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333)
낭선기환담-332화(333/600)
낭선기환담 – 2부 42화
정원을 거닐던 천범은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아직도 기운을 갈무리하고 있는 사하가 있었다.
범은 그녀가 구결을 정리하기를 잠자코 기다리다 말했다.
“오늘 밤, 함께 보내야겠다.”
“…가, 갑자기?”
좋지 않은 예감이다.
양휘가 했던 말을 곱씹어 보노라면 팔찌를 잘 지키라는 말 같았다.
단순한 노파심일지도 모르지만, 범은 이런 직감을 자주 신용했고, 그로 인해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하지만 사하는 너무 뜬금없었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 나도 준비하고 올게.”
“무슨 준비가 필요하더냐. 이제 슬슬 어두워질 때다. 그냥 있거라.”
“여인은 준비가 필요한 법이다!”
여인? 준비?
아무래도 오해를 한 듯하다.
범은 볼을 긁적이고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런 뜻이 아니라 팔찌를 강탈당할지도 모른다고 말하자 사하는 입술을 꾹 깨물고 얼굴이 뻘게졌다.
“크흠, 아무튼 사흘간은 함께 보내야 할 것 같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말이야.”
“아, 알았다. 그러도록 해.”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대단히 창피한 모양이다.
서늘한 날씨인데도 부채를 꺼내 부채질을 했다.
“대체 뭘 기대한 건지.”
피식거리자 쌍심지를 켜고 노려보기 시작했다.
어깨를 으쓱이자 부들부들거리더니 흥! 하고 등을 돌려버린다.
“태천외양신공은 조금 진전이 있었느냐.”
“…뭐, 조금.”
사하는 곧장 손을 펼쳐 보였다.
이내 화염이 솟아오르며 구의 모양으로 뭉쳐 들기 시작한다.
그녀의 손안에 태양이 떠올랐다.
아직은 작고 힘도 유약하다.
조금 건드리면 사라져버릴 정도로 불안정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태양이었다.
범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도와주마.”
그녀의 손 아래, 그가 떠받치자 볼품없고 유약하던 태양은 융성해지고 강렬하게 타올랐다.
천범은 따로 입을 열지 않았으나, 그녀의 손을 통해 기혈의 흐름으로 말해주고 격려해주었다.
여기가 아니라 이곳이다.
그리 가지 말고 이곳으로 향해라.
잘하고 있다. 그리만 해라.
흐름을 이끌어주었다.
사하는 칭찬 받는 어린아이처럼 단숨에 태천외양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태양은 방 안을 밝게 비추고 그녀와 그를 밝혔다.
붉게 타오르는 태양은 천범의 것과는 다르게 열정적이었다.
그녀가 만들어낸 태양이다.
“너와 똑 닮았구나.”
태천외양신공으로 만든 태양은 시전자의 성향을 닮기 마련이다.
그녀의 태양은 사방을 어루만지듯 비추는 범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오로지 강렬하게 타오르기만 했다.
조금은 독선적이고, 주변을 살피지 않지만, 항상 순수하게 존재하는 그녀와 닮은 태양이었다.
“나도 너와 같이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겠지. 넌 상서의 주인이자 사씨 세가의 가주가 아니더냐. 할 수 있냐 없냐가 아니라 해야 한다.”
허나 그녀의 불안감은 해소되지 아니했다. 범은 받쳐준 손으로 태양을 살짝 건들었다.
화아아.
그러자 태양은 십수 개로 분열 되어 방 곳곳으로 자리 잡았다.
분열된 작은 태양은 붉은 반딧불처럼 사방을 비춘다.
“너의 붉은 화염은 사방을 환히 밝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네 주변의 이들은 그 불꽃으로 네가 있음을 알 것이다.”
“허나 난 사방을 밝혀야 한다.”
“밝히지 못해도 된다.”
범은 자신의 손에 금빛 태양을 만들어 작게 분열시켰다.
분열된 그의 태양은 사하의 것과 맞물려 밝은 빛을 자아냈다.
“내가 밝혀줄 것이니.”
방안 가득 금빛이 가득하다.
사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리 하는데 어찌….’
한마디 쏘아붙이려는 찰나.
스슥.
알 수 없는 기척이 느껴졌다.
“범아.”
“안다.”
범은 이미 눈치챘는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 * *
“어찌, 벌써부터 무도전이 시행된 것 같군요.”
“한창 뜨거울 때이지요. 대천무장도 소싯적에는 통천수궁을 뒤집어엎고 난리고 아니었다던데요.”
“다, 옛일입니다.”
대화를 나누는 둘은 대천무장과 대천문장의 직위를 지닌 자였다.
둘 다 향선에 오른 자로, 통천 수궁 내에서도 높은 위치에 있었는데 서로 별로 친하지는 않았다.
대천무장은 검은 면사포를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고혹스러운 여인이었고, 대천문장은 뾰족하게 생긴 중년 사내였다.
어쨌거나 둘은 같은 탁자에 자리한 채로 물이 담긴 커다란 그릇 하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릇에 담긴 물은 각자가 보고자 하는 바를 보여주고 있었다.
여러 가문이 거처로 머물고 있는 별궁을 시시각각 비추는 중이다.
대부분의 이들은 내일 있을 무도전을 대비하고 있었으나, 그렇지 않은 자 또한 많았다.
“지씨 세가가 이번에는 독을 단단히 품었나 봅니다. 웃음기 하나 없이 타 수선의 식환(識環)을 뺏고 있어요.”
대천문장이 즐겁다는 듯 수염을 매만지며 말하자 대천무장은 무표정한 낯으로 그릇 속 사내를 보았다.
흑발에 금안을 지닌 상선이다.
금색의 화염을 다루는 화신통이 제법이었다. 강체 또한 남다른지 몇 번 손속을 겨루면 다른 상선이 죄다 나가떨어졌다.
‘저 상선이 주천무장이 말했던….’
확실히 눈여겨볼 사내다.
같은 경지의 상선을 아이 다루듯 거꾸러트리니 눈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나머지는 그리 눈에 띄는 자가 있지는 않다.
오대세가의 상선들은 애초에 식환을 빼앗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들을 건드리는 가문이 있을 리 없으니 당연했다.
오대세가가 아닌 다른 대가문들 또한 비슷한 느낌이다.
유독 지씨 세가가 저리 날뛰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대천무장은 생각했다.
수계의 정세는 그리 좋지 않다.
전쟁을 겪지 않은 가문과 그러한 신선들이 많다.
그로 인해 수계의 전력은 약체화되었다.
이전과 같은 선살전의 때가 다시금 도래한다면 복구할 수 없는 피해를 보게 될지 모른다.
‘그리되기 전에….’
좋은 자질이 있는 신선들을 뽑아 천무선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또 다시 전쟁에 패하여 모진 수모를 겪지 않으려면!
“대천무장. 듣고 계시오?”
“예, 말씀하세요.”
“내일 행해질 무도전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관측됐소.”
“관측됐다라 하심은….”
“정확한 신원은 모르지만, 잔잔경정도를 지키는 무선과 문선의 틈에 첩자가 끼어있는 모양이더군.”
“!!”
대천무장이 벌떡 일어났다.
잔잔경정도는 수계의 보물이다.
그것을 탐하려는 세력이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뒤탈 없이 잡아내야 함이 옳다.
그리고 그것을 행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통천 수궁의 대천무장과 그 휘하에 있는 천무선일 것이다.
“누굽니까.”
“거 말했잖소. 신원을 모른다고.”
“허나 대천문장이라면 대충 예상하고 있는 곳이 있겠지요.”
대천문장은 조용히 손가락 다섯 개를 피워냈다.
“사실입니까.”
“이만한 일을 할 수 있는 곳은 수계를 좌지우지하는 다섯 가문 중 하나라 볼 수밖에 없소. 그들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런 대담한 짓을 할까.”
통천수궁의 문선은 죄를 가리고.
무선은 그 죄를 심판한다.
대천문장이 저리 말했다면 믿을 만한 정황이 있을 터.
대천무장은 자리에 앉았다.
“선계쪽과 관련이 있을 것 같더군.”
“선계요?”
“선계는 얼마 전 힘의 균형이 맞물려 언제 어디가 뒤집힐지 모른다고 들었소. 아마 그 탓이겠지.”
“선계는 순수한 인간과 다른 피가 섞인 혼아의 세력 구도가 있다지요. 그 때문에 수계와?”
“그럴 거라 예상하고 있소. 선계에서 충계는 너무 멀고 험하지. 그들이 대화가 통할 상대도 아니니까. 그러니 수계에 손을 뻗지 않았겠소.”
선계쪽과 관련이 깊은 가문.
“오대세가 중에서도 그쪽이라면….”
두 가문으로 좁혀진다.
곤가와 교가.
* * *
사흘 뒤.
“참가하는 인원이 너무 많으면 수궁에서도 이런 일 정도는 그냥 눈 가리고 아웅 한다고 하더라.”
사하는 어머니의 유품이라던 상선보를 들고 연신 부채질했다.
그녀의 앞에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수선이 여럿 있었다.
소선도 있었으나 상선도 몇 있었다.
대부분은 천범이 상대한 이들이다.
“그래도 한쪽으로 이렇게 많은 상선이 몰리지는 않는다던데….”
사하는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그 점은 범도 동의했다.
하지만 굳이 누군가를 고문해서 답을 들을 필요는 없다.
악연이 있는 가문 한두 개 정도는 만들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곤가 아니면 지가겠지.’
이야기를 들으니 곤가의 꼬맹이도 입궁했다고 한다.
지가는 뭐 말할 것도 없고.
이들은 그들에게 사주받은 힘 없는 가문의 상선들일 뿐일 것이다.
“벌써 날이 밝았나.”
시간 참 빠르다.
어느새 수궁에 햇빛이 새벽의 어스름을 지워내고 빛으로 물들인다.
“범아, 우리도 이제 가자.”
“슬슬 출발해야지.”
제대로 쉬지도 못했지만 별로 상관없다. 어차피 피가 끓어서 잠도 오지 않던 참이다.
범은 간단하게 준비를 마치고 사하와 가문의 식솔들과 별궁을 나섰다.
근처의 가문들 모두가 행렬을 길게 이으며 수궁 한켠으로 모이고 있다.
통천수궁은 여러 섬이 모여져 만들어진 것 같은 궁이다.
하여 통천수궁이라도 땅이 넓고 거리가 멀어 하루 종일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궁도 있다.
수궁 내의 무선을 제외하고 이곳에서 뛰거나 날 수 있는 자는 없으니.
“우린 어디로 가는게냐.”
“회희궁(會熙宮)이다.”
무도전 본선은 수궁 내에서도 크고 아름답기로 자자한 회희궁.
그곳에는 네 개의 신목이 자라나 있어 웬만한 공격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게 만들어진 곳이다.
회희궁의 장대함은 두말할 것 없거니와 그곳에서는 향선들이 난리를 쳐도 무너지지 않는다 하여 수계에서도 퍽 유명한 곳이라 한다.
“나도 꼭 한 번 회희궁에 들어가 보고 싶었어. 신선이 된다면 이곳에서 무도전을 치르는 게 꿈이거든!”
사하는 신났는지 싱글벙글했다.
하기사, 소선으로 지낸 세월이 있으니 기대할 만하다.
반나절 뒤.
겨우겨우 회희궁으로 들어오게 된 사씨 세가 일행은 그 웅장함에 입을 벌리고 두리번거렸다.
회희궁은 거대한 네 개의 신목이 기둥처럼 굳건했고, 바닥은 하늘을 발아래에 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킬 만큼 푸르른 청석이 깔려 있었다.
그 밖에도 각각 신수의 형상을 본뜬 조각상들이 수천여 점이 곳곳에 자리했고 통로를 몇 개 지나자 거대한 원형의 연무장과 그 앞에 수백 개의 의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수궁의 신선인지 상선 하나가 다가와 사씨 세가를 이끌었다.
출전자인 범과 사하는 연무장으로 데려가고 나머지 가솔들은 따로 대기석으로 보냈다.
범은 그를 따라 연무장 바로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다른 가문의 신선들도 차례차례 배정받은 의자에 앉았다.
그곳에는 지헌위도 있었고 팽가연과 호준성도 언뜻 보였다.
왜 여기에 이런 의자가 연무장 바로 앞에 있는지 의아했는데, 그것은 이내 무도전이 시작되니 알 수 있었다.
쿵! 쿵! 쿵!
북소리가 요란했다.
무도전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연무장에 모인 구경꾼들이 환호성을 지르렀다.
-와아아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연무장 대문이 열리며 수백의 천무선들과 함께 돌돌 말린 거대한 족자를 들고 오기 시작한다.
함께 발맞춰 들어오는 천무선의 기세가 자못 대단했다.
번잡하던 연무장의 분위기가 단숨에 그들에게 빨려들어갔다.
착.
천무선이 멈추고 흑색의 궁장과 면사포를 쓴 여인이 손안에 든 족자를 하늘로 던지며 수결을 맺었다.
“통천수궁의 대천무장. 호초민이라고 한다. 다른 게 아니라 이번 자리를 빛내줄 상선들에게 한 가지 새롭게 알릴 것이 있기 때문이다.”
새롭게 알릴 것?
연무장이 웅성웅성거리자 펼쳐진 족자가 빙그르르 돌았다.
거대한 크기로 변한 족자는 원형으로 변했고 무언가 알 수 없는 그림이 그려진 족자가 연무장을 덮었다.
“규칙이 바뀌었다. 본래 한 경기당 두 수선이 나와 겨루는 것이 응당 맞겠으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해 여기 있는 상선 모두가 일제히 들어간다.”
한꺼번에 잔잔경정도로 들어간다는 소리다.
말인즉슨, 이 백이 넘는 수선 모두가 한꺼번에 싸운다는 뜻!
“무운을 빈다.”
그렇게 대천무장이라는 자가 단상에 올라 무도전의 시작을 알렸다.
그들이 무어라 소리치기도 전에, 징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상선들의 의식은 단번에 잔잔경정도로 빨려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