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193)
낭선기환담-192화(193/600)
낭선기환담 – 192화
어스름한 동굴 안에서 산군과 요호는 한참이나 서로를 바라봤다.
요호는 애틋하면서도 드문드문 노기가 섞인 눈빛이었고, 산군은 다소 초조함이 다분한 눈길이었다.
그 연유를 모르지 않았는지, 요호가 씁쓸한 음성으로 물었다.
[부인의 안부가 궁금하시겠지요.]속을 들켜 민망한지 멋쩍게 웃었다.
“그것도 그거지만 그대가 어찌 놈들의 경매회에 나왔는지부터 묻고 싶어졌소. 더군다나 그 꼴은 또 뭐고…”
온몸이 피투성이에 어디 성하지 않은 곳이 없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몰골인데 어찌 초아의 안위를 먼저 물을까.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후드득.
떨어지는 핏방울이 지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상태가 정말 좋지 않았다.
“후우… 일단 몸부터 치료합시다. 얘기 듣다 숨넘어가게 생겼으니.”
한숨을 내쉬고는 품에서 곧장 복조부 몇 장을 꺼내 요호의 몸에 붙였다. 단숨에 수결을 맺고 주술을 외우니 복조부가 발광하며 피가 멎고, 살이 붙어지기 시작했다.
[으윽….]요호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단령금정으로 그녀의 몸 곳곳을 들여다보아 다른 이상이 없나 점검하고서야 수결을 풀었다.
‘하루 이틀된 상처가 아니다.’
몸 곳곳에 자리한 흉터는 수십, 수백 년 동안 새겨진 상처였다.
해야 할 이야기가 적지 않다.
“급한 상처는 치료했으니 마음 놓고 편히 쉬게.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
그의 손길에서 푸른 파동이 잔잔히 퍼지니 요호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산군은 착잡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동굴을 나왔다.
잠시 망부석처럼 우두커니 있던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손아귀를 펼쳐 푸른 영기를 그러모았다.
영기는 이내 작은 새로 변해 날개를 펄럭여 휙 날아가 버렸다.
그 뒤, 동굴 앞에서 좌선하여 그 또한 얌전히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며칠 뒤.
줄곧 앉아 있던 산군이 눈을 뜨고 좌선을 풀어 자리에 섰다.
잠시 기다리자 하늘에서 궁장을 펄럭이는 여인 둘이 사뿐히 내려왔다.
“육귀! 여기 있었습니까?”
반가움과 원망스러움이 한가득 묻어나오는 음성이었다.
“잘 찾아왔군.”
“잘 찾아왔군? 잘 찾아왔군이라구요? 저희 꼴을 보고도 그리 태평한 소리가 나오십니까?”
그녀들은 소 소저와 호리였다.
호리는 왠지 모르게 산군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고, 소 소저는 이만저만 화난 게 아닌지 목청을 드높였다.
“대체 무슨 일인지 이야기를 들어야겠습니다! 갑자기 나타나 경매에 참여하는가 했더니 뇌신통을 꺼내 그 난리를 만들다니요! 그뿐인가요? 육귀의 불천불벽에 죽을 뻔 한 것은 고사하고, 호 소저를 데리고 반롱까지 오느라 갖은 고생은 다 했습니다!”
“일단은 진정하게.”
다 말해줄 테니.
그리 답하자 소 소저도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자는 듯 팔짱을 끼웠다.
호리를 데리고 다니며 나름의 고충을 겪었던 모양이다.
산군은 어디부터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다 요호와 자신의 인연부터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시선이었던 소 소저는 산군과 요호의 인연을 들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어쩐지… 마지막 궁비호라 했을 때부터 왠지 육귀와 연관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했습니다….”
날개달린 범이다.
산군을 알고 있던 소 소저였으니 그를 떠올린 것도 무리가 아니다.
소저는 그제야 주목받기를 꺼려했던 산군이 그 난리를 피웠는지 깨달았고 이내 수긍했다.
“그분은 괜찮으신 겁니까? 그리 오랜 상처를 안고 계시는 분이라면, 외적인 것은 물론이요 내적인 상처까지 생기셨을 겁니다.”
“그랬겠지.”
무슨 일인지 몰라도 그녀가 겪었을 고통이 짧지는 않았을 터.
귀강총마의 경매회에 나왔던 몸이니 누군가에게 잡혀있다. 그들에게 팔려간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자세한 건 들어봐야겠지만.’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그리 좋은 내용이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초아의 안부 또한 좋은 상황은 아닐 터.
절로 근심이 가득했다.
“한데 검둥이 넌 왜 그러냐.”
우울한 건 자신인데 호리는 왜 저리 울상인지 모르겠다.
소 소저를 바라보자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일단 고생했을 테니 이 근처에서 휴식을 취하게. 영맥이 흐르는 곳은 아니지만 우리가 찬밥 더운밥 가릴 때는 아니지 않는가. 어차피 꽁쳐둔 보영석 몇 개도 있을 테니 말이야.”
그러자 뜨끔한 소 소저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 사레를 쳤다.
“그럴 리가요.”
산군은 다 안다는 듯 미소 지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지.”
“크흠, 전 먼저 쉬도록 하지요!”
소 소저가 도망치듯 사라지고, 호리가 슬금슬금 눈치 보았다.
산군은 쟤가 왜 저러나 싶어 가만히 바라보다 말을 걸었다.
“너 왜 그래.”
“내, 내가 뭘 말이냐!”
“자꾸 눈치 보잖아. 네가 언제 눈치나 보던 놈이더냐? 보라고 해도 안 보던 놈이 갑자기 왜 그래? 뭐 맛난 거라도 훔쳐 먹었냐?”
왜 그러냐 놀리니 그런 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그럼 뭔데. 저번에 입을 막아버려 아직도 화난 거냐? 그건 네가 너무 시끄러워 그런 것이니….”
슬쩍 내려 보자 호리가 쌍심지를 켜고 산군을 올려다봤다.
“입 닥쳐라!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화가 머리까지 치솟느니라!”
“뭐야, 그거 때문이었냐?”
“아니다! 그 때문이 아니다! 본녀도 바보는 아니야!”
“그럼 무엇이냐.”
호리는 주먹을 꽈악 말아 쥐었다.
이내 입을 달싹이다 소리쳤다.
“네, 네놈이 무서워 그런 것이다!”
산군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무서워? 무섭기는 뭐가 무섭….”
산군의 눈이 좁혀졌다.
호리의 상태가 이상하기는 하다.
큰 성량으로 소리치기에 평소대로 돌아왔나 싶었으나 은연중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왜 안 무섭겠냐! 네놈이 이전에 나와 막역한 벗이었다고는 해도 네 경지는 영겁이고, 난 영결이다!
당연히 널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하지! 그리고 난 네놈이 싫다!”
당황스러웠다.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호리는 기억이 없으나 다른 이들은 그녀를 기억하니 똑같이 대했다.
경지는 영결이었으나 직책은 귀왕.
구귀인 것이다.
딴에는 배려한 것이었으나 그녀 입장에서는 혼란스러웠던 모양이다.
“귀왕들이나 귀수들조차 본녀를 공손히 받든다. 그러나 그들이 떠받드는 것은 이전의 나이지, 지금의 영결 육사인 내가 아니다!”
이전의 자신이 어찌했던 지금의 호리는 평범한 영결일 뿐이다.
기억하지도 못하는 과거의 일인데 왜 안 그렇겠는가.
“이전의 내가 어찌했던 지금의 나는 영결이다. 네놈들이 두렵지 않을 리 없지 않느냐….”
호리는 그동안의 응어리를 토해내듯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흥분한 것인지 말하면서도 전신을 덜덜 떨고 있었다.
산군은 멍하니 그것을 들었다.
혼란스럽다 토로하는 것이었으나, 그것을 듣는 산군도 같았다.
혼란스러웠다.
“구귀님. 저와 잠시 가시지요.”
“왁! 뭐, 뭐야! 넌 누구야!”
허공에서 화란이 나타나 호리를 감싸 안으며 데려갔다.
산군은 쓰게 웃으며 근처 나무를 등지고 주저앉았다.
“어지럽구나….”
분명히 살아있으나, 어찌 보면 죽었다 해도 무방했다. 그녀는 분명 호리였으나, 검둥이는 아니었다.
그것이 괜스레 서글퍼 마음 한켠이 먹먹하고 쓰려왔다.
“화봉의 기억이 있음에도 검둥이를 배려하지 못했다… 누구보다 혼란스러워 할 것임을 알았는데도 막연히 보상 받을 것만 바랐어.”
그의 사저인 화봉은 결국 기억을 찾지 못했다. 그리 혼란스러워하고 방황하던 화봉을 알았는데도, 무시하고 자신을 기억해주기만 바랐으니 호리의 혼란을 부추기기만 한 꼴이다.
산군은 자신을 자책했다.
“신선이라도 전지전능하지 않거늘 나는 왜 이리 오만하단 말인가…”
그는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바라보며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은 화창하고 구름 한 점 없었으나, 그 푸르름이 오늘따라 유난히도 먹먹해 보였다.
* * *
오악(五嶽)중 하나라는 항산(恒山).
본래는 선도문이 점유한 영산이었으나, 지금은 마도세력이 점거한 산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항산에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영산의 대부분이 반파되어 산사태가 흘렀다. 무너진 항산의 꼭대기에는 한 사내가 위태롭게 앉아 산 아래를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천천히 즐기며 가볼까 했더니 보통 놈은 아니군. 설마 주인의 금제를 풀어내버리다니 말이야.
균천오광의 그릇이 된 자들 모두가 하지 못한 걸 놈이 해냈으니 응당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무심하던 사내의 눈이 흔들리고, 질투와 시기가 타올랐다.
“너만 이 무간지옥에서 벗어나게 둘 수는 없지… 하계의 수도자가 어찌 상계의 신선을 거역할 수 있을까.”
돌연 사내의 온몸에서 오색의 기운이 서리니, 강대한 영압에 운무가 화악 걷혀졌다.
“억울하지. 그럼, 억울하고말고. 너만 그리 벗어난다면 나와 같은 이들은 물론, 나와 하나가 된 동료들의 희생이 너무도 딱하지 않더냐.”
사내는 그리 중얼거리더니,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 * *
며칠 뒤.
병상에서 일어난 요호는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하여 산군을 맞았다.
영명으로 경지가 하락해 탈형할 수는 없으나 둔갑정도는 가능했다.
“묻고픈 게 많음을 압니다.”
“천천히 하지. 아직 자네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것도 아니니까.”
요호의 침소에 가까이 앉아 그녀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왜 이러십니까. 안 하던 짓이나 하시니 제가 알던 분이 맞나 싶네요.”
요호가 주책이라는 듯 얼굴을 붉히며 손을 빼냈다.
“이런 거 좋아했잖아?”
“그런 적 없습니다. 대체 어느 년이랑 그리 뒹굴고 다니신 겁니까? 부인께서 들으시면 좋아라 하시겠네요.”
안쓰러워 잘해주려 했더니 저리 까탈스럽게 굴어서야, 잘해주려던 마음도 쏙 사라졌다.
“쯧, 말이나 해보게 그럼. 어쩌다 그런 꼴이 됐던 겐가.”
“….”
겸연쩍어 퉁명스레 물으니 요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인내심 있게 차분히 기다리니 그녀의 입술이 작게 열렸다.
“부군이 떠나신 후, 저와 부인은 수도를 위해 여행을 떠났습니다. 어떤 야박한 분이 제게 그런 부탁을 남기고 가셔서 팔자에도 없는 북해로 향할 수밖에 없었지요.”
초아의 수행을 봐 달라 했던 산군의 부탁을 말하는 것이리라.
산군은 애써 요호의 눈초리를 피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처음 200년 정도는 좋았습니다.”
초아는 순조롭게 폐관하여 경지를 올렸고, 환선은 물론 태선까지 앞두고 있던 차였다고 한다.
같이 지내다 보니 서로 마음을 터놓게 되었고 언니 동생까지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서로 많이 의지했다 한다.
“그러던 때, 돌연 노파 하나가 나타나 부인을 데려갔습니다.”
“노파?”
돌연 나타난 노파가 초아를 보고는 제자로 삼아야겠다고 했다.
요호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따졌으나 반항할 수조차 없었다.
“그 노괴는 지선이었습니다. 제 신통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지선을 이기지는 못하니 속수무책이었지요.”
후, 정신차려 보니 자신은 지선의 수중에 있었고, 모진 감금 생활을 이어가다 내상을 치료하지 못해 경지가 하락하고 죽기직전이었다 한다.
“비밀리에 오신 부인께서 환약 하나를 주시지 않았다면 벌써 죽었겠죠.”
그 환약이 퍽 값진 것이었는지 지선 노파는 노발대발 했다고 한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후는 별 것 없었습니다.”
화가 난 지선이 요호를 팔아버리고, 이후에 산군이 구한 것이었다.
비교적 담담히 말하고 있었으나 지선에 대해 말할 때 요호의 손은 옅게 떨리고 있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산군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화를 삭였다.
“그 지선의 이름이 무엇인가.”
“빙궁의 초음선녀라 하더군요.”
“초음선녀(草陰仙女)!!”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산군의 입가가 비릿하게 뒤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