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236)
낭선기환담-235화(236/600)
낭선기환담 – 235화
후두둑.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쿠웅.
떨어져 내리는 누각의 조각들 사이로 산군은 성큼성큼 발을 내디뎠다.
“대체 누구기에 이런 분들이 당신을 지켜주고 있는 겁니까!”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울분을 토하듯 내지르는 차륙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크르르르르.
허나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탐화가 으르렁거렸다.
차륙 정도는 한 입에 삼켜버릴 오룡의 모습이다. 그녀 또한 겁에 질려 안 색이 새하얗게 변했으나 그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만해라. 난 괜찮으니.”
산군이 탐화의 콧잔등을 만져주니 살기가 수그러들었다.
“제가 누구냐 물으셨죠.”
차륙은 쳐다보지도 않고 탐화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전 그저, 하계에 속하며 수도를 행하는 자일 뿐입니다. 아시다시피 영겁 육사일 뿐이지요.”
“그런 걸 물었던 게 아닙니다.”
“그럼 진정으로 궁금한 것을 물으시지요. 제가 누구인지는 아무런 상관도 없지 않으십니까.”
슬쩍 뒤돌며 날카롭게 바라보니 차륙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가 말해드릴까요. 당신이 궁금한 것이 진정 무엇인지. 그리고 듣고픈 말은 또 무엇인지.”
차륙의 어깨가 움찔 떨었다.
“전 당신의 정인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면 어이하여 그런 모습으로 절 보러 오신 겁니까. 혹시라도 싶은 마음에 옛 정인에게 추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 그런 것 아닙니까.”
미련이다.
그녀를 움직이게 하는 것도, 사라져 가는 수명을 쥐어잡고 있는 것 또한.
모두 다 정인에 대한 미련.
“아닙니다!!”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겠죠. 내가 양소팽이 아니라는 것을 거의 확신하고 있음에도 미련을 놓지 못했겠지요.”
저 모습으로 왔다는 것 자체가 그러한 증거 중 하나다.
그녀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나, 한 가닥 미련을 놓지는 못한 게다.
“아닙니다….”
차륙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답하는 음성 또한 옅게 떨리고 있어 굳이 진심을 듣지 않아도 되었다.
“예상하시다시피 양소팽. 그러니까 양 사형과는 인연이 있습니다. 검령도에서 만나 사제의 연을 맺었지요.”
“…사실입니까?”
산군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 하면 지금은 어디 계시는지 알고 있으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모를 수가 없다.
“천만 다행입니다! 그러셨군요! 제가 괜한 오해를 했었나 봅니다!”
차륙은 더 없이 기뻐하며 한 번도 본 적 없던 미소를 보였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산군의 낯은 그늘이 낄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 이어질 물음이 무엇인지는 눈에 훤했으니까.
“그 분은… 안녕하십니까?”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차륙의 태도에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다행입니다. 정말….”
차륙은 계속 같은 말만 반복했다.
다행이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그의 생사를 묻기만 할 뿐, 어디 있냐거나 찾아가겠다란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가 살아있음에 깊게 감사하고 있었다.
‘무의미한 질문이지.’
그녀는 유무간을 나갈 수 없으니.
그가 살아있어도.
죽어 있어도.
만날 수 없는 건 같다.
애초에 그녀의 수명 또한.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 사실을 똑똑한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사실상 헤어졌던 정인이다.
죽을 때가 다 되어 찾아가 봤자 잘 살고 있는 그에게 민폐일 뿐이리라.
그런 애처롭기 짝이 없는 모습에 산군은 마음이 심히 좋지 않았다.
‘곧 영면에 들 여인이다.’
그리고 양 사형의 마음에 자리 잡은 정인이다.
어찌 보면 형수라 할 수도 있다.
그러니 갈 때 가더라도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주는 게 낫지 않겠는가.
‘사형 또한 그리 하길 바랄 테니.’
그것을 알아챈 것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
돌연 산군의 몸에서 검 하나가 빠져나와 차륙과 그의 앞에 섰다.
“…살성갑검.”
그의 다섯 검중 하나.
양 사형의 검이었다.
살성갑검은 그녀의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다 주저앉아 있는 차륙의 다리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이 검은 무엇입니까?”
옛 추억을 상기시키는 그 모습에 산군은 나지막이 눈을 감았다.
마음은 심란했고 쓸데없이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백년.
그 세월동안 함께 동거 동락했던 사형이 바로 양 사형이 아니던가.
성격도 좋고, 쾌활했던 사형이니만큼 산군도 그를 퍽 싫어하지 않았다.
아니, 기꺼워하는 쪽에 속했다.
도계에 몸담은 이후로, 그리 마음 편히 대할 수 있는 이들은 손가락을 꼽을 만큼 적었으니까.
‘내 이리 감성적인 사람이 아니었거늘… 이 또한 부작용 중 하나인가.’
쓰게 웃은 그는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표정을 달리했다.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으나….
‘생각이 바뀌었다.’
왠지 모르게 그런 기분이었다.
그가 바라고 있는 듯했다.
게다가 산군 또한 그러했다.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고, 이리 뒀다가는 마음에 마가 끼어버릴 것 같았다.
“차 선자. 양 사형은 사실….”
잠시 후.
입꼬리가 한껏 올라가 있던 초아는 차게 식은 낯으로 그를 보았다.
“뭐예요?”
“아… 쓰러져 버려서.”
산군은 어느 여인 하나를 안아들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검 한 자루를 품에 꼬옥 쥐고 잠들어 있었다.
“쓰러져요?”
“그런 일이 있었다.”
눈가를 가늘게 뜬 초아는 산군에게 안긴 여인을 흘겼다.
눈두덩이가 붉고 습기가 있는 걸 보니, 울다 지쳐 잠이 든 모양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지선이나 되는 여인이 통곡하듯 울다 잠이 든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초아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여기서 재우시게요?”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어차피 이곳에 남는 방은 많지 않으냐.”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바깥에 내버려두기에는 조금 그랬다.
하여 데리고 들어왔으나… 안사람의 표정이 영 껄끄러워보였다.
“그렇네요. 혹시 모를 때를 위해 남는 방이 많으면 좋을 거라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네요.”
“무슨 소리냐, 그게.”
“아무것도요.”
콧방귀를 끼며 딴청을 부리는 모습이 어지간히 삐친 모양이다.
산군은 그 모습이 귀여워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아무것도 아니라니 다행이구나. 혹 차 선자를 데려와 네가 삐친 건 아닐까 했는데 말이야.
역시 우리 부인께서는 마음이 대해와도 같으니 난 복 받은 놈이로군.”
그리 말하니 초아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입을 뻐끔거렸다.
“하긴, 범에게 시집온 여인이 고작 이 정도 일로 좀생이처럼 토라졌을 리도 없겠지.”
“좀, 좀생이…요?”
“그래, 왜 그리 놀라느냐?”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한데 저번에 뵈었던 분이 맞아요? 겉모습이 꽤 변하셨네요.”
겸연쩍어 말을 돌리자 산군도 모르는 척 받아주었다.
“맞다. 심마의 영향을 받기 전 원래의 모습인 게지. 비록, 지금은 신통으로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지만.”
“제가 할게요.”
초아가 차륙에게 손을 뻗었으나 산군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할 테니 이부자리 좀 펴줘.”
“그 여인 품이 그리 좋으십니까.”
“그럴 리 있겠느냐. 다 내가 못나서 그런 것이니 이해해다오.”
“…알겠어요.”
묻고픈 게 많은 얼굴이었으나 초아는 더 묻지 않았다.
이내 이부자리에 차륙을 눕히고 그녀의 곁에 검을 떨어뜨려 놓으려고 했다. 그녀는 잠결에도 검을 꼬옥 품에 쥐며 잠이 들었다.
애잔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산군은 물론이요, 초아 또한 무슨 사정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별로 궁금하지는 않습니다.”
허나 초아는 궁금하지 않은 듯했다.
“알려 달라 투정부리는 것이냐, 아니면 정말로 궁금하지 않은 게냐.”
“글쎄요.”
뾰로통한 볼을 보니 단단히 삐친 듯했다.
산군을 침소에 앉아 턱을 괴었다.
“뭘 그리 보세요?”
물끄러미 보고 있자 참다못한 초아가 퉁명스레 물었다.
“신기해서.”
“제가요?”
“그래. 세삼 신기해서.”
“뭐가 그리 신기하세요?”
“그 어렸던 아이가 커서는 나의 아내가 되었고, 그 아내가 내 바가지를 긁으려고 하니 신기하지.”
초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산군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를 마주본 채로 다리 위에 앉아 목을 껴안았다.
“제가 아직도 백 마을의 어린 아이로 보이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나.”
이제는 그 시절의 앳된 얼굴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성숙한 여인만이 남아 있을 뿐.
“그럼 뭐에요. 제가 서방님 평생 배필인데 그 정도 바가지도 못 긁어요? 그렇게 사람 기대하게 해놓으시고 다른 여인을 품에 안아 들고 오시다니… 일부러 그러신 거예요? 놀리려고?”
“내 마누라 놀리는 재미도 있기야 하다만 지금은 아니다.”
“너무하세요, 정말!”
“사정이 있다. 들어볼 테냐.”
이참에 설명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초아는 검령도에서의 일을 모르기도 하니까.
“…차라리 잘 됐네요.”
초아는 준비했던 술상을 가져오며 목이 긴 술병을 들어 술잔을 채웠다.
“밤은 길고, 제 서방은 바라보는 맛이 있으니 한번 들어볼게요. 저도 할 이야기가 적지는 않으니까요.”
그렇게 둘은 서로의 술잔을 채우고, 이야기 속에 술잔을 꺾으며 기뻐하다가도 슬퍼하며 서로를 보듬었다.
밤인지 낮인지 모를 곳이 바로 유무간이었으나, 그들의 밤은 퍽 길었다.
* * *
다음 날.
산군은 차륙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제 좀 괜찮으십니까.”
그의 물음에도 차륙은 냉랭한 표정을 유지한 채 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산군은 개의치 않는 듯 신경 쓰지 않으며 그녀의 다리로 시선을 내렸다.
차륙의 허벅지 위에는 살성갑검이 뉘어져 있었는데 한시라도 떼어놓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차륙이 아미를 좁히며 입을 열었다.
“뭘 그리 보십니까.”
“사형의 한이 조금은 풀어졌을까 싶어서요. 알고 계십니까? 사형이 검령도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이유는 제 여인 하나도 지키지 못한 자신의 모자람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연유들도 많았으나 차 선자. 당신의 영향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비록, 검이 되어서라도 자신의 정인을 만나게 되지 않았던가.
조금은 사형의 한이 풀어졌기를 바라볼 뿐이다.
“전 당신이 싫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정인을 집어삼킨 놈이 바로 앞에 있는데, 저리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도 참 대단했다.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이 바로 제가 아니겠습니까.”
씁쓸하게 웃으며 답하자 차륙은 슬그머니 산군의 시선을 피했다.
“전 그리 아둔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말에 거짓은 없었어요.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고, 그로 인해 지금도 당신은 목숨을 위협받고 있다지요.”
“어쩌다 보니 그리 되었습니다.”
살아남은 덕분에 상계의 신선에게 쫓겨 다니는 신세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양 형도 피해자일 뿐이죠.”
하지만.
“제 마음은 애석하게도 당신의 처지를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겠죠.”
자신이라도 그럴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충분히 그럴 수밖에 없던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자신의 정인을 산군이 집어삼켰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차륙은 산군을 딱하게 보기도 했으며 동시에 노여워했다.
“허나 저는 당신을 벌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제 수명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고 당신은 신선의 뒷배를 가진 분이시죠.”
“그렇죠.”
애석하게도 그러하다.
그녀로서는 산군을 어찌할 힘도 능력도, 시간도 없다.
“그러니 제 부탁을 들어주시죠.”
“부탁이라면….”
“양 형이 변한 이 검.”
살성갑검.
“이 검으로 절 죽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