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345)
낭선기환담-344화(345/600)
낭선기환담 – 2부 54화
거대한 해룡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지란위.
상계에 올라 단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모습이며 기운이다.
가히 가늠할 수 없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
대자연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붕마목이 터져나가는 여파 속에서 정신을 잃자, 잔잔경정도의 환계는 자연스레 사라졌다.
먹물과도 같은 바닷물과 붉은 하늘이 사라지고 회희궁의 연무장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살았다는 안도감에 수선들이 기뻐했으나 이내 납작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그들의 하늘은 거룡이 회희궁 전부를 뒤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룡.
지란위는 처음 나타났던 그대로 아무 말도 없이 유유히 사라졌다.
그들 속에 섞여 있는 지 가주 지저위는 수선들의 틈바구니 속에 쓰러져 있는 천범을 보며 눈빛을 빛낼 뿐이었다.
* * *
사흘 뒤.
은은한 촛불이 밝힌 동굴 안에서 깨어난 범은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신식으로 주변을 살폈으나 거대한 동굴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향초 하나가 피워져 묘한 연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는데, 그 향이 별로 좋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화란.]그가 부르자 허공에서 꽃과 같은 여인이 나타났다.
“깨어나셨습니까.”
화란이 안도하듯 미소 지었다.
[나 왜, 이 모습이더냐.]상계에 오르고는 보기 어려운 본신의 모습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상계에서는 모든 수선들이 본신의 모습을 잘 내비치지 않는다. 자신의 혈통이 좋지 않아 숨기고 있는 자가 있는 반면, 자신의 혈통이 탄로 날까 숨기는 자도 많다.
그리고 크기도 워낙 크기 때문에 웬만하면 본신의 모습을 하지 않는다.
“지치셨으니 그리 되셨죠. 덕분에 사 가주가 고생 좀 하셨습니다.”
[사하가?]“예.”
혹시나 오래토록 깨어나지 않으면 어쩔까 걱정이 많았더랬다.
[…우선 저 향부터 꺼줘. 냄새 나.]“더 맡으세요. 저거 값비싼 거라고 하루 한 개씩 피워 달라 하셨습니다. 맡기만 해도 몸의 회복이 빨라진다고 어렵게 구하셨다 합니다.”
[냄새 구려.]“원래 몸에 좋은 게 맛은 쓴 법이죠. 참으세요.”
저리 단호한 걸 보니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으리라.
범은 단념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냄새는 뭣 같지만 그래도 신경 썼는지 아늑한 곳이다.
몇 가지 귀물이 배치되어 있고 진법으로도 몸의 회복을 도우고 있으리라.
[사하는 뭐 한다더냐.]“사 가주는 바쁘시답니다. 사 가문의 가솔들이 모두 죽었잖습니까. 아끼던 시녀도 죽어 장례도 치러야 하고 타 가문의 자제들과 친분을 쌓아 두어야 하니까요.”
[아… 그런가.]잔잔경정도에 의식을 빼앗긴 소선들은 대부분 금세 죽었다.
의식의 힘이 약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끼던 소선도 죽어버렸다니 슬픔이 이만저만 아닐 텐데….
‘씩씩하네.’
사가를 책임져야 할 가주이니 그런 것일까. 어쨌거나 다행이다.
슬픔에 독에 빠져 있지는 않으니.
[뭐 다른 일은 없느냐.]“저도 모릅니다. 저 홀로 밖에 나다닐 수 있는 처지는 아니라서요.”
그것도 그렇다.
이곳은 통천 수궁.
검령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나다녔다가 괜한 눈독에 들면 큰일이다.
하공에서 이전에 한 번 그랬으니 그리한 것이리라.
범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고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셔도 되겠습니까. 조금 더 쉬시지요.”
스으윽.
범의 몸에서 연기가 새어나오고 이내 사내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상황이 어찌 되는지는 알아야지.”
화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옷을 꺼내 그에게 입혔다.
슬쩍슬쩍 여기저기를 만지며 건드리는 통에 범의 미간이 펴지지 않았다.
“다 되셨습니다.”
“고마워.”
옷깃을 정리해준 화란이 다시금 모습을 감췄다.
범은 잠시 몸속을 관조하며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의 몸속에는 원옥과 곁에 자리한 화정, 그리고 작은 화산이 있었다.
봉이 들어간 탄한여산이었다.
“이름 바꿔야겠네.”
여러 가지가 함축되어 이제는 탄한여산이라 부르는 게 맞지 않다.
수봉외외정.
응명천충.
융전가단
탄한여산이 하나 되어 버렸다.
“수봉여산(守鳳濾山)이라 할까.”
봉이 지키고 있는 산이니.
수봉여산.
지킬 수에 봉황 봉.
거를 여에 뫼 산자를 썼다.
방금 지어냈지만 묘하게 친근한 어감이다.
봉안 수봉여산은 밖으로 꺼냈다.
봉악청화가 불타오르며 자그마한 화산이 손바닥위에서 나타난다.
빙그르르 돌며 자리한 푸른 화산.
수봉여산이다.
봉이 자신의 일부를 희생하여 만들어낸 신통이자 법보 자체이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응명천충과 수봉외외정의 신통을 혼합하여 천지원기를 자연적으로 끌어들인다.
그것을 융전가단의 힘으로 모아두고 걸러내어 선력으로 바꾸어준다.
그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보물이지만 더 대단한 것은 그 안에 자리한 응명천충의 아이들이 남긴 묘리이다.
‘이게 날 치료한 힘인가.’
보이지는 않으나 희미하게 느껴지는,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힘이다.
그녀들이 남긴 응명천충의 신통이 죽음으로 향하는 자신을 살렸을 터.
지금은 빛바랜 듯 희미해졌으나, 다시 채워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구기자에 남겨진 묘리가 그것이었으니.’
자신의 생명을 조금씩 축적하거나 타인의 생을 탈취함으로써 위급 시에 다시 한번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감사해야겠군.’
봉에게도, 그녀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밖에 없다.
범은 한참을 수봉여산을 들여다보다 깃털 하나와 창을 꺼냈다.
가문의 가보이자 연자보인 곤가의 영화비와 후가의 쌍멸이었다.
잠시 고민하다 다시 넣어두었다.
자신의 물건이 아니다.
언젠가 제 주인을 찾아갈 물건들이다. 그러기 위해 맡아둔 것이다.
허나 스멀스멀 올라오는 탐욕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다.
‘허나 약속이다.’
잠깐이었으나 함께 목숨 걸고 싸웠던 이들의 부탁이다.
천범은 그런 아비의 부탁을 외면할 정도로 몰염치한 자가 아니다.
자신만 해도 하계에 자식들을 두고 온 두 아이의 아비이지 않던가.
“때가 되면 건네줘야지.”
그 때가 오기까지.
그때까지만 잠시 지닐 것이다.
지금 넘겨줘 봤자, 오히려 그들에게는 독이 될 터이니.
“욕심쟁이 노인네가 무슨 변명을 그리 꿍얼꿍얼 하십니까? 그냥 시치미 뚝 떼고 쓰면 될 일을.”
참다 못한 화란이 튀어나와 핀잔을 주었다.
“어허! 대도를 향하는 자가 어찌 그리 후안무치 할 수 있단 말이냐.”
“대도는 개뿔. 허구헌 날 뒤통수만 치는데 무슨….”
“스읍- 시끄럽다.”
“그럼 지금 그냥 줄 것이지 뭘 나중이라고 하십니까?”
“지금 건네 봤자 독이 될 뿐이다.”
가문의 가보이기 전에 연자보다.
이것을 탐내는 무리가 없지 않으리라 볼 수 없다.
애초에.
‘그들이 죽은 것부터가 오대세가에 눈이 먼 자들의 소행일 테니.’
곤가의 뒤를 이을 후계는 범도 잘 알고 있는 녀석이고, 후가를 이을 놈도 무도전에 한 번 봤다.
“지금 건네주면 얼마 안가 비명횡사하고 가보는 어디론가 사라지겠지.”
뻔할 뻔자다.
‘할 일이 많군.’
가보뿐만 아니라 가문의 비전으로 대대로 전해져 오는 공법등과 비술의 구결을 의식으로 넘겨받았다.
몇몇을 제외하면 난해함이 극치에 다다라 범도 이해하기 어려운 비술들이 많았다.
이것들 전부도 정리하여 하나하나 전해주어야 할 것이다.
솔직히 귀찮은 일이지만, 그리 나쁘게만 볼 일은 아니다.
한 가문의 비술들을 몰래 익힐 수 있는 기연은 쉽게 찾아오는 게 아니니 당연지사 아니던가.
“곤사비와 후 뭐였더라….”
듣긴 들었는데 잘 기억이 안 난다.
건방지게 기권하라고 떠들기에 주먹 좀 날렸더니 바로 떨어져나갔었다.
“…뭐 상관없나.”
때가 됐을 때 전해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
그 가문이 어찌되든 자신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이다.
‘후씨 세가는 그렇다 쳐도 곤씨 세가는 점점 몰락하려나.’
곤가는 그 특이한 체질 탓에 후계는 곤사비밖에 없었고, 친가나 외가 쪽 혈육이 있기는 하지만 향선에 오른 자는 없다고 알고 있다.
앞으로 크게 굴러갈 수계의 흐름에 곤씨 세가는 점점 주변에서 물어뜯는 승냥이 떼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할 일이 아니긴 하다.
범은 생각을 털어버리고는 동굴 밖을 나섰다.
또렷한 햇빛이 그를 비춘다.
눈이 부신 태양과 하늘이다.
“하늘….”
그러고 보니 그 해룡.
지란위가 맞기는 했던 걸까.
아마 맞을 거라 생각하지만 확인해볼 필요는 있다.
동굴 밖을 나서니 분주하게 움직이는 궁녀들이 엿보인다.
“거기 자네.”
“아, 예. 부르셨습니까.”
소선의 경지에 있는 궁녀였다.
범은 그녀에게 이곳이 어디며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이름 모를 상선의 물음에 그녀는 성심성의껏 답변했는데 그 중 몇 가지는 범이라도 놀랄만한 것들이었다.
“벌써 오대세가가 바뀌었다고.”
“네, 아직 한 자리는 비워져 있다 들었는데… 왜 그런지 까지는 저도 아는 바가 없사옵니다.”
고작 사흘이 지났는데 벌써 오대세가가 바뀌었다 선언한 모양이다.
하나는 비워두었고, 그 두 자리를 차지한 것이 팽가와 지가.
“그리고 그때 나타난 게 지란위가 맞다고….”
“원선태사의 존명성대를 함부로 말하셨다가는 큰 벌을 받게 될지도 모르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그래, 고맙군.”
수계에 고작 셋 있는 원선 중 하나인 지란위가 맞다 한다.
그들은 원선태사라 불리며 웬만한 일에는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데 이번 일에는 왜 나타났는지 호사가들도 어리둥절한다고 한다.
“곧 장례식이 거행될 터이니 저는 그럼 이만….”
“아, 고마웠네.”
여러 이야기가 있으나 대부분은 범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우선은 장례식이 거행된다 하니 그곳부터 가보는 것이 먼저다.
잠시 뒤.
어김없이 맑은 하늘이었으나 그 아래 수선들의 얼굴은 어두웠다.
통천 수궁과 하공에서 치러진 장례가 조용하게 시작됐다.
수궁에 모인 수선들만 수천이요, 그 아래 하공에 자리한 수선들만 해도 수십만에 이르렀다.
그들 모두가 하나같이 향을 피우며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떠나보낸 이를 위한 조용한 은율이 악기를 연주하는 수선의 손에서 흘러나왔다.
애도의 행렬은 사흘 밤낮으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중에는 아비를 잃은 곤사비도.
후씨 세가의 가솔들은 물론, 교가의 교청 또한 언뜻 보였다.
“다시금 하늘의 품으로 돌아간 곤씨 세가의 가주 고사춘과 후씨 세가의 가주 후독원 그리고 교씨 세가의 가주 교춘정 외, 오백구십일 명의 수선을 기리노니….”
오대세가의 가주 중 셋이 죽고 그 외의 수선들도 목숨을 잃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마선의 습격으로 일해 수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죽음에 석연찮은 점이 있었으나 초점이 맞춰진 것은 마선에게 공격당했고, 그로 인해 수계는 많은 수선을 잃었다는 것이 중점이었다.
“우리는, 지난 과오를 바로잡고자 수계가 필요로 하는 가문을….”
이런저런 말은 많으나 오대세가의 곤과 후, 교는 아픔을 달래는 기간을 갖고, 그 자리를 대신할 가문으로 지씨 세가와 팽씨 세가가 전력을 다하여 선살전에 대비할 거란 소리였다.
당연히 수선들의 슬픔은 분노로 바뀌기 시작한다.
“이번에도 당할 수는 없소. 비통함만이 남는 승리는 승리가 아니오. 난 반드시 선살로부터 우리 수계를 보호하여 완전한 승리로 이끌겠소!!”
열광의 함성이 터져 나온다.
가히 흥분의 도가니다.
허나 범의 마음은 고요하기만 했다.
아니, 도리어 싸늘했다.
단상에서 연설하던 지저위의 뒤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 선살전의 아픔을 아직도 마음 한켠에 지니고 있소. 허나 아직 살아있는 것은 누구보다 선봉에 서 전장을 주도한 화기린의 일가가 있기 때문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소. 그리고 이분이 바로….”
화기린 일가의 적통.
“현 사가의 가주. 사하 수선이오.”
바로 사하였다.
‘쟤가 저기 왜 있는 거야….’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