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273)
낭선기환담-272화(273/600)
낭선기환담 – 272화
평범한 범인이 태어나고 노쇠하여 죽게되기까지의 시간.
백 년.
한 나라가 세워지고 멸망하기도 하는 시간이니만큼 많은 것들이 변하고 바뀌고 사라져갔으나 그 중에서도 변하지 아니하는 것들은 있었다.
하늘까지 닿은 듯 높디 높은 산 봉우리에는 구름을 놓은 듯 운무가 짙었고, 주변은 새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는 그곳.
백산!
백 년이 지난 지금 백산의 유명세는 더욱더 높아져 있었다.
백산파의 유명한 일화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압권인 것은 역시 장문에 관한 것이다.
육동지역의 선도 문파들을 홀로 멸문시키고, 그것으로 모자라 백산파를 능멸한 촉산파를 찍어 눌러 그들의 대사부를 볼모로 삼은 것이 가장 유명했다.
그렇기에 많은 영수들과 도사들은 백산파 장문의 신통력에 경외감을 품어 백산파의 제자가 되고자 시간이 지나도 멈출 기색 없이 몰려들였다.
허나 백산파의 입문 시험은 까다롭기 이를 데 없고 죽음을 불사하지 않으면 통과하기가 어려워 많은 이들이 고배를 마셨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백산 근처에는 여러 나라들이 생겨나 흥하였고, 당연히 백산파의 유명세에 힘입어 날로 번성했다.
백산파 제자가 되기를 포기하고 나라를 세우거나 범인으로 돌아가 속세의 삶을 살기로 한 이들이 적지 않은 탓이었다.
그럼에도 수많은 인재들이 모여 백산파는 많은 제자들을 가지게 되었고, 그 수가 일만에 달하였을 때.
백산파는 여러 거대 문파들에게 연통을 보내 그들을 초대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내노라 하는 거대 문파들이 백산파로 모이는 날이었다.
“많이도 오는구나.”
백산파 장문.
천범은 뒷짐을 지고 서며 끝 없이 이어지는 행렬을 보았다.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많은 귀물들을 싣고 오는 마차들의 행렬이다.
“공정강에 넣어오면 될 것을.”
굳이 보여주기 식으로 저리 가져오는 게 픽 우스웠다.
“이게 다 장문의 힘이 두려워 저리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오셨소.”
그녀는 촉산파의 대사부.
촉만이었다.
천범에 의해 볼모가 된 그녀였으나 솔직히 말이 볼모지 그는 단 한 번도 촉만을 억압한 적이 없었다.
그때 일이 있고 난 후, 둘 사이에 존칭이 생겨난 것 말고는 여전했다.
아무리 그래도 생사고비를 함께 겪었던 사이이니 범도 그렇고 촉만도 서로를 배려했다.
서로의 입장을 잘 알고 있기에 더더욱 이리 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백산을 잠시 떠나셨는데 무엇을 하고 오셨습니까.”
“별 것 아니오. 그저… 소식이 끊긴 벗을 좀 찾아보고 왔소.”
“찾으셨습니까.”
“찾지 못했소.”
몸이 회복되고 다방면의 소식통을 이용해 그녀의 흔적을 찾았으나, 애석하게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홍연 또한 마찬가지였다.
분명 함께 있으리라 생각하고 홍연을 찾았으나 그녀 또한 행적이 묘연하여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축하가 늦었소.
지선으로의 승선 축하하오.”
그녀는 얼마 전, 천범의 도움으로 승선에 성공해 지선이 되었다.
“다 장문의 덕이지요.”
“그게 왜 내 덕이겠소. 무슨 짓을 해도 오르지 못하고 거꾸러지는 이들 또한 저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데.”
천범은 얼마 전, 승선에 실패하여 죽은 그를 떠올렸다.
“명 장로의 일은 저도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태양화리의 명화는 진수명화에 실패하여 죽고 말았다.
“크흠….”
덕분에 그의 부인도 얼마 후에 그를 따라 삼도천을 건넜다.
안타까운 마음에 그 둘을 함께 백산 한켠,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다.
아주 오래 전.
그들이 단순히 영물이었을 시절부터 함께하던 천범이다.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슬픔이 뼈에 사무쳤다.
그 때문에 자신과 연이 있던 자들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금은자매는 물론, 호리와 홍연까지 백방으로 찾아봤으나 찾지 못했다.
“명칠이가 참 걱정이겠습니다.”
그녀의 말대로다.
부모와 형제들 모두를 잃어버린 명칠이의 슬픔을 누가 알아줄까.
자신만 해도 이리 아프고 쓰린데, 그 아이는 오죽하겠는가.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 아이 곁에 만삼이가 있으니….”
세상만사 천태만상이라 하던가.
만삼은 몇 해 전 명칠이와 혼인했다.
‘서로 앙숙이기는 했으나 놈 또한 명화가 죽어 상심이 컸겠지.’
오랜 벗을 잃은 슬픔과 제 부모를 잃은 슬픔이 둘을 엮이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 계셨습니까.”
“쌍녀왔느냐.”
범의 딸인 천유였다.
“언제까지 쌍녀라 부르실 거예요. 아버님이 직접 천유라 이름까지 지어주셔 놓고….”
“아비가 되어 내 딸에게 애칭도 마음대로 못 붙인단 말이냐.”
“그건 아니지만… 너무하셔요.”
천유는 아직도 어린 아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본래 영결이었던 천유는 이제 막 영명에 한 발 걸치고 있었다.
수행 속도가 느린 영수치고는 매우 빠른 성취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천천히 느긋하게 하라고 했으나 천유는 어서 빨리 백산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후에 천우가 말하길.
[누님은 아버님 뒤를 이어 백산파의 장문이 되고 싶다 했습니다.]그렇다고 한다.
‘줄 생각 없는데 말이지.’
그가 보았을 때, 천유는 백산파 장문직이 어울리지 않았다.
아비 앞에서는 저리 다소곳하게 있으나 누굴 닮았는지 성정이 포악하고 잔인한 면이 있다.
게다가 인간을 그리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 더더욱 그랬다.
‘제 어미를 닮은 게지.’
백산파는 영수와 인간이 뒤섞인 문파라 장문될 이가 어느 한 쪽에만 치우쳐서는 안된다.
내심 다음 대장문인으로 점 찍어둔 인물은 따로 있었다.
‘장문 그릇으론 운모가 제격이지.’
혼아혈이기에 영수와 인간의 마음을 잘 알고, 천성이 차분하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녀석이다.
수행도 빨라 벌써 환선 중경에 올랐으니 아마 머지않아 태선에 오를지도 모를 일이다.
“한데 장문.”
“왜 그러시오.”
“이 많은 문파들을 뭣하러 불러들이신 겁니까. 장문의 위명이라면 굳이 이런 짓 하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혹… 과거의 원한을 갚아줄 생각입니까?”
“그런 생각까지 하지는 않소.”
“하면 무엇 때문입니까.”
촉만의 물음에 천범은 잠시 고민하다 쓰게 미소 지었다.
“힘이 어찌 영원할 수 있겠소. 제 아무리 강인한 문파라도 세월 앞에 흥망성쇠는 차별이 없는 것 아니겠소.”
“장문은 벌써….”
무언가를 간파한 듯한 어투에 천범이 싱긋 웃고는 유에게 물었다.
“한데 무슨 일이냐.”
“아! 큰 어머니가 찾으셨습니다.”
“슬슬 때가 되었구나. 알겠다.”
* * *
백산파 한켠 회장에는 온갖 산해진미와 함께 탁자가 줄지어서 있었는데, 얼마나 길게 만들어두었는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만찬이 펼쳐진 자리에는 여러 얼굴들이 보였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문파의 중임을 맡은 자들이었다.
화신파, 아미파, 무당파, 점창파, 수월문, 일월문 등등 셀 수도 없이 많은 문파의 대장로나 장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몸소 제자들을 이끌고 온 장문이 있는가 하면, 백산파가 두려워 장로만 달랑 보내는 문파도 있었다.
“모두 도착했느냐.”
“아직입니다.”
수많은 문파들의 긴 마차 행렬은 아직도 끝날줄 모르고 이어지고 있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마차의 행렬이 사흘 밤낮으로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으니, 그들의 숫자를 모두 세어야 하는 역할을 맡은 백산파 제자들은 잠도 자지 못하고 인원을 세기만하고 있었다.
“허허, 아직도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니… 백산파의 위명이 역시 대단하기는 대단하구나.”
진귀한 광경에 천하제일문(天下第一門)은 역시 백산파가 맞다며 갑론을박이 펼쳐지기도 했다.
“수고가 많다. 네 공을 잊지 않을 테니 끝까지 고생 좀 해주거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만호 장로님.
소인 성심성의를 다할 테니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만호는 제자의 어깨를 두들겨주고는 어느 한 문파 문양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에이 퉤!”
그 수많은 문파들 중에는 촉산파 또한 섞여 있었는데, 백산파와 면식이 없는 자들로 꾸려져 있었다.
백산파 제자들은 그들을 아니꼽게 보았으나 무어라 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백산파가 내실을 다지고 여러 문파들을 초대하여 그 우위를 확실히 하기 위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허나.
백산파가 아니꼽게 보는 문파가 있다면, 반가운 곳 또한 있었는데 다름 아닌 탈이라 불리는 무리였다.
“고작 몇 백 년 만에 이리 융성하여 천하제일문에 거론되다니…. 하하, 내 벗 하나는 정말 잘 두었군!!”
백산파 장문과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탈의 대법주 장천이었다.
“여기서 그 고명한 탈의 대법주를 만나뵙다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그대는….”
웬 여인이었는데, 입고 있는 복식이 유달리 기품있고 흘러나오는 기운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아미파 장문인 예춘화라 합니다.”
“그러셨군요. 아미파의 새로운 장문이 되셨다던 예 장문이셨어요.
탈의 대법주 장천이라 합니다.”
서로 포권하여 인사하자 다른 문파의 도사들이 힐긋힐긋 바라봤다.
“대법주, 혹 괜찮으시다면 함께 식사라도 하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하하, 사내가 되어 여인의 권유를 거절할 수야 없지요.”
예춘화가 간드러지는 웃음소리를 내며 기뻐하는 찰나.
“저도 끼워줄 수 없을까요?”
흰 달덩이처럼 백옥같은 피부가 유난히 눈에 띠는 여인이었다.
“당신은….”
“인사가 늦었습니다. 일월의 장문.
소소정이라 합니다.”
그녀는 일월문 장문 소소정이었다.
장천은 뜬금없이 여인 둘 사이에 끼었는데, 그러나 회장의 사내들은 부러워하기보다는 모두 안타깝다는 동정의 눈빛을 보냈다.
그 이유는 일월과 아미파는 철천지원수지간이기 때문이었다.
먼 훗날부터 지금까지 대가 몇 번을 바뀌었으나 일월문과 아미파는 항상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사이로 유명했다.
일월에 유정이라는 도사가 있었을 때는 아미파가 크게 당해 멸문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다시 회복하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철천지원수 사이에 끼어 괜한 화를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어찌 동정어린 시선을 거두겠는가.
‘난감하게 되었군.’
애초에 여인을 멀리하라는 사부님의 가르침을 잘 따르던 그다.
겉으로 내색할 수 없기에 그런 것이지 그녀들의 관계가 아니라도 여인 자체가 퍽 껄끄러운 그였다.
“음? 아니 장천님이 아니십니까!”
“아, 자네는….”
“절 기억 하시겠습니까.”
“기억하고 있네. 동국에서 보았지?”
장천에게 구세주와도 같은 노인이 다가왔는데 백산의 만호였다.
그는 이전에 동국에서 장천과 안면을 튼 적이 있었다.
“그때는 겨우 비선이었던 걸로 아는데 벌써 태선이 되었는지는 몰랐네!”
만호는 지난 백 년간 꾸준히 수행에 힘써 태선이 되었다.
그의 성취는 백산파 장문도 놀라 했는데 아무리 그에게 선단 몇 개를 주었다 해도 순조롭게 태선으로 승선하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명화가 그리 되고 난 뒤라 더더욱 놀라기도 했다.
그것이 영수와 인간의 차이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는 오직 하늘만이 알 길이었다.
“하하, 과찬이십니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전부 장문의 큰 은혜가 있어 올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가? 어쨌거나 이리 만나게 되니 더 없이 반갑군!”
“저야말로 영광이지요.”
장천은 만호와 악수를 나누고는 자연스레 자리에 앉았다.
그의 모습에 장천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나름대로 배려한 것이다.
‘덕분에 살았군.’
갑자기 나타난 만호 덕분에 아미파와 일월문은 도로 자기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알겠군.”
“무엇을 말이신지요.”
“그리 모르는 척 하지 말게.
백산파의 세력이 날로 융성해져 감히 함부로 할 수 있는 이가 없는데, 굳이 이런 만찬을 벌여 세상 문파들을 모두 모을 이유가 뭐 있겠는가.”
장천의 말은 사실이다.
굳이? 라고 하다시피 번잡스럽게 이런 만찬을 열 필요가 없었다.
“저도 처음에는 그리 생각했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장문께서 왜 이러신 것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그래,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건 아마도….”
그때였다.
후우웅-
돌연 만찬회장에 바람이 불었다.
회장의 거대한 대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사내가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로 걸어 나왔다.
“오… 저분이 바로….”
“저분이 그….”
금테가 수놓아진 칠흑 같은 흑포.
그리고 무엇이든 꿰뚫어 볼 것 같은 시뻘건 적안.
그가 바로 백산파의 장문.
천범이었다.
그는 잠시 좌중을 둘러보고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입을 열었다.
“인사는 딱히 필요 없겠지.”
아무개가 그런 소릴 했다면 노발대발했겠으나, 회장에 있는 그 누구도 감히 무어라 하지 못했다.
백산파 장문.
영원의 대선사인 그를 그 누가 건방지다 할 수있을까.
“허례허식은 좋아하는 편이 아니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내가 오늘 그대들을 모두 부른 것은 청이 있기 때문이다.”
청?
백산파의 장문이 대체 자신들에게 뭐가 아쉬워 청을 한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명령을 해도 그들은 거절할 힘이 없다.
그런 힘과 위치에 선 백산파다.
한데 청이라하니 도통 고개가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의중을 헤아릴 수 없어 하던 그때.
“대체 무슨 일이기에 영원에 오르신 대선사께서 저희에게 청이라고까지 말하신단 말입니까.”
보다못한 장천이 옅은 미소를 띠며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범은 씨익 웃으며 답했다.
“도계에 공적이 한 놈 있다.”
“도계의 공적?”
“공적이라니 대체….”
누굴 말하는 것인지 의아했다.
도계에 공적이란 게 있기는 하던가.
“이곳에는 우리 백산파와 생사혈투를 벌이던 문파 또한 있을 테지.
백 년 전, 우리는 전쟁을 치렀고 많은 피를 흘렸다. 허나, 그 전쟁을 주도하고 의미없는 피를 흘리게 한 자는 아직도 멀쩡히 살아있지.”
놈은 아직도 살아있다.
“전쟁을 주도한 자라니….”
“헛, 설마!”
동해해족을 부추겨 백산을 치게 하고, 방곡의 문파들을 휘어잡아 전쟁을 벌이게 만든, 모든 것의 원흉이 누구던가.
“유, 유정!!”
이제는 이 질긴 인연의 끈을 끊어낼 때가 왔다.
“나 백산파 장문 천범은!
놈이 바로 도계를 어지럽힌 공적이라 보고 대대적인 추살문을 내리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