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279)
낭선기환담-278화(279/600)
낭선기환담 – 278화
“금명지수… 당신인가.”
허나 그 물음에 답해줄 이 없으니.
물음은 도리어 비수로 되돌아와 서글픈 가슴을 찌른다.
손에 닿은 그녀의 뺨은 차디차다.
서늘한 몸은 한줌 온기도 품지 못하니 그동안 얼마나 시리었을까.
그 긴 세월.
서리같은 그 마음 어찌 참았나.
억수처럼 쏟아지는 마음은 또 어찌 그리 참았나. 저 잊고 잘사는 놈 보며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고 어찌 그리 살았나.
어이하여 그리 바라만 보았나.
욕이라도 하지. 소리라도 지르지.
그리 싫었나. 그리 미웠나.
후에 더 후회하라고, 더 아파하라고 그리 꾹꾹 참고 견뎠나.
‘야속한 사람 같으니라고.’
이 빚을 어찌 풀어내라고 그리 가슴에 짐을 지우게 하는가.
내가 기다린 재회는 이런 것이 아니었거늘.
다시 만난다면 묻고픈 것도 많고, 갚아줄 것도 많았는데.
진작 좀 들키어 속풀이 할 기회를 줄 것이지 왜 이렇게 될 때까지 그리 꾹꾹 참고 입 다물고 있었나.
그리 죽어서도 고집불통인 것은 하나 달라지지 않았는가.
“퍽 소중한 강시가 되셨나 봅니다?”
귀음나찰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고칠 수 있나.”
범은 물음에 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고칠 수 있느냐고.
그러자 그녀가 답했다.
“어려울 게 있을까요. 결국에는 수십만의 혼이 제대로 섞이지 못하여 일어난 일입니다. 그것들만 하나로 만들어준다면 될 일이지요.”
고칠 방법이 있다.
범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그 방법이 무엇이냐.”
허나 귀음나찰은 대답 대신 히죽 웃으며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왜 그런가 싶어 눈살을 찌푸리자.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네년이 내게 조건을 제시할 입장이 아님을 알고 있을 텐데.”
쿠구구구!
다시 한번 천범의 영압이 사방을 짓누르자 예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녀는 아미를 좁히면서도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제가… 이 강시를 고쳐도 죽는 건 매한가지 일 아닙니까?”
그러자 천범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그녀의 말대로다.
그는 귀음나찰을 살려둬서 좋을 게 하나 없다.
그녀는 자신의, 또 부인의, 후에는 백산의 제자들과 혈육들이 피해를 보게 될지도 모를 자다.
자신과 악연을 맺은 자들을 살려두어 후환을 남길 필요가 있겠는가.
지금은 몰라도 후에 천범이 등선하고 난 후에 괜한 피바람이 몰아칠지 모를 일이다. 그렇기에 환망 또한 불살(不殺)하며 원한의 고리를 끊어내려 했었다.
“널 살려둘 수는 없다.”
“살려 달라 한 적도 없습니다. 한 가지 청을 들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청?”
“예, 죽은 사람 부탁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부탁도 못 들어주십니까.
죽기 전 마지막 청입니다.
제 숙원을 풀어내게 도와주신다면 깔끔하게 죽어드리겠습니다.”
그 청이 무엇인지 들어보고 결정하는 것이 좋아 보였다.
“그 청이란 게 무엇이냐.”
귀음나찰 예후는 웃으며 답했다.
“제 아비를 죽여주십시오.”
한없이 기뻐 보이는 표정이었다.
* * *
어느 산꼭대기의 운무 속.
“예운선사. 그대의 말이 사실인가.”
은밀히 감춰진 정자 안에는 여러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넷으로 땅 위의 신선이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제가 왜 바쁘신 분들 모시고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저 예운의 말은 한치의 거짓도 없이 하늘 아래 진실만을 말하고 있음이 맞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반응은 제각각으로 갈렸는데, 놀랍다는 의견이 반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반이었다.
“난 믿을 수 없소. 아무리 그자가 그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같은 지선 셋과 싸워 둘을 무참히 도륙했다니!!”
“나도 그렇소. 말도 안되는 일이요. 우리가 괜히 땅 위의 신선이라 불리는 존재입니까. 등선에 오른 환망선사도 강력한 힘을 지녔었으나 그 정도로 압도적인 신통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운이 말하는 백산파 장문은 거의 상계의 신선이나 다름없는 힘을 지녔다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허나 그에 대해 들어보자면 고작 천 년도 살지 않은 자다.
어찌 그리 짧은 생을 산 자가 그런 신통을 보인단 말이던가.
객관적으로 생각해봐도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모두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세상은 말이 되질 않는 이야기가 곧 잘 있다는 것을요.”
“그건… 크흠.”
“그것도 그렇지….”
모두들 수천 년의 세월을 살아온 자들이니 있을 수 없는 일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들이다.
살아온 세월이 있으니 보다 많은 신비한 경험들을 많이 한 자들.
그것이 바로 땅 위의 신선들이니.
“나와는 별 상관치 않는 이야기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는 조용히 수행하여 등선을 바라는 것이 더 나아 보이오. 환망선사가 등선했으니 우리도 어서 등선 준비를 해야지.”
헛기침을 한 사내는 도포를 펄럭이며 바람을 흩뿌리며 사라졌다.
“크흠….”
허나 다른 지선들은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했다.
그런 이들에게 예운의 혀가 날아 꽂혔다.
“피 선사는 영원 육사이니 저희의 걱정이 무엇인지 모를 테지요.”
방금 사라진 사내의 성이 피씨인 모양이었다.
“피가 놈이야 원래 제멋대로 살아가는 자이니 그렇겠지. 애초에 영수들은 수명이 우리의 두 배나 되니 여유가 넘치지 않겠는가.”
“게다가 백산파 장문 또한 같은 영수이니 저리 반응할 수 있지요.”
“그래서….”
지선들 중 하나가 예운을 흘기며 은근히 떠보았다.
“지금 자네가 봐주는 자가 곧 지선이 될 것이고, 그리된다면 백산파 장문을 대적자가 된다는 말인가.”
예운은 빙그레 웃었다.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다면 그리 하는 게 편하지 않겠습니까.
저희는 그저, 유정 그놈이 지선이 될 때까지만 시간을 끌어주면 되는 일이지요. 그리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놈이 다 알아서 한다 하였습니다. 유정이 거사에 성공하면 같은 지선인 우리는 좋고, 실패한 다면 손을 빼면 되는 일이지요.”
“하긴, 백산파 입장에서 보자면 고작 조금 방해한 정도로 우리들을 모두 죽일 명분이 되지는 않으니 우리에게 나쁠 건 없지.”
“한데 유가 놈이 지선이 된다 해도 놈을 처리할 실력이 되던가? 제법 말이 많은 놈임을 알지만….”
도저히 승산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저도 그리 승산이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큰 중상을 입힐 수는 있을 겁니다.”
“음? 그 말인즉슨….”
“이빨 빠진 범만큼 잡기 쉬운 것이 또 없지요.”
“굳이 그럴 이유가….”
“놈이 어찌 그리 강한 것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역시 뭔가 있나 보군.”
예운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자 정자 안에 있던 지선들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보, 복충이 신수가 되었다고?”
“말도 안 되는…!!”
“한데 어찌 반서하지 않았나!”
“그거야 저도 모릅니다. 그 말고도 다른 보물들을 가지고 있겠지요.
선계의 신물을 말입니다.”
그리 말하니 탐나지 않을 리 없다.
“걸리는 점이 많지만… 말하는 걸 보니 생각이 있는 듯하군.”
신선이 됐는데도 주인을 따르는 복충이라면, 그 주인을 죽였을 때 어찌 될지는 자명한 바.
그걸 알면서도 저리 말하는 것을 보노라면 방도가 있지 않겠는가.
“선계의 존재가 인계로 내려오면 천칙의 압력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신선들조차 죽을 정도로 강력하지요. 방책을 갖춘 신선이라면 다를지 모르나 제 눈으로 확인한 바, 백산파 장문이 데리고 있는 오룡은 별다른 방책을 가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되었다.
나머지는 유정이 어찌하느냐에 따라 달린 것이다.
“놈이 가진 신물과 오룡을 가질 수 있다면… 등선이 한결 편해질 지는 또 모를 일이지요.”
* * *
같은 시각.
“어찌 되셨습니까.”
범의 곁에는 그의 부인인 초아가 그의 심사를 헤아려주었다.
“원만하게 해결했다.”
자세한 설명을 할 이유야 있을까.
괜한 걱정을 하게 할 필요는 없다.
“또, 나가시는 겁니까.”
또라는 말이 왜 이리 무겁게 들리는지. 괜스레 미안해졌다.
“그럼, 함께 갈까.”
라고 물었으나 그녀는 거절했다.
“제 자리는 이곳이겠지요. 그래야 서방님께서도 마음 편하겠죠?”
범은 말없이 웃었다.
흘러내린 새하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이처럼 속 깊고 어여쁜 부인을 두었으니 어찌 힘이 나지 않을까.
“미안하구나.”
“부부사이에 미안하다 말할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그리고….”
초아는 범의 손등에 손을 포개며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다 저희들 때문이잖아요.”
퍽 의미심장한 말이다.
“무엇이 말이냐.”
“모르시는 척 마세요. 전 당신 부인이자 백산의 안주인이예요.”
모르래야 모를 수가 없다는 말투.
“그런 게 아니다. 그저 내 원한과 후환을 없애려 하는 것이지.”
“그렇다 해도 그 생각에 저희들의 앞날을 닦아주려 하는 것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서방님께서는 등선하시고 난 후의 도계를 걱정하고 있잖아요.”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알고 있었느냐.”
“왜 모르겠어요. 제 반쪽이 바로 서방님인데 당연히 알죠.”
하기사.
그녀가 모를 수가 없다.
그가 계속하고 있는 일들은 자신의 미련을 털어내는 것이고, 후에는 부인들과 아이들, 그리고 제자들과 백산의 안녕을 위하는 일들이다.
그가 때가 되어 등선하였을 때.
남겨진 이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문파의 흥망성쇠야 내가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마는….’
그래도 떠나기 전, 미련을 남기고 가는 것보다야 그리 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그래.”
하고픈 말이야 많았다.
자신이 떠나서도 잘 지낼 수 있겠느냐라던가, 나 없이도 등선에 어려움이 없겠느냐라던지 많은 걱정과 애정이 담긴 질문들이 떠올랐다.
‘지금 할 필요는 없겠지.’
그녀의 자질은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자질로만 본다면 천범보다 초아의 자질이 더 뛰어난 편이다.
지금만 해도 초아는 당장 지선으로 오를 수도 있지만 그것을 조금 뒤로 미루고 있는 중이다.
십생단을 먹어 전생의 기억을 되찾는다면 곧장 지선으로 오를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될 것이다.
허나 범이 그것을 말렸다.
호리와 같이 전생의 기억이 본래 자신을 덮어쓰게 된다면 아예 다른 사람이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전생의 자신을 알게 된다는 것은 자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기에 초아는 그가 마련한 다른 영초들과 선초로 수행 중이었다.
그러해도 앞으로 오백 년 정도면 지선에 오를 수 있었고, 초아의 수명은 아직 넉넉한 편이기에 급하게 승선할 필요 없이 차근차근 단계를 나아가라 말했었다.
그런 그녀를 위해서도.
천범은 후환을 없애야만 했다.
‘유정.’
그와의 악연도 이제 종지부를 지어야 할 때였다.
그 뒤, 천범은 백산을 떠났고.
1년이 흘렀다.
북해와 맞닿아 있는 마도.
그곳 누각 어느 한켠에 자리 잡은 천범은 술잔을 손에 든 채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예후. 이게 다 뭐지?”
그의 곁에는 수많은 아리따운 여인들이 얇은 옷을 입고 분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 수선하는 여선들로 마도에 입문해 있는 자들이었는데, 여선보다는 기생에 가까운 행태였다.
귀음나찰 예후는 그 사이에 껴서 거문고를 켜고 있었다.
흥겨운 가락 속.
“글쎄요. 환영식?”
예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