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237)
낭선기환담-236화(237/600)
낭선기환담 – 236화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공정강이 만들어낸 공간 속이었으나, 산군의 마음은 작게 요동치기만 했다.
“….”
산군이 아무 말도 없자 차륙은 무덤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해주셔야 합니다.”
“어째섭니까.”
“당신이 이 검의 주인이니까요.”
차륙 또한 봉에게 선문답을 배워왔는지 의미 모를 말뿐이었다.
미간을 찌푸리자 차를 한모금 머금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전 어차피 곧 죽습니다. 삼 천년 가까이 살았으면 오래 살았지요.”
그 안에 맺혀있는 한은 응어리진 채 풀리지 아니하였지만.
“본디 살아있는 것이라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순리죠.”
“그래서 죽여달라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차륙은 자신의 무릎 위에 있는 검면을 매만졌다.
“제 모습이 심마로 인해 변해버린 것을 잘 알고 계시죠.”
“그렇죠….”
“제 심마는 죽음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가려놓았으나….”
차륙은 자신의 궁장 한쪽을 벗어 어깨를 선뜻 보여주었다.
어깨죽지에는 비늘인지 뭔지 모를 검은 무언가가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의 피부가 검게 변하고 전염되듯 퍼져가고 있었다.
“육사는 아십니까. 도사가 심마에 사로잡히면 어찌 되는지.”
“자세하게는 알지 못합니다. 언뜻 듣기로는 마귀가 된다 하더군요.”
“심마란, 마음에 마가 끼는 것.
그리고 그 마는 다른 마를 불러들이기 마련이지요. 구천을 떠돌던 마인지 무엇인지 알 길은 없습니다.”
다만.
“마에 몸을 빼앗기는 자는 마귀가 되어 사람을 해하게 되지요.”
“그렇군요….”
이제야 이해가 간다.
차륙은 심마에 점점 몸을 빼앗기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완전한 마귀가 되어버리기 전에 먼저 죽여달라는 것이다.
“어제 이후로 더 심해졌습니다. 이제는 정말 얼마 남지 않았군요.”
자못 씁쓸한 낯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산군도 알고 있다. 그 또한 여러 번 죽을 뻔한 적이 있지 않던가.
그때마다 느끼던 것은 오로지 죽음에 대한 깊고 깊은 공포.
말로 헤아릴 수 없는 진득한 늪과 같은 지독한 두려움이다.
그것을 저리 담담하게 받아들이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고민과 고뇌를 풀어내야 저리되는 것인지….
차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한데 그것을 왜 제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이 검의 주인이기 때문이라고.”
또 원점으로 돌아왔다.
“놀리는 게 아니라면 제대로 설명을 해주셔야겠습니다.
주인이기 때문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차륙은 물끄러미 산군을 바라보다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졌는데, 초가집 밖에 서 있었다.
뭐하는 건가 싶어 축지하여 밖으로 나가보니 차륙은 절벽 위에 서서 작은 연못을 보고 있었다.
“제 기나긴 삶이 지탱하고 있던 것은 오로지 그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정인은 죽었다.
“그러니 미련은 없습니다. 다만….”
그녀는 썩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산군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될 수 있다면 그와 함께 윤회하여 같은 나날에 태어나고 싶습니다.”
‘윤회라….’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 검에는 아직 양 형의 혼이 남아 있다고 느꼈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랬어요.”
“그래서입니까.”
“예. 미련한 마지막 소원입니다.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녀의 말은 그러했다.
양 형과 같은 나날에 환생하고 싶으니 이 검에 혼을 녹여 넣겠다.
이후에 검이 부러지든, 없어지든 언젠가 때가 되어 먼지로 화할 때.
그와 함께 윤회의 굴레로 들어가게 되리라.
산군은 저도 모르게 합환호환검을 떠올렸다.
‘육귀 또한 그러 했었지.’
사랑하는 정인을 잊지 못해 그녀가 지니던 검에 몸을 던진 육귀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히 산군의 뇌리에 박혀 있다.
그녀 또한 육귀와 다를 것 없는 일을 행하고 싶다 하니….
‘감회가 새롭다 해야 하나….’
그도 아니면 무어라 해야 하나.
참으로 애매모호했다.
“검 속에 함께 있다 보면 질긴 붉은 실로 묶일지 또 모를 일이죠.”
육귀는 몰라도, 양소팽의 혼이 이 검에 담긴 것은 확실하다.
그러니 그녀의 말이 영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윤회가 어찌 되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 검에 혼을 담는다면 함께 있을 수 있기는 할 터.
“그래서 제가….”
“당신이 절 도와주셔야겠습니다.”
* * *
“자네가 바랐던 것 여기 있네.”
봉에게 단함을 건네받은 산군은 내용물을 살폈다.
“자네 안색이 별로 안 좋군.
하긴, 이제 곧 진수명화해야 하니 여러 가지로 고민이 많겠지.”
그것도 그렇지만, 그가 고민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따로 고민하는 것이 있나 보군… 그래. 아마도 그 여인 때문이겠어.”
산군은 굳이 답하지 않았다.
그에게 하소연할 것도 아니고, 말해봤자 달라질 것은 없었다.
“내게 물어보지 않는구나. 그 여인을 살릴 수 있지는 않느냐고.”
“무의미한 물음입니다.
죽기를 바라는 자에게 억지로 삶을 강요해서 무엇할까요.
모두 자신의 선택이죠.”
그러나 내심 바라고 있기는 하다.
그녀가 살기를.
양 사형의 기억 때문이기도 했고, 차륙이 걸어온 모진 도(道) 탓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걱정스러웠다.
“걱정하고 있구나.”
“….”
맞다.
산군은 걱정하고 있다.
차륙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죽었을 때.
자신의 안에 새겨질 그녀의 죽음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녀가 검 속에서 양소팽과 함께 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확인할 방도는 없다.
하니 산군에게는 그저 죽은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니, 그녀의 죽음으로 자신의 안이 소란스러워지지 않겠는가.
산군은 그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봉의 말대로 진수명화가 코앞이다.
몇 년간은 경지를 차분히 안정시키고 심신을 가라앉혀 십생단을 복용해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한데 이리 심기를 어지럽히는 인연이 찾아온 걸로 모자라, 자신을 죽여달라 청하니 오죽할까.
다른 심계가 있는 것은 아닐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심기체중 심을 단련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하더니 그 말이 참말이었다.
“어려우냐.”
“무엇이 말입니까.”
“사는 것 말이다.”
“사는 것… 그렇네요. 그저 살아가면 될 줄 알았거늘, 뭐 이리 어렵고 복잡하고 힘든 것인지.
무엇 하나 간단한 것이 없어 너무 어렵습니다.”
푸념하듯 늘여놓자 봉은 옅게 웃으며 불꽃으로 꽃을 만들었다.
“어려울 때는 꽃을 뜯어 보거라. 이게 의외로 많은 도움이 될 거다.”
“무슨 소릴 하나 했더니….”
눈살을 찌푸린 산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이 정한 점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겁니까.”
“의미는 충분히 있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 묻자 봉은 보란듯이 꽃의 잎을 떼어냈다.
“보았느냐?”
“뭐가요.”
“내가 꽃잎을 직접 떼어냈다.”
“그게 어쨌다는 말입니까.”
“그로 인해 꽃잎은 네 개가 되었지.”
“그래서요.”
“내가 떼어내지 않았으면 이 꽃의 잎은 영원히 다섯이었을 거다.”
“그랬겠죠.”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릴 하는 걸까.
의뭉스럽게 바라보자 봉은 허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꽃은 너의 고뇌. 그리고 꽃잎은 그 갈랫길인 셈이다. 지금 네가 고민하는 것이 무엇이든, 꽃잎을 떼는 것부터가 시작인 셈이지.”
하지만 그 이후는 한결 쉽다.
봉 특유의 알쏭달쏭한 소리였으나 대강은 알 것 같았다.
‘별로 도움은 안되겠지만.’
봉은 그 이후, 새로운 꽃을 하나 더 만들어내 산군에게 쥐어줬다.
잎은 다섯 장이고, 전체적으로 가장자리는 푸르고, 안 쪽은 색이 옅었다. 무슨 꽃이냐 묻자 선옹초(仙翁草)라고 말했다.
“이거 독초 아니던가.”
하계에서도 잡초처럼 흔히 보이는 평범한 꽃이다.
독을 품고 있어 잘못 만지면 위험하다 알려져, 보이는 족족 베어 내지는 꽃 중 하나다.
“범인들 이야기지만.”
산군은 선옹초를 바라보다 근처에서 드러누워 있던 탐화의 머리 위에 올라타 드러누웠다.
“고민 하나 없는 거 같아 부럽다.”
먹고 자고만 반복하는 탐화가 어찌 이리 부러울까.
자신도 탐화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편했을까 싶다.
심마 걱정 따위는 하지도 않고, 그저 보이는 대로 다 씹어먹고는 배가 부르면 그대로 아무 대나 드러누워 자면 되지 않던가.
탐화처럼 세상 편하게 사는 놈은 또 없을 거다.
“나도 백산에 있었을 때에는 이리 편하게 살았던 것 같은데….”
어쩌다 이리 변했을꼬.
항상 무언가에 쫓기고.
무언가를 걱정하고.
고민하기 급급하다.
적어도 그 시절은 이렇게까지 머리가 아플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배가 고프면 사냥을 하고, 잠이 오면 거처에 들어가 잠을 잤다.
심심하면 화란을 불러내 말장난을 했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것들을 보기도 했다.
“그때가 편했지….”
그리 푸념하고 있자, 귀신처럼 치마를 펄럭이며 나타난 화란이 쪼그리고 앉아 산군의 미간을 콕콕 찔렀다.
“그때도 산군은 고민하셨습니다.”
“내가?”
“예. 오래 후회하셨지요.”
“내가?”
고개를 갸웃하니 쓴웃음을 지으며 누군가의 이름을 말했다.
“유월이가 있지 않습니까.”
“아…”
산군의 낯이 숙연해졌다.
그러고보니 그러했다.
그런 아이가 있었다.
“그랬었지. 그 아이가 있었지….”
정말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리 후회하시고 가슴 아파하셨으면서 까맣게 잊으신 걸 보면 지금 고민하시는 것 또한 후에는 잊으시겠죠.”
“…그럴까.”
“지나가면 다 추억이지요. 이 또한 지금의 시절을 기억하게 될 테지요. 그러면 산군은 절 탐하시며 옛일을 추억하듯 떠올리겠죠.
내가 미숙하던 시절에는 이런 고민을 하기도 했지. 하면서요.”
참 알다가도 모를 여자다.
위로를 해주려는 건지 놀리려는 건지.
검령으로 변했음에도 이런 성격은 어찌 변하지 않는건지 원.
“네가 말하는 그때의 나는 널 탐하고 있는 게냐?”
“그렇죠. 쭈그렁 할아버지가 되어도 젊고 탱탱한 저를 탐하시는 걸 보면 아주 호색하신 분입니다.”
“참나….”
얼토당토않은 말이라 그런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쁘시네요.”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산군은 웃고 있는 모습이 아주아주 이쁘십니다.”
“여인네도 아니고, 사내에게 이쁘단 말은 어울리지 않다.”
“내 눈에만 이쁘면 된 겁니다.”
“그렇더냐.”
“네, 그렇습니다.”
애정 가득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산군과 화란은 한참이나 그리 보며 감정을 나누었다.
무슨 말을 나누지 않아도.
행동을 하지 않아도.
눈을 보고 있노라면 그대로 감정이 전해져 오기도 했다.
그 둘은 그렇게 한참이나 서로를 흡족하게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 * *
그리고 보름 뒤.
산군과 차륙은 한 식탁에 앉았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알뜰살뜰한 반찬과 흰쌀밥에 김이 모락모락 피었다.
그 둘은 가벼운 목례와 함께 말 없이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식사 시간은 매우 느긋하게 이루어졌다. 아주 천천히 쌀알 하나를 여러 번 곱씹듯 씹어먹었다.
산군은 그에 맞춰 무표정한 낯으로 식사를 했고, 어느새 시간이 흘러 식사를 마쳤을 때.
그 둘은 먼저랄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연못 앞으로 걸어갔다.
이내 산군의 손에 검이 한 자루 들렸고 차륙은 그 앞에서 가부좌를 튼 채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외견은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푸른 단발에 뿔이 돋아나 있는 괴이한 모습이었다.
측은한 마음이 일기도 했으나, 그리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실례였다.
마귀로 변해가는 외관이었으나, 그것은 그녀가 힘겹게 싸우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잡은 산군이 검을 잡아 그녀의 앞에 섰다.
그녀의 선택이다.
존중해야만 했다.
그녀의 가슴에 검을 가져갔다.
그와 동시에 법문을 외우자 바닥에 그려진 진법이 발광하며 살성갑검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화령을 검 속으로 집어넣기 위한 진법이었다.
이전에 검령도에서 육귀가 만들었던 진법을 어렴풋이 본 것으로 그녀와 함께 새롭게 고안해낸 것이었다. 허공의 법진들이 떠오르고 그녀의 몸에 새겨진 법문들이 하나하나 떠올라 검과 공명하기 시작했을 때.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습니까.”
저도 모르게 산군은 그런 말을 물어버렸다.
하지만 그 말은 명백한 실수였다.
까드득!
섬뜩한 이빨 가는 소리와 함께 차륙의 손톱이 길어지고 그녀의 몸이 울룩불룩해지기 시작했다.
“빨리… 빨리 찌르세요.”
그녀는 벌써부터 검에 찔린 듯 잔뜩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경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팔뚝을 감싸 안으며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뚜둑, 뚜두둑!
그녀의 궁장이 찢겨져 나가고, 어깻죽지에서 검은 비늘이 돋아났다.
그것을 보자마자 산군은 후회했다.
괜한 소리로 그녀를 어지럽혀 심마의 촉진이 빨라진 것이다.
“빨리!!”
산군은 곧장 검을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