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300)
낭선기환담-299화(300/600)
낭선기환담 – 2부 9화
하늘은 오늘따라 구름이 가득 끼어 있었고, 해는 가리어져 어두웠다.
덕분에 안 그래도 습도가 높은 용마골은 안개가 짙어졌고 물먹은 솜 마냥 전신이 무거웠다.
화란은 오늘 날씨가 꼭 똥 씹은 산군의 얼굴과도 같다 말했다.
“산군.”
“똥 안 씹었다.”
반사적으로 대답했으나 그녀가 물으려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
“고민중이다.”
그는 화란이 무어라 덧붙이기 전에 답했다. 그녀의 눈이 반개했다.
“지금 절 눈앞에 두고 다른 여인을 생각하시는 겁니까?”
음성은 날카로우나 천범은 또 장난질이 시작됐음을 깨달았다.
평소 같으면 알면서도 받아줬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입을 다물고 안개로 뒤덮힌 용마골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천범은 지금 다른 여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이제는 사라진 여인이다.
그녀는 자신의 곁에 있었으나 이제는 사라졌고, 다시 곁으로 왔다.
그게 바로 사하 소선이다.
그녀는 금명지수가 아니지만 그녀가 환생한 자이기도 하다.
범은 아직도 그녀에 대한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고 될 수 있다면 덜어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직접 만나고 싶었거늘.’
그러하지 못하여 아쉬웠다.
고맙다.
미안하다.
이런 말을 하는 사이는 아니다.
그러나 입으로는 못해도 마음으로, 행동으로는 해주고 싶었다.
허나 그녀는 원래의 자리를 찾아갔고 이제 더 만날 수는 없을 듯하다.
사하가 있기는 하지만….
‘그녀는 지수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부채감은 어찌 해결해야 하는가.
범이 고민하는 건 그것이었다.
드득, 드드득!
“뭔 소리야.”
무슨 소린가 하니 근처에서 탐화가 나무뿌리를 뜯어먹고 있었다.
“쟤는 왜 여기서 나무뿌리를 뜯어먹고 있는 게야….”
“흥, 탐화야. 우리 주인 되시는 분이 여자 때문에 또 고민이시라는구나. 그러니 비켜드리자.”
다분히 비꼬는 것이었으나 범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뿐이다.
“자, 물어와!”
탐화 앞에서 다과를 흔들던 화란은 용채봉 밑으로 냅다 던졌다.
그 모습에 범은 턱을 벌리고 얼빠진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무슨 짓이야?”
“탐화가 좋아합니다.”
“….”
개한테 뼈다귀 던지는 것도 아니고 저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환생한 여인을 탐하시려는 분보다는 훨씬 낫지요.”
“그런 거 아니다.”
“그럼 뭡니까? 처소에 다른 여인을 들이시고 뭐가 아닙니까, 흑흑. 백산에 있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럴 거였으면 둔갑도 못 하셨을 때가 더 좋았습니다.”
소매로 눈물을 닦는 척 우는 연기를 한다. 뭐만하면 저러고 놀린다.
“내가 뭐 들이고 싶어서 들였나.”
어쩌다 보니 픽 쓰러져서 안 일어나니 어쩔 방도가 없었다.
그녀가 금명지수의 환생임을 알았으니 황씨 세가가 해코지하게 다른 곳에 둘 수도 없는 일 아니던가.
“덕분에 새로 오신 상선이 소선을 취했다고 소문이 파다하지요.”
“잔소리를 하려는 것이냐 아니면 욕하려는 것이냐. 한 가지만 해라.”
“그럼 욕을 하지요.”
“아니, 하지 마.”
사하는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아 자신의 처소에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지수가 아니지만.
그녀의 환생은 맞다.
그렇다면 답은 정해져 있다.
“황가를 어찌해야 하려나….”
지난 한 달 간.
황씨 세가에서 지내며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수계의 정세.
그리고 수계의 수많은 가문들.
황가와 사가의 관계.
“황가를 어찌할 필요가 있습니까?”
“있지. 황가는 본래 그리 흥한 가문이 아니었으나 천 년 전쯤인가 떼돈을 벌어 큰 부를 쌓은 가문이 되었다 하더구나.”
“그게 왜요?”
“본래 큰돈을 벌게 되면 더 큰 돈을 원하는 법이다.”
“그게 저희랑 상관있습니까?”
지금은 없다.
“앞으로는 있을 거다.”
검은 도포를 휘날린 천범은 등을 돌려 동부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화란은 한숨을 내쉬며 궁시렁거렸다.
“나이 드시더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지셨어.”
그리고는 용채봉 아래를 보고는 품에서 다과 하나를 더 꺼냈다.
그때 탐화가 나타나 소리쳤다.
“나 왔어!”
“자, 가져와!”
휙!
다과 하나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또다시 탐화도 사라졌다.
* * *
“아버님, 드릴 말씀이….”
촤르륵.
업무를 보고 있던 황 가주가 막내아들 황손의 말에 귀 기울였다.
“사가 계집 한 달째 안 나왔습니다.”
“…용채봉의 동부에서 말이구나.”
황 가주는 피식 웃었다.
“과연 사내는 사내로군.”
여인의 몸으로 사내의 방에서 한 달이나 두문불출한다는 뜻이 뭐겠는가.
게다가 그 여인은 사씨 세가를 책임지고 있는 자다.
황씨 세가보다 상선 하나에 더 목을 매야 하는 입장.
그렇다면 상황은 뻔하다.
‘있는 건 몸뚱어리뿐이니.’
자신의 몸을 사용한 게 아니겠는가.
“그리 웃을 만한 일은 아닙니다. 혹, 여인의 치마폭에 휩싸여 사씨 세가로 가버리면 어찌합니까.”
뛰어난 상선이다.
잔잔경정도로 황씨 세가를 책임지는 가주 황곤이 패했다는 사실은 드문드문 퍼져 나간 지 오래다.
게다가 용뇌까지 그에게 내줬으니 여기서 사씨 세가에 그를 빼앗긴다면 손해가 이만저만 아니다.
“그럴 일 없다.”
허나 황곤은 단호했다.
“하계에서 비승한 신선이다.”
상계 신선보다 비승 신선을 더 으뜸으로 치는 이유는 많은 경험.
그 경험 때문이다.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고 올라온 비승 수선은 같은 상계의 신선보다 많은 경험을 지녔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계에서 상계에서 비승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몸으로 맺어진 정이 무섭다고는 하나, 고작 여인에게 헤어 나오지 못할 자였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 계집의 방중술이 아무리 뛰어나 봤자 선충이나 때려잡는 여인의 거친 살결은 금세 질리겠지.”
황손은 고개를 주억였다.
“차라리 잘됐다. 침소에 뉘일 여인은 사가 계집 말고도 많다는 걸 알려주면 될 일이지. 그쪽은 네가 잘 알지 않더냐, 이참에 하나 쥐어 주거라.”
“그 말씀은….”
“네가 용마골에서 계집질 하나는 소문이 자자하니 미색이 뛰어나고 시중을 잘 드는 눈치 빠른 년으로 하나 구해주면 될 일이지. 그럼 천 수선도 그런 거친 여인보다는 살결 부드러운 계집을 더 원할 것이다.”
“아하! 그리하면 그년은 괜한 짓을 한 셈이 되고, 저희는 상선 하나를 얻을 수 있겠습니다.”
황 가주는 속에 숨어있는 뼈를 찾지 못한 아들내미를 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적당한 계집을 물색하거라.”
“옙!”
그때였다.
황 가주의 심복 중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요, 용채봉의 천 수선께서 오셨습니다.”
“천 수선께서?”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잘 됐군. 마침 수선께서 오신 지도 한 달이 넘어간다. 이쯤 되었으면 슬슬 답을 내놓을 때도 되었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넌 아까 말한 대로 준비하거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 * *
끼이이익.
황씨 세가의 본진이 있는 용두골.
그곳에 돌계단을 걸어 올라가 대문을 밀어 넘기니 먼저 자리하고 있는 황 가주와 여인들이 엿보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천 수선.”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많은 수의 음식과 술이 놓여 있었다.
빼어난 미모의 여인들 또한 함께였는데, 속이 훤히 다 비치는 얇은 분홍 옷을 입고 있었다.
입술도 붉고 색기가 흘러넘쳐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랐다.
-작정을 했네요.
화란의 말대로다.
지난 한 달 동안 빈번히 그를 황씨 세가로 들이려는 권유는 많았다.
허나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자 오늘은 아주 작정을 한 모양이다.
“일단은 앉으시죠.”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여인들이 곁에 앉아 술잔을 채웠다.
“이게 다 뭡니까.”
“별것 아닙니다. 제 미처 비승하신 수선의 여독을 생각지 못해 시중 들 여선을 챙겨드리지 못했습니다. 하여 지금이라도 성의를 보인 거지요.”
“성의요….”
천범의 낯이 묘해졌다.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이었기에 황 가주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사가의 거친 살결보다는 용마골의 여인들 살결이 더 부드럽습니다. 베고 잘 것이라면 지푸라기보다는 비단이 좋지 않겠습니까.”
“지푸라기보다는 비단이라….”
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본 황 가주 또한 옅게 미소 지었다.
“대도를 이룰 수선들에게 여인이란 그런 것이지요.”
범은 말없이 곁에 자리한 여인의 허리를 잡아 당겼다. 여인은 놀란 듯 얼굴을 붉혔으나 이내 몸을 밀착하여 안기듯 머리를 기댔다.
여인의 몸에서 꽃향기가 그윽했다.
여인을 품자 황 가주는 조금 신이 난 듯 연거푸 건배를 원했다.
몇 번 잔을 마주치며 적당히 취기가 오르자 황 가주가 은근히 말했다.
“그 지푸라기가 충과 가까이하는 것이니 베고 자면 아무래도 냄새가 나지 않겠습니까. 하여 저희 용마골 최고의 여선들을 불렀으니 마음에 드시는 아이로 여독을 푸십시오. 오늘 밤, 여기 있는 여인들 모두를 취하셔도 괜찮습니다. 비승의 여독이 어마어마할 텐데 큰 사내에게는 많은 여인이 필요한 법이지요.”
여인들의 낮에 홍조가 띠었다.
벌써부터 범에게 복잡한 눈빛을 보내는 여인들이 적지 않았다.
“허허, 제가 드린 것도 없이 받기만 하여 이거 마음이 불편합니다.”
“흐하하! 고작 이정도로요? 수선께서 저희 가문으로 들어오신다면 이 정도는 약과입니다. 정 마음이 불편하시다면 저 황모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봐 주시겠습니까.”
“듣는 것이야 어려울 것 없죠.”
황 가주가 눈짓하자 여선들이 고개를 주억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 여선들을 물리는 것인지 궁금했다.
마지막으로 범이 품었던 여인마저 아쉬운 눈길을 보내며 사라지자 황 가주가 기다렸다는 입을 열었다.
“수선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천 수선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저번에 저와 잔잔경정도의 승부에서 수선께서는 여유가 있으셨습니다. 하여… 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더군요.”
“무슨 생각을 말입니까.”
황 가주는 목이 타는지 술병을 입에 가져가 꿀걱꿀꺽 마셨다.
“천 수선.”
“말씀하세요.”
“혹, 상서의 주인이 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 말씀은.”
“상서에 천씨 가문을 만드는 것이 어떻습니까.”
상서에 천씨 세가를 만든다.
천범의 가문.
그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