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322)
낭선기환담-321화(322/600)
낭선기환담 – 2부 31화
“아닙니다! 아니에요! 제,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경!”
미씨 가의 자제인 경은 피로 점칠된 그녀의 모습과 고약한 피 냄새에 소매로 입가를 가렸다.
“제 아무리 자신의 수선이 조금 고전한다 하여 화가 나 근처의 소선을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잖은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경은 그동안 자신에게 보여준 모습이 모두 거짓되기라도 한 듯 미친 듯 소선을 죽인 곤사비를 혐오스런 눈으로 보았다.
“아닙니다! 이, 이건… 누군가의 모함이고! 하, 함정입니다!!”
“…몸이 좋지 않은 것 같군. 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하지.”
“아, 아닙니다! 믿어주세요 경!”
“대체 뭘 믿으라는 건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경은 성난 짐승을 보듯 사비를 바라보며 멀찍이 떨어졌다.
망연자실한 사비는 멍하니 있다가 자신이 헤친 소선들을 보았다.
장기와 살점이 토막나 여기저기 난무하고 있었다.
“우욱!”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때였다.
화가 잔뜩난 듯한 여선이 등장해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녀는 상서의 사하였다.
“영애! 사씨 세가의 소선을 헤치다니 무슨 생각으로 저지른 일입니까! 제 가족과도 같은 이들이었습니다. 생명의 무게는 강산과도 같이 지엄한 법. 책임을 지셔야 할 겁니다!”
사가의 소선?
이들이 사가의 소선이었다고?
“나, 난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가의 소선인 줄도 몰랐다.
억울하기 그지없다.
“미씨 세가의 자제분께서도 함께 보았는데 발뺌하실 셈입니까? 계속 그리 오리발을 내민다면 제가 직접 증인을 서 달라 요청할 것입니다!”
머리를 부여잡고 휘청거린다.
평소처럼 곤씨 세가의 힘과 권력으로 찍어 누르고 싶었으나, 미씨가의 정혼자를 걸고넘어지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
“하지만 내가….”
까드득.
뭐가 뭔지는 몰라도 더 이상 자신의 말을 믿어줄 이는 없다.
정황이 그러했고, 보는 눈이 여럿이었으니 그녀가 겪는 상황은 현실.
‘후… 겨우 소선 서넛이다. 대충 값을 치러주고 무마시키면 돼.’
사비는 이빨이 으스러져라 짓씹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녀가… 어찌하길 바라십니까.”
“생명의 무게는 한없이 무거워 감히 저따위가 정할 수는 없으나, 그들을 기다리는 가족과 삶이 있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요. 해서, 저기 계시는 상선의 반환과 원근 서른 냥을 위로금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원근 서른 냥!
게다가 상선 하나까지라니!
사비의 아미가 찌푸려졌다.
“너무 과합니다.”
바로 어제 곤씨 세가의 소선들이 죽고 상해를 입은 것으로 천범을 받았는데 그것과 더불어 원근 서른 냥을 요구하다니! 어찌 과하지 않을까!
“과해요? 과하다고 하셨습니까?”
허나 사하는 잘 걸렸다는 듯 입꼬리를 씨익 끌어 올렸다. 사비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영애께서는 어제 제게 그러셨죠. 생명의 무게에 어찌 값을 매길 수 있느냐고, 그 무게를 알기에, 그리고 그들이 이어나갔을 삶을 알기에 절대로 값을 물릴 수 없다고요.”
사하는 부채를 팔랑팔랑 부치며 치마폭을 움켜쥔 사비의 주변을 맴돌았다.
“한데, 어찌 수선하는 자가 삶의 무게를 재단하고 그것을 폄하하여 그 위로금을 과하다 할 수 있습니까!!”
‘캬, 이거지 이거.’
목구멍이 톡톡 튀는 용마주 한 병을 그대로 쑤셔 넣은 것 같은 시원함이 아닐 수 없다.
판은 분명 범이 짰으나, 사하가 저리 잘해줄 거라 생각지는 못했다.
“설마, 곤씨 세가의 영애께서 겨우 어제 자신이 했던 말씀을 물리실 작정은 아니시겠지요.”
사하는 사비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 속삭였다.
“정혼자분도 아직 듣고 계시겠지요. 자신의 말을 번복하는 무식한 여자를 반려로 맞이하고 싶은 사내는 없을 겁니다.”
흠칫.
슬쩍 고개를 돌리니 멀리서나마 미가 자제의 모습이 보였다.
사비는 이제 치마폭을 잡은 두 손이 덜덜 떨리고 닭똥 같은 눈물이 두 눈에 글썽였다.
“흑, 그, 그리 하겠습니다.”
“네? 뭐라고요? 큰 소리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 그리 하겠다 했습니다! 흑!”
사비는 울먹울먹하며 소리치고는 하인들을 이끌고 도망쳐버렸다.
* * *
덜컹덜컹.
마차 안에서 다시금 수궁 길에 오른 범은 킥킥 웃었다.
“아아, 통쾌했다.”
곤씨 세가에 있을 동안은 항상 고구마 먹다 체한 것 마냥 가슴이 답답했는데, 이제야 속이 좀 시원했다.
십년 묵은 체증이 싹 가라앉은 듯 후련하기도 하다.
“왜 그렇게 봐.”
허나 사하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빤히 노려봤다.
“미리 말 좀 해주면 덧나시나?”
아무 말도 않고 곤씨 세가의 가선이 된다 말해서 그런 듯하다.
“그럴 여유 없었잖아.”
서류상으로 원근을 상납하겠다 체결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가선이 된다 말하고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됐다.
‘안에 있다 보면 방도가 생길 것 같기도 했으니까.’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기도 했다.
“그래도 귀띔이라고 해줬으면 내가 그렇게….”
사하는 자신이 벌인 추태를 떠올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뭐?”
“됐다. 말을 말아야지 원.”
“싱겁기는.”
범은 의자 깊숙이 몸을 눕히고 두 눈을 감았다.
“그런데 소선들은 어떻게 한 거야? 내가 봐도 진짜 죽은 줄 알고 얼마나 깜짝 놀란지 몰라.”
“괴뢰다 괴뢰.”
간간히 연구하던 게 있었는데 마침 쓰일 때가 생겨 환계와 적절히 섞어 그리 보이게 한 거였다.
하계에서 예운이 사용했던 강시술을 범 나름대로 개량해본 것이었다.
어쨌거나 곤사비는 아마도 지금쯤, 거기에 왜 사가의 소선이 있었지? 하며 의아해하고 있지 않을까.
‘이미 때는 늦었지만.’
곤사비가 빠져나갈 방법은 그 자리에서 환술임을 밝히는 것뿐이다.
나중에 환술이었다고 주장해봐야 추한 행동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어쨌거나 이번 일도 무사히 해결됐으니 이제는 진짜 통천수궁에 도착해 무도전을 치르는 일만 남았다.
“얼마나 남은 게냐.”
“글쎄, 한 달 정도 더 가면 방위 전송진이 나오니까. 거기서 전송진을 통과하면 수계의 중심지가 나와.”
수계의 중심.
하공(下空)이다.
그 위에 있는 것이 바로 하늘 위에 떠 있는 거대한 궁궐.
통천 수궁이다.
“수계는 대체 얼마나 넓기에 여기까지 왔는데도 전송진을 써야 되는 건지. 정말 넓긴 더럽게 넓나 보네.”
지도로 보기는 봤으나 실감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넓긴 넓지. 곡기를 끊고 날아가기만 해도 상서에서 하공까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를 일이야. 그래서 소선들은 전송진이 없으면 수계 일대를 돌아보기도 전에 죽어버린다는 옛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더라.”
“무시무시한 크기네.”
전송진은 누가 만들었는지 정말 상이라도 줘야 한다.
이리 편리한 걸 만들어 냈으니 건 원해로 건너가 대라신선이 됐으리라.
그가 아니고는 누가 대라선에 어울리겠는가.
“소설 같은데서 보면 이 타이밍에 딱 전송진에 이상이 있던데.”
그래서 여행에 차질이 생기고.
“그런 불길한 소리 하지도 마. 수계의 동서남북에 자리한 방위 전송진은 엄중한 경계로 보호되고 있어서 그리 쉽게 망가지거나 하지 않으니까.”
“그럼 다행이고.”
그리고 한 달 뒤.
불길한 예감은 정말 지나칠 정도로 딱 들어맞았다.
“범, 앞으로 너는 함부로 혀 털지 않도록 하는 게 좋겠어.”
“내 잘못 아니다.”
“그건 알지만….”
어쩜 이리 귀신같이 들어맞을 줄이야. 우스갯소리로 했던 이야기가 정말 사실이 되어 있었다.
“어쩌지.”
방도가 없었다.
곤란한 것은 자신들 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에서 온 가문의 상선들도 마찬가지인 듯 얼굴을 찡그러트렸다.
많은 수의 신선들이 방위전송진 앞에 모여 불만을 털어놨다.
“허나 저희도 방법이 없습니다. 갑자기 영문 모를 고장이 생겨서….”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다.
“얼마나 남았지?”
“이제 한 달.”
“날아가면?”
“한 오십 년 뒤에는 도착 가능.”
“하….”
뭐 하나 쉬운 게 없다.
때마침 전송진이 부서질 게 뭐람.
“다른 전송진으로 가면 안 돼?”
“우리는 지금 남쪽에 있는 전송진이고, 방위 전송진은 동서남북으로 이루어져 있어. 무슨 말인지 알아?”
“엄청 멀다는 얘기네.”
“맞아. 지역별로 전송진이 이어져 있기는 하지만 방위 전송진처럼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짧은 거리를 여러 번 전송진을 이용하면 갈 수도 있다.
허나 그리하면 한 달은 훌쩍 지나가서 무도전에 늦게 될 것이다.
“에이씨, 내가 이 고생까지 하면서 무도전에 나가야 되나? 다음 무도전은 또 언젠데?”
“글쎄, 한 천 년 뒤? 더 오래 걸릴지도 모르고.”
당장에 다 때려치우고 싶었으나 그러기에 천 년은 너무 길다.
‘수행의 진전을 위해서는 법칙 수서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수계에서 영향력을 부리기 위해서는 천무선이라는 직위 또한 지녀서 나쁠 게 없다.
다른 계로 나가기 위해서는 평범한 가선으로는 역부족이니까.
‘천 년 후에 천무선이 돼서는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는데.’
범은 사가 행렬의 수레 위에 앉아 품에서 비녀 하나를 꺼냈다.
새하얀 나무로 만들어진 비녀였다.
“뭐해 여기서… 웬 비녀야?”
사하가 물어왔다.
범은 잠자코 있다 답했다.
“등선하기 전에… 부인이 내게 준 것이야.”
자신이 선물한 것과 같은 도모잠이다. 복숭아 향기가 일품인지라 여인과 아이 모두가 좋아할 비녀다.
초아는 등선하기 전, 범에게 자신과 같은 한 쌍의 비녀라며 선물했다.
자신의 것과 반응하게 만들었으니 때가 되어 등선하게 된다면 이것으로 서로를 찾자며.
“범… 혼인 했었구나.”
“말 안 했나?”
“응, 안 했어.”
“그래, 아들딸도 있다. 쌍둥이지.”
당황하는 사하에게 천범은 천유와 천우의 이야기도 해주었다.
사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렇구나 답했다. 그러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천 년이면 충분히 올라오겠지.”
자질이 충분한 여인이니.
요호나 아이들이라면 자신이 수계에 있으니 상관없지만, 초아는 인간의 몸이기에 다르다.
선계로 향할 여인이다.
‘수계의 수선이 다른 계로 향하는 일은 거의 드물다.’
위험하기도 하고 그럴 일이 없기 때문이다. 있다고 한다면 전쟁이 벌어질 때를 제외하곤 잘 없다.
게다가 가려고 한다 해도, 이동 거리만 수백 년이 걸리니 당연히 어렵지 않겠는가.
통천수궁에 마련된 특수한 전송진이 아니면 다른 계로 가는 것은 거의 무리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러니 범은 천무선이 되어야 한다.
이전에는 몰랐다 한들, 이제는 알았으나 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연아도 선계에 있을 테고.’
자신의 제자도 그곳에 홀로 있을 테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한데 시작부터 이리 꼬이니 꼭 누가 내 앞길을 막은 듯하구나.”
범은 비녀를 매만지다 품에 고이 넣어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송진에 문제가 생겼다 하니,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밖에 없다.
전송진을 고치는 재주는 없으니, 대체할 방도를 찾아야 함이 옳다.
덕분에 골치를 썩는 이들은 많으니.
그때였다.
돌연 모여 있던 신선들이 웅성웅성거리며 시끄러워졌다.
왜 그러나 했더니 단번에 바닷물이 갈라지듯 인파가 갈라져 그 가운데에 웬 노파 하나가 자기 키보다 큰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저 노파는 대체 누군데….”
“쉿! 저분 그분이시잖아. 그 오대세가 중 하나인 교가의 장로!”
교가의 장로?
“아, 지씨 세가와 원수지간이라던 그 교씨 세가?”
‘지씨 세가라….’
흘려들을 성씨는 아니었다.
지씨와 교씨가 원수지간이라.
재밌는 소리다.
‘생각해보니 해룡족은 오대세가가 아니었군. 그래서인가?’
하여 교씨와 원수지간일지도.
어쨌거나 범은 잠자코 교씨 가의 노파를 빤히 바라봤는데, 노파는 주변을 힐끗 이더니 지팡이를 땅에 찍고 자신에게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곳에서 뇌신통에 일가견이 있다는 수선은 전부 날 따라오시오.”
그 말 뿐이었다.
수선들은 전부 의아함에 얼굴을 찌푸리거나 고개를 두리번거렸으나 누구 하나 감히 묻지 못했다.
그때 인파 속에서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대머리 노인이 입을 열었다.
“어찌하여 뇌신통을 수련한 수선을 찾는단 말이오?”
“전송진이 망가졌으니, 다른 방도로 수궁에 가야 하니 그런 게지.”
“바, 방도가 있단 말이오?”
화들짝 놀란 대머리 노인이 눈을 번쩍 떴다.
“꽤 많은 수의 인원이 필요하지만 내게 방도가 있소. 내 비술과 그대들의 뇌신통을 이용해 간이 전송진을 만들 것이니 강력한 뇌전을 부릴 수 있는 자라면 모두 나, 교가의 교청을 따라오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