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227)
낭선기환담-226화(227/600)
낭선기환담 – 226화
잠시 후.
지면에는 빼곡히 법진이 그려져 있었고, 그 위에는 산군과 초아.
그리고 초음이 함께 있었다.
허공에 흐드러진 암석들이 제각각 자유로히 움직이며 별천지의 느낌을 주었으나 그 주변에는 거대한 오룡의 모습인 탐화가 둥글게 그들을 감싸듯 자리하고 있었다.
금제를 옮기는 와중에 혹시모를 사태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조금이라도 감정이 흐트러지면 금제에 영향이 가니 조심해야 할 게야.”
초음은 산군과 초아의 가슴에 손바닥을 붙였다.
이내 법문을 읊조리고 있었는데, 마치 불경을 외우는 듯 고요하면서도 또랑또랑한 음성이었다.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법진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하고, 초아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초음의 왼손에서 작은 한기 덩어리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어 춤을 추듯 일렁거렸다. 한기 덩어리들은 점점 더 커져만 가더니 어떠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면 용 같기도 했고, 저렇게 보면 수레바퀴 같기도 했다.
이 형상만 보이고 실체는 없는 것이라 더욱 모호했다.
허나 저것이 바로 초아의 몸 속에 잇던 한령오륜제라는 금제리라.
“가겠네.”
금제의 형상.
한령오륜제는 초아의 몸에서 나와 곧장 산군의 몸 깊숙히 침투했다.
“큽!”
그는 고통스러운 듯 대번에 인상을 찡그렸다. 초음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무어라 말할 수도,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는 괴이한 감정이었다.
초아는 그런 산군을 바라보며 분하고 한스럽다는 듯 주먹을 말아 쥐었고, 그는 그저 조용히 눈을 감고 금제를 감내하고 있었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절로 느껴지는 터라 초음은 기분이 이상했다.
‘나 또한 저런 사내를 만났다면….’
삶이 조금 달랐을까.
행복할 수 있었을까?
그런 의문들이 머릿속을 헤집으며 점차 증식하기 시작했다.
초음은 저도 모르게 덜덜 떨리는 손을 뒤로 감추었으나 흔들리는 동공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오랜 세월 사내에 대한 불신이 한순간에 바뀔 수는 없었다.
초음은 생각을 떨쳐내고는 자신이 죽을 일이 없어졌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금제를 파하지 못하는 이상 산군은 초음을 죽이지 못한다.
초음 또한 산군을 지키는 수선 탓에 그를 해할 수 없다.
그러나 제 목숨은 건질 수 있었으니 안심이라면 안심이었다.
‘어쩔 수 없지. 금환선향에서는 어쩔 수 없으나 하계라면 또 다르니.’
하계에서는 신선들 또한 하늘의 압박으로 힘을 온전히 쓸 수 없다고 알고 있다.
본래의 힘을 발휘할 수 없으니 이곳에서와는 달리 하계에서는 산군 또한 자신을 위협하기는 힘들 터.
이곳만 벗어나면 되는 것이다.
그 이후에는….
‘되갚을 날이 오겠지.’
수선의 뒷배만 아니었다면 별 것 아닌 고작해야 영겁 육사다.
그런 놈에게 이런 수모와 수치를 당했으니 곱게 넘어갈 수 있겠는가.
자다가도 이불을 걷어찰 정도의 치욕이니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이번 일이 심마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니 은원은 확실해야 했다.
“자, 이제 다 됐네!”
스으으으윽. 한령오륜제가 산군의 몸속으로 완전히 스며들어 한기가 모조리 그의 몸속으로 집중되었다.
빨려들어가듯 한기가 그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자 그의 전신이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변했고, 동상에 걸린 사람처럼 입술을 시퍼렇게 변하고 몸 주변에 서리가 끼기도 했다.
안쓰러운 낯으로 바라보던 초아는 연신 안절부절 못했다.
‘이런 금제를 대체 얼마나….’
몸속에 품고 있었던 걸까.
몇 십, 아니 몇 백 년일 것이다.
산군은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손아귀를 보았다.
조금 움직인 것으로 살점이 찢어지고 툭툭 갈라지기 일쑤다.
만보시대 금제라더니 그 이름값 정도는 하는 모양이다.
아무리 자신이 화신통 육사라지만 이렇게까지 반동이 큰 금제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떤가. 조금 괜찮은가?”
놀리는 건지 아닌 건지 초음이 그리 물어왔다. 산군은 잠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몸은 한기에 침식당하고 움직이기도 힘들었으나 이상하게 머리만큼은 더 없이 차분해졌다.
괜찮냐는 그녀의 말을 곱씹던 산군은 피식하며 답했다.
“아주 좋습니다.”
화르르륵!!
돌연 그의 전신이 푸른 화염으로 뒤덮였다.
스으으으윽.
그와 동시에 산군의 가슴에서 새하얀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덥석!
돌연 산군이 초음의 두 손을 파악 움켜잡았다.
“뭐, 뭐하는 게냐!”
뜬금없는 행동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왠지 모를 불안감이 초음의 전신을 핥아 내렸다.
“본래 은원은 확실히 해야 하는 게 도계의 상식이 아닙니까.”
꾸드득!!
“큭!”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무슨 놈의 힘이 이렇게 강한지 뿌리칠 수 없다.
손목이 잘려나갈 것만 같았다.
‘오룡의 갑주를 입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의 괴력이라니…!’
그뿐만이 아니다.
사아아아악!!
산군의 손에서 법문들이 타고 흘러와 초음의 손으로 이어졌다.
살아있기라도 한 듯 금빛 글자들이 춤을 추는듯 그의 팔에서, 초음의 전신으로 퍼져가기 시작한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별 것 아닙니다. 갚아주는 것뿐.”
“갚아?”
갖은 인상을 다구기고 묻자 산군이 피식 거리며 답했다.
“내 아내에게 금제를 걸었으나 나 또한 그걸 되갚아주는 것이지!!”
“어리석은 짓을!! 자네 몸속에는 한령오륜제가 있다는 사실을 벌써 잊어버리기라도 한 겐가?”
한령오륜제를 발동시키기만 하면 산군은 몸이 얼어붙어 죽을 것이다.
단순히 얼어붙는 게 아니다.
처음에는 내부에서부터 차갑게 얼어붙어 설산 속에 벌거벗은 듯한 추위를 느낄 것이고, 천천히 얼어붙어 조각조각 깨져 먼지로 변할 것이다.
“어리석은 것은 초음, 바로 너다.
그 어여쁜 외모와는 다르게 머리가 썩 좋지는 않으신가 보군.”
“뭐, 뭐?”
“만보시대 금제라고 믿는 구석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날 얕잡아 본 건지 모르겠으나 한 가지 실수했더군.”
“실수?”
“만보시대 금제라고는 해도 결국, 하계의 도사가 만든 금제일 뿐이다. 그런 것을 고작 신선이 어찌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는가?”
신선!
“설마….”
“이까짓 금제는 상계의 신수인 그에게는 어린애 장난과도 같은 것.
그러니 이건 돌려주도록 하지!!”
그때였다.
후웅.
돌연 그의 등뒤로 어린 외견의 소년이 나타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후우우우웅!!
콰아아아아아!!
산군이 초음의 손목을 잡고 비틀자 막대한 한기가 손으로 퍼졌다.
단번에 한령오륜제가 산군의 몸에서 초음의 몸으로 옮겨간 것이다.
“커억!!”
초음은 충격에 못 이겨 제 가슴을 쥐어틀며 비틀거렸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펼쳐 보였다.
덜덜 떨리는 손은 그녀의 심정을 말해주었고, 흔들리는 동공과 파리해진 안색은 현재의 처지를 인지시켰다.
산군은 서늘한 눈초리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 여인에게 한 짓이 있는데 내가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했나?”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는 게 바로 은원을 갚는 방법이다.
더군다나 그것이 더없이 소중한 것이라면 더더욱 당연한 소리.
“마지막으로 남길 말 있나?”
초음은 말이 없었다.
무릎 꿇은 채로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눈 속에는 절망과 허망이 공존했고, 입가에는 짙은 회한이 가득했다. 산군은 고개를 돌려 초아를 바라봤다. 초아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초음의 앞에 섰다.
“제 힘으로 이리 하려 했습니다. 아쉽게도 그리 되지는 않았네요.
제게는 최악의 스승이었으나, 당신의 가르침이 모두 쓸모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스승님을 동정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제게 한 짓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으니 제자의 검, 달게 받으시지요.”
그리 말한 두 손바닥을 포갰다.
그러자 작은 빛무리와 함께 투명한 검신의 검이 나타났다.
그녀의 본선법패인 한원음검이었다.
초아는 작게 한숨 쉬고는 초음의 가슴에 한원음검을 꽂아 넣었다.
푹.
화르륵.
검을 꽂아 넣자 새하얀 백염이 타오르며 초음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초아의 백염은 화기가 아닌 한기.
한염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불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차갑구나.”
그녀의 불꽃은 차가웠다.
너무도 시리고 차가운 불꽃.
전신이 새하얀 불꽃으로 타오르던 초음은 멀거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금환선향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푸른색이었다.
죽기 참 아쉬운 날씨였다.
‘하아….’
허나 어쩔 도리가 없다.
한령오륜제에 묶인 몸이요, 백염으로 뒤덮여 얼어붙고 있는 중이다.
한련오륜제와 백염이 뒤섞여서인지 몸은 벌써부터 꼼짝을 할 수 없었고 점점 얼어붙고 있다.
‘움직인다 해도 소용없겠지.’
수선을 부리는 놈이 자리하고 있다.
자신이 어찌 도망치겠는가.
완벽히 당했다.
아니, 바보처럼 냉정하지 못했다.
초아를 대신해 금제를 이어받으려는 산군의 모습에 냉정을 잃었다.
조금만 생각해봤어도 조심할 수 있었을 것을 놓치고 말았다.
“믿음이 크면 배신당했을 때의 아픔도 커다란 법이다.”
“그 또한 배신당했을 때의 일이죠.”
“확신할 수 있느냐?”
“예.”
“…행복해 보이는구나.”
“행복합니다.”
“그래… 그럼 된 게지. 그럼 됐지.”
사아아아아….
지면에는 새하얀 한기가 사방으로 널리 퍼졌고, 타오르는 몸에서는 얼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생겨난 빙각은 점점 불어나 초음을 집어삼켜 빙산으로 뒤바뀌었다.
잠시 후.
하늘 높이 솟은 거대한 빙산의 중심에는 초음이 눈을 감고 있었다.
얼어붙은 빙산 속에 꼭 잠들어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한령오륜제는 신체는 물론 화령까지 얼음조각으로 깨어져 먼지로 사라진다고 들었는데….”
겉보기에는 빙산에 봉인당한 듯한 모습이지 않은가.
“죽었습니다.”
“죽은 건가?”
“예.”
산군은 흔들리는 눈빛의 초아를 바라보다 이내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지.”
그녀의 선택이고 결정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빙산과 동화되어 자연히 사라지게 되리라.
산군은 그윽한 눈으로 초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할 말이 많다.”
“하고픈 말도 많지요.”
그러나 아직은 시기상조.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초음을 처리하고, 초아를 구해냈으니 대강의 일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호리는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었고, 당춘 또한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니 대비함이 마땅했다.
‘하계로 갈 수는 없다.’
가봤자 당춘이 곧장 따라올 거다.
하계로 가면 그를 대적할 자는 그 누구도 없을 터.
‘차라리 이곳이 낫다.’
금환선향.
이곳이라면 탐화를 온전히 부릴 수도 있을 것이요, 봉의 도움도 받을 수 있으니 차라리 이곳이 낫다.
‘하지만….’
앞으로 이틀 후면 이곳은 닫힌다.
하계로의 길이 닫히는 것이다.
그리하면 천년은 이곳에서 지내야 하니 곤란하기 그지없었다.
“어쩌실 거예요?”
“…글쎄.”
마땅한 방도가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봉, 잠시 나와 주시죠.”
화르륵.
푸른 깃털이 지면에 내려서 푸른 불꽃을 피워내자 그 안에서 소년의 모습을 한 봉이 나타났다.
“하계는 갈 수 없습니다.”
“그렇겠지. 당춘이라는 놈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니까.”
“그렇다고 이곳에 있을 수도 없죠.”
“천년을 갇히는 꼴이니 그렇겠지.”
봉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갸웃하고는 산군을 바라봤다.
“네가 생각하는 것이 설마….”
눈가를 좁히며 묻자 산군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미쳤구나. 그곳이 어딘지 알고 하계의 수도자가 발을 디딘단 말이냐.”
엄하게 꾸짖는 모습이었다.
산군은 봉이 저렇게까지 화를 낼 줄은 몰랐기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해야 할 말은 해야 했다.
“봉도 아시다시피 이제야 겨우 아내를 만났습니다. 허나 적은 저를 노립니다. 하계로 가면 절대로 피할 수 없고, 저항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금환선향에 있을 수 없다.
이곳이라도 놈이 찾아오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고, 천년이나 갇혀있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유무간으로 간다?”
“…예.”
“유무간은 공간과 공간 사이의 무한한 공간이다. 그곳의 끝은 없고, 무한히 펼쳐진 어둠만이 자리한 곳이지. 유무간은 고계 신선이라도 함부로 발 딛지 않는 위험한 곳이다.
하물며 하계의 수도자라면 순식간에 존재가 지워지거나 그곳에 자리 잡은 흉수의 한 입 식사거리로 전락하겠지. 그것을 알고 말하는 것인가?”
“예.”
봉은 산군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비웃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날 믿고 가려는 게로군.”
그러자 산군이 씨익 미소 지었다.
“태초의 신수들은 모두 유무간이라는 곳에 태어났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봉 또한 그곳의 지리를 잘 알고 있음이 맞지 않습니까?”
유무간의 또 다른 말은 혼돈.
그의 말에 봉은 미간을 좁혔다.
“당돌한 생각을 하는구나.”
무언가를 꿰뚫어본 듯 봉은 눈을 가늘게 뜨며 산군을 떠봤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봉이라면 몰라도, 당춘이라면 유무간에 평생을 갇힐지도 모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