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26)
낭선기환담-25화(26/600)
낭선기환담 – 25화
살아있는 것이라면 수명이 존재한다.
인간의 수명은 대략 80년.
평균적으로 70년을 살아도 범인들은 장수했다고 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짐승은 어떨까.
적게는 1년을 사는 것부터, 100년을 넘게 사는 것들도 허다하지만 한계는 존재한다.
그것은 종족의 차이에서 오는 수명적 한계이고, 그것을 벗어나는 일은 비교적 없는 편이다.
하지만 산해발산고의 세계에서는 도사와 영수가 존재한다.
그들은 대기에 녹아있는 영기를 흡수함으로써, 탈각(脫殼)하여 더 나은 생물로 진화한다.
그렇게 수명의 한계를 돌파하고 더 많은 삶을 보장받는 것이다.
검선이 되었을 때.
도선이 되었을 때.
그들의 수명은 점점 늘어난다.
검선의 수명은 150년.
도선은 300년 정도로 늘어난다.
그렇다면 영수는 어떠할까?
이 부분에 있어서 산군은 범으로 태어난 것을 조금 감사하고 있다.
‘애초에 시작부터가 다르지.’
검선과 동급인 영물의 수명은 500년이다. 비등한 힘을 지녔지만 150년이 한계인 검선과는 다르게 월등한 수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뿐인가.
영화가 되면 천년. 더 높은 경지로 한발 나아갈 때마다 영수의 수명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그렇기에 4년이 지났어도 산군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영화가 되어 천년의 시간을 보장받았는데, 그까짓 4년이 대수일까.
그렇다고 허송세월 보낸 것은 아니다.
4년으로 산군은 봉악청화로 벌모세수해 화정지체를 대성했고, 그의 수행은 벌써 영화 중경에 달하게 되었다.
‘이게 다 봉악청화 덕분이지.’
분에 넘치는 봉악청화의 화염.
그것으로 자신의 몸을 담금질하며 수행을 거듭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말처럼 쉬이 얻게 된 성과는 아니었다.
패도의 불길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을 몸에 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잠깐의 실수로 주화입마에 빠질 뻔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그는 이겨냈다.
백산 깊숙한 곳에 봉인되어 있던 봉악청화의 불길을 모조리 자신의 몸에 담은 것이다.
조금만 긴장을 늦춰도 봉악청화가 자신을 잡아먹을 것 같았지만,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였다. 이것을 위해 화정지체를 연마한 것이기도 했고, 여섯으로 분열된 내단은 그것을 가능케 할 테니까.
“이제 백산도 본래의 영기를 되찾을 테니.”
나쁠 것이 없었다.
물론 그리하면 도사와 영수들이 몰려들겠지만 아무렴 어떠랴.
‘다시 돌아왔을 때 처리하면 된다.’
본래는 더 일찍 떠날 예정이었다.
홍해 쪽에 전쟁이 터져 어수선할 시기이니 조금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온전히 수행할 수 있었고 이제는 백산을 떠날 수 있다.
‘사월제항.’
그것을 찾기 위해서.
“그 전에 그 꼬맹이나 찾아가 볼까.”
초아랑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던 아이. 자신에게 서찰과 통술서를 읽어 줬던 똘똘한 소녀.
산군은 그 아이를 찾아가 볼 셈이다.
봉악천화를 온전히 몸에 담아 화정지체를 이루고 영화 중경에 올랐으나, 그는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들을 채우기 위해 최우선으로 익혀야 할 것은 단연코 글이라 할 수 있다.
“꼬맹이한테 글을 배우는 것이 모양 빠지긴 한다만.”
그래도 자신과 안면이 있고, 묘하게 어수룩한 것이 누군가를 생각나게 해 그리 싫지 않았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
휘적휘적 백마을로 내려간 산군은 연아를 찾기 시작했다.
* * *
백마을 저잣거리.
그곳에는 코를 자극하는 고소한 냄새가 사람들 발길을 멈추게 했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 그리고 먹음직스러운 보리밥에 수북이 얹어진 시래기.
날씨가 쌀쌀해져 뜨끈한 국밥과 탁주 한 사발을 찾는 이들 탓에, 국밥집은 연신 북새통이었다.
“크흠. 이보게 그 얘기 들으셨나?”
“음? 뭘 말인가.”
얌생이 수염을 달고 있는 사내가 주위를 슬쩍 둘러보고는 소곤거렸다.
“그 달걀 팔던 연가 놈 여식 말일세.”
“어어, 글공부할 거라고 똥고집 피우던 계집년?”
“그래그래. 연아라고 했던가.”
그때.
옆에서 국밥을 떠먹던 사내의 수저가 우뚝 멈추었다.
“한데 연가 여식이 뭐 어쨌기에 그리 조심하는 건가.”
“이 사람이! 그리 눈과 귀가 어두워 어쩌려고 그러는가!”
“나 원, 뭔데 그래. 말을 해줘야 알지!”
“큼큼. 백지자댁 도련님이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워 그 계집을 자기 노비로 삼겠다 하지 않았나!”
“뭣?! 아니, 그런 천인공노할 일이….”
노비라니!
어찌 멀쩡한 상민을 천민으로 만든단 말인가!
“하면 연가 놈은 뭘 하고? 제 여식이 노비가 되게 생겼는데도 가만히 있는단 말인가!”
“쯧쯧, 어쩔 도리가 있나. 어디 가서 하소연해봤자 백지자 어르신 위세를 감당할 자가 어디 있던가. 모두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거지.”
“허허…. 연가 놈만 안됐네! 그려. 쯧쯧.”
“이제 꽃피려는 나이에 노비로 팔려가 모진 일은 다 당하겠구먼. 연아 고것이 글공부를 한다 나대서 그렇지 면(面) 또한 나름 고운 편이지 않던가. 그래서 그런 얕은 수를 부린 게지.”
“이제 봉오리 진 것이 피어 보지도 못하고 떨어지겠구먼.”
연신 혀를 차는 사내들 옆.
흑색의 도복을 차려입은 사내가 은자 한 냥을 올려놓고 유유히 사라졌다.
* * *
찰박찰박.
달이 해를 밀어내고 잔잔한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하는 시간.
백지자 댁 한켠에서는 연신 찰박거리는 물소리. 그와 함께 울음소리 또한 동시에 들려왔다.
“너무 울지 말기라. 네 팔자가 그런 모양인데 어쩌겠누? 받아들여야지.”
“그려. 처음엔 좀 그래도. 팔자다~ 하고 생각하면 익숙해지는 법이여.”
소녀는 곁에서 시중을 들어주는 여인들의 위로에도 구슬프게 울었다.
자기들 위로가 전혀 통하지 않자, 여인들은 서로 눈짓하며 욕간에서 나왔다. 어린 나이에 모진 수모를 당해 노비가 됐으니 그 마음이 어찌 평온하랴.
끼익, 턱.
여인들이 나가자 소녀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목욕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저가 보기에도 서글퍼 샘물처럼 눈물만 솟아났다.
“슬프더냐.”
“!”
그때.
웬 사내의 음성이 잔잔히 울려 퍼졌다.
소녀는 섬섬옥수로 제 몸을 가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사내 하나가 슬그머니 나와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소녀는 화들짝 놀라 소리를 빽! 지르려다 우뚝 멈췄다.
“…공자님?”
“날 기억하더냐.”
“예, 예…. 사년 전, 절 도와주신 분이 아니십니까. 어찌 그때와 한 치도 변함도 없으십니다.”
더듬더듬 말을 이은 소녀는 왠지 모를 반가움에, 동시에 살갗을 보인 것이 부끄러워 홍조를 띄웠다.
사내는 여인네 살갗을 보고도 무표정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내, 이번에는 네게 글을 배우러 왔다.”
“지, 지금이요?”
“그래.”
소녀는 묘연한 얼굴로 사내를 바라봤다.
4년 전과 변함없이 앳된 티가 나는 사내의 얼굴.
자신은 그때와는 달리 키도 크고 팔다리도 늘어났다. 한데 사내는 어찌 변함없이 예전 그대로일까.
무릇 자라야 하는 수염 또한 하나도 없으니 참 기묘한 일이었다.
무슨 도깨비도 아니고 뜬금없이 나타나 글을 가르쳐 달라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이보다는 덜할 것이다.
하지만 소녀는 글을 배우러 왔다는 사내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글을 가르쳐 드리지요. 대신, 청이 하나 있습니다.”
그제야 사내.
아니, 산군도 슬쩍 미소지었다.
“무어냐.”
“제 상황을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소녀는 현재 노비가 되어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닙니다. 이제 곧 천둥벌거숭이에게 정결을 잃게 생겼지요.”
연아는 말을 이어가면서도 억울함이 치솟아 오르는지 울먹거렸다.
“그렇다 한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여인네들 말처럼 네 팔자가 그러 한 것일지도 모르는 것 아니더냐.”
그는 냉랭히 웃으며 말했다. 각박하다 할지도 모를 대답이었으나 소녀는 쓰게 웃을 뿐이었다.
“…예. 그렇지요. 제 팔자가 그러해 그런 것이겠지요. 하지만 소녀는 그 팔자를 고쳐볼까 합니다. 도와주실 수 있겠는지요.”
“글을 가르치는 값으로 팔자를 고쳐 달라라…. 내가 너무 손해 보는 것 아닌가?”
“아닐 겁니다. 소녀가 공자님께 부탁드릴 것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러자 그의 낯이 묘연해졌다. 대체 무슨 청을 하려는 것이길래 저러는 걸까.
이윽고 소녀가 입을 열었고, 잠자코 듣고 있던 산군의 눈살이 씰룩였다.
“정말 그것이 네 청이더냐?”
“예.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 들어주마.”
그 직후, 소녀는 자신이 글공부하던 서책의 위치를 알려주었고 산군은 욕간을 나갔다.
* * *
백지자의 아들.
백지종은 만연에 웃음을 머금으며 별관으로 들어섰다.
은은한 촛불이 방안을 밝히자, 소복을 입은 어여쁜 아이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곱구나.”
음욕이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연아를 훑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
이리 고우니 달걀이 상해 죽을 뻔했다는 헛소리를 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술 한잔 마시지 않았는데 낯이 달아 오르고 몸이 후끈거렸다. 욕정이 치미니 술상이고 뭐고 눈에 뵈지 않았다.
“네, 네년도 몸이 근질근질할 터지? 내 곧장 동침할 것이니 앙탈은 침소에서 부려 보아라!”
염소처럼 돋아난 수염을 씰룩거린 그는 연아에게 손을 뻗었다.
어깨에 살짝 손을 올리자 흠칫 몸을 떠는 것이, 심히 아련해 그의 가슴마저 술렁였다.
“흐흐, 부끄러워 할 것 없다. 노비가 되었으니 이제 사내를 알 때도 되었지.”
큭큭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옷고름에 손을 올려 스리슬쩍 그것을 잡아당겼다.
스르륵 옷고름이 탄력 있게 풀어지며 저고리가 술렁였다.
그리고 그때.
푹!
“…어?”
둔탁한 소음과 함께 백지종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너무 흥분한 탓일까?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눈앞이 흐릿흐릿하기도 했다.
이상하다 싶어 고개를 흔드니 어느 새 자신은 이불보에 머리를 대고 있었다.
“허, 허허….”
약주를 한 것도 아닌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눈알을 굴리자, 표독한 낯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소녀의 손이 번뜩였다.
‘은장도…?’
그리고 그것으로 사내의 시야는 암전됐다. 허무하기 짝이 없는 죽음이었다. 제 손으로 만든 노비의 손에 죽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연아는 차게 식은 눈으로 멍청한 얼굴을 한 백지종을 내려다봤다.
이리 간단히 죽어버렸다.
그동안 당했던 수모에 덜덜 떨었던 것이 우습게만 느껴졌다.
핏물을 머금은 은장도는 유난히도 차가워 보였다.
‘이제 이것이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오겠지.’
연아는 그것을 담담히 바라보며 조소했다.
“어차피 난 살지 못해.”
양반집 자제를 죽였으니 제 죽음에 이변은 없다.
차라리 지금 자결하는 것이 편하겠지. 허무하기도 하고 짧기도 한 인생이었으나 후회는 없다.
그런 후안무치에 정조를 잃고 평생 수모를 당할 바에는 이것이 낫다.
‘적어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인생이니.’
가족들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괜찮다.
“공자님이 약조하셨으니.”
그러니 이제 편해져도 된다.
연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은장도를 들어 올리는 제 손의 떨림이 여실히 느껴졌다. 죽음 앞에는 결연한 절개도 다 소용이 없는 모양이다.
제 꼴이 우스워 냉소한 소녀는 다시금 은장도를 질끈 쥐었다.
찔러 넣는다.
지금이 아니면 죽는 것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그러니 그 전에.
턱.
순간 연아의 눈이 번쩍 떠졌다.
“어, 어찌 막으십니까.”
언제 나타났는지 눈앞에는 예의 사내가 나타나 손목을 단단히 붙들었다.
“살고 싶지는 않더냐.”
담담한 음성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찌 살고 싶지 않을까. 살 수만 있다면 살고 싶었다.
하지만 백씨 집안의 장손을 죽였는데 어찌 살 수 있을까.
필히 자신의 가족들이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다 죽어 나가겠지.
그것만큼은 절대로 막아야 했다.
박복한 팔자는 자신 하나로 족함이 옳았다.
“왜 내게 살려달라 청하지는 않았더냐. 아니면 백지종을, 백씨 집안을 죽여 달라고 빌었어도 됐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럼 어찌 은장도와 네 가족을 지켜달란 말만 한 것이냐.”
“이것은 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게다가……. 무리한 부탁이지요. 아무리 공자님이 인간이 아니라 하셔도.”
사내는 왠지 씁쓸한 눈빛으로 연아를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연 빼앗은 은장도에 푸른 불길이 치솟았다. 화르륵! 그 청염은 은장도를 재도 남기지 않고 세상에서 지워 버렸다.
“합!”
화들짝 놀란 연아가 딸꾹딸꾹하며 물었다.
“도, 도깨비셨습니까?”
“그런 미친놈들이랑 날 엮지 마라. 내가 누군지는 곧 알게 될 터이니.”
그리 말한 그가 한 발을 내디디니.
발밑에서 눈이 시린 청염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이내 여섯의 작은 청조로 변해 사방팔방으로 휘몰아쳤다. 벽면이고, 지붕이고 할 것 없이 푸른 화염이 치솟아 별관 자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 터럭의 재도 남지 않고 깨끗이 지워버리는 요술 같은 신통.
소녀는 연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사라져버린 별관에서 나와 마당으로 걸어갔다.
걸음걸이마다 청염이 치솟고, 기온이 끓어 올라 공기가 후끈해졌다.
별관뿐만 아니라 본채, 곁채 할 것 없이 푸르게 피어나는 화염이 집 전체에 번져 활활 타올랐다.
“아, 아니 이게 다 무슨…!”
“아이고! 불이야! 대감마님 불! 불입니다요!”
살갗을 에는 열기에 노비들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물을 퍼다 나르고 모래를 뿌렸지만, 한번 타오른 청염은 꺼질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이, 이게 다 무엇이냐! 어, 어서 불을 꺼라! 불을!”
그때 즈음.
혼비백산하는 노비들과 머리채를 쥐어뜯는 백지자를 보며 감춰둔 기운을 끌어 올렸다.
특유의 영압이 사방을 짓누르자 그들의 무릎이 풀썩! 꺾이며 석고대죄를 하듯 엎드렸다.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이유 모를 두려움에 고개만 슬쩍 들어 올렸다.
그곳에는 적안을 번뜩이는 사내가 귀신처럼 서 있었다. 그 맹렬한 기세에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오금이 저렸다.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압도적인 강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으니 그리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내의 한마디에 더 명확하게 와 닿았다.
“귀찮은 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