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346)
낭선기환담-345화(346/600)
낭선기환담 – 2부 55화
오대세가.
아니, 지금은 사대세가의 가주들이 모여 한마디씩 이번 사건에 대한 포부를 말하는 중이다.
그 와중에 사하가 나오니 대번에 천범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알 만하군.’
예상대로의 일이지만 직접 보게 되니 더 배알이 꼴렸다.
필요치 않을 때는 내치더니, 이제 와 이용하는 것이니 당연하다.
마음만 같아서는 죄다 뒤집어 엎어버리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자리를 지키는 가주가 넷.
그 밖에 여러 관직과 가문의 수선들이 모두 모여 있는 자리다.
소선과 상선만 해도 수천수만이고, 향선에 오른 자들 또한 그 수가 적지 않다.
게다가 엄숙한 장례의 자리다.
이 상황에 소란을 일으킨다면 간단한 일로 끝나지는 않겠지.
안 그래도 마선의 습격으로 민심이 흉흉해져 있는 터이니….
“저, 저는 사씨 세가의 장손이자, 현 사씨의 가문을 책임지고 있는 가주. 사하라고 합니다.”
목소리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자신감 없는 모습에 그를 지켜보는 수선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화기린의 용맹함을 기억하는 자들은 안타까움에 혀를 찼고, 모르는 자들은 의아함에 눈만 깜빡거렸다.
당황한듯 어쩔 줄 몰라 하는 사하의 모습이 눈에 담긴다.
입을 붙였다 뗐다하며 어찌하면 좋을지 모른다.
범은 한숨을 내쉬고 입을 달싹여 남몰래 전음을 보냈다.
-침착해라.
그러자 사하는 흠칫 놀라며 수선들 사이에 섞여 있는 범을 찾아 냈다.
그녀의 표정에 반가움과 기쁨, 그리고 초조함이 묻어난다.
-네가 그 자리에 왜 올라갔는지는 모르겠다만,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면 과감하게 말해라. 넌 죄인도 아니고, 저들에게 잘못한 것도 없으니.
진중한 그의 음성에 사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내 주먹을 말아쥐자 눈에 힘이 들어간다.
‘이제 좀 봐줄 만하네.’
이내 그녀의 입이 열렸다.
“옛 영광을 찾을 생각은 없습니다. 지난 선살전에서 저희 사씨 세가는 누구보다 앞장서 살선(殺仙)을 쓰러뜨려왔으나 돌아온 것은 가문의 몰락이었을 뿐입니다.”
가문의 몰락.
그 소리에 수선들의 웅성거림이 더 커져만 갔다.
“가문의 몰락이라니…?”
“무슨 소리야 저게.”
아는 자들은 침묵했고, 모르는 자만이 의아함에 입을 연다.
허나 힘 있게 소리치는 사하의 다음 말에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허나 그렇다 할지라도 저는! 이번 선살전에서 저의 선조들이 행했던 것처럼 살선을 죽일 겁니다. 지금과 같은! 그리고 이전과 같은 아픔이 지속되지 않기 위해! 그 고리를 끊어낼 것입니다!”
고리를 끊어낸다.
“고리를 끊어낸다니 무슨 말이오.”
“설마 붕계와 사계를 침략이라도 하겠다는 소리오?”
그들의 물음에 사하는 되물었다.
“그럼 언제까지 저희 수계가 붕계와 사계의 먹잇감 노릇이 되어야 합니까. 언제까지 우리는 고통 받아야 합니까! 왜 그래야 합니까!”
그녀의 물음에 답하는 자는 없다.
이제까지 수계는 먼저 전쟁을 일으킨 적이 없다.
밑으로는 충계에서 쏟아져 나오는 선충들의 피해가 이어졌고, 위로는 선계를 경계해야 했다.
거기에 마계와 붕계놈들까지.
그 때문에 수계는 항상 보수적이다.
수비적이다.
“저희의 운명이 그러한 것입니까? 평생을 저의 선조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지금 이후의 후손들까지 항상 당하고만 살아야 하는 겁니까? 그게 저희의 운명이라서요?”
사하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그 고리를 끊어내야 할 때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아니, 수계의 여러분들이 절 도와주신다면! 선살전은 더 이상 우리가 당하는 것이 아닌, 저들에게 갚아주어야 하는 것으로 바꾸어 보이겠습니다.”
흥분한 듯 얼굴이 붉다.
숨이 가빠 보인다.
허나 낯빛에 그늘은 없다.
하고픈 말을 다 한 것 같았다.
“이상입니다.”
그녀가 단상에서 내려섰으나 모여 있는 수선들은 말이 없었다.
모두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수선들은 모두들 저마다의 신통을 이용해 은은한 빛을 띠는 광구를 하늘 위로 올려 보냈다.
장례가 치러지는 중이니 큰 소리는 내지 못한다. 허나 그녀의 연설은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리하니 저러는 것이다.
수천, 수만의 수선이 사하의 의지에 감복했다는 뜻이다.
사하는 그 뜻에 화답이라도 하듯 기화선을 휘둘러 적화를 뒤집어 쓴 화기린으로 하늘을 수놓았다.
아름다우면서도 용맹하기 그지없는 화기린이었다.
* * *
그 뒤, 장례는 한 달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 한 달 내내 화기린과 사씨 세가의 가주 사하의 이야기는 여러 수선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수궁뿐만 아닌, 수계 전체에 그녀의 이름과 가문이 퍼져나갔다.
당연히 화기린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은 그녀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선살전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렇게 헌신한 가문이 왜 지금은 저리 됐다는 건가?”
“그게 말일세….”
소근소근.
“뭐?! 역적의 누명?”
“조용히 좀 하게…! 동네방네 소문을 다 낼 심상인가!”
“크흠, 하여튼 그게 정말 사실인가? 감사해도 모자란 가문을 그리했다고…?”
“들리는 소문이 그렇다는 거지 확실한 건 없네. 자그마치 수만 년이나 지난 일이니 당연하지.”
“쯧, 사씨 세가만 딱하게 됐군.”
“그런데도 저리 수계를 위해 한 발 벗고 나서니 대단한 게지.”
담소를 나누던 수선은 이내 주변을 살피더니 다시 한번 소곤거렸다.
“한데 들리는 소문이 하나 더 있는데 들어 보실랑가?”
“뭔데 그러나.”
“사실은… 이번에 영면에 든 세 가문의 가주 분들이 있지 않은가.”
“그분들이 왜.”
“사실 그분들이 사씨 세가를 시기 질투하여 누명을 씌워 몰락하게 만든 장본인들이라는 소문이 있더군.”
“뭐!? 그게 정말인가!?”
“소문일 뿐이네 소문… 허나 꽤나 그럴 듯한 소문이지.”
“허허… 그리 안 봤거늘, 천벌을 받았구만 그래 쯧쯧.”
요새 들어 하공의 주루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풍문이다.
‘대놓고 말하고 있으면서 뭘 저리 속닥거리는 척 하기는.’
정말 숨겨야 할 이야기라면 전음을 썼겠지 저리 속닥거리진 않는다.
‘하는 짓거리가 참 치졸하구만.’
아마도 팽가와 지가 둘 중 하나가 은밀하게 공작하고 있는 것일 터.
저런 소문은 발이라도 달린 듯 삽시에 퍼지기 마련이다.
지난 연설로 사씨 세가의 관심이 깊어졌으니 혹시나 나타날 추문을 미리 차단한 것이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삿갓을 쓴 채 주루에서 낮술을 홀짝거리던 천범과 화란이다.
“어쩌긴 뭘… 사하 고것이 선택한 길이다.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자신의 포부를 밝힌 것도, 수선들에게 사씨 세가를 각인시킨 것도 모두 사하의 뜻이다.
그녀의 인생과 선택에 왈가왈부할 이유도 책임도 범에게는 없다.
그저 친우로서 묵묵히 지지하고 지켜봐줄 뿐이다.
“안 그래도 물어보기는 했었다.”
네가 그리 하는 것 자체가 놈들의 심계이며 이용당하는 거라고.
허나 사하는 개의치 않았다.
“뭐라던가요.”
술잔을 내려놓은 범이 히죽 웃었다.
“바라던 바라고 하더군.”
그녀가 어떤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는 범조차 모른다.
허나 대강은 알 수 있었다.
‘기회라 생각했겠지.’
멸문 직전까지 간 사씨 세가다.
이리 관심을 받으면 기세를 타고 한 번에 규모와 크기를 늘릴 수 있다.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나에게는 뜻이 있다. 그 뜻을 널리 펼치고 대도를 이룰 거다. 하여 수계의 고름을 쥐어짤 것이며 가문의 본래 명예를 되찾을 게야.]어째서 저리 야심이 생긴 건지는 모르겠다만….
“나쁠 거 없지.”
그 길이 험난하고 위태롭겠으나, 홀로 걷는 길은 아니니 괜찮다.
범이 곁에서 도울 것이니.
‘그들이 자신을 이용한다면 자기 또한 놈들을 이용할 거라던가.’
재밌는 일이다.
생각을 정리한 천범은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아, 오늘이었죠.”
화란이 작게 박수를 치며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래. 오늘이다.”
천무선으로의 취임식이 바로 오늘이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성대하게 치러지지는 않겠지만, 그렇다 해도 나름 기대하고 있다.
나름대로 고생이란 고생을 다 하고도 아직 수계에 붙어있는 이유가 바로 천무선의 직위 때문이라 볼 수도 있으니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잠시 뒤.
범은 곧장 입궁하여 취임식 절차를 밟았다.
수궁의 문무궁.
취임식은 문선과 무선이 함께 모이는 장소인 문무궁에서 이루어졌다.
현 대천무장과 대천문장.
그리고 그 밑의 천무장과 천문장들이 엄숙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 앞에 모인 이들은 범을 비롯한 무도전에 출전했던 상선들이다.
무도전에서 살아남은 상선들 중 뛰어난 자질을 지닌 자들이었다.
개중에는 범과 무도를 겨루고 패배한 상선 또한 있었으며, 익숙한 얼굴로는 지씨 세가의 지헌위와 팽씨 세가의 팽가연도 함께였다.
“시기가 시기인 관계로 조촐하게 치러지는 취임식이다만, 그대들은 자랑스러운 통천 수궁의 이름을 짊어지게 될 자들이다. 사사로운 것에 연연하지 말고 수궁의 뜻을 펼쳐라.”
대천문장의 선기를 담은 음성이 퍼지자 모두들 움직임이 멈췄다.
“호명하는 자는 앞으로.”
백 명이 조금 넘는 상선들이 한명 한명씩 호명되기 시작했다.
“상선 팽가연, 상선 고원원, 상선 윤진정, 상선 하개완.”
척척 앞으로 나서자 대천문장이 직접 나와 영패를 하나씩 건네준다.
저들은 천무선이 아닌, 천문선이 되어 수궁에 몸담게 될 것이다.
천무선은 주로 무도를 주력으로 삼는 수선들이 발탁되는 곳이고 주로 수궁 외부로 나가는 일이 많은 직위이다. 그에 반해 천문선은 진법이나 법술 등등이 뛰어난 이들을 모아 수궁의 결계를 유지하거나 내적인 일을 주로 처리하는 곳이다.
간단하게 천무선이 창이라면, 천문선은 방패인 셈이다.
‘팽가연은 천문선이로군.’
나름 잘 어울린다.
무선에 가까운 느낌은 아니었으니.
“상선 지헌위, 상선 우명, 상선 미매련, 상선 해춘분. 앞으로.”
저들은 천무선이다.
대천무장이 나와 영패를 건넨다.
영패를 받은 지헌위는 히죽히죽 웃으며 범을 향해 입꼬리를 비틀었다.
왜 저러는지 몰라 천범은 속으로 욕하다 잠시 뒤 이유를 깨달았다.
‘호명된 순서.’
순서에 의미가 있는 모양이다.
처음에 불리는 자들은 대부분 헌앙하며 기세가 남다른 상선이다.
허나 뒤로 불리면 불릴수록 그 기세가 조금은 떨어져 보였다.
그것을 알고 지헌위가 천범을 비웃으며 도발한 것이다.
‘같잖기는.’
그래봤자 가문 덕으로 저리 하게 된 것이 틀림없다.
지씨, 우씨, 미씨.
한가닥 하는 가문들이지 않던가.
‘원선태사가 있는 가문이던가.’
아마 그럴 것이다.
지헌위를 제외한 우명과 미매련이라는 상선은 당연하다는 듯이 무미건조한 얼굴이다.
범은 이내 신경을 껐다.
그런 자질구레한 것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다. 애초에 범이 목적하는 것은 명예보다 천무선의 혜택이니.
“자, 다음 호명된 자는 앞으로.”
그 후에도 차례차례 천무선과 천문선으로 취임식이 치러졌다.
천무선과 천문선을 상징하는 영패를 받은 이들은 감격에 벅차하며 싱글벙글 웃음꽃을 피웠다.
그렇게 대기하는 상선의 숫자가 점차 사라지고, 대부분은 우측과 좌측으로 천무선과 천문선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이내 가운데에 홀로 남은 자가 한 명 있었으니.
“상선 천범.”
천범이었다.
제일 마지막에 불리는 상선이라 그런지 영패를 허리춤에 매단 천무선과 천문선들은 각기 다른 얼굴을 하며 천범을 보았다.
그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은 자들은 꼴좋다며 비웃었고,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측은하게 보았다.
그리고 그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도 범은 담담한 낯으로 단상으로 올랐다.
그를 부른 건 대천문장이었으나, 이상하게 대천무장도 함께 나섰다.
묘한 상황에 그를 비웃던 이들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네를 두고 대천무장과 함께 오랜 담소를 나누었네. 하여 이리 결정하기로 했지.”
대천문장이 꺼낸 것은 문선패.
“우린 자네가 잔잔경정도에서 한 일을 잘 알고 있네.”
작게 속삭이며 말하는 대천무장.
이내 그녀는 무선패를 꺼냈다.
둘의 손아귀에서 떠오른 영패가 기이한 기운에 의해 순간 하나로 합치어진다.
봉황과 용이 그려져 있는 영패.
그 사이 화기린의 그림이 덧그려져 새롭게 만들어진 영패다.
“상선 천범. 그대를 특별 종4품, 문무관장으로 임명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