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241)
낭선기환담-240화(241/600)
낭선기환담 – 240화
곰곰이 생각해 봤으나 떠오르지 않았다. 어찌하여 자신이 이러했고 저러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 처음에는 알고 있었던 것 같았으나 지금은 새하얀 백지처럼.
아니면 새까만 먹물처럼.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럴 리가 없는데.”
말이 되지 않았다.
경지가 오르면 오를수록 천지원기를 받아들여 뇌가 깨어나 한 번 본 것만으로 기억력이 퍽 비상해진다.
개인마다 격차는 있겠으나… 겨우 수천 년.
수만 년이 지났다고 모든 것을 깔끔하게 잊어버리게 될 리는 없다.
많은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기이했다.
동시에 괴이했다.
“아닌가….”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아무런 기억도 없어졌다라는 상실감이 조금 있을 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 말인즉슨.
원래 무엇을 지녔는지 떠오르지도 않으니 뭘 잊었는지도 모르게 됐다.
이내 고민하던 그는 생각을 털어 내고 다시 수행에 들어갔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몰라도 수행을 하는 데 필요한 것도 아니었으며 굳이 중요하다 생각지 않았다.
그렇게 만 년이 흐르고.
또 다시 만 년이 흘렀을 때.
그는 깨달았다.
“사라져 가는군.”
그가 있는 곳이 점점 사라져갔다.
땅도 있고, 바다도 있다.
하늘에는 태양이 떠오르며 시간이 지나면 밤이 되어 달이 떠오른다.
막연하게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장소라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땅이 조금씩 소실되고, 하늘마저 좁아졌다.
어디가 끝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으나 조금씩 사라져만 갔다.
그러면 그럴수록 잊고 있던 의문은 새록새록 피어나 그를 괴롭혔다.
“난… 왜 이곳에 있지.”
원해서 이곳에 자리했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 듯 하다.
허나 이유는 모른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느구가가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 듯 답답하고 막막했다.
누군가의 목소리와 행동들이 생각이 날듯 말듯 하나 결국 나지 않는다.
손아귀를 펼치자 어여쁜 보검 하나가 푸른 화염과 함께 나타났다.
꽃내음이 물씬 나는 검이다.
“화란.”
저도 모르게 뱉어낸 말에 크게 놀라더니 이내 크게 기뻐했다.
“그래, 화란! 이 검은 화란이다.”
허나 그뿐이다.
이름 말고는 기억나는 게 없다.
슬슬 그는 두려워졌다.
점점 사라지는 세상.
무언가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
두렵지 않을 리 없다.
자신마저 기억하지 못하는 놈이요, 세상은 점점 사라져만 가니.
“나 또한 사라지는건가.”
* * *
“겁…이요?”
“그렇다.”
정신을 차린 초아는 봉의 말이 한 줄기 단비와도 같았다.
“그렇다면….”
“자네 부군은 아직 죽은 게 아니라는 소리다. 아직은 말이지.”
쨍그랑!
“저, 정말입니까?”
찻잔을 떨어뜨린 초아의 손은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사실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그가 이겨낼 수 있을지는 모른다.
진명수목이라 부르는 목겁의 겁은 다른 것들과는 사뭇 다른 시련이다. 이겨내지 못한다면 그대로 변치않고 나무가 될 것이지만….”
이겨내기만 한다면 그가 얻어낼 것은 무궁무진 할 것이다.
“그곳은 무한한 곳이니 무엇을 얻어낼지는 자신에게 달린 곳이니까.”
정확한 뜻을 이해하기는 어려웠으나 초아의 뇌리에 박힌 단어는 하나.
그는 죽지 않았다.
겁을 이겨낸다면 살아돌아온다.
그 말이 무엇보다도 깊이 박혔다.
“목겁은 어떤 겁인가요? 진명수목이란 말은 많이 들어봤으나 목겁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봤어요.”
“그렇겠지.”
봉은 그럴 만하다는 듯 쓴웃음을 내보였다.
“어째선가요? 진명수목이 겁의 일종이라면 육사들이 모를 리 없는데 서방님은 전혀 모르는 눈치셨습니다.”
“그야 목겁을 이겨내는 자가 없으니 자연스레 전해져 온 이야기도 사라져 겁인지도 모르게 되었겠지.”
“!”
놀라운 이야기였으나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내용이었다.
겁을 이겨내는 자가 없었다면 그들은 나무가 되어 생을 마감했을 테니 당연히 전해진 이야기도 없을 터.
애초에 진명수목이라는 말은 목겁을 버티지 못하고 스러져간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 아니던가.
잠시 안심했던 초아의 목울대가 고저를 그렸다.
“보다시피 몸은 나무가 되었으나 정신만은 또렷이 자아를 유지하지.
쉽게 말하자면 격리된 공간에 정신이 깨어나, 보다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게 겁의 내용이기는 하지만….”
영 꺼림칙하다는 듯 팔짱을 끼우며 미간을 좁힌다.
“무한한 시간이라고 해봤자 결국에는 자신의 정신에 달려 있지. 그곳에서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소모되는 정신력이 바닥남에 따라 존재 자체가 말라비틀어질 수 있다.”
마치 가뭄에 말라버린 고목처럼.
“제, 제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없는 건가요?”
허나 들려온 답변은 단호했다.
“없다.”
겁을 미룰 수는 있으나 한 번 시작된 것을 다른 이가 도와줄 수는 없다.
“괜한 짓은 오히려 독이다.”
“그럼….”
아쉽게도 지금은 그를 믿고 기다 릴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무너짐은, 곧 자신의 정신이 무너짐과 같으니… 때가 오면 그는 선택을 해야 할 게다.”
“무슨 선택을….”
“글쎄… 그건 자신만이 알겠지.”
“….”
아쉬운 얼굴을 뒤로한 초아는 이내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봉의 말은 다소 이해하기가 어려웠으나 그의 말대로 아직 끝이 아니라면 이리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승선 준비를 할 텐가.”
“그래야지요.”
고개를 주억인 봉은 이내 품에서 작은 목갑 하나를 건넸다.
“자네 부군이 전해달라더군.”
“이건….”
“십생단일세.”
멍한 눈으로 십생단을 챙긴 그녀는 이내 진명수목에 다가갔다.
“뭘 하려는 겐가.”
“그것도 그거지만… 얄궂으신 분이 저리 되시기 전 부탁하신 게 있어요. 그거라도 해드리고 싶습니다.”
“부탁?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나.”
“그네를 만드려고요.”
“…뭐?”
* * *
존재의 소멸.
본능적인 두려움.
그것이 자신을 잡아먹을 듯 덮쳤다.
절벽 위에 앉은 그는 차디찬 바람을 맞으며 고민했다.
수만 년 동안 잊어버린 것이 많다.
첫째는 자신이요, 둘째는 곁이다.
수행하며 천지를 뒤집으며 천재지변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으나, 자신을 잊고 곁에 있는 것들을 잊어버렸으니 수도가 다 무슨 소용일까.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시간의 법칙을 고민하게 되며 깨닫게 된 것이라면 이곳의 흐름이 이상한 괴리감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허나 그는 시간을 어찌할 수 없다.
흘러가는 시간을 멈추게 할 수도 없었으며 흐름을 거스를 수도 없었다.
자신의 공법이나 신통을 수련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법칙에 관해 파고드는 것은 수만 년이 지나도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쉴 수 없었다.
“법칙….”
자연의 법칙들을 고민해봄과 동시에 자신이 누구인지 잊었다 떠올렸다.
법칙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마저도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는 한줄기 동아줄이라도 되는 듯 법칙에 매달렸다.
인과 척.
소위 말하는 인력과 척력의 실마리를 잡는 데 어려울 것은 없었다.
태천외양신공 자체가 인과 척을 응용하여 만들어진 신공이기 때문이다.
태양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무수한 인과 화를 토대로 하는 것이었고, 거기에 공간과 척력이 끼어들어 가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허나 시간.
시간만큼은 제 아무리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보통의 인간들이 바람을 느낄지언정 그 바람을 다루지는 못한다.
그것은 불도 그렇고, 물도 그렇다.
도사들에게는 간단한 일이지만 그러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도 그랬다.
“참 오묘해.”
시간을 느끼지만 그것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은 어찌 알 수 있을까.
도저히 알 궁리가 없었다.
하루가 지나 한 달이 지나도 그는 절벽 위에 좌선하여 요지부동했다.
장장 몇 년을 그리 있었으나 그에게 깨달음은 내려지지 않았다.
무언가가 꽉 틀어막은 듯 두터운 벽이요, 안개 낀 망망대해였다.
“하아….”
무한한 줄 알았던 공간은 점점 땅이 바스라지고 바다가 꺼지고 있었다.
대륙이나 다름없던 땅덩어리는 어느새 거대한 섬처럼 변해갔다.
그럴수록 그는 초조함을 느꼈다.
그리고 초조하면 초조할수록 가만히 수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채지 못한 채 흐름을 바라만 보았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을 때 그는 탁해진 눈으로 일어나 돌연 거대한 영력을 끌어 올렸다.
무언가 개운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고민하던 것에 마침표를 찍은 듯한 아주 시원한 얼굴이며 눈빛이었다.
쿠구구궁!!
천둥번개와 폭풍이 일어날 정도로 거대한 기운이 휘몰아쳤다.
대기 중에 녹아있는 천지원기 또한 끌어당겨져 단숨에 비구름이 몰려들고 태풍이 휘몰아쳤다.
불경을 읊는 듯 낮지만 또랑또랑 한 음성이 밤낮 없이 울려 퍼졌고, 그의 몸에는 오색 빛이 쉼 없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때.
그의 손아귀에서 푸른빛이 일렁이며 눈부신 광채가 새어 나왔다.
손톱만한 크기.
하지만 그의 태천외양신공이 만들어낸 작은 태양이었다.
휘이이이이잉!!
태양은 크기를 점점 키웠다.
오랜 시간과 심력이 필요했다.
손톱만한 이것을 손바닥만 하게 만드는 데 단숨에 천 년이 흘렀다.
천 년은 금세 만 년으로 흘러 태양의 크기는 그의 머리통만 해졌다.
그러나 그는 만족하지 못하고 주변의 모든 걸 집어삼킬 듯 푸른 태양의 크기를 키우고 또 키웠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있는 세상은 점점 사라져간다.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두려워했으나 많은 고민 끝에 결정내린 것은 이상할 정도로 속 시원한 결론이었다.
“사라질 세상이라면 내 손으로 전부 부서트려주지.”
그리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는가.
자신의 기억도.
자신의 세상도.
“전부 부숴버리고 다시 만든다.”
사라짐이 아쉬운 것은 무언가가 남아 있을 때뿐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자신뿐.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니 모두 지워버릴 것이다.
혹시 아는가.
그리하면 자신이 바뀔지.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이 하늘.
이 땅.
이 바다다.
이것들을 지워버린다는 것은 곧 자신 또한 지워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확실한 불안감과 두려움이 일어났다.
뭔지 모를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사라져가는 하늘이지만 그 하늘아래 존재하는 것이 자신 아니던가.
묘한 공포였고, 묘하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무형의 무언가가 제 선택을 막아서 기묘한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돌연 그의 눈에 신기한 풍경이 눈에 내비쳤다.
“….”
그가 보는 건 커다란 나무였다.
산속이다 보니 나무야 많았으나 그 나무에 내걸린 게 퍽 신선했다.
“그네잖아.”
두툼한 가지 위에 두개의 줄과 그 줄이 연결된 판자가 보였다.
어린 소녀들이 자주 타는 그 그네가 맞는 듯했다.
“어찌 이런 게 이곳에….”
참 신기한 일이다.
허나 그와 동시에 무언가 생각이 날듯 말듯 머리가 지끈거렸다.
“뭐야 이게….”
머리가 아파왔다.
심기가 어지러워지자 자연스레 그의 몸에서 기세가 뿜어졌다.
기세는 바람으로 변해 그네가 앞 뒤로 흔들리고, 수풀이 부닥치며 소리를 자아냈다.
그 소리가 꼭 누군가의 웃음소리 같아 그는 멍하니 그네를 바라봤다.
바람에 흔들린 그네는 누군가가 타고 있는 듯 천천히 흔들렸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저도 모르게 눈은 그네를 따라갔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흔들리는 그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아팠던 머리가 식어갔다.
그는 밤이 어두워지고 달빛이 마중 나왔을 때에도 그네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또 보았다.
달빛에 비춰지며 홀로 흔들리는 그네는 신비로와 보이기도 했다.
그것을 마냥 바라보고 있던 그는 그네에 누군가 타고 있는 듯 하염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봤다.
“뭘까 이건.”
희한하게도 그네를 보며 품은 것은 갈피 잃은 그리움이었다.
무엇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리움이라 느끼는 게 참 오묘했다.
허나 그게 왠지 싫지는 않았다.
“그네가 좋겠다….”
돌연 떠오르는 말이 그러했다.
“그네가 왜 좋지?”
그런 의문도 품으며.
그는 떠오른 말을 곱씹었다.
저도 모르게 매달리듯 곱씹으며 자신이 떠올린 그 말을 되뇌였다.
그네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으나 그는 그것을 보며 작은 안식과 안정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만든 태양도 내버려두고는 무어에 홀린 듯 그네 줄을 잡았다.
줄은 그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끊어졌고, 이내 가루가 되어 먼지로 사라져버렸다.
“아….”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탄성이었다.
저도 모르게 뱉어낸 탄성에 놀라며 이내 입가를 둥글게 했다.
“그런 건가.”
그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맑은 눈동자로 자신의 손에서 빛나는 푸른 태양을 하늘로 떠올렸다.
푸른 태양은 눈부시게 발광하며 하늘을 밝혔다.
천천히 올라간 푸른 태양은 본래의 해를 집어 삼키고, 달까지 삼켰다.
점점 크기를 키우는 그의 태양은 하늘 바깥에 자리한 또 하나의 태양이 되어 세상을 푸르게 밝혔다.
그리고 잠시 후.
푸른 태양은 천지를 집어 삼키고 그 또한 보란 듯이 집어 삼켰다.
태양에 의해 가루가 되어 사라져가는 그는 자신의 죽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새로이 태어남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