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295)
낭선기환담-294화(295/600)
낭선기환담 – 2부 4화
소선은 수명이 있다.
상계의 어느 곳이든 소선은 존재하고 그들의 수명은 차이가 있다.
이들은 수명이 다하면 소생한다.
이전의 기억을 잃고 육신이 윤회하여 어린아이로 돌아간다.
그렇게 새 삶을 산다.
“그게 보편적인 소선의 생이지만 간혹 전투 중에 전사할 때도 있지요.”
모든 육신이 온전하게 남아 사망할 경우에는 적절한 조취를 취해 주면 다시금 소생한다.
팔다리나 손가락이 하나만 없어도 소생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전 이전에 전투에서 한 번 목숨을 잃었으나 가문의 도움으로 소생에 성공했습니다.”
그 덕에 기억은 잃어버렸다.
지금의 공법은 과거의 자신이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적어둔 공법서를 보고 다시 익혔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천범의 낮에는 떨떠름함이 녹아들었다.
천외양군과 무슨 연관이 있는 듯했는데 알 길이 사라졌다.
아쉽지만 이 건에 대해 더 알아볼 수는 없었다.
때마침 황씨 세가의 인물들이 그를 맞이하러 왔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황씨 세가를 이끄는 가주 황곤이라 합니다.”
“천가라고 합니다.”
“천 수선이셨군요. 반갑습니다.”
황곤은 기품 있는 사내였다.
얼굴이 반질반질 윤이 났고, 메기수염을 하고 있으나 인상은 좋았다.
예의도 반듯하여 손님을 맞이할 줄 아는 자였다.
그는 천범과 같은 경지인 상선이었는데 수준 높은 수신통을 부리는 듯했다. 황곤의 기운에서 은근한 물의 기세가 느껴져 왔다.
‘물 냄새도 좀 나네.’
“아직 결정을 내리시진 못하였다 들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지내실 곳을 제공해도 되겠습니까.”
“그리해주신다면 저야 감사하지요.”
어차피 잠시 머물며 여러 정보들을 모아야 하니 나쁠 것 없다.
황씨 세가는 상선이라는 먹이가 제 발로 들어온 것이니 이것저것 더 해주고 싶어 안달이 나지 않겠는가.
“여봐라. 용채봉을 내드리거라.”
“용채봉을… 아, 알겠습니다.”
“하하, 제가 아끼는 곳입니다. 인연이 닿은 향선께서 가끔 찾아 주실 때 머무시는 곳이라 하인이 놀란 모양이지요.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감습할 따름입니다.”
내심 조소했지만 티내지 않았다.
아마 하인과 미리 말을 맞추지 않았을까 싶다.
용마골의 황씨 세가가 상업으로 유명하다더니 벌써부터 티가 났다.
“아참, 제게 좋은 술을 한 병 있는데 잠시 쉬시다가 한 잔 어떠십니까.”
해가 중천이다.
내키지 않는 자리였으나 거절한다면 도리가 아닐 것이다.
“주도 또한 엄연한 도라 할 수 있으니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하하핫! 수계에서도 용마골의 술은 뛰어난 편이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기똥찬 술상 한 번 대접해 드리죠!”
황곤은 호탕하게 웃으며 사라졌고, 황손은 천범을 용채봉으로 안내했다.
잠시 후.
용채봉의 동부 속으로 자리한 천 범은 주위를 둘러보며 만족스러워했다.
‘선기가 풍부하군.’
유무간에 비한다면 조족지혈이었으나 하계와 비교한다면 풍족하다 못해 넘치는 지경이다.
용마골에서도 용채봉의 주위는 선기의 흐름이 모이는 곳이라 그런지 법칙을 수행하기에는 적절한 곳이었다.
천범은 용채봉 동부에 손가락을 튕겨 몇 가지 금제와 환진을 설치했다. 그 걸로도 모자라 균천보화의 깨달음을 섞은 용융오이진의 진법을 펼쳐낸 이후에야 크게 숨을 내뱉었다.
“모르는 것 투성이라 걱정이구나.”
상계로 올라서자마자 많은 이야기를 듣고 많은 것을 보았다.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건만 벌 써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래도 바라시던 곳이지 않습니까.
후우웅.
호젓한 바람이 불었다.
돌연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는 줄곧 그가 그리워했던 여인의 음성.
화아아.
그의 주변에서 금빛 꽃잎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그 사이로 익숙한 여인의 모습이 한 떨기 꽃이 떨어지듯 떨어져 내렸다.
천범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만개하며 그녀를 받아들었다.
“화란!”
금색 꽃잎 사이에서 떨어지는 그녀를 받아든 천범은 기뻐했다.
품에 안긴 화란 또한 그의 목을 감싸 안으며 재회의 기쁨을 만끽했다.
“이제 괜찮은 것이냐.”
“예. 꽃잎이 금색으로 물든 것 빼고는 다를 게 없습니다. 사내들은 여인을 제 색으로 물들이고 싶어 한다더니 거짓은 아니었나 봅니다. 이렇게 제 색이 산군의 색으로 물들어버렸으니 말입니다.”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짓궂은 농담을 내뱉지만 그럼에도 천범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보듬었다.
“더 이뻐졌구나.”
그녀의 몸에서는 은은한 금빛이 새어나오고 있어 마치 후광이 뿜어져 나오는 듯 보였다.
아마도 천범의 눈이 금안으로 변하고 화염이 금색으로 변한 것과 상관이 있는 듯했다.
그녀는 그의 일부이자 검이다.
당연히 변화 또한 함께 겪는 게 당연했다.
“좋으십니까?”
“좋다마다.”
어찌 좋지 않을까.
천년을 넘게 보지 못했었다.
은연중 느끼고는 있으나 만나지 못하니 내심 적적함을 느꼈다.
헤어지게 된 것도 아니라 그 마음이 덜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반갑지 아니한 것도 아니니 말이다.
화란은 자기도 내심 기쁜 모양인지 범의 목은 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둘은 오랜 시간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
어느새 하늘이 어두워졌다.
침소에서 한참 동안이나 화란을 애틋하게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이 어디인줄 아느냐.”
“알고 있습니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빗어 넘기던 화란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알고 있다는 걸 보니 자신의 안에서 보고 들은 모양이었다.
“왜 황씨 세가로 가지 않으십니까? 걸리는 게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 해도 용마골로 가는 것이 낫습니다.”
확언하고 있는 듯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상서는 선충의 습격이 잦은 편이고 그로 인해 사씨 세가는 상선이 하나도 없고 수행에 도움을 주기도 어려워 보이더군요.”
“그렇지.”
“그렇다고 황씨 세가가 그리 좋은 곳이라 확언할 수는 없겠지만 모든 건 산군하기에 달린 것이겠지요.”
그 말도 맞다.
“넌 아직도 날 산군이라 하는구나.”
“입에 붙어서요. 이번 기회에 호칭을 조금 바꿔볼까요? 어찌 바꿀까요? 제 반쪽? 반려? 아니면 제가 검이니 검집이라고…?”
“또 장난질을, 산군이라 하거라.”
함께한 세월이 이천년을 넘겼거늘 어찌 저리 변한 게 없는지 참.
“어쨌거나 사씨 세가는 아닙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한데 어찌 고민하십니까. 혹, 다른 가문과의 접촉을 바라시는 겁니까.”
“아니다.”
달칵.
화란이 빗을 내려놓았다.
이맛살을 찌푸리는 걸 보니 답답하게 굴지 말고 빨리 말하라는 뜻이다.
“걸리는 게 있다.”
“목에 가시라도 걸리셨습니까? 아- 해보세요. 제가 지금은 비록 날카롭고 치명적인 검이지만 목에 걸린 가시 정도는 빼드릴 수 있습니다.”
고개를 빼들고 치명적인 척을 하는 화란을 가볍게 무시한 천범은 복장을 바르게 하고 동부를 나섰다.
그 뒤를 화란이 따라나서려는 듯 귀신처럼 스르륵 사라졌다.
“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주님께서도 이번 자리를 몹시 기대하고 계시고 있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음.”
동부 밖에서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황손이 포권하며 나타났다.
황손의 안내대로 하늘을 가로지르자 작은 폭포수가 자리한 곳의 정자에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꽤 자리가 큰 곳이었는데, 얇은 면사를 입은 무희들도 함께였다.
“오! 오셨구려!”
황씨 세가의 가주 황곤이 반겼다.
그 곁에는 처음 보는 사내도 둘 정도 있었는데 모두 상선의 경지에 있는 신선들이었다.
한 명은 이마에 붉은색으로 꽃문양이 새겨진 미청년이었고, 한 명은 머리를 덥수룩하게 기르고 거 지꼴을 하고 있는 등이 굽은 노인이었다.
가주까지 합하여 총 셋이 천범을 향해 일어나 포권했다.
“이분들은 저희 가문에서 몸담고 계시는 상선분들입니다. 안면이라도 익혀두면 서로서로 나쁠 것 없어 제가 초청했습니다. 혹, 기분이 상하셨다면 미리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하계에서 올라와 아무런 연고도 없는데 이리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주셨으니 감사드려야 하 지요.”
“초찬(礁竄)이라 합니다.”
“탄고말(歎考沫)이요.”
미청년은 초찬. 노괴는 탄고말이라는 이름의 수선이었다.
“천범입니다.”
소개하고 자리에 앉으니 황곤이 흡족하게 웃었다.
이내 품에서 술병을 꺼냈는데 속이 훤히 보이는 투명한 유리병이었다.
유리병은 용의 형상을 그대로 담은 듯한 모습으로 주둥이에 마개가 달려 있어 신기한 모양이었다.
뽀옹!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황곤이 술병을 따자 진득한 주향이 파문처럼 잔잔하게 퍼졌다.
“향이 아주 좋군요.”
“용마골에서 자랑하는 용마주라고 한다죠? 향만 맡았음에도 벌써 술 한 잔을 마신 것만 같습니다.”
초찬과 탄고말이 기분 좋게 눈을 감으며 향을 음미했다.
탄고말은 생긴 것과는 다르게 달변가처럼 말을 잘했다.
“일단 한 잔씩 받으시죠.”
쪼르르륵.
토톡, 톡톡.
진한 향기와는 다르게 술잔에 따르니 공기방울이 톡톡 튀어 올랐다.
단숨에 입안에 털어 넣자 톡톡 튀는 청량감이 몸속을 활개 쳤다.
한기가 전신을 요동치다 사라지는 신기한 감각이었다.
“어떠십니까.”
“이런 술은 난생 처음이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선주구려!”
탄고말은 껄껄거리며 한 잔을 더 들이켰고 초찬은 천천히 음미했다.
-저도 먹어보고 싶습니다.
-나중에 구해다주마.
그때였다.
돌연 천범의 손목에 감싸져 있던 팔찌가 요동치더니 빛이 번쩍였다.
“엇….”
빛이 번쩍이고 그 안에서 어린아이가 나타나 화곤이 지닌 술병을 낚아채 술병 째로 와득 씹어 먹었다.
“이, 이게…!!”
황곤은 때아니게 나타난 아이를 보며 분을 삼키지 못했다.
하지만 분을 풀 수도 없었다.
그 아이는 술자리의 손님.
천범의 손목에서 나타난 아이는 바로 탐화였기 때문이다.
“하아….”
탐화는 아랑곳 않고 술병을 삼켜 버리고는 목이 따갑다며 재밌다고 또 달라고 보챘다.
“또 줘! 이거 하나 더 없어?”
황곤은 천범과 탐화를 번갈아보며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술 냄새에 잠이 깬 건가.’
상계에 올라왔어도 잠잠하기에 아직까지 잠을 자고 있는 줄 알았다.
갑자기 나타날 줄은 몰랐다.
그래도 낄 때 안 낄 때를 잘 아는 아이였는데 갑자기 왜 저런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허허….”
“크흠.”
어쨌거나 무르익어가던 술자리를 파탄 내놨으니 책임을 져야 했다.
“제 아이가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탐화를 데려와 머리를 붙잡고 고개 숙이게 했다.
그렇게 사과하자 황곤이 뺨을 움찔거리며 사과를 받았다.
‘상선….’
술을 낚아채 한 입에 삼켰을 때는 몰랐으나 자세히 보니 상선이다.
저 꼬마 아이가 자신과 같은 경지라는 것을 느끼자 화는 단숨에 눈 녹듯 사그라들었다.
황곤은 이내 사람 좋은 웃음을 내보였다.
“용마주가 귀한 술이라는 것은 충선께서도 알고 계셨나 봅니다. 사과 받을 이유가 없겠습니다, 흐하하!”
이들도 탐화가 상선임을 알아챘는지 참 재미난 상황이라며 웃었다.
황곤의 눈은 이미 반달을 그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에 뻔히 보이는 모습이었다.
천범은 탐화가 사고칠 수 없도록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침을 질질 흘리는 게 아무래도 술을 더 먹고 싶어하는 모양이다.
‘술 먹는 건 한 번도 못 봤었는데.’
용마주가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 아이가 실수한 것이 맞으니 어물쩡 넘어갈 수야 없는 법이지요.”
천범이 그리 말하자 황곤은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좁히다 옳거니 하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하면, 이건 어떻습니까.”
그의 손에는 웬 족자가 하나 꺼내어져 있었다. 족자를 펼치자 신기하게도 동그란 족자였다.
본래 족자는 네모난 모양이 대부분인데 이것은 둥그런 구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산수화라도 그려져 있나 했지만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붉은색 주술문자가 여기저기 적어져 있을 뿐이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오, 잔잔경정도군요!!”
“예, 잔잔경정도(孱孱境靜圖)라 하는 것의 모조품인 법보입니다.”
“잔잔경정도요?”
“백 마디 말보다는 한 번 눈으로 보시는 것이 더 빠를 겁니다.”
황곤은 펼쳐진 족자 위에 제 머리털 한 가닥을 뽑아 떨어뜨렸다.
그러자 머리털이 호수 한가운데에 떨어뜨린 것 마냥 족자에 파문이 일며 그 속으로 가라앉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더 신기한 것은 떨어뜨린 머리털이 족자 안에서 꿈틀거리며 그림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천 수선께서도 한 번 해보시겠소?”
“그러지요.”
초찬과 탄고말 또한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천범은 자신의 머리카락 한 가닥을 뽑아 넘겼다.
그의 머리카락이 스르륵 스며들어 가더니 이내 족자에 범과 똑같은 외형의 그림이 생겨났다.
황곤과 비슷한 그림과 천범과 비슷한 그림.
그 둘이 한 족자에 있으니 이제야 무슨 용도인지 알 것 같았다.
“비무를 하는 거군요.”
“바로 맞추셨습니다. 저희가 떨어뜨린 털로 잔잔경정도는 흡사한 분신을 만들어냅니다. 이 분신을 저희가 조종할 수는 없으나….”
탁!
황곤이 족자를 내려쳤다.
그러자 족자 속 그림들이 밖으로 뛰쳐나와 환상으로 형태가 유지됐다.
천범, 그리고 황곤과 똑닮은 분신이었다.
“비록 보물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본체의 무력과 거의 동일하게 만들어졌으니 직접 싸워보지 않아도 대강의 무력을 가늠할 수 있지요.”
본래는 가문의 가주를 정하는 일이나 수궁의 장을 정할 때 사용하는 보물의 일종이다.
진품도 아니고 잔잔경정도의 모조품이니 그 성능은 떨어지겠으나 유희거리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어떻습니까. 천 수선께서 그리 마음이 찜찜하시다면 이 잔잔경정도로 저와 내기를 한 번 하시는 것이.”
내기에서 이겼을 땐 물론 자신의 가문으로 들어오라는 것일 터.
“그것 참 재밌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