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337)
낭선기환담-336화(337/600)
낭선기환담 – 2부 46화
하늘은 붉고 바닥은 먹물처럼 새까만 운무가 가득 찬 운해.
잔잔경정도의 내부에는 입가에 선혈을 흘리는 대천무장이 있었다.
“대천무장! 이게 어찌 된 일이오!”
그녀를 찾은 사람은 팽씨 세가의 가주인 팽종연이었다.
그는 사색이 된 대천무장을 향해 목에 핏대가 설만큼 소리치고 있었다.
“잔잔경정도를 빼앗겼습니다.”
입가의 피를 닦은 대천무장은 새하얀 안색으로 일어섰다.
잔잔경정도의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겼다.
“빼, 빼앗겼다니! 수계의 보물을 지금 빼앗겼다 하셨소!?”
애석하지만 사실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이고, 그렇기에 실감이 나지 않았다.
모든 기감이 차단됐다.
선살전에서 막대한 공훈을 세운 잔잔경정도의 무서운 점이 이렇다.
아무런 기척도 감각도 차단되어 평생을 이곳에서 갇혀 지내야만 한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법칙의 힘이 가미된 잔잔경정도의 환계를 빠져나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렇기에 지난 선살전에서 수많은 마두들을 섬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회희궁이 잔잔경정도에 삼켜졌어.’
그 말인즉슨, 이곳 전체가 환계로 뒤덮였다는 소리.
이곳에 있던 관중들도 그리고 오대세가의 가주들과 가솔들 역시 잔잔경정도 안에 갇혔다는 소리다.
보통 일이 아니다.
잔잔경정도는 의식을 빼앗아 가두는 보물이다.
회희궁 연무장에는 아직 수많은 수선들이 자리하고 있다.
잔잔경정도에는 의식을 둔 채여도 본래의 몸은 바깥에 있는 거다.
‘아무리 신선이라도 그런 무방비한 상태로는 어린아이의 손에도 쉽게 죽을 수 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러하다.
그러니 빨리 되찾아야 한다.
“적은 누굽니까.”
“본래 저와 대천문장은 선계와 밀접한 연관을 지닌 수계의 가문들 중 하나라 생각했습니다.
허나 이제 보니 완전히 헛다리를 짚고 있었군요.”
바닷물로 떠오른 선살반이라는 글자를 보고도 모를 리 없다.
붕계와 사계의 짓이다.
“아마 무도전의 참가자들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정도로 갑작스럽게 잔잔경정도의 주도권을 빼앗을 정도라면….”
안으로 들어간 이의 짓일 수밖에 없다. 귀물을 의식 속에 숨기는 특수한 비술이 없지 않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잔잔경정도를 쥔 자가 환계 안에 있다는 것 정도.
바깥에 있었다면 모두가 꼼짝없이 죽을 테니.
“시간이 없습니다.”
놈을 찾아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회희궁의 모두가 전멸할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지. 내 부축해 주겠소.”
그때였다.
팽 가주의 부축을 받으려던 그녀는 순간 그를 뿌리쳤다.
태앵!
날카로운 철성이 터져 나왔다.
휘리리릭, 풍덩.
먹물처럼 검게 변한 바닷물에 빠진 것은 묘한 모양의 구부러진 단검.
“팽 가주.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단검을 쳐낸 그녀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붕마계의 독 중에서도 퍽 강력한 놈이오. 조금 닿은 것만으로 체내의 선력을 빼앗고 기혈을 꼬아놓지.”
그리 말하며 음흉한 웃음을 흘린다.
“팽가도 한패였군….”
그의 말이 거짓은 아닌 듯, 그녀의 손은 벌써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곰팡이가 피는 것처럼 겉 표면에 포자가루가 생겨났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신은 수계를 대표하는 대가문의 가주 아닙니까!”
“그렇지. 대가문이지.”
“한데 어째서!!”
“단지 대가문이기 때문이오.”
대천무장의 낯이 와락 구겨졌다.
“내가 아무리 팽씨 세가를 이끄는 대가문의 가주라 해도 현 수계는 통천수궁과 오대세가의 그늘 아래로 벗어날 수 없지. 지금과도 같은 영광을 얻기 위해서 노력 하나 하지 않았으면서.”
팽 가주의 눈빛이 서슬 퍼렇게 변하고 살기가 흘러 넘쳤다.
“대천무장도 잘 알 것이오. 선살전에서 누구보다 빛났으나, 그 어디보다 낮게 추락한 가문이 있다는 걸.”
“….”
“질투와 시기에 빠져 사씨 세가에 누명을 씌워 영락하게 만들고! 후에는 야금야금 화기린의 혈통을 갉아 먹어 수계에서 지우려 했던 것이 바로 지금의 오대세가요!”
왜 모르겠는가.
모두 알면서도 눈 가리고 아웅 하고 있는 것이 그들이다.
상선들은 잘 모를 수 있어도, 향선에 오른 이들은 대부분 안다.
알면서 모른 척 한다.
자신들도 가족을 잃었다는 핑계로, 슬픔에 잠겨 있다는 이유로, 더 피를 보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그들은 외면했다.
“그렇다고 원수 같은 놈들과 손을 잡는단 말입니까!”
“목숨을 구명 받아놓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들이 오대세가였소. 본래 독은 독으로 푸는 것이지. 혹시 물갈이라는 표현을 아시오?”
“압니다.”
“못에서 잉어 같은 것들을 키우다 보면 물이 탁해져서 한 번씩 물을 갈아주어야 할 때가 있지. 내가 하려는 것은 단순한 물갈이일 뿐이오.”
더럽고 냄새나는 것들을 버리고, 새로 담을 깨끗하고 청량한 물.
그것을 담을 것이다.
“당신은 마두놈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겁니다.”
“나 또한 그들을 이용하고 있으니 나쁠 것 없지. 아니 그렇소?”
말이 통하지 않는다.
대천무장은 한숨을 내쉬고 독이 퍼진 팔을 싹둑 잘라냈다.
“역시 대천무장 다운 판단이오. 장기적으로 보면 그리 하는 게 맞지.”
더 퍼지지 않도록 팔을 잘라내는 것이 살 수 있는 판단이다.
“허나 그 전에 날 먼저 죽였어야 했을 것이오. 독이 묻은 팔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못하지. 식환을 차지 않고 잔잔경정도로 들어온다면 의식의 죽음이 곧 육신의 죽음이니!”
신선의 육신은 심기체가 합일된 상태이다. 그러니 이전처럼 육신을 훼손당하면 다시 복구하기가 어렵다.
팔에 담긴 선력을 잃는다는 것은 쌓아온 수행을 잃는다는 소리고, 그것이 향선이라면 수천 년에서 수만년에 걸친 수행의 결실이나 다름없다.
잔잔경정도의 의식 속의 모습이라 해도 마찬가지.
식환을 차지 않고서는 의식의 훼손이 곧 육신의 훼손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지금 대천무장의 원신은 대천궁에 봉하고 왔다 들었소.”
향선의 또 다른 자신.
원신이 없다면 향선의 힘은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다.
수계에서 가장 강하다 일컬어지는 대천무장이라도, 원신도 없고 팔 한 짝도 없는 상태라면 어찌될까.
“대천무장이 독에 취약하다는 걸 미리 알아내기 참 힘들었소이다.”
“절 죽일 셈입니까.”
“그럴 생각은 없소. 대천무장의 성품은 나무랄 곳이 없으니 꼭 살아서 수계를 이끌어주어야 하오. 허나, 그 바른 성품이 무엇보다 우리의 거사에 커다란 걸림돌이지.”
대천무장은 눈을 감았다.
그의 목적은 기존의 오대세가를 몰아내는 것. 가주를 죽이는 것.
그리고 그 자리를 자신이 갖는 것.
그의 목적은 대천무장의 발을 묶어 두기 위함이다.
‘대의가 어쩌고 말은 많지만….’
기존의 것을 밀어내기 위함이라면 그를 지지하는 가문들도 있을 터다.
새로운 오대세가에 들어갈 가문이.
결국 탐욕이다.
“이곳에 모두를 죽일 생각입니까.”
“그럴 생각은 없소.”
오대세가만 죽인다는 뜻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가주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미 다른 가문들이 환계 속에서.
아니면 환계 바깥에서 거사를 진행 중일지도 모른다.
목숨을 부지하려면 여기서 잠자코 있으면 된다.
그는 자신을 해할 마음이 없으니.
허나.
“전 대천무장입니다. 작게는 수궁을, 넓게는 수계를 위한 직위이지요.”
그의 뜻을 알겠으나 수계는 지금 흔들려서는 아니 된다.
향선 다섯이 죽는다면 그 전력의 감소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수계를 위해서도, 가만 둘 수 없다.
“그럴 것이라 생각했소. 역대 대천무장은 그러한 자리이고, 그대 역시 나무랄 데 없는 대천무장이니.”
“본분을 다할 뿐입니다.”
이내 대천무장과 팽 가주의 신형이 사라지고 경천동지할 굉음이 잔잔경정도 한켠을 가득 메웠다.
* * *
한편.
“선살반이라….”
천범은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대강 파악했다.
선살전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경종.
그것으로 상선무도전의 때가 채택되었고 그걸 시행한 것이다.
“마도놈들은 어딜 가나 지랄이군.”
허나 제아무리 미친놈들이라 해도 여긴 통천수궁이다.
수계의 밀접한 관계를 지닌 자가 연루되지 않았다면 이런 사달은 일어나지 않을 터.
“이야기는 들어보고 싶네요.”
범은 눈앞의 사내를 보았다.
퍽 익숙한 얼굴이다.
분위기는 사뭇 달랐으나, 그가 익히 알고 있는 사내다.
“왜 당신이 그곳에서 그런 모습으로 있는 겁니까.”
그는 먹물처럼 검어진 바닷물 위에 좌선한 채였다.
뒤로는 바닷물 같은 새까맣고 기형적인 거대한 나무가 자리했다.
앙상한 가지만 있는 새까만 나무는 해골모양 같은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는데, 척 보아도 심상치 않았다.
“당신만큼은 이곳에서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천 수선.”
“저도 웬만하면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호 수선.”
그는 팽가의 가선.
호준성이었다.
“수계의 수선이 아니었군요.”
“예, 저는 붕마계의 수선입니다.”
후련하다는 듯 털어놓는 모습이 무언가 이질적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팽가의 가선으로 숨어들었지요.”
“목적이 뭡니까.”
“잔잔경정도를 탈취, 그리고 파괴. 덤으로는 선살의 도래와 때가 머지 않았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파괴….”
“저희들에게 수계의 잔잔경정도는 상당히 골치 아픈 보물 중 하나였거든요. 제 부모도 이것으로 인해 돌아가셨죠. 그 때문에 붕계의 천살성조께서는 절 보내신 겁니다.”
범은 그저 빤히 그를 쳐다봤다.
“막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가만히 있자 오히려 호준성이 물어왔다. 범은 곰곰이 생각해보다 어깨를 으쓱했다.
“쉽지 않아 보여서 고민 중입니다.”
“하하, 그렇죠. 향선이 와도 한동안 버틸 결계입니다.”
그의 주위에는 각기 다른 기운을 띠고 있는 산이 자리하고 있었다.
동서남북으로 자리한 네 개의 동산이 허공에 자리한 채로 빙그르르 천천히 선회하고 있다.
지금은 손바닥만 한 삼각형의 모습이었으나 풍기는 기운이 남달랐다.
그것들이 결계를 이루어 그를 보호하고 있는 듯 했다.
뒤의 나무는 아마도 이 현상을 만든 원흉이 아닐까 싶다.
“팽가의 큰 그림입니까.”
“그들은 그리 생각할 겁니다.”
“호 수선은 다른가 봅니다.”
호준성은 잠시 말이 없다가 쓰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들은 수계의 새로운 오대세가가 되어 잘못을 바로 잡을 거라 하더군요. 아마 선살전으로 혼란을 잠재우고 자리매김 하려는 생각일 테지요. 아마도 저는 그들의 도약에 발판이 되어 죽임 당할 겁니다.”
“다 알고 있는데도 팽가의 뜻대로 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그리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호준성은 붕마계의 수선이다.
일이 마무리되면 수계의 혼란을 잠재우는 용도로 공개적으로 처형당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선살전이 도래할 것이니.
“어리석지요. 잔잔경정도는 제 손 안에 있는데 말입니다.”
“어찌하실 겁니까.”
“모두 죽일 겁니다. 잔잔경정도 정도의 보물을 파괴하려면 보통 일이 아니죠. 그 여파로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죽습니다.”
“당신도 죽을 텐데요.”
“제가 원해서 수계로 잠입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전, 이리해도 죽고 저리해도 죽는 운명입니다. 이왕 죽을 거라면 길동무가 많을수록 좋죠.”
붕마계에 도움이 되면 더 좋고.
범은 고개를 주억였다.
“이런 걸 알려주셔도 되겠습니까.”
“천 수선이 안다 하여 무언가 달라질 것이 있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그래봤자 상선에 국한되어 있는 존재이지요.”
그 말이 맞다.
지금 그가 풍기는 기운은 상선의 것이 아니다.
향선의 것이다.
그는 모종의 비술로 상선으로 감추고 있던 향선이었다.
“그래도 당신한테는 솔직하게 털어놓아 다행입니다. 그래도 이곳에서 지내던 나날 중, 수선과의 수행은 나름 즐거운 것이었으니까요.”
초탈한 자의 얼굴이다.
솔직히 범은 그가 누구와 손을 잡건, 수계를 어찌 하건 상관이 없다.
오대세가가 바뀌든 말든 그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
잘 알지도 못하는 오대세가의 가주들이 죽는 거야 알 바 아니다.
그들이 죽으면 잘됐네 싶어 할지도 모른다. 천벌 받았네하며 고소해 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전 아직 죽을 생각이 없어서요.”
그는 아직 죽을 생각이 없다.
“그리고 이곳에는 목숨 빚을 진 친우도 하나 있어서 말입니다.”
당연하게도 가만 내버려둘 수 없다.
“화기린 가의 피를 이은 여식 말이군요. 다른 수선은 몰라도 그 여식은 제가 꼭 죽이고 싶었습니다. 붕마계에서는 수계의 화기린을 철천지원수처럼 생각하고 있거든요.”
동시에 그의 주먹이 내질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