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197)
낭선기환담-196화(197/600)
낭선기환담 – 196화
화과산은 참 신비한 곳이다.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라 그런 건지, 이곳의 관리를 잘한 건지.
싱그러운 풀내음과 그와 적절히 뒤섞이는 단내가 풍겨왔다.
지하에 자리한 적수성연(積水成淵).
연못이 있었는데 이곳에 몸을 담그는 것만으로도 내상을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영지(靈池)였다.
“몸은 좀 어떤가.”
그 적수성연 속에는 산군과 요호가 몸을 담그고 있었는데, 그녀의 내상을 치료하기 위함이었다.
“시원하네요. 덥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녀는 알쏭달쏭한 말을 뱉으며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숨겼다.
의아한 말이었으나 더 묻지 않았다.
산군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탈형의 모습이라지만 이리 가냘프고 유약해졌다.
피부에 달라붙은 물기 어린 내의는 오랜 상처를 훤히 비췄다.
“아프지 않았소?”
손목부터 이어지는 상처를 매만지며 물었으나, 물으면서도 참 바보 같은 질문이라 생각하였다.
이렇게 흉이 졌는데 어찌 아프지 않았을까. 어찌 괴롭지 않았을까.
초아가 지선에게 잡혔다는 소리에 그녀를 탓하고 싶기도 했으나 이 꼴을 보면 그런 마음이 싹 가셨다.
필시 죽기보다 더한 꼴을 당했을 터인데 어찌 그러랴.
게다가 시체마냥 창백하고 몸에 힘이 없는 모습을 보노라면 자신이 알고 있던 요호 같지도 않았다.
‘상처 때문만은 아니야.’
항시 당차던 여인이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고 애써 미소 짓는 유약한 모습을 내비쳤다.
이리 연약한 모습을 보이는데 어찌 마음이 약해지지 않을까.
‘금환선향에 갈 때까지만이라도….’
그녀를 보살피는 게 응당 도리였다.
백산을 떠나기 전, 그녀와 약조한 것도 있으니 더욱 마음이 갔다.
“몸이 안 좋은 것도 나름 괜찮네요. 쳐다도 보지 않으시던 분이 이렇게 신경 써 주시니 말입니다.”
말없이 가만히 있자 요호가 힘없는 낯으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물기를 머금은 머리칼이 뺨에 달라붙어 있었다.
산군은 그녀의 머리를 넘겨주며 만감이 교차하는 눈으로 답했다.
“그랬던가… 그래도 포옹 정도는 자주 했던 것 같은데.”
“하고 싶어서 하신 것도 아닌 거 알고 있습니다. 제 억지 때문이었죠.”
생각해보니 퍽 오래된 이야기다.
어렸던 아이가 노인이 되고, 그 노인의 증손이 흙으로 묻힐 정도의 세월이니 더 말해 무얼 할까.
“그랬지. 그랬었지.”
지나고 보면 추억이라던가.
당시에는 고민하던 일들도, 돌이켜 생각해보니 추억이요, 행복이었다.
그 좋은 나날들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으니 쓴웃음만 깊게 패였다.
둘 모두 그 시절을 추억하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적수성연엔 똑똑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 소리만 청아하게 퍼졌다.
“부군.”
“말하시오.”
“절 혼자 두지 마세요.”
홀로 남아 일족을 잇는 그녀에게는 퍽 많은 것이 내포된 말이었다.
‘이리도 여렸던가.’
아니면 여리어진 것인가.
허나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약한 모습을 보면 볼수록,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여인의 모습이 도드라졌다.
냉정해 보일지 모르나 요호는 어찌 됐든 살았고, 초아는 아직이다.
지선의 제자가 됐다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가 아는 초음선녀라면 안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설마 그 노괴랑 엮일 줄이야.’
초음선녀. 그녀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은 얼마 없으나 어떤 성정을 지닌 자인지는 대강 알고 있다.
‘유정과 깊이 엮이는 노괴이니.’
살벌한 도계에서 지선이 된 인물인 만큼 지극히 이해 타산적인 성격이다. 죽여야 한다면 즉시 죽이고, 자신에게 필요하다면 살린다.
도계에서는 평범한 축의 성정이다.
초아를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인 것 또한 그에 해당하는 것일 터.
‘잡아먹을 생각이겠지.’
본래는 유정을 자신의 제자로 만들려 했던 이였으나….
‘유정에게 도리어 당했었지.’
그에게 도리어 수천 년간 모았던 한음을 빼앗겨 결국에는 노정으로 살게 된 기구한 운명의 지선이다.
어찌된 게 지금은 초아를 제자로….
“부군.”
상념을 깨는 요호의 목소리가은 밀히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이전의 약조를 기억하십니까.”
밀착된 피부와 함께 그녀의 살내음이 향긋하게 올라왔다.
“비록, 부인을 제대로 지키지는 못했으나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말하면서도 애석한 것인지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해서 이제는 그 보답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부군의 마음을 모르지도 않으니, 약조한 것을 받으면 어디 외딴 곳으로 들어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지요.”
약조한 것이란 당연히 산군의 정을 말하는 것일 터. 몸 상태가 저런데도 자신의 정을 원하는 그녀의 입장과 처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유약해졌으나 그녀의 피부는 부드러웠고, 긴장한 얼굴은 아름다웠다.
산군은 그녀의 뺨을 매만졌다.
“그럴 필요가 있나.”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요호는 산군을 올려다보았다.
우수에 찬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는 아련함과 회한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일단 몸부터 회복하시오.”
더 궁금한 것이 많았으나 그의 말이 맞다. 무엇을 하려거든, 일단 몸을 회복하고 나서 해야 했다.
* * *
한달 뒤.
하늘은 해가 떠올랐으나 이상하게도 황혼이 내려앉은 것처럼 어두웠다.
태양은 구멍이 뚫린 것처럼 가운데가 어두웠고 표면이 붉었다.
천년에 한번 나타난다는 금환일식.
그것이 만연히 떠올랐다.
금빛의 환이 하늘을 지배하자 오묘한 파장이 지상을 아우렀다.
하늘 곳곳에 묘한 일렁임이 연출되고, 희미한 풍경이 내비쳤다.
공간 자체가 불안정해져 무작위로 균열이 틀어진 것이다.
퍽 불길해 보이는 하늘이었다.
“오! 멋있다!”
허나 그렇지 않은 이도 있는 모양이다. 산군의 시선이 호리에게 향했다.
“왜… 왜! 뭐!”
자신에게 시선이 쏠리자 당황한 듯 괜한 윽박을 지른다.
시선을 거두고 옆을 보았다.
곁에는 여러 인원들이 금환일식을 바라보며 대기하고 있었다.
삼귀, 사귀, 구귀, 십귀.
자신을 포함한 귀왕 다섯.
그리고 각각의 귀수들 수백.
그들 모두가 금환선향으로 향한다.
“우리가 들어갈 입구는 어딘가.”
질문하자 기다렸다는 듯 삼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가리켰다.
삼귀의 손가락이 향한 곳은 산골 사이에 자리 잡은 작은 폭포.
하지만 평범한 폭포는 아니다.
“폭포…?”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게 아닌,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폭포였다.
그 모습 자체도 기이했으나, 폭포 자체가 금환선향으로 향하는 문이라는 게 더 놀라웠다.
“자세히 보시게.”
그의 말대로 자세히 관찰하자 폭포가 흐르는 수면에 희미한 금색의 환이 내비치고 있었다.
그곳이 바로 금환선향의 입구일 터.
“금환선향의 입구는 수십만 개라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안전한 입구라고 장담할 수 있소!
지난 수백 년 동안 찾아온 입구 중에서도 엄선하여 고른 것이니!”
그리 말하자 십귀가 호탕하게 웃으며 쩌렁쩌렁한 음성을 냈다.
“지체할 것 있나! 내 앞장서지!”
십귀가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앞장섰다. 그러나 은연중 산군의 눈치를 보는 것은 감추지 못했다.
산군이 말없이 미소짓자 십귀는 헛기침을 하고는 폭포로 뛰어들었다.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고 십귀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럼.”
그 뒤를 이어 사귀와 삼귀도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폭포로 뛰어들었다.
“다녀오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요호의 목소리였다.
몸이 좋지 않음에도 굳이 배웅을 해주고 싶다고 따라왔다.
정양하며 몸을 보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낯빛이 좋지 않다.
산군의 마음이 영 좋지 않았다.
요호를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이내 소 소저에게 닿았다.
“부탁 좀 하지.”
“선물이나 잊지 마세요.”
요호를 혼자 내버려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데려갈 수도 없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소망에게 그녀를 보살펴줄 것을 원한 것이다.
‘소망이라면 그나마 안심이고… 검둥이와는 나눌 이야기가 많으니까.’
할 일은 태산과도 같으나 언제나 티끌부터 처리해야 함이 옳다.
차근차근 행하다 보면 언젠가는 태산도 티끌이 되고, 티끌도 태산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올 테니.
“가자 검둥아.”
“본녀는 검둥이가 아니다!”
“시끄럽고 따라와라.”
“아악!”
산군에게 뒷목을 잡힌 호리는 괴성을 내지르며 발악하다 폭포 속으로 사라졌다. 이내 그의 뒷모습도 물방울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쉬운 눈으로 그를 배웅하던 요호는 곧장 몸을 돌렸다.
“소 소저. 부군에게 빚진 것이 많다 들었는데, 맞습니까?”
뜨끔!
소망이 어버버하며 눈알을 굴리자 요호는 진한 미소를 흘렸다.
“제 경지가 영락하여 많은 도움이 필요한데 지금 곁에 있는 분이 소 소저밖에 없네요.
부군께 많은 것을 받았으나 이것을 제대로 소화하려면 지금의 제 몸 상태로는 불가능합니다.
소저의 도움이 필요해요.”
“아… 그, 그게….”
하지만 소망은 말꼬리를 늘어뜨리며 제대로 답하지 않았다.
영락한 경지를 되찾으려면 제일 빠른 것이 원기를 나누는 것이다.
허나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원기이고, 자칫 잘못하면 큰 내상을 입는 것은 물론 목숨과 직결된 일이니 간단히 답을 내리기 어려운 것이었다.
“설마 부군의 재물을 그리 빼앗으시고 이 정도도 도와주지 못하겠다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네, 네?! 빼, 빼앗다니요! 부인께서 말씀이 조금 지나치십니다!”
부인이라는 말에 꾹 다문 요호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부군의 은혜를 갚으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건…. 제, 제가 나중에….”
소망의 아미가 찡그려지고, 요호의 낯에 희색이 돌았다.
그녀의 원기를 나눠 받을 수 있다면 경지를 되찾는 일이 한결 수월할 것이다. 수백 년의 세월을 단축시킬 수 있으니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어요? 안 그래도 마음고생이 심했던 걸로 아는데, 그리 급하게 위험부담을 안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백 년 정도 들여 천천히 본래의 경지를 끌어 올리면 되는 문제인데 어째서….”
소망은 물론, 요호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는 방법이다.
백 년 정도 정양하며 치료하면 되는 일인데 왜 이리 급하냐 나무라는 것이었다. 애초에 인간과 달리 요호는 영수의 몸이요, 육사이다.
영겁의 수명이 대략 사천 년 정도인데 급할 게 전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요호는 단호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많은 뜻이 함축된 말이었다.
그를 이해하지 못한 소망만이 아리송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 * *
같은 시각.
북동쪽의 마도 지역 마곤(魔困).
마도인들의 성지라 불리는 곳에서도 한참 분주함이 느껴졌다.
“금환선향에 마곤의 삼대 문파가 모두 나선다더니 사실인가 보군.”
“그러니 모르긴 몰라도 피바람이 불어 닥칠 게야. 조심해야겠지.”
마곡의 귀강문, 요향문, 불천문.
기백의 마도인을 품은 문파들이 일제히 금환선향에 당도한다.
천년에 한 번 열리는 금환선향이니 만반의 준비를 했을 터.
그리고 그것은 마도뿐만 아닌, 선도의 도사들도 마찬가지.
벌써부터 피냄새가 진동했다.
“잘된 일이지! 안 그래도 오검인지 뭐시기인지 하는 놈 덕에 마도의 체면이 말이 아니니 이참에 마공의 위력을 제대로 보여줌이 좋지!”
“흥, 그런 작자가 왜 꼬랑지만 개새끼처럼 그러고 있나? 그리 생각하면 자네도 금환선향으로 향하게!”
친우의 말에 이름 모를 노인은 자신의 눈알을 빼서 손으로 문지르다가 다시 끼워 넣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리 위험한 곳을 들어가겠나. 금환선향의 크기가 아무리 넓다고는 하지만 온갖 놈들이 몰려드는 곳인데, 죽고 싶어 환장하지 않고서야 일 없지!”
“도계에 속한 놈들 중 미치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나.
그러한 집념과 욕망도 없으면서 어찌 불로장생을 꿈꾸겠어!”
나무라는 말에 노인은 겸연쩍은 듯 이번엔 반대쪽 눈알을 빼서 닦았다.
“아 몰라! 난 바쁘니 저리 가게!”
눈알 노인이 축객령을 내리자 다른 노인들이 궁시렁거리며 사라졌다.
이내 잠시 후.
노인의 뒤편에서 한 사내가 나왔다.
“금환선향. 관심 있느냐?”
노인은 사내의 헐렁한 한쪽 소맷자락을 보며 말했다. 노인의 말에 사내는 신중한 낯으로 고심하더니 이내 입꼬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