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275)
낭선기환담-274화(275/600)
낭선기환담 – 274화
“그게 무슨 말이오. 오늘 밤을 넘기기가 어려울 것이라니.”
너무도 뜬금없는 말이었다.
“사실 그 아이들은 진즉에 수명이 한계에 다다라 있었습니다. 혼아이기에 겉으로는 노쇠하지 않았으나 속은 진즉에 뭉그러지고 있었지요.”
“그렇다면 왜 내게 지금에서야 고하는 것이오. 진즉 알았다면….”
조금 더 신경을 썼을 것이다.
“그 아이들의 뜻이었습니다.”
범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장천. 이거 미안하게 됐군.”
“아닐세. 내 도울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함께 가보세.”
“고맙네, 부인은 당장 아이들에게 안내해 주시오.”
* * *
휘영청 내걸린 만월이 내려앉은 밤.
소슬바람은 살을 스치오며 탓하듯 불어와 그를 반겼다.
“아니, 이게 다 무슨….”
범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백산의 봉우리 중, 직녀봉이라 불리는 봉우리에 있는 누각 앞.
응명천충의 아이들은 누각 앞에 그려진 법진 위에 나란히 누워있었다.
“이게 다 무엇이냐.”
오늘 밤을 넘기기가 어렵다 하더니 이게 다 무슨 꼴이던가.
차디찬 밤바람이 살을 에듯 불어오는데 혼아들이 왜 저리 있을꼬.
“저들의 뜻입니다.”
천범의 의문에 그녀가 답했다.
아이들의 뜻이라고.
그는 대번에 인상을 찡그렸으나 더 입을 열지는 않았다.
한걸음에 달려가 아이들의 상태를 살펴보니 초아의 말 대로였다.
‘한 오라기 실과 같구나.’
그녀들의 목숨줄은 끊어질 듯 이어져 있는 실 한 올과도 같았다.
“장문님….”
“이게 다 무엇이더냐. 아니, 되었다. 그보다는 안으로 들어서자. 날이 춥다. 나까지 추운데 웬 소복 하나만 입고 이리 누워있더냐.”
누워있는 그녀들을 향해 말하니 묘한 미소만 짓고 고개를 젓는다.
“저희들의 오랜 바람입니다.”
“지금 내가 느끼는 바람은 차디찬 솔바람밖에 없는데 무슨 바람이 또 있다는 말이더냐.”
답답함에 호통도 쳐보았으나 그녀들의 낮에 변함은 없었다.
“장문, 저희는 항상 장문께서 거두어주신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 것이 언제나 마음에 걸렸었습니다.”
응명천충 혼아 셋은 바닥에 그려진 법진 위에 균일하게 누워 있었다.
법진 가운데에는 목이 긴 화병이 하나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 은혜에 보답하고 싶다면 이리 누워있지 말고 더 살거라.”
푸념하듯 뱉어낸 말에 혼아들은 흐뭇한 듯 미소 지었다.
“그리 말하실 줄 알았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저희의 혈통신통을.”
알다마다.
자신의 생명을 남에게 전하는 응명천충의 신통을 가진 아이들이다.
그 신통 탓에 비운의 운명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다.
허나 이제는 여인이라 부를 만큼 장성하고, 또 노쇠한 그들이다.
“하여… 저희는 후회가 없습니다.”
“무엇이 후회가 없느냐.”
“수명이 다 되었으나 그리 나쁘지 않은 인생이었습니다.”
“죽기 전에 완성해서 다행입니다.”
참 다행이라는 듯 눈물을 보이며 눈을 스륵 감는다.
천범은 심난한 마음을 부여잡고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저희의 목숨은 언제나 장문을 위해 쓸 거라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허나 그런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고, 장문께서 허락하지도 않으셨죠.”
자주 백산을 떠나있는 그다.
그럴 기회가 거의 없었고, 기회가 왔다 해도 그는 항상 거절했다.
그러자 그녀들은 다짐한 것이다.
“어떻게든 도움이.”
“어떻게든 보탬이.”
“어떻게든 보답을 하고자.”
그것이 법진, 그리고 그 위에 자리한 아이들의 모습이 결과였다.
“평생을 공들여 만든 공법이며, 동시에 장문을 위한 선물입니다.”
기쁘기보다는 착잡했다.
이 아이들의 혈통신통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만든 공법과 선물.
법진의 구성들을 한눈에 꿰뚫어 본 그는 아이들이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단번에 눈치챘다.
“난 너희들을 잊고 있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그리고 내 마음의 짐을 지우지 않기 위하기도 했다.”
그러니 이 선물은 너무 버겁다.
무겁다.
지금도 후회중이다.
조금만 더 신경 썼다면, 차라리 혼인을 시켜 가정을 이루게 했다면 이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지 않았겠는가.
“저희는 이것을 원했습니다.”
“저희의 바람입니다.”
응명천충의 세 아이는 자매였다.
첫째가 만월, 둘째가 반월, 셋째가 초월이라는 이름이었다.
허나 그 또한 곧 사라질 이름.
지이잉.
지면에 그려진 법진이 무형의 기운으로 떠올라 허공에 멈춰 섰다.
이내 빙그르르 돌아가기 시작하며 주변을 은은한 불빛으로 밝혔다.
법진에서 흘러나온 응어리진 기운의 영기들은 토실토실한 물방울처럼 뭉클거리며 튀어 올랐다.
그러자 누워 있는 세 자매의 몸에서도 진득한 기운이 흘러나와 작은 빛기둥이 뿜어져 나왔다.
굳세지도, 그렇다고 유약하지도 않은 간들간들한 빛기둥이다.
‘아지랑이 같구나.’
세 자매의 생명이 투영된 것일까.
유달리 유약한 법진의 기운에 그의 마음이 다 씁쓸해졌다.
“부인이 도와주었군.”
초아는 우물쭈물하다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답했다.
“그랬습니다.”
저들끼리 만들었다기에는 법진의 형태가 공법의 완성도가 높았다.
이 정도 현묘한 법진이라면 백산파에서도 정교하기로 손꼽히는 초아의 솜씨가 아니라면 어렵다.
“헤아려 주세요.
그곳에서 구해졌을 때 저 아이들이 느꼈을 행복감은 시간이 지나도 흐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수행을 도외시하고 저러한 공법과 흔적을 남기고 싶어 했지요.”
오로지 그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하….”
천범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눈은 미안함과 씁쓸함이 묻어 있었으나 마음만은 따스함이 번졌다.
눈 뜨고 코 베이는 도계에서 자신을 위하는 몇몇이 있다.
그렇기에 살아가고, 또 마음을 주려는 게 아닌가 싶다.
‘그것을 판가름하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시간과 생각이 필요하지만….’
휘이잉.
법진의 영향으로 세찬 바람이 그의 앞머리를 휘날렸다.
흔들리는 머리칼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니 조그마한 빛 덩이 세 개가 아지랑이 같은 빛기둥을 따라 올라갔다.
시선을 내리니 법진에 뉘어져 있던 자매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의 눈이 빛을 좇았다.
빛 세 덩이가 간지러운 웃음을 짓는 듯 흔들렸을 때.
휘잉. 순식간에 빛기둥이 사라지고 직녀봉에는 순식간에 어둠이 찾아왔다.
지면에 그려진 법진에 옅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한가운데에 있던 화병에는 한 떨기 꽃이 피어 있었다. 그는 가만히 화병 속에서 피어난 꽃을 바라보다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한 발, 한 발. 걸음걸이를 옮길 때마다 보라색 꽃은 서서히 시들었고, 꽃잎은 떨어져 내렸다.
떨어진 자리에는 이내 붉은 과실이 맺히기 시작했고, 범이 화병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을 때.
“하필이면….”
세 개의 열매가 맺혀 있었다.
손가락 마디정도 크기의 붉은 열매.
“하필이면 구기자(枸杞子)더냐.”
구기자의 열매였다.
손에 닿은 작은 구기자 열매가 떨어질까 소중하게 품은 그는 쓴 웃음을 지으며 열매를 매만졌다.
“구기자의 꽃말은 희생이라지요.”
서글프게도 잘 어울리지 않은가.
“쓸데없이도 잘 어울리는구나.”
퉁명스러운 말과는 달리, 범의 손은 보물이라도 되는 양 구기자를 쓰다듬고 매만졌다.
‘혈통신통.’
열매에는 그것이 들어있었다.
이것이 아이들의 생명 그 자체였다.
응명천충의 신통은 생명을 옮겨 담아 그 끈을 이어 붙여주는 것.
또 하나의 생명을 부여하는 신통.
또는 희생하는 신통.
‘…본질은 다르지만 내가 지닌 것과 퍽 잘 어울리는 녀석이다.’
융전가단과 수봉외외정과 유사하면서도 조금 다른 개념의 신통이다. 범의 머릿속에서는 벌써 아이들이 만들어낸 구기자 열매를 이용해 새로운 공법을 창안하는 것을 떠올렸다.
융전가단과 수봉외외정.
그리고 이것을 합하면 또 하나의 기운과 산과 생명을 얻게 된다.
그것들이 하나가 되었을 때, 위기의 순간 자신을 지킬 신통이 될 것이다.
“허나 아쉽고, 애매하구나.”
참으로 애매한 감정이다.
“이 감정을 무어라 말해야 할꼬.”
이 감정을 무어라 알아야 할꼬.
표현할 수 없었다.
슬프긴 슬프다만 눈물을 흘릴 정도는 아니고, 아쉽긴 아쉽다만 가슴이 절절해질 정도는 아니다.
참으로 애매한 인연이요, 애매한 끝맺음이었다.
“……서방님. 밤바람이 찹니다. 이제는 돌아가셔야지요.”
백산의 밤바람은 차고 시렸다.
소슬히 불어오는 바람은 백산의 수풀을 지나, 눈밭을 지나 쓰라린 시림을 붙잡아 불어왔다.
그러나 범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따스하니 되었소.”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초아는 옅은 미소를 걸었다.
“그럼 술상을 봐올까요.”
“그래 주시오.”
그러자 장천도 슬며시 다가왔다.
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범의 곁에 앉아 품에서 술병을 꺼냈다.
술잔을 부딪쳐 한 잔을 넘기고.
두 잔을 넘기고, 세 잔을 넘겼다.
풀벌레 우는 소리와 떠오르는 만월이 희미한 밤을 비추었다.
반딧불이 깜빡깜빡 밤을 비추었고, 술상을 가운데 둔 셋은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한숨을 내쉬듯 나지막하게.
이내 달은 져버리고 해는 떠올랐다.
햇살에 반사된 새벽이슬이 반짝였고, 움츠린 꽃이 다시 피었다.
밤새 잠에 취했던 소동물들이 일어나 기지개를 폈고 수풀 사이로 머리를 빼꼼 내밀어 두리번거린다.
변한 듯, 변하지 않은 백산을 보는 범의 눈은 아쉬움이 맺혔다.
“쓸쓸하십니까.”
초아가 그리 물었다.
허나 범은 고개를 저었다.
“하면 애석하십니까.”
재차 물은 질문에도 범은 담담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면 어이 그러십니까.”
그녀가 묻자 범은 답했다.
“어여뻐서.”
“어여뻐서요?”
“어여뻐서… 아쉬웠다.”
밝게 빛나는 저 햇살처럼.
햇살에 비추어 반짝이는 이슬처럼.
이슬을 마시고 피어나는 꽃들처럼.
반짝임은 언제나 순간이라 어여쁘고 아쉽기만 하다.
“저처럼요?”
어이없는 물음에 범의 입가에 헛웃음이 맺혔다.
“그렇다 치지 뭐.”
“변하셨어요. 언제는 제가 제일 어여쁘다 하셔놓고 이러시기예요?”
“어허, 천이도 옆에 있는데 할 말 못 할 말을 구분도 못 하는 게야.”
“뭐 어때요, 서방님의 지기지우(知己之友)이니 사양할 것 없잖아요?”
“나참….”
무슨 말을 못 하겠다.
피식 웃으니 뭐가 그리 좋은지 헤실헤실하며 어깨에 머릴 기댄다.
술이 조금 됐나 보다.
“삶에 연연하지 말라. 삶이란 탄생과 죽음이 함께 만들어진 것이니.
삶이란 죽음까지의 길.
삶이 곧 죽음이라 할 수 있노라.
삶은 여명이며.
동시에 황혼이니.
덧없다 목 놓아도 그때뿐.
반겨줄 이 없으니 허깨비와 같다.”
이 친구도 취한 모양이다.
“한 때이니 어여쁜 것 아니겠나.”
“칠백 년 전인가, 환망선사도 내게 그리 말한 적 있었지… 제자 아니랄까 봐 같은 소리만 하는군.”
“배운 게 그것이니 그럴 수밖에.”
어깨를 으쓱하며 술잔을 털어넣는 장천은 왠지 모르게 기분 좋아 보였다.
그렇게 셋은 한참을 나란히 앉아 턱을 괴며 떠오르는 해를 보았다.
어슬렁어슬렁.
떠오르는 해는 눈이 부실 정도로.
어여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