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186)
낭선기환담-185화(186/600)
낭선기환담 – 185화
모래먼지가 폭풍이 되어 회오리바람으로 화해 사라질 때.
잘린 팔 한 짝을 들고 있는 산군은 자신이 만든 참상을 목도했다.
황폐해져 버린 일대는 거대한 폭발로 인해 초토화되었고, 능선 너머까지 이어진 참격은 지면을 절벽으로 갈랐다.
“쿨럭!”
주르륵.
흘러내린 선혈을 따라보니 산군의 얼굴은 원기가 적잖이 상했는지 수척해져 금세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팔 한 짝인가….”
산군은 손에 들린 팔 한 짝을 복잡한 심경으로 보았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유정의 팔 한 짝은 잘랐으나 놈을 죽이진 못했다.
“팔이 아니라 놈의 목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놈은 간발의 차이로 공간 균열 속으로 도망쳤다.
이 팔 한 짝을 놓아둔 채.
하지만 산군의 입꼬리는 왠지 모르게 올라가 있었다.
이유는 잘린 놈의 팔이 꼭 쥐고 있는 하나의 물건 탓이었다.
소 모양의 등잔.
일귀가 지녔던 천양지보.
고구천우(古丘天牛).
그것을 빼앗았기 때문이었다.
“크윽…”
털썩.
한쪽 무릎을 꿇었다.
대부분의 영력을 소비한 터라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죽을 뻔 했네.’
고구천우의 위력은 얕볼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떤 원리로 이루어지는 신통인지는 모르나 공간을 비틀어 거대 손을 조종하는 신통은 만만히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왼손을 들어 혜연회검을 보았다.
혜연회검의 검집은 여기저기 균열이 생겨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아까움에 미간을 좁혔으나 이내 마음을 접었다.
자칫하면 죽을 뻔했으니 이 정도 대가를 치르고 살았다면 이득이다.
게다가 고구천우까지 얻지 않았나.
아무리 봐도 이득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산군은 곧장 가부좌를 틀었다.
핏기가 하나도 없어 누가 툭 치면 억하고 죽을 듯 위태로워보였다.
“마유! 멈춰라!”
그때였다.
사내의 음성이 들려오고 허공에서 보자기가 펄럭였다.
검은 보자기를 거둔 사내는 십해만척의 귀왕 중 하나.
“…오귀.”
그림자에 숨어 있었던 여인이 눈치 보다 오귀의 앞을 막아섰다.
“됐다.”
“오귀님…”
오귀가 고개를 가로저자 마유라는 여인도 어쩔 수 없는지 물러났다.
“범 형. 아니, 육귀.”
“뭡니까. 다 죽어가는 꼴을 보니 없던 자신감이라도 생기덥니까.”
까칠하게 말하자 오귀가 침울한 얼굴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 뭐하는 짓이지.”
산군의 눈가가 좁혀졌다.
“그날 이후. 육귀 그대는 나의 심마가 되었네. 당연한 일이지! 금돈족의 보물인 금돈신상까지 빼앗겼으니 당연한 셈이 아닌가!”
“그래서.”
산군의 음성이 서늘했다.
경어도 쓰지 않아 더욱 그랬다.
“그렇기에 마유를 그대에게 붙이고 약점을 찾으라는 치졸한 짓도 했지. 이곳까지 쫓아와 자네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기도 했네.
자넬 죽이기 위해서 말이야.”
산군의 살기가 은근히 퍼져나갔다.
마치 형체를 지닌 뱀처럼 오귀의 몸과 목에 감기는 듯했다.
오귀의 목울대가 고저를 그렸다.
“한데 왜 이러고 계시나.”
자신을 죽이지 않고.
“…두렵네.”
“두렵다?”
“난 자네가 두렵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그랬으나, 줄곧 외면했지.
그러나 이곳에 당도하고 자네의 실력을 보고서 확연히 깨달았네.”
오귀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난 자네를 이길 수 없어.”
산군이 얼굴을 구겼다.
“그래서 어쩌란 건가. 귀왕씩이나 되는 존재가 영겁에 오른 지 백 년도 되지 않은 내게 무릎 꿇고 무엇을 바라나.”
“바라는 건 없네. 어차피 자네를 죽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하하….”
산군이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 내 꼴을 보아도?”
산군의 상태는 한눈에 봐도 좋지 않았다. 창백한 얼굴하며 내상을 입은 듯 기운도 많이 흐트러졌다.
지금은 영명이라도 상대하기 힘들어 보이는 모습.
“그런 모습이라도 도저히 확신이 서지가 않아. 이미 내 안에서 육귀 자체의 심마가 생겼다는 반증이지.”
오귀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니 내 원한을 내려놓아 심마를 덜어내는 게 좋지 않겠나.”
심마를 없애는 방법 중 간단한 것은 그 원인을 지우는 일.
그리고 두 번째는 한을 덜어내고 시간을 들여 심마를 찢어내는 것.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리지만 그리하여 어떻게든 심마를 없앨 수 있다고는 들었다.
‘수백 년이 걸릴지도 모를 일이라 들었는데… 감수하기로 한 건가.’
수도를 걷는 이들에게 수백 년이랑 세월은 짧지 않다. 수행에만 전념해도 모자란 시간이다.
그 시간을 심마를 위해 쏟기로 결정했으니 대단히 큰 결단이었다.
“쯧.”
하지만 산군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자 주변 풍경과 그의 신형이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이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산군의 모습이 나타나고, 그 옆을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지키고 있었다.
오귀를 뒤따라 갔던 홍연이었다.
그리고 오귀의 뒤에서 귀율이 귀신처럼 스르륵 나타났다.
오귀와 마유는 간담이 서늘해져 식은땀을 주륵 흘렸다.
“그리 결정했다는데 제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어깨를 으쓱한 산군이 공정강에서 화운반홍을 꺼내 올라탔다.
“장수하고 싶다면 지금 그 마음가짐을 잊지 마시오.”
화구름과 함께 사라지는 산군을 멍하니 본 오귀는 털썩 주저앉았다.
“수도의 끝은 결국 불로장생과 같은 영생이니 살아난 것만으로 한걸음 전진했다 할 수도 있겠지…”
오귀는 초탈한 듯 한참이나 망부석처럼 하늘을 바라보았다.
* * *
용전으로 돌아간 산군은 다른 귀왕들의 환영을 받으며 도착했다.
궁금한 게 많았으니 그에게 다가오는 이들이 많은 건 당연했다.
갑자기 나타난 화기린은 대체 무엇인지, 그와는 무슨 연줄을 지니고 있는지 궁금한 듯했다.
그러나 산군은 애써 웃는 낯으로 몸이 안 좋다며 돌려보냈다.
그러자 귀왕들도 주책을 떨었다며 하나둘, 사라졌고 이내 산군의 주변에는 홍연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말씀해주세요.”
홍연이 은빛 고치를 품에 들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마음이 급한 모양이다.
산군은 고개를 주억이고 말했다.
이전에 자신의 사저가 역천공법을 지니고 있었고, 생명의 위기가 느껴지면 성장의 역전을 통해 환생과 흡사한 신통을 부리는 비술. 그것을 말해주자 홍연의 낯에 놀라움이 서리고, 이내 희열로 바뀌었다.
“그럼 살아나시는 겁니까?”
“기억을 잃겠지만.”
후에는 어찌 될지 모르지만 완전한 아이의 상태로 돌아가니 기억 또한 퇴화하는 것이다.
‘잃는다 하여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기연이 있다면 찾을 수도 있겠지.’
성장의 역전이다.
본래의 경지와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오직 자신에게 달려있을 터.
“기억이야 다시 쌓으면 되지요.”
하지만 홍연은 개의치 않은 듯 살아난 것만으로도 깊이 감사해했다.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주인님을 모셨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전하지 못한 채 죽기보다는 기억을 잃었어도 살아남는 것을 택하셨을 겁니다.”
확고한 믿음이다.
그리 말하니 산군의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주인님이라면 기억을 잃으셨다 해도 변할 분이 아닙니다.
이전과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요.”
착잡한 얼굴이던 산군의 낯에 작은 웃음이 피어났다.
호리라면 그럴 듯하다.
본래 심성이 곱고, 곁에 있는 자를 살피는 걸 좋아하는 아이다.
‘기억이야 다시 채워주면 되겠지.’
고치를 만져보자 그 안에서 뛰는 심장의 박동이 느껴졌다.
“그럼 쉬시지요. 저도 관련 경전을 한번 찾아보아야겠습니다.”
“그래.”
홍연이 나가고, 산군의 거처가 된 육귀각에는 적막함이 맴돌았다.
하지만 그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한 소녀 탓이었다.
“언제까지 숨어 있을 겁니까.”
그러자 허공이 일렁이고 왜소한 체형의 소녀가 나타났다.
“당신이 날 잡아두고 있는데 제가 할 수 있는 게 뭐겠어요.”
앙칼지게 쏘아붙이는 말이었다.
소녀는 유정과 붙어 다니던 소 소저로, 그를 쫓던 와중에 산군이 붙잡아 둔 인질이었다.
자세히 보면 그녀의 손목과 발목에 구속구가 매여 있었다.
“묻고 싶은 게 많지만 다음에 하죠.”
“그냥 절 놓아주는 건 어떨까요.”
당연히 안 될 말.
“오래 붙잡고 있을 생각도 없지만 무엇을 알고 있냐에 따라, 그대가 어떤 존재인지에 따라 다르겠지요.”
산군은 그녀에게 궁금한 게 많다.
이전에 봤을 때는 몰랐으나, 지금 가까이서 보니 알아볼 수 있었다.
‘혼괴의 기운이 느껴진다.’
평범한 도사는 아니었다.
이전, 태선의 공정강에서 얻은 구속구를 매어 놨으니 쉽게 도망치지는 못할 것이다.
“하… 난 대체 언제까지…”
사연 깊어 보이는 말투였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
“방이 많습니다. 편하신 곳에 거주하시면 후에 찾아뵙지요.
적어도 우리가 초면은 아니지 않습니까. 400년 전에 일월에서 만났던 회포는 한 번 풀어야 하니까요.”
일월문에 기거할 때 보았던 시비가 사실은 영겁 급의 인물이었다니 산군으로서도 참으로 놀랄 일이다.
그 시절의 회포를 풀어보자 능글맞게 답하니 소 소저는 그를 노려보다 휙 하니 궁장을 펄럭이며 사라졌다.
* * *
방곡 근처의 이름 모를 숲.
그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진법과 많은 수의 도사들이 대기하고 있는 것이 엿보였다.
각기 다른 문파의 장문인이나 대장로가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으니 저계 도사들은 혹시나 실수할까 봐 숨소리도 조심히 내쉬었다.
그때였다.
모여 있던 도사들 중, 가마 속에 자리하던 인물이 묘한 파동을 뿜었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백의를 입은 도사들이 몰려갔는데, 잠시 후 그들 중 하나가 당당히 소리쳤다.
“일월문 대장로가 실패했습니다!”
그러자 혼비백산한 도사들이 몰려들어 한차례 말다툼을 자아냈다.
그럴 리 없다하는 이와 그렇다면 놈들이 다시금 방곡으로 오지 않겠냐 걱정하는 이로 나뉘었다.
하지만 가마에서 나온 노파의 서늘한 눈초리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천자문을 등에 건 소년이 쯧 혀를 차고 빛줄기로 변해 사라졌다.
계획이 틀어졌으니 더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천자문 장문이 저리 나오자 다른 문파들도 하나둘 자리를 떴다.
거사가 실패로 돌아갔으니 후폭풍에 대비해야만 했다.
난데없이 습격 받은 귀수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으니.
대부분의 문파들이 떠나고.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것은 백의를 입은 집단.
북해빙궁의 백의를 입은 추레한 노인이 쯧쯧 혀를 찼다.
“유 선사라 여기저기서 띄워줄 때부터 한 번 일을 그르칠 줄 알았다. 자질도 나쁘지 않고 실력 또한 뛰어나 네 배필로 삼으려 했으나 다시 생각해 보아야겠구나.”
노인은 나이를 몇이나 먹은 것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주름이 많아 보이는 노파였다.
노파가 슬쩍 뒤를 돌아보자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태선 후경의 경지로 기연이 따라 준다면 지선을 눈앞에 둘 정도의 여인이었다.
“우리도 가자꾸나.
놈이 실패했으니 그 책임은 응당 일월이 짊어질 터. 여기저기서 낭선을 모집해 가더니 결국 귀왕들 좋은 꼴만 시켰구나… 하긴 이제와 속세의 일에 끼어들 필요는 없겠지.”
노파의 모습이 일그러지고 돌연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이내 삿갓의 여인 또한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다 공간이 비틀리고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췄다.
* * *
30년 뒤.
십해만척의 주축을 이루는 용전에는 한창 떠들썩한 축제가 벌어졌다.
30년 전의 상처를 딛고 많은 귀왕 후보들이 백귀야뢰겁을 받아 영겁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 때문에 십해만척귀의 열 개의 왕좌에 공석이 없었다.
귀수들의 세력이 한층 더 공고히 해졌으니 기쁘지 않을 리 없다.
게다가 오늘은 모든 귀왕이 모이는 날이기도 했다. 당연히 축제였다.
“시간 참 빠릅니다.”
“벌써 30년이 흘렀으니 말이야.”
빠르기도 빨랐다.
내상을 치료하고 공들여 키우던 용염삼을 먹어 잠시 수행을 한 것만으로 30년이 흘렀다.
그 덕에 산군은 가볍게 영겁 중경에 올랐으니 30년이면 짧은 시간이라 할 수도 있었다.
“맞습니다. 고작 30년을 수행해서 중경으로 오르시니 그 자질이 남달라 다른 분들도 내심 질투하셔요.”
칠귀였다.
은근한 어조로 산군의 팔뚝을 매만지는 손길이 심상치 않았다.
홍연은 자신의 무릎 위에 코 골고 자는 여우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호리는 좀 어떤가.”
“똑같습니다. 먹고 싸고… 딱히 하는 게 없으십니다. 후에 시간이 되신다면 조금 살펴봐 주시겠습니까?”
“무슨 일 있나?”
“아뇨, 요새 영수행에게으르고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셔서…”
“난감하겠군.”
산군은 자고 있는 호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이내 동그랗게 눈을 뜬 호리가 으르렁거렸다.
잠을 깨워서 화가 난 모양이다.
“이놈을 어찌할꼬…”
기억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도통 막무가내라 다루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진심으로 화내면 꼬랑지 말고 어딘가로 숨어버리니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고민 좀 해봐야겠네.”
이후, 치근덕거리는 칠귀를 떼어내고 귀왕들과 술잔을 나누던 산군은 재미난 소리를 듣게 되었다.
“현천선녀?”
“북해빙궁의 여선 중 하나를 많은 자들이 그리 부른다더군.”
술잔을 홀짝이던 일귀는 돌연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말했다.
“자네가 찾던 여인도 백발이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