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324)
낭선기환담-323화(324/600)
낭선기환담 – 2부 33화
“여기서 뭐해?”
사하를 찾던 범은 근처 주루에서 낮술을 꺾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곁에는 시녀인 순이까지 있었는데, 언뜻 노려보는 것 같기도 했다.
‘왜 저래 둘 다.’
술에 거하게 취해서는 딸꾹딸꾹거리고 난리도 아니다.
“뭔 술을 그리 마셨어.”
“내버려둬라! 내가 술을 마시던 독을 마시던 네가 무슨 상관? 상관? 관짝이나 들어가라 이 자식아!”
“맞습니다! 이미 짝도 있으신 분이 막막, 다른 처녀에게 그리 잘해주시고 그러시면 아니 되시죠!”
뭐가 그리 웃긴지 사하는 배를 부여잡고 깔깔거린다.
순이도 재밌는지 탁자를 두들기고 겨우 웃음을 참고 있다.
“그러시는 거 아닙니다, 금천.”
“내가 뭘 말이냐.”
“막, 그렇게 막! 상냥하게 대하고 그러면 아니 되시는 겁니다! 어차피 부인이 오시면 떠날 거잖아요!”
그리 말하고 순이는 툭, 머리를 탁자에 박고 곯아 떨어졌다.
“훗, 순이 넌 아직 멀었구나. 역시 소선은 상선의 주도를 따라올 수 없는 법이야… 하, 상선이라 행복하다.”
그리고 범을 쳐다보더니.
“불행하다 젠장! 젠장!!”
주루가 떠나가라 소리쳤다.
“많이 취했다. 그만 가자.”
“이, 이거 놔! 혼인도 하지 않은 처녀 허리를 그리 우악스럽게 잡는 거 아니다 이 나쁜 놈아! 넌 혼인했다고 나 무시하는 게냐!?”
“…어째 하는 짓이 점점.”
범은 금명지수가 떠올랐다.
그리고 호리가 떠올랐다.
그 둘을 섞어 놓은 것 같달까.
지금의 사하가 그러했다.
“그래그래, 일단 가자.”
으쌰. 순이를 허리춤에 들어올리고, 사하를 어깨에 멨다.
“더 먹을 거다! 이거 놔라!”
“술이 널 먹고 있는데 먹긴 뭘 먹는단 말이냐. 잔말 말고 가자.”
그러자 잠시 조용해지더니 축 늘어져 물었다.
“어딜 가는데.”
“처소에 가는 거지 어딜 가.”
“…갈 거냐.”
곁에서 풍겨오는 취기가 상당했으나 목소리는 더 없이 진중했다.
처소에 가는 것이냐 묻는 게 아닌 듯하다. 더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음을 모르지 않다.
범은 잠시 침묵하다 답했다.
“가야지.”
그녀가 묻는 게 수궁인지.
아니면 가문인지, 자신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허나 그 어디라도 범은 간다. 그리고 떠날 것이다.
아마 그에게 영원히 머물 장소 따위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답을 찾으러 고행 길을 떠나야 하는 자다.
그러니 그는 가야 한다.
여태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니 이변은 없다.
“가지 마라.”
우뚝.
범의 발걸음이 멎었다.
“취했느냐?”
“그래, 취했다!”
범은 천천히 어깨에 멘 그녀를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취기로 달아올랐던 얼굴은 어느새 가라앉아 백옥처럼 새하얗다.
눈가는 조금 붉었으나, 그리 진하지 않아 화장을 한 것만 같았다.
“술 다 깼네. 네 발로 걸어라.”
그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척, 퉁명스레 그리 말했다.
허나 발걸음을 재촉하는 그의 소매를 잡았다.
“가지 마라.”
다시 한번 그녀가 말했으나, 이번에도 범은 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때가 되면 내가 보낼 것이다. 그러니 네가 갈 필요 없다.”
취기에 흐려진 눈이 아닌, 더 없이 맑고 총명한 눈이다.
‘날 보낸다라….’
코웃음이 절로 나온다.
허나 내색하지는 못한다.
그리 말하는 것이, 그녀가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며 동시에.
결심을 확고히 하는 방법일 테니.
“그러냐.”
“그래.”
“그렇다면 됐다.”
범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사하에게서 뒤돈 채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는 그런 그의 등에 고개를 파묻었다.
“네가 가면, 앞으로 만날 일은 없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러겠지.”
일을 다 마무리하고 떠날 때가 된다면 그럴지도 모른다.
세상 일이 어찌될지 모르는 것이니.
지금만 해도 그는 자신의 가족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그런 세상이고, 그런 하늘아래다.
“…상서의 주민들이 널 많이 그리워할 거다. 네, 네가 좀 많이 그들에게 잘 해주었으니.”
“그럴 테지.”
“나도… 술 한 잔 생각나는 밤에는 네 얼굴이 떠오를지 모른다.”
“그럴 거다. 벗이니까.”
범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뻗으려다 거두었다.
유달리도 사하의 어깨는 옅게 떨렸고 불끈 쥔 주먹은 얼마나 힘을 주고 있는지 새하얗다.
범은 하고픈 말이 많았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들을 그는 하나하나 삼키고 삼켰다.
안쓰러움을 삼키고, 상냥함을 삼키고 그녀의 마음을 삼켰다.
“교가의 교청이 뇌신통 수선들을 모아 간이 전송진을 만든다고 한다. 난 거기에 들어가게 됐다. 앞으로 보름 뒤, 수궁으로 떠날 수 있을 거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범은 담담히 계속 말했다.
“오대세가 중 하나인 교가의 장로씩이나 되는 자다. 거짓을 말하거나 하지는 않겠지. 그리고 거기서 알게 된 수선들과 뇌신통에 관한 수행을 교류하게 되기도 했다. 아마 내일부터 그들과 어울리게 되겠지.”
나쁠 것이 없으니 그리하게 됐다.
어려운 일도 아니니.
범은 우두커니 서 있는 사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작고 여린 몸이다.
그리고 어린 여인이다.
“무도전으로 향하는 길에 문제될 일은 없을 것 같으니 걱정하지 마라.”
어깨를 두들겨 주려다 손을 빼고 다시 뒤돌았다.
조금 걷다 뒤 돌아보니 사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대로 가려다가도 신경이 쓰여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범은 한숨을 내뱉었다.
“밤바람이 차다.”
사하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그러자 천천히 그를 따라 걷는다.
밤바람은 유달리 차고, 벌레 우는 소리는 참으로 구슬펐다.
그러나 그의 손은 영 따뜻하기만 하니 사하는 씁쓸하기만 했다.
* * *
사하와 순이를 거처로 집어넣은 범은 침소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의 나무 무늬가 기괴하여 괜한 번뇌에 들게 했다.
잠도 오지 않으니 화란을 불러볼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저가 나온다면 몰라도 굳이 불러 내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몸을 뒤척여 벽을 보고 누웠다.
천장을 보고 싶지 않았다.
허나 잠이 올 리가 있나.
그때였다.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척비척.
불규칙한 발소리다.
술 냄새와 여인의 향냄새가 함께 맡아졌다.
‘사하.’
방문을 연 것은 사하였다.
범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사하가 탁자에 술병을 내려놓고 무어라 중얼거렸다.
“무정한 놈.”
그리 말하며 술병을 따 벌컥벌컥 마시더니 꺼억 트림도 한다.
‘가지가지 하네.’
그러더니 슬그머니 범의 등 뒤로 다가와 드러눕고 자기 시작했다.
“술 끊어야겠다 넌.”
술버릇이 뭐 이리 고약한지.
어이가 없어 웃겼다.
그리 한참을 웃다 보니 잠든 사하의 얼굴이 보였다.
달빛은 구름에 가리어 어둡기 짝이 없는데 그녀의 얼굴만은 달덩이처럼 뽀얗고 고우니 어쩔 수가 없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넘겨주니 긴 속눈썹이 흔들린다.
“흐응.”
잠꼬대였다.
괜시리 마음을 졸인 범은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나 싶어 표정을 구겼다.
“네 방 가서 자라.”
하며 볼을 쿡 찌르니 하지 말라는 듯 콧잔등을 씰룩인다.
범은 깨워도 깨지 않는 사하를 곁에 두고 가만히 바라봤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많은 생각과 번뇌 속에서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을 때.
무언가가 그의 눈을 떠지게 했다.
툭, 데구르르.
천범은 눈을 치켜뜸과 동시에 사하를 껴안고 벽을 때려 부쉈다.
그와 동시에.
번쩍.
빛이 터지고 그의 방이 터졌다.
콰앙!!
“뭐, 뭐야!!”
화들짝 놀란 사하가 그의 품에서 소리쳤고 범은 벽을 부수고 숲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거친 나뭇잎소리가 몇 차례 들려오고 바닥에 착지했다.
그가 누웠던 거처는 이미 개박살이 난 지 오래였다.
까만 연기구름이 자욱했고, 불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기습이었다.
“범! 괜찮아?!”
“괜찮다.”
“괜찮기는! 피 나잖아!!”
“이 정도는 괜찮아. 넌 괜찮냐.”
“나, 나는 괜찮아!”
“그럼 되었다.”
품에 안긴 사하를 놓아주고 보니 오른 어깨에 피가 흥건했다.
철 조각 같은 것이 박혀 있는 듯한데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다.
아무리 무방비했다고는 해도, 범의 몸에 상처를 냈을 정도의 물건이다.
기습을 가한 자가 누구인지 몰라도 쉽게 볼 수는 없었다.
쾅! 콰앙!
쿵!
기습은 범 혼자만 당한 것이 아닌 듯 여기저기 소란이 일었다.
“난리도 아니네.”
갑자기 무슨 기습인가 생각해봤으나 뭔가 떠오르는 건 없다.
천범은 부적 여러 장을 꺼내 사방에 뿌리고 결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어깨를 파고든 철심을 빼 내고 점혈하여 지혈했다.
순식간에 피는 멎고 상처가 아문다.
“범,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했을 리가.”
원한 살 만한 짓을 한 적은 없다.
‘아니, 있나.’
조금 걸리는 게 많긴 하다.
그러나 원한 때문이라기엔 자신 말고도 여러 곳에서 기습이 이루어져 있는 듯하니 그건 아니고.
“설마….”
의아해하는 순간.
투둑.
기척이 느껴졌다.
“역시 비승 수선은 비승 수선인가. 그 찰나의 순간에 벽을 부수고 도망갔을 줄이야. 정말 대단했다.”
박수치며 나타난 수선은 머리에 긴 관을 쓴 자였다.
상선이었고 주위에 가문 문양을 새기고 있는 수선들이 함께였다.
“네놈들은 아농에 총씨 세가 아닌가? 왜 우릴 공격하는 거지?”
“그거야 제일 만만하니 그러하지.”
“무슨 소리냐.”
“아무도 모르는 미천한 가문. 그리고 그보다 미천한 상선. 그 미천한 상선이 지닌 미천한 뇌신.”
그러니까 한마디로.
“내 뇌신이 탐이 났다?”
“알다시피 뇌신통만 있으면 간이 전송진을 만들 수 있다고 하더군.”
허나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건 교가와 뇌신통으로 도움을 준 자들뿐.
“그럼 나는? 나도 힘겹게 달려와 무도전에 나가 뜻을 펼쳐 보려 하는데, 그마저도 하지 못하게 하면 세상 공평하지가 않지.”
“하여 내 미천한 뇌신을 빼앗아 전송진을 이용하겠다 이거로군.”
“바로 그거지!”
총가의 수선은 족제비 같은 수염을 매만지며 촤르륵 접선을 펼쳤다.
“내 대단한 목신통에 뇌기 따위는 필요 없으나 이것도 신선의 연이니 내 잘 키워주도록 하마.”
누군가 했더니 교청에게 목신통은 필요 없냐고 물었던 자였다.
“다른 수선들도 마찬가지였나 보지?”
“그랬으니 저 난리 아니겠나.”
범은 고개를 주억이고 일어났다.
상황파악은 끝났다.
놈들이 원하는 건 뇌신.
아니면 뇌신통 수선의 뇌기.
그것을 이용해 무도전에 출전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문 단위로 이루어져 전쟁을 방불케 한다.
난전이 예상된다.
“사하.”
“응.”
“옷을 여미어라.”
“어, 어어!”
옷이 많이 얇다.
범은 제 상의를 풀어 그녀의 어깨에 덮었다.
“내 뒤에 서.”
“나도 싸울 수 있어!”
수가 많다. 자신과 같은 상선이 넷에 소선이 열댓이다.
다칠지도 모른다.
그녀가 다치는 건 사양이다.
그게 자신의 눈앞에서라면 더더욱.
“방해다.”
눈앞에서 목이 잘리는 그녀가 아른거렸다. 보고 싶지 않다.
그녀가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다.
죽음을 목도하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더 슬프고 싶지 않다.’
손아귀에 금빛의 태양이 맺힌다.
손톱만 하던 그것은 이내 머리통만 해지고 이내 모든 것을 집어 삼킬 정도로 거대해진다.
금빛의 태양이 붉게 빛났다.
새벽을 밝게 비추는 태양.
그것은 여명이나 다름없었다.
“날 적대한 이상 살아 돌아갈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거다.”
그리고 여명이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