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182)
낭선기환담-181화(182/600)
낭선기환담 – 181화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숨조차 쉬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무섭도록 정신은 멀쩡했다.
자신의 몸에서 새어나가는 연기는 꼭 생명력이 그대로 빠지는 듯했다.
“주인, 주인님! 으아아악!! 주인님!!”
홍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대답할 수 없었다.
입이 굳어버렸기 때문이다.
붕양초수의 무서움은 익히 들었다. 한 호흡 만에 온몸이 굳고, 이내 몸속의 진기가 빠져나가며 연기로 화한다. 결국에는 몸이 바스러져 붕괴하고 마지막에는 흔적도 남지 않는다.
존재조차 말끔히 지워지는 것이다.
뼛조각 하나도 남지 않고 순식간에 죽어버리니 가히 십대 극독 중 제일이라 칭할 만했다.
‘죽어? 내가?’
죽음이라는 두 글자가 등 뒤로 조금씩 다가오는 듯 했다.
아니, 조금이 아니다. 빨랐다.
너무도 빠르게 다가왔다.
발을 놀려 도망쳐보지만, 어느샌가 등뒤에 붙은 것처럼 다가왔다.
‘아….’
그러고보니 그때도 이러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
숨 가쁘게 도망치다 기력이 다해 죽을 뻔 했던 그날.
그날도 이러했다.
수백 년 전.
그놈을 처음 만났을 때도.
이처럼 죽음이 가까웠었다.
* * *
사백 오십년 전.
나는 평범한 여우, 호리였다.
특별한 핏줄은 지니지 않았다.
극히 평범한 들짐승이 바로 나였다.
부모가 누구인지, 형제가 있었는지도 모르는 들짐승.
배가 고프면 사냥을 하고, 잠이 오면 굴에서 잠을 자는 평범한 여우.
털이 까맣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특징조차 없는 여우다.
하지만 그때의 난 개의치 않았다.
어찌 사는지도 모르고, 그저 살아 있기에 살아가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살았다.
사냥하고, 때론 사냥당할 뻔 하기도 하며 사는 그런 짐승.
그게 바로 나였다.
만족이라는 글자도 모르고, 배가 부르면 좋았던 나날들.
나의 튼튼한 다리로 이 산 저 산을 뛰어다니면 그저 기분이 좋던.
그런 나날들이 이어졌다.
나의 삶은 그러했다.
평온하며 평탄하고, 걱정거리 따위는 없는 한적한 삶.
하지만 그런 삶에도 끝은 찾아왔다.
타닥타닥타닥!!
본능적으로 느꼈다.
날 노리는 짐승이 있었다.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보통의 짐승은 아니었다.
영수였다.
놈이 무어라 알 수 없는 소리를 뱉어냈으나 난 이해할 수 없었다.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나의 자랑은 튼튼하고 날쌘 다리.
난 내 다리를 믿었다.
하지만 비참하게도 놈의 다리가 훨씬 더 빨랐다.
놈은 나를 가지고 노는 듯 내 옆에서 뛰며 날 넘어뜨리고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고는 또 쫓았다.
악질 중의 악질이었다.
죽일 거면 그냥 죽이지 그러한 농락질은 왜 하느냔 말인가.
놈의 장난질과 다르게 그때의 나는 살고 싶었다.
살고 싶었기에 뛰고 또 뛰었다.
숨이 차오르고 몸이 뜨거워졌다.
숨을 돌리고 몸을 식히고 싶었다.
그늘에 들어가 혀를 내놓고 숨을 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놈은 끈질기게 날 쫓았다.
쉴 수 없었다.
이 산을 넘고, 저 산을 넘었다.
지금 달리는 곳이 어디인지 나조차 모르게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던 중.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되었다.
몸이 뜨거워 머리가 핑 돌았다.
몸이 터질 듯 숨이 찼고, 움직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제야 놈은 낄낄거리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난 그때가 되서야 놈의 생김새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놈은 멧돼지였다.
멧돼지는 내가 뛰고 뛰다 지쳐 죽기 직전이 되서야 날 건드렸다.
지저분한 주둥이로 날 몇 번 뒤적이더니 더 뛰어보라는 듯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러나 난 이미 기력을 다했다.
혀는 길게 빼어져 있었고, 열이 뻗어 눈은 초점이 맞지 않았다.
멧돼지는 이내 흥이 식었는지 흉측한 입을 벌렸다.
난 본능적으로 죽음을 예감했다.
그때였다.
크와아아앙!!
우렛소리 같은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거대한 무언가가 내 앞에 떨어지는 충격이 퍼졌다.
꾸이이이이익!!
멧돼지의 비명이 산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그제야 눈을 뜬 나는 온몸이 바짝 얼어붙었다.
주홍빛의 갈색 털과 멋들어지게 이어진 흑색 줄무늬.
그리고 위엄 넘치는 얼굴과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붉은 눈.
분위기만으로 모든 것을 압도하는 강력한 맹수.
그것이 바로 내가 처음 본 산군이었으며, 처음으로 본…
범이었다.
* * *
파지직! 파직!
홍연의 몸에서 붉은 뇌전이 튀었다.
“흐아아아아아!!”
그녀의 눈이 붉게 변하고 몸에서 털이 자라났다.
붉은색 털이었다.
이내 그녀는 적뇌주랑.
적색의 늑대로 변해 붉은 뇌전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쿠르릉 콰앙!!
그러나 금색 석장은 그녀의 몸을 옭아매고 있었다.
대체 무슨 보물인지 홍연의 강력한 적뇌도 버텨낸다.
하지만 그마저도 잠시뿐.
서서히 옭아맨 석장의 색이 바래지기 시작했다.
미친듯이 펄떡이는 적색 뇌전이 석장의 기운을 갉아 먹었다.
치지지지지지직!!
“적뇌주랑?”
“흔치 않은 걸 다 보네요.”
살아생전에 적뇌주랑을 보게 될 줄이야. 전설로만 전해지는 영족이 아니던가. 유정의 낯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순.
이내 품에서 비도 여러 개를 꺼내 단숨에 집어 던졌다.
푹푹!
크아앙!!
적뇌주랑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지금 당장 죽이지는 않겠다. 죽지 못해 사는 꼴을 보여줄 테니. 기대해도 좋다.”
그것은 다른 귀왕들 또한 마찬가지.
금색 석장이 변한 금추나를 풀어내려 안감힘을 쓰고 있으나 소용 없다. 점점 금추나의 기운이 약해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풀어낼 때는 전송이 끝마쳐진 이후일 터!
유정은 참을 수 없다는 듯 광소하며 귀왕들을 흘겼다. 적뇌주랑은 묶여 있으면서도 어떻게든 구귀에게 다가가려 발버둥이었다.
“소용없다. 붕양초수에 당했으니 이제 곧 흐드러질 터. 적뇌주랑인 네가 가장 잘 알 텐데?”
붕양초수는 적뇌주랑이 만들었으니.
유정은 고개를 돌렸다.
구귀는 우두커니 선 채로 서서히 몸 표면이 갈라지고 있었다.
표면이 돌처럼 변하여 먼지로 흐드러질 준비가 되가는 것이다.
갈라진 틈에서 진원진기가 새어나오고 있었으나, 그마저도 이제 끝이다.
‘참 대단한 독이군.’
연기가 옅다.
그와 반대로 전송진의 빛은 밝다.
유정의 입꼬리가 둥글어졌다.
그는 이내 두 팔을 펼쳤다.
휘릭.
장포의 소매가 펄럭이고, 철공미궁이 핏빛으로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기이이이잉!
세상이 전부 핏빛으로 물든 것처럼 불길한 빛.
전송진의 빛이 밝게 타올랐다.
* * *
그 시절에는 몰랐으나 후에 들었다.
흉흉한 안광을 번득이며 날 농락하던 멧돼지를 단번에 제압하는 범.
그가 바로 백산의 산군.
대호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꾸이익! 꾸익! 꾸익!
놈은 내 앞에서 의기양양하던 것과 다르게 비굴하고 비루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듯했다.
속으로는 내심 바랐다.
절대 살려주지 말라고.
정말 못된 놈이라고!
그런 내 마음을 알았을까.
[뭐 시발.]콰직!
무어라 말한지는 모르겠으나 산군은 거대한 앞발로 단숨에 놈의 머리통을 부숴버렸다.
단숨에 절명한 놈의 모습에 쾌재를 불렀으나 이내 두려움이 엄습했다.
범의 눈이 날 향했기 때문이다.
두려웠다.
한치의 흔들림 없는 붉은 눈은 날 꿰뚫어보듯 내려다봤다.
그것이 두려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눈을 피할 수 없었다.
마치 빨려들어가는 것처럼.
그리고 잠시 뒤.
산군은 몸을 틀어 유유히 사라졌다.
내가 곧 죽을 거라 생각했던 건지 아니면 일부러 살려둔 건지는 모른다.
중요한 건 살았다는 거였다.
그러나 이대로 쓰러져 있으면 다른 짐승들에게 사냥 당한다.
그러니 난 움직여야 했다.
본능적인 생각이었다.
덜덜 떨리는 몸과 핑핑 도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겨우겨우 일어났으나 내 시선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멧돼지의 찢겨진 몸에서 달빛을 받아 유난히 빛나는 그것.
내단이었다.
그때의 나는 무엇인지도 몰랐으나 본능적으로 내단을 탐냈다.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다.
붉은 내단이었다.
마치 방금 전의 범과 같은, 빠져들 것 같은 붉고 둥그런 내단.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난 그것을 한입에 삼켜버렸다.
그 이후의 일은 잘 기억이 안 난다.
정신차려 보니 난 말을 할 수 있었고, 지성을 얻은 상태였다.
어딘가로 굴러 떨어졌는지 어떤 동굴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났다.
거대한 붉은 늑대.
[담도 크구나. 기운을 감추고 있었다지만 들짐승들도 내 거처에는 다가오지 않는데, 이제 막 영수가 된 녀석이 굴러들어올 줄이야.]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크기였다.
앞서 만난 산군보다 거대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산군이 풍겼던 분위기는 없었다.
보이지 않았다면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냄새는 맡아졌다.
동굴 안은 피 냄새가 매우 짙었다.
상처 입은 듯 했다.
그러나 내게는 두려운 존재였다.
[나, 난 범이다!]잘 나오지도 않는 말로 그리 외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홍연의 얼빠졌던 얼굴이 이해가 된다.
[…넌 여우가 아니더냐.] [난 범이다! 범이 될 것이야!]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리 떠들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다.
이제 막 입이 트여서일까.
아니면 지성을 갖게 되어서일까.
나는 한참이나 봇물 터진 듯 그리 떠들었다.
[난 범이 될 거다! 반드시 범이 되서… 아무튼 범이 될 거다!] [대화가 이어지질 않는구나.]홍연은 저 혼자 떠드는 여우가 귀여웠는지, 그도 아니면 지쳐버렸는지 날 내버려두고 바라보기만 했다.
난 바보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범이 되서 내 산을 가질 거다! 그 돼지 놈도 혼내줄 테야! 그리고 그리고… 그 범과 싸워 이길 테다!] [별 미친놈들은 다 만나봤지만 네가 제일 어처구니없는 놈이구나. 여우년이 범이 되고 싶다니…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는 처음이다.]어이가 없다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웃음기가 가득해 웃고 있는 듯했다.
[범이 되고 싶다라… 정말로 범이 되고 싶은 게냐?] [당연하지! 난 범이 될 거다!]붉은 늑대가 씨익 웃었다.
검은 여우를 보는 늑대의 눈동자에 다른 무언가가 비추는 듯 했다.
날카로웠던 늑대의 눈이 순간 둥글어졌다.
팟.
빛이 터지고 허공에서 붉은 머리칼을 지닌 아리따운 여인이 나타났다.
“제 주제도 모르고 설쳐 대는 것들과는 다르시니 이 또한 인연.
붉은 실로 이루어졌다 할 수 있으니 내가 바라오던 이상과 맞다.
그치들과는 다르게 골이 비었으나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기도 하니 네 소원 내가 이루어주마.”
여인은 이내 한쪽 무릎을 꿇고 내게 고개를 숙였다.
“범이 되겠다는 허무맹랑한 말.”
반드시 이루어드리지요.
* * *
“정신을!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주인님!! 주인! 으으윽!!”
홍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리 흥분한 홍연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 눈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다.
먹먹하게 들려오는 홍연의 목소리만이 그녀의 표정과 감정을 전해올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이내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주변의 소리도.
홍연의 목소리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내 눈은 어둠만을 보여줄 뿐이고, 온몸의 감각은 사라진 지 오래다.
어쩌면 난 이미 죽은지도 모르겠다. 실감이 나지 않다.
아직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았고, 이루지 못한 것도 많았다.
그리고 전하지 못한 것도.
‘아아.’
전하지 못한 것.
그놈에게 전하지 못한 게 많다.
무척이나 많다.
순간 놈의 모습이 그려졌다.
눈은 보이지 않아도 그놈의 모습은 어찌 이리 생생한지.
마지막까지 마음을 뒤흔든다.
하지만 이 또한 부질없는 짓.
흐드러질 것이라면 빨리 가고프다.
그리해야 다시금 태어날 테니.
‘다시금 태어나 널 볼 테니.’
그때였다.
[검둥아.]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