꺼낸 것은 복좌패(伏佐牌).
모르는 이라면 그저 보통의 나무 명패로 보겠지만, 그 명패에 흐르는 은은한 영기는 그것이 영패(靈貝) 중 하나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복좌패는 그 이름대로 영수를 복수로 만들어 부릴 때 사용하는 것.
저 명패에 이름을 적고, 술식을 짜넣어 영수의 혼의 일부를 넣으면 제 입맛대로 부릴 수 있는 보패였다.
[그게 뭔데?]“주인님은 조용히 계십시오.”
홍연에게 혼난 까망호리가 콧김을 킁! 내뱉고는 등을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산군은 혼란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복좌패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다는 것은 그것을 지닌 이에게 제 목숨 줄을 쥐어주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하는가.
산군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산군님은 이리 생각하시겠지요.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하려는 것인가.”
산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창귀를 응시했다.
생각해보니 이상하다.
창귀란 범에게 종속된 존재.
범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범이 마음만 먹으면 혼백을 갈가리 찢어버릴 수도 있다.
게다가 소매에서 순간 은은하게 반짝인 빛.
그것은 공정강의 빛이었다.
색이 그리 밝지는 않았지만, 공정강 특유의 호박색 빛이 번뜩였으니 산군의 눈은 속일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이 창귀는 귀기가 느껴지지 않아.’
정말 창귀가 맞나?
산군의 신뢰를 얻으려 복좌패를 꺼냈지만, 그는 오히려 이 상황에 긴장하고 있었다.
“뭘 그리 망설이십니까. 복좌패를 쥔다면 저희가 산군님을 해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시다 하진 않으시겠지요.”
선선히 웃으며 복좌패 두개를 산군에게 건네는 홍연은 어서 가져가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아, 이런. 저란 사람이 이런 실수를.”
그리 말하며 홍연은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고는 영패에 이름을 적었다.
그것으로 산군은 확신했다.
‘창귀가 아니군.’
붉은 피.
창귀가 피가 날 리가 없다.
그녀는 창귀가 아니다.
헌데 희한하게도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기운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런 점이 오히려 산군을 두렵게 만들었다.
‘자신의 기운을 이리 완벽하게 숨길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나보다 몇 계단 위의 영수일 터.’
홍연은 그런 산군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명패에 적고, 까망호리의 피까지 받아내 명패에 이름을 적고는 결을 읊어 자신의 혼을 담았다.
까망호리의 것도 함께였다.
[으악, 이거 뭐야!]자신의 몸에서 조막만한 빛 덩이 하나가 영패로 날아가자 까망호리가 놀라 펄쩍 뛰었다.
“조용히 계십시오, 주인님.”
‘주인님이라……. 주인님. 그래……, 그렇군.’
영수 중에는 그런 영수가 딱 하나 있긴 하다.
맞는지 아닌지 모를 일이나, 자신이 정한 이를 주인으로 모시며 그를 보좌하고 수호하는 희한한 영수.
그것을 떠올린 산군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자, 받으시지요.”
홍연이 산군에게 건네는 피로 적힌 복좌패.
산군은 그것을 떨떠름히 받고는 가볍게 영기를 흘려 넣었다.
퉁.
잠시 명패가 박동하고는 순식간에 산군의 몸속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이것으로 그 둘은 산군의 복수가 되었다.
정말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에 산군은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했으니 그들이 자신을 배신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괜찮습니다. 그동안 봐온 산군께서는 저희의 목숨 줄을 잡고 위협하는 일은 없겠지요. 근 50년을 보았으니 제 눈은 틀리지 않았을 겁니다.”
[뭐……, 그, 그렇긴 하지? 산군은 비겁한 자는 아니니까! 그럼그럼!]까망호리는 뭘 한 건지도 모르면서 으레 아는 척 으스댔다.
산군은 얼떨떨한 낯으로 둘을 멍하니 응시하다 돌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 뭐가 그리 웃기냐!]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하, 정말 어이가 없군.]호랑말코라 불리기도 하는 자신을 이리 믿어주다니, 어이가 없음이었다.
산군은 궁금한 것이 많았으나 그것을 뒤로 미루고 몸을 돌렸다.
[가자, 갈 길이 멀다.] [그, 그래! 네놈 꼬라지가 말이 아니니 이 까망호리님이 친히 따라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