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302)
낭선기환담-301화(302/600)
낭선기환담 – 2부 11화
용채봉의 동부 안.
여러 석실들 중, 가장 안쪽에 있는 석실은 여러 금제와 부적이 붙어져 있는 금지가 되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귀율.’
그녀가 사라진 강시의 몸은 이제 단순히 살(煞)과 악(惡)에 가득 찬 무언가 임이 틀림없었다.
꽃과 함께 주옥처럼 보관되던 것과는 달리 지금의 귀율은 검은 쇠사슬과 붉은 진이 그려진 금제에 묶여 옴짝달싹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극명한 대비였으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강시란 그런 것이니.’
처음 귀율이란 이름을 붙였을 때가 떠올랐다. 삼척귀동마인 셋의 어린 강시가 하나가 되었을 때.
범은 그것을 귀율이라 부르고 자신의 무기이자 수족처럼 부렸다.
반서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던 것에 의아함을 느끼고, 한편으로는 귀율 또한 용뇌로 인해 정이란 것을 느끼게 되었나 했지만 알고 보니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귀율 속에는 금명지수가 있었다.
그로 인한 일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없어진 귀율은….’
단순한 강시.
그뿐.
“그것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강시.”
게다가 원옥을 지니게 된 강시다.
만약 어느 날 눈을 떠 폭주하게 된다면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귀율은 불구대천마의 허상을 현현할 수 있고 그의 흉력까지 부린다.
거기다 구환도의 수십만에 달하는 악귀를 집어삼키고 각종 마도와 사도의 신통에 능하니 여간 까다로운 놈이 아닐 수 없다.
“이제는 강시라 부르기도 애매하지 않던가.”
사계에는 귀율과 비슷한 것들이 대부분이니 사계의 사선(死仙)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범은 팔짱을 끼고 가만히 귀율을 바라봤다.
사슬은 석실의 사방으로 촘촘하게 박혀져 그녀를 구속하고, 지면의 진법은 핏빛으로 물들어 검붉은 금제를 만들었다.
때문에 석실은 어둡고도 선명했다.
멀거니 바라만 보던 범은 품에서 작은 돌 하나를 꺼내 보았다.
오묘한 빛이 영롱한 돌.
황가의 용뇌였다.
“그건 또 왜 꺼내십니까.”
화란이었다.
꽃잎과 함께 나타난 그녀는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못마땅하게 그를 흘겨보고 있었다.
“하나 되지 못하던 혼들은 서서히 원옥이라는 구심점으로 뭉치고 있다.”
제대로 된 원리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사라지고 난 이후 귀율은 점점 변해가기 시작했다.
사방팔방으로 제각각 날뛰던 혼과 기운이 서서히 버릴 것은 버려지고 합쳐질 것은 합쳐지고 있다.
무언가가 되려면 몇 백 년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지만 그래도 동결되었나 싶었던 이전과는 달리 눈에 보이는 확연한 변화였다.
“새로운 인격 또한 만들어지겠지.”
온갖 악귀와 귀신들이 뭉쳐 새로운 것이 나타날 것이다.
그놈을 제어할 수 있다면 범은 큰 힘을 휘두를 것이고, 다루지 못한다면 큰 적을 만들게 될 것이다.
그가 생각하건데 후자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다.
그러니 그러기 전에.
“용뇌로 지성을 심겠다. 이겁니까.”
“그래. 물론 여러 금제를 심어 제어하려 애써볼 요량이다만 세상 일이 어찌 될지는 모르는 법이지.”
이 한 달.
용뇌는 이미 봉에게 요청해 사월제항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상계의 물건이고, 신의 육신 중 하나가 바로 용뇌이니 가능할까 싶었지만 의외로 간단히 되었다.
‘하니 쓰임에 거리낄 것은 없다.’
구천월보라는 것은 범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물건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 있습니까?”
“뭐가 말이냐.”
“저라는 여인이 있는데도 산군께서는 어찌 만족하시지 못하는 겁니까!”
또 시작이다.
“실없는 소리 할 거면 들어가 잠이나 자. 나 바뻐.”
“바쁘긴 무슨.”
“정말 바쁜데.”
그리 말하니 이쁘장한 강시를 묶어놓고 감상하기 바빴으면서 뭘 바쁜척이라며 핀잔을 준다.
“왜이래, 남편 바가지 긁는 여편네마냥… 뭐가 그리 불만이야.”
“절 안 봐주시니 불만이죠.”
“애도 아니고….”
“애가 아니니까 이러는 겁니다.”
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애가 아니면 뭔데.”
슬그머니 다가오던 화란이 범의 허리를 감싸 끌어당겼다.
화란은 배시시 미소 지었다.
“한 번…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꽃내음을 가득 담은 봄바람처럼 둘의 숨결이 가까워졌다.
그때였다.
“어떻게 확인하는데?”
탐화가 불쑥 나타나 물었다.
화들짝 놀라 떨어지는 화란과 범은 연신 헛기침을 하며 둘러댔다.
“처, 척보면 아는 거지 뭐.”
“그렇죠.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서로 등을 돌리며 아무것도 없는 석벽을 먼 산 바라보듯 바라봤다.
고개를 갸웃한 탐화는 왜 저러나 싶어 눈을 깜빡거렸다.
“타, 탐화야 가자. 산군은 바쁘시니까 방해하면 안 되는 거예요.”
“심심한데~”
“언니랑 물어와 놀이하자. 그거 좋아하잖아.”
“그래!”
북풍 같은 그녀들이 사라지고 다시금 정적이 감도는 금지에서 범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이내 용뇌를 꺼내 입을 달싹이며 한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용뇌에서 작은 빛이 터져 나오고 둥그런 돌의 형상이었던 것은 현묘한 빛을 사방에 흩뿌렸다.
사이함이 흐르던 금지에 여러 색이 다채롭게 비추었다.
돌의 형상이던 용뇌는 이내 작은 소룡의 모습으로 변하여 물속에서 유유자적 헤엄치듯 허공을 오색의 기류로 흩뿌리며 천천히 흘러들어갔다.
잠시 그 모습을 감상하다 춤추듯 손짓하니 용뇌의 소룡은 처음과 똑같이 헤엄치듯 귀율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췄다.
곧바로 좌선하여 입을 달싹이자 사방에서 불경 외우는 소리가 석실을 에워싸듯 울려 퍼졌다.
지이잉!
불길해보이던 석실이 단숨에 금빛 찬란한 빛으로 밝혀졌다.
이쯤이면 되었다 싶은 그는 품에서 부적 다섯 장을 내던졌다. 부적은 단숨에 불타고 쓰여져 있던 금색 글씨가 천천히 허공을 선회했다.
‘내가 아는 가장 강력한 금술이다.’
그것은 이내 귀율의 목과 두 팔, 두 다리에 스며들어 번뜩였다.
이전, 검노의 서른두 번째 검이었던 당춘을 죽이고 그가 지녔던 서책에 있던 금술.
오신금장이라는 봉인술이다.
상선이 되기 전에는 사용할 수 없는 선술이었으나, 용채봉에 있는 약소한 선기를 이용하니 사용할 수 있었다.
팔목, 발목, 그리고 목에 새겨진 금제는 불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죄인의 움직임을 멈추게 한다.
처음에는 고통뿐이지만 새겨진 금제는 몸속으로 파고들어 움직임을 멈추게 하고 내부로 침입해 목숨까지 앗아갈 수 있다.
‘오신금장(五神禁掌).’
다섯의 신을 금하여 손바닥으로 다루는 봉인술이란 뜻이다.
“아쉽구나.”
범은 미동도 없는 귀율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그대로 등을 돌렸다.
잠시 후.
그 누구도 자리하지 않은 금지의 사슬이 꿈틀거렸다.
* * *
눈을 뜬 사하는 몽롱한 낯으로 천장을 바라보다 다시 눈을 감았다.
포근한 기운이 줄곧 자신을 감싸는 듯해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본래 가장 달콤한 것은 꿈이고, 잠이라 하지 않던가.
항시 선충의 습격에 대비하고, 기울어진 가세를 걱정하느라 단잠을 자본 적 없던 사하이기에 이리 마음 편한 수면은 더욱 더 떨쳐내기 어려웠다.
가능하다면 이대로 줄곧 기분 좋게.
따뜻한 이불을 덮고 잠들고 싶었다.
수면 위와 아래 사이에 걸터 있던 그녀는 문득 자신의 잠자리는 이리 따뜻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번뜩 눈을 떠 일어나니, 곁에는 의자에 앉아 서책을 살피고 있는 상선.
천범의 모습이 내비쳤다.
정갈한 검은 도포를 입고 서책을 탐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고고한 학처럼 기품 있었다.
그녀가 보았던 이천 년 전의 모습과는 달리 여유와 품이 있어서 조금 신기하기도 흥미롭기도 했다.
탁.
“일어났나.”
서책을 덮은 그는 아직도 멍한 얼굴의 사하를 바라봤다.
사하는 정신을 차리고는 답했다.
“네. 제가 얼마나 잠들었습니까.”
“글쎄. 처음 일어난 뒤로 사흘 정도 되었을 걸세. 하계와는 달리 상계의 낮과 밤은 조금 길더군.”
“하계와는 크기부터 큰 차이가 나기에 그렇다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가.”
이전과는 달리 묘한 친근함마저 생겼지만 그것은 금명지수의 기억에 관한 것일 뿐이다.
자신과는 남남이나 다름없기에 단 둘이 있을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조금 어색했다.
‘이전보다 편하기는 하지만….’
이전에는 신비한 신선 같았다고 한다면 지금은 친근한 웃어른 같은 기분이었다.
“할 말이 있네.”
“바로 듣겠습니다.”
“상서를 보고 싶네.”
“…상서를요?”
“전생이 나와 연으로 이어져 있으니 그대와 내가 남이라 할 수 없지. 난 아직 그녀에게 빚을 갚지 못했어.”
허나 이제는 사라진 그녀에게 은혜를 갚을 도리가 어디 있겠는가.
그녀의 환생.
사하에게 갚는 것이 도리일 터.
그리하는 게 금명지수도 바라는 일일 것이다.
“그럼, 저희 가문의 상선이….”
“되어주겠네.”
꽈악.
사하는 기쁨에 이불보를 힘껏 말아 쥐었다.
입꼬리가 씰룩씰룩 올라가는 걸 도저히 막을 길이 없었다.
“허나 그리 좋아하긴 일러.”
“네?”
“사 소선이 잠들어 있을 때, 이런저런 일이 많았거든.”
얼떨떨한 얼굴을 하는 사하에게 황 가주와의 이야기를 풀었다.
심마의 맹세를 했기에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는 못했으나 대략적인 황가의 계략과 야심을 말해주었다.
“천인공노할 놈들!”
그녀는 크게 분노하며 당장에 통천수궁에 이 사실을 알릴 거라 소리쳤으나 그뿐이었다.
“그곳에 알려서 어쩔 텐가.”
“알려야 합니다! 그놈들 때문에!!”
상서의 이들이 죽어나갔다.
사하에게는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들이 바로 황가 놈들이었다.
제 가족과 상서의 소선들을 죽인 것이 바로 그놈들인데 알고도 가만있으면 죽은 이들의 영정을 어찌 보겠는가!
“알리면 해결되나?”
“무, 물론….”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영 자신이 없는 듯한 태도다.
왜 그러냐 물으니.
“수계는 수천의 가문들이 있고, 시시때때로 봉토전을 벌여 하루아침에 사라지고는 합니다. 하도 그런 일이 많다 보니 통천수궁에 알려도 일을 처리하기까지의 기간이 몇 백 년 단위이고 그마저도 묵과되는 경우가 많죠.”
가문이 수천 개나 있으면 사건사고도 그만큼 많을 것이다.
수계에서는 웬만하면 가문끼리 서로 목숨을 빼앗지는 않는다.
크게 번지는 일이 아니라면 보고도 모른 척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게다가 저희 가문은….”
다 쓰러져가는 가문이다.
탄원서를 올린다하여도 몇 백 년 후에나 통천수궁에 오를 것이고, 그들이 슬쩍 내려왔을 때에는 이미 상서는 다른 이의 땅이 되었을 터.
“황씨 세가의 계략을 알아도 저희로서는 막을 방도가 없습니다.”
“다른 가문은?”
“수천 년 전 저희 가문이 흥하였을 때 친분을 쌓은 가문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남이지요.”
사씨 세가의 중임들은 모두 죽었고, 남아있는 소선들도 소생을 거쳤다.
친분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 땅. 지킬 가치가 있나?”
“물론입니다! 수만 년 전에는 저희 가문 또한 오대세가에 들 정도로 막강한 힘을 지녔었어요!”
상서는 선조들의 노고와 유지가 깃든 땅. 가문의 혈육은 이제 그녀가 마지막이다.
그러니 포기할 수 없다.
그녀로서는 당연한 입장.
자부심마저 느껴지는 말이다.
허나 그가 궁금한 건 그런 것들이 아닌 물질적인 것에 한했다.
“그런 거 말고는 없나.”
“…저도 가주 대리가 된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그녀 또한 소생을 한 번 거쳤던 몸이니 그럴 만하다.
“흠… 그럼 일단 저질러 볼까.”
“저지르다니요?”
“그냥 모른척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상서에 계속 터를 잡고 살 거라면 놈들이 행했던 짓들을 묵과할 수는 없는 법 아닌가.”
그들이 야금야금 상서를 병들게 하고, 소선들을 죽였으며 사씨 세가의 상선들마저 죽음으로 몰았다.
그녀는 그런 세가의 마지막 남은 혈연이고 천범이 은혜 입은 여인의 환생이니 모른척할 수 없지 않은가.
“하계에서는 이런 말이 있네.”
은혜는 은혜로.
원한은 원한으로.
은원을 확실히 하라.
“복수는 허망하다고도 하지만….”
복수만큼 짜릿한 것도 또 없다.
범은 황 가주에게 받은 모취항이 담긴 원액을 꺼내보였다.
“선물을 받았으니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함이 도리이지 않나.”
사하의 손에 모취항을 넘겨준 범은 씨익 웃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