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320)
낭선기환담-319화(320/600)
낭선기환담 – 2부 29화
“뭐라고?”
“방도가 없잖아. 간단한 방법은 내가 곤씨 세가의 상선이 되는 것이니 그리 하는 게 서로 편하지.”
사하는 듣고도 믿을 수 없었다.
“농이지? 지, 지금 놀리는 거지?”
“원근 열 냥을 낼 수도 없는데 그럼 어찌할 테냐. 어쩔 수 없이 내가 가는 게 낫지.”
일어나 있던 사하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와 반대로 곤사비는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몸을 베베 꼬았다.
얼굴이 핀 홍조가 그녀가 느끼고 있을 희열을 말해줬다.
“그래도 어찌…!”
“자, 이야기는 끝난 듯 하네요. 오늘은 시간이 많이 늦기도 하니 저희 곤향루에서 편히 쉬다 가시길.”
끼이익.
벌컥.
“참, 천 수선께서는 잠시 저를 따라와 주시겠어요? 이제 곤씨 가의 수선이 되었으니 잠깐이나마 이곳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천범은 알겠노라 답하고 망연자실해 있는 사하를 남겨두고 나갔다.
쿵.
“문 소리가 참… 매섭구나.”
홀로 어이없다는 듯 그리 허허 웃고 웃다 비척이며 사라졌다.
* * *
곤씨세가의 곤향루(銀香樓)는 이런 오밤중에도 불이 환하고 쉴 새 없이 뛰어다니며 일하는 소선들이 있었다.
“저긴 뭘 하는 겁니까.”
“피륙을 짜는 게지요.”
꽤 많은 수의 인원이 베틀을 움직이며 피륙을 짜고 있었다.
이제 곧 무도전이 코앞이라 저리 밤을 지새워 일하는 듯 싶다.
무슨 실로 만드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직 별다른 가공이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천이 매끈하고 부드러웠다.
허나 이것을 만드는 소선들의 낯빛은 며칠 밤을 지새운 것 마냥 눈 밑이 검고 눈에 총기가 없이 어두웠다.
“이 늦은 시각까지 말입니까.”
“예, 그들은 소선이니까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소선은 언젠가 죽지 않습니까. 하여 죽기 전에 열심히 일하는 거지요. 어차피 죽을 이들이니 죽기 전, 열심히 일하여 상을 받고 그 삶으로 원 없이 놀다 죽으려는 게 아닐까요?”
범의 낯이 묘해졌다.
“그러는 영애도 소선이실 텐데요.”
“저는 일할 필요가 없어서.”
싱긋 웃는 낯이 참 개구장스럽다.
아직 앳된 얼굴하며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참 어린 소녀다.
천범은 그 뒤로 이런저런 곳을 소개받고 이야기를 들었다.
곤향루는 곤씨 세가 한켠에 딸려 있는 대궐이었는데, 상서만 한 면적 전체가 자신의 것이라 했다.
단순히 땅만 사비의 이름으로 된 것이 아니라, 그녀가 곤향루 주변의 주민과 상업들의 세까지 걷는다 한다.
이 곤향루에 곤씨 세가의 어른들은 따로 없었다.
실질적으로 여의천의 곤향 지역은 그녀의 손아귀 안에 있는 것이었다.
“영애.”
“사비.”
“사비?”
“사비 아씨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사비 아씨.”
꺄르르 웃으며 좋아한다.
“왜 그러시나요?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전, 정혼자가 있답니다. 괜한 마음은 가지지 말아주세요?”
어처구니가 없는 소녀다.
“그거 참 잘 됐군요. 저도 예저녁에 임자가 있는 몸이라서.”
“잘됐네요. 궁금한 사항이 더 있다면 이 아이에게 물어주세요. 밤이 깊었으니 밤놀이는 이만할게요.”
곤사비는 그리 말하고는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 버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멋대로에 저가 하고 싶은 말만 내뱉는 꼬맹이다.
당돌한 곤사비의 행태에 천범은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해봤자 고작 소선에 불과한 것이 가문의 힘을 믿고 저리 오만방자하니 불쾌하기보단 어이가 없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푸른 의복을 입은 하인이다.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고, 툭 치면 날아갈듯 몸이 얇았다.
“그보다 몇 가지 묻고픈 게 있는데.”
잠시 후.
천범은 자신의 거처를 둘러보며 침소에 엉덩이를 붙였다.
‘대강의 이야기는 알았다.’
그녀는 곤가의 금지옥엽.
가주의 하나뿐인 자식이었다.
곤씨 세가는 시조부터 본신의 체질이 해수였다 조수였다가 하는 특이체질이라고 한다.
수백 장이 되는 물고기였다가도 지느러미는 펼치면 단숨에 붕새로 변하는 기질을 가진지라 바다와 하늘을 아우르는 강대한 신수였으나, 안타깝게도 그런 체질 탓에 아이를 갖기가 힘들었다.
아이를 갖기 힘든 몸인 건 혈통을 이어 쭉 내려왔는데, 이번 대의 가주는 그 정도가 훨씬 심했다고 한다.
수천 년이 넘게 자식 복이 없어 별 짓을 다하고 다 하다 겨우겨우 얻은 것이 바로 곤사비였다.
“죽을 사, 숨길 비.”
사비 또한 태어나자마자 죽을 뻔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기에 저런 이름을 붙였다 한다.
죽음을 숨기다.
불멸하기를 바란 부모의 바람이 떠오르는 이름이었다.
허나 수천 년만에 얻은 자식이라 그런지 뭐든 오냐오냐 하다 보니 저리 철이 없어진 것이었다.
“수천 년만의 자식이라면… 조금 이해가 가기도 하네요.”
“아이 깜짝이야.”
어느새 침소 옆에 앉아 있는 화란이 중얼거렸다.
나름 사색에 빠져 있었는데 갑자기 말소리가 들리니 범이라도 놀랐다.
“산군.”
“왜.”
“저도 아이를 가질 수 있나요?”
흠칫.
“…갑자기?”
“갑자기 궁금해져서요. 어렵겠죠?”
뒷목이 간지럽다.
긁적이고 있자 빤히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린다.
“글쎄… 가능하지 않나?”
“정말요?”
웬일로 저리 초롱초롱한 눈을 다 하는지 원. 솔직히 검령이 아이를 가질 수 있는지 그가 어찌 안단 말인가.
잘 모른다.
그러나 지금 사실대로 답해서는 괜히 바가지나 긁힐 것 같다.
“그, 그렇겠지.”
“근데 산군이 그걸 어찌 압니까? 천지신명도 아니고… 사실 맞아요?”
깐깐한 여자 같으니라고.
범은 자신의 귀걸이를 톡 건드리며 말했다.
“여위가 있지 않느냐.”
“아….”
범의 귀에 걸려 있는 여위는 성족.
보물이 영성을 얻어 형을 갖춘 신비한 종족이다.
이러한 성족 또한 아이를 가지고 낳는 것을 보면 검령인 화란이라도 막연하지는 않을 터.
“한데 그게 왜 궁금하더냐.”
“그냥 궁금할 수도 있죠.”
“아이라도 갖고 싶더냐.”
“그럼 가지게 해주시게요?”
“…못할 이유는 없지.”
진지하게 말하자 오히려 화란이 얼굴을 붉혔다. 주책이라는 듯 범의 가슴팍을 툭툭 때린다.
“됐습니다. 검령이 아이는 무슨… 일 없습니다.”
답지 않게 당황하는 모습에 범은 씁쓸한 낯으로 란의 뺨을 매만졌다.
“왜 이러십니까. 그리 꼬신다고 넘어가는 손쉬운 여인이 아닙니다.”
“내가 꼬시긴 뭘 꼬셨다고.”
“지금 그 능글능글한 얼굴에 당장이라도 아이를 만들어줄 수도 있다라고 써놓고 계시잖아요?”
또 시작이다.
범은 고개를 젓고는 침소에 누웠다.
“한데, 어찌하실 겁니까?”
침소에 누운 범 위에 란이 몸을 포갔다. 발을 동동거리며 범의 얼굴을 검지로 콕콕 찔렀다.
“뭐 어찌해.”
“곤씨 세가에 적을 두실 겁니까? 제가 아는 산군은 그리 못 하셔요.”
맞는 말이다.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잠시 그러는 척 하는 것뿐이다.
“혜안이 있으십니까.”
“대책 없는 얼굴로 안 보이나?”
“정말이시네 이 바보 같은 분.”
“하면 무슨 방도가 있느냐.”
화란은 어깨를 으쓱했다.
“있을 리가 있습니까. 곤가의 영애는 똘똘한 편이더군요. 천둥벌거숭이라서 그럴 뿐이지.”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
억지와 상식 사이에서 교묘하게 상대방을 현혹시키는 어투를 사용하여 원하는 것을 가진다.
평범한 이라면 그런 억지 생떼 따위 무시했겠으나, 곤씨 세가를 등에 업은 영애는 가능할 법한 일이었다.
‘하는 짓을 보면 안 통했던 적이 없던 것 같고.’
그러니 저리 여유를 부리는 게다.
성격도 그만큼 비뚤어졌고.
“해서.”
쿡쿡 찌르던 검지로 턱 선을 훑더니 아랫입술을 매만진다.
“곤가에 눌러 앉을 겁니까?”
“그럴 리가.”
철부지의 억지에 계속 놀아날 생각 따위는 없다.
“눈에는 눈이고, 이에는 이라지.”
어린이의 억지로 옭아맸으니, 이제는 어른의 억지를 보여줄 차례다.
“다 크려면 아직 멀으셨네요.”
큭큭 웃는 범의 모습에 쯧쯧 혀를 찬 화란이었다.
* * *
다음날.
아침 일찍 자리에서 일어난 범은 사하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꼴이 대단하네.”
술이라도 마셨는지 침소에 널브러져 자고 있는 꼴이 대단했다.
옷도 제대로 벗지 않음은 물론이고, 눈두덩이는 붉게 부어 있었다.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
“얘기 좀 하러 왔더니 원….”
지금 상태로는 뭔 말도 못하겠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그는 방 문을 꼭 닫고 산보를 나섰다.
딱히 할일도 없으니 근처를 노닐며 구경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베틀 소리가 아직도 나네.’
아직도 천을 짜는 모양이다.
그 밖에도 여러 소선들이 잡다한 것을 만드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나무를 깎는 이, 조각하는 이, 망치로 신을 두들기는 이 등등.
참으로 많은 자들이 보였다.
‘상선도 있네.’
대부분이 소선이었으나, 언뜻 언뜻 상선들도 많이 보였다.
가볍게 눈인사를 하자 한 상선이 고개를 숙이고 다시금 일에 집중했다.
‘이곳에서는 상선도 별 것 없구나.’
변방의 용마골이나 상서와는 달리 이곳에서 상선이 가지는 힘은 그리 크지 않은 듯하다.
상선도 상선 나름 대로지만 그렇다 해도 언뜻 보이는 자들만 해도 퍽 많은 수가 일터에서 보이니,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상선이라도 해도 모두 전투에만 능한 것은 아니니까.’
저마다의 재주가 다른 것처럼, 신선 또한 그러하다.
범이 무도에 재능이 뛰어난 것처럼, 그들은 연기술이나 연단에 재주가 능한 것이리라.
“어머, 여기서 뭐하세요?”
“영애.”
어느새 곤사비가 나타나 물었다.
그녀는 붉은 색과 금테로 수놓아진 붕새의 문장이 그려진 궁장을 입고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화려했고 화장도 마쳤는지 앳된 소녀는 사라지고 요염한 여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영애가 아니죠. 이제 상선은 저의 가선이시니까요. 자, 다시 한번 제대로 불러보세요.”
“…사비 아씨 오셨습니까.”
“그렇죠. 잘하셨어요.”
범의 눈썹이 꿈틀거렸으나, 사비는 눈치채지 못했다.
“한데 오늘은 어딜 나가십니까. 복장이 화려하군요.”
“제 정혼자를 만나러 갑니다. 아, 마침 잘 되었네요. 상선도 함께 가시는 게 어떠한가요? 듣기론 무위가 출중하시다 하니….”
소매로 입가를 가리며 쿡쿡 웃는다.
“오늘 천 수선의 무예를 보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자, 가봅시다.”
범의 대답은 듣지도 않는다.
그녀에게 가선이란 그러한가 보다.
곤사비 주위에 있던 자들 중, 어제 운적을 흉내 내며 검을 섞었던 사내와 여인도 함께 있었다.
그들은 어색한 미소를 보냈다.
범은 담담히 인사를 받았다.
잠시 뒤.
사비와 함께 곤향루 앞에서 대기하고 있자, 하늘에서 눈이 넷이고 다리가 여섯인 천마가 나타났다.
천마 네 마리는 구름을 밟으며 마차를 끌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곤사비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소년이 자리하고 있었다.
“비!”
“경!”
소년은 내려서자마자 곤사비와 손을 맞잡았다. 사비 또한 그를 경이라 부르며 기꺼워했다.
보아하니 어디 지체 높은 세가의 자제인 것 같았다.
‘마차의 문양이….’
미후의 문양이다.
흉흉한 원숭이 모양임을 보니 오대세가중 하나인 미씨 세가였다.
‘끼리끼리 노는군.’
나름 잘 어울렸다.
둘 다 용모가 빼어났고, 기품 있는 의복을 착용하여 겉보기에는 선남선녀나 다름이 없었다.
“내 얼마나 비를 보고파 했는지 모를 거요. 그날 이후 한시도 비를 그리워하지 않은 날이 없소.”
“저도랍니다 경.”
둘은 두 손을 꼭 마주 잡고 한참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어린놈의 자식들이 꼴값은….’
허나 범은 이내 재밌는 생각이 났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곤사비의 정혼자라….’
생각보다 일을 빨리 마무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