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342)
낭선기환담-341화(342/600)
낭선기환담 – 2부 51화
푹, 푸욱.
살을 가르고 찢는 소리가 유별나다.
회희궁의 연무장.
그 안에 자리한 수선들은 모두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다.
수천 명에 이르는 자들이 모두 그러했다.
이곳은 잔잔경정도 밖.
환계에 의식이 홀린 자들이 남겨 둔 육신이 있는 자리.
그곳에 두 사내가 자리했다.
“이제 끝인가.”
“예, 가주.”
그는 지씨 세가의 가주.
지저위였고, 곁의 사내는 그의 원신이었다.
모두가 잔잔경정도의 환계로 빨려 들어간 사이, 그는 곤, 후, 교가의 가주를 여지없이 죽였다.
“오대세가 모두를 죽일 수 없어 아쉽기만 할 뿐이로다.”
우가와 미가에 손 댈 수 없었다.
뒤에 원선이 자리하고 있는 가문에 손을 댔다가는 어떤 후환을 당할지 모를 일이다.
그들과는 이후 차분하게 교섭해야 할 것이다.
“신호를 보내거라. 가주 셋을 죽였으니 이제 마두 놈을 처단하고 선살의 때가 도래했음을 알려야 한다.”
그리해야 혼란을 잠재우기 쉽다.
잊혀졌던 사씨 세가를 앞세운다.
자신들은 그 뒤에 숨어 선살을 대비했음을 선포하며, 마두의 잔혹한 손속으로 오대세가의 가주가 흉살당했음을 전한다.
오래 준비한 일이다.
차질이 있어서는 아니 됐다.
“가주.”
“뭐냐.”
“신호를 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말 그대로 입니다. 아마도 마두 놈이 다른 마음을 품은 것 같습니다.”
마두가?
지저위는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내 표정을 풀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놈의 얄팍한 수는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잔잔경정도를 다시 빼앗을 수 있는 주술을 미리 심어두지 않았나.”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 당연지사. 더군다나 어떤 속내를 가졌을지 모르는 붕계의 마선이다.
그 정도 조취도 취해놓지 않았다면 수만 년을 살아온 향선이라 말할 수도 없는 노릇.
허나 그의 원신은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뭐?”
“놈이… 사이한 술수로 잔잔경정도에 무언가를 뿌리내렸습니다. 아마 그것으로 보물을 파괴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파괴? 파괴라니? 무엇을? 설마!”
“예, 잔잔경정도입니다.”
“이런… 미친!”
잔잔경정도를 파괴라니!
수계를 수호하는 상징적인 보물을 파괴하려 하다니 제정신인가!
“…붕계 놈들이 제정신일 리 없지. 이 일을 어쩐다.”
잔잔경정도 같은 고계의 연자보가 파괴된다면 그 여파는 엄청날 거다.
잔잔경정도에 빠져있는 수선은 물론, 통천 수궁 자체도 큰 피해를 입게 된다.
‘다행히 회희궁이라 하공까지 여파가 미치지는 않을 게야.’
허나 이곳의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더군다나 수계의 중심.
통천 수궁에서 수천에 이르는 젊은 수선들이 몰살당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방도가 없나?”
“환계 안으로 들어간다면 모를까 바깥에서는….”
방도가 없다.
지저위는 고민했다.
머릿속에서는 한없이 저울질이 시작됐다.
차라리 모두 죽어 깔끔하게 새로이 시작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허나 그리되면 오대세가의 명분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
속세의 일에 잘 끼어들지 않는 원선들이 나타나게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안에는 자신의 아들도 있다.
그냥 둘 수 없다.
득보다 실이 많은 사태다.
“일을 어찌해야….”
고민하던 그때.
스윽.
거대한 무언가의 그림자가 회희궁을 그늘지게 만들었다.
* * *
싸늘하다.
내 몸을 껴안는 그녀의 온기는 따스했으나, 느끼는 감각은 싸늘하기 그지없다.
그렇다.
싸늘했다.
그녀와 나 자신을 감싸는 그 운명.
그리고 그녀의 천명이 싸늘하다.
하계에서의 때처럼.
내 앞에서 사그라들던 그때처럼.
지금도 그러하려는 것인가.
그리 살다 그리 가는 것이 그녀의 운명이란 말인가.
싸늘하다.
심장의 피가 서늘해진다.
사하의 뒤로 건곤권이 다가온다.
그녀의 죽음이 다가왔다.
이전과 같다.
금명지수와 같다.
그녀는 전생과 달랐으나 같았다.
날 살리려 또 죽음으로 향한다.
절체절명의 때에 그녀는 또 다시 내 앞으로 다가왔으나 그와 동시에 떠나려 한다.
‘그렇구나.’
너와 나는 이러한 운명이구나.
통감했다.
동시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부정해야만 했다.
‘안 돼.’
또 그녀를 죽일 수는 없다.
또 다시 상처 입힐 수는 없다.
내가 지금껏 힘을 길러온 이유는 나의 소중한 자들을 지키기 위함.
겨우 만난 인연이다.
또 다시 재회한 인연이다.
아직 소중히 하지도 못한 여인이다.
그런 그녀를 또다시 잃을 수 없다.
날 대신해 잃을 수 없다.
그리해서는 안 되는 여인이다.
두 번이나.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그녀의 죽음을 보고 싶지 않다.
그녀를 기리고 싶지 않다.
추억하고 싶지 않다.
마음으로 그리고 싶지 않다.
그녀의 술을, 다시 맛보기 싫다.
움직여야 한다.
움직여서 지켜야 한다.
‘움직여.’
기혈이 뒤틀려 있다.
막힌 둑처럼 수발이 자유롭지 않다.
‘움직여.’
목구멍으로 핏물이 올라온다.
허나 다시 삼킨다.
근육 하나하나가 찢어질 듯 괴롭다.
‘움직여.’
뒤틀린 기혈이 팽창한다.
끊어질 듯 비명을 내지른다.
허나 아직 괜찮다.
내 피와 뼈와 살은 모두 검.
모두가 검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정도는 아직 괜찮다.
아직 움직일 수 있다.
움직여야 한다.
‘움직여.’
근육과 뼈마디가 욱신거린다.
고통스럽다.
그러나 고통스럽지 않다.
지금은 그런 것보다.
그러한 것들보다.
또 다시 제 목숨을 날 위해 쓰려는 여인을 지켜야 했다.
“움직여어어어어어!!”
이제까지 내가 힘을 길러온 이유가 대체 무엇이던가!
‘움직여라.’
그것들은 모두 나의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던가!
‘움직여서.’
지켜라.
“범아!!”
촤아아악!!
등이 갈라져 피가 솟구친다.
뜨거운 무언가가 등으로 흘렀다.
허나 왜인지 눈앞이 또렷하다.
또렷하게.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놀란 눈이다.
그리고 슬픈 눈이다.
“왜! 왜 그랬느냐!!”
울먹이며 소리친다.
그렁그렁 맺힌 눈물은 어느새 또르르 떨어져 내린다.
“못… 생겼으니… 울지 마라.”
손을 들어 엄지로 눈물을 닦아줬으나 도리어 피가 묻어버렸다.
피 위로 그녀의 눈물이 번졌다.
“바보 같은 놈….”
그리 말하며 날 꼭 껴안는다.
품이 퍽 따스하다.
“떠나지 말거라. 너까지 떠나면….”
떨림이 전해져 온다.
허나 내 눈은 점점 흐려진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상처가 깊다.
붕마의 기운이 몸속을 헤집는다.
난 살 수 없다.
그녀도 직감했을 것이다.
“떠나지 마, 제발….”
툭, 투둑.
그녀의 눈물이 볼에 떨어진다.
뜨겁다.
허나 흘러내리며 차게 식는다.
어느새 눈앞이 깜깜하다.
피로하다.
눈이 절로 감긴다.
귀가 먹먹하다.
어느새 드리운 것은 어둠.
그리고 찾아온 것은 의외로.
평안이었다.
* * *
“…난 무엇을 바랐던가.”
울부짖는 여인과 그 품에서 싸늘하게 식어가는 사내를 본 호준성은 그리 중얼거렸다.
제 손으로 끝을 인도했으나, 마음은 어지러이 펼쳐지기만 하다.
“흐드러지는 낙엽인가, 아니면 님 보내는 앙상한 가지인가.”
알 수 없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말이다.
호준성은 쓰게 웃고 말았다.
천범이란 자가 썩 싫지 않았다.
적당히 무덤덤하며 이해가 빨랐고, 남에게 정을 주지 않는 자였다.
그렇기에 그랬는지 몰랐다.
그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은 붕계의 마선.
수계의 수선들에게 정을 주어서도 안 되고 받을 수도 없는 자다.
허나 그 짧은 시간.
그와 함께한 시간은 싫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던가….”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환수어를 물어간 고양이처럼.
자신을 물고 어디론가 가 버리길.
그도 아니면 자신을 죽여주길.
그리 바랐을까.
그러하여 이리 씁쓸한 마음일까.
“이제 와서는 아무 소용없구나.”
지나가는 인연이다.
그리고.
“뒤따라갈 운명이니.”
누가 먼저 간들 어떠하랴.
빠르든 늦던, 누구든 가는 곳이 그가 먼저 간 곳이거늘.
빨라도 좋다. 늦어도 좋다.
어차피 모두가 가게 될 곳이다.
“끝은 죽음뿐이고, 안식이야 말로 죽음의 또 다른 말이니.”
차분히 눈을 감은 그는 슬며시 다시 눈을 뜨며 여인을 보았다.
사씨 세가.
화기린의 핏줄이다.
‘적어도 화기린의 핏줄만큼은 내 손으로….’
저 핏줄에 죽어나간 마선이 수천.
그 중에는 자신의 혈육들도 있다.
“흠.”
그러나 그 품에 안겨 있는 사내가 거슬렸다.
그가 지키려 했던 여인.
“…어차피 곧 죽을 테니.”
곧 잔잔경정도에 뿌리내린 붕마목이 이 의식의 환계를 부술 것이다.
어찌하든 죽는 것은 매한가지.
그를 보아서라도.
잠깐이나마 그를 위해 슬퍼해주는 모습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날 위해 울어줄 이는 없으니.”
그리고.
이변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화르륵.
“어?”
여인이 화들짝 놀란다.
호준성이 고개를 돌린다.
그의 눈에 푸름이 번졌다.
“저건….”
분명히 죽었던 사내의 등.
깊게 베어진 상처에서부터 푸른 화염이 치솟았다.
호준성의 목울대가 고저를 그렸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입가가 자연스레 비틀린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돌연 솟아난 청염은 주변으로 번져 일대를 가득 감싼다.
시리도록 푸르고, 정화될 것만 같은 청렴함을 지닌 불이다.
그 불 속에서 여러 가지 것들이 절로 튀어나왔다.
아니, 불이 아닌 천범의 몸속에서 나온 것들이다.
세 개의 붉은 열매.
금색의 구슬.
작은 화산.
기괴한 돌.
그리고 범상치 않은 깃털.
그 모두가 범의 몸속에서 나왔다.
그것들은 살아 움직이듯 허공을 선회했다.
하나같이 비상한 물건들이다.
‘그 중에서도.’
저 깃털.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가 보아도 저 깃털만큼은 평범치 않다.
‘봉황의 깃으로 보이는데….’
눈앞에 드리운 청염을 보노라면 떠오르는 것은 하나뿐이다.
“설마.”
그때였다.
돌연 떠오른 귀물들이 눈부신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붉은 열매는 금 구슬 속으로 스며들고 구슬은 기괴한 돌과 하나 된다.
기괴한 돌은 이내 깃털의 인도 속에 작은 화산으로 스며든다.
이내 깃털과 함께 화산 속으로 들어가게 되자 빙그르르 돌기 시작한다.
천천히 선회하는 화산은 손바닥만 한 크기였으나 풍기는 기운이 난폭해지고 서서히 푸르게 변해갔다.
허나 그것도 잠시.
푸른 화산은 다시금 잠잠해지고 더 작은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렇게 작아진 화산은 빙그르르 돌며 다시금 천범의 상처 속으로 스며들었고, 잠시 후 그의 몸속에서 화산 터지는 소리가 쾅! 울렸다.
“하!”
호준성이 희열에 찬 웃음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화산이 내지른 굉음에, 찢겨진 범의 상처가 급속도로 아물기 시작했다.
그 뿐이랴?
이내 범의 몸이 돌처럼 굳어 부풀어 오르더니 그 위로 산이 쌓아 올려지기 시작했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거대해진 것은 앞에서 보았던 푸른 화산이다.
장대하고 웅장한 모습은 호준성이 지닌 극산과 견주어도 나무랄 데가 없다.
범의 몸 위로 자라난 푸른 화산.
화산의 분화구에서 다시 한번 쾅! 굉음이 터지니.
잿가루가 하늘을 적시고, 이내 금색의 화염이 사방을 아울렀다.
그리고 나타나는 것은.
뿔과 날개를 지닌 범.
바로 천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