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353)
낭선기환담-352화(353/600)
낭선기환담 – 2부 62화
“그래, 문무관장에게 전해줬다고.”
끄덕.
천범 앞에서 재잘거리던 때와는 달리 주약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문무관장이 무어라 하더냐.”
“딱히.”
딱딱한 표정에 단답형이다.
허나 대천무장은 익숙한 듯 주억였다.
“그와도 인연이 있는 아이이니, 잘 지켜주겠지. 다소 걱정이 많았는데 문무관장으로서 이리 잘해주는 모습을 보면 그 아이를 맡겨도 될 게야.”
흡족한 미소를 보이는 대천무장이었으나 그의 원신인 주약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모습을 감춰버렸다.
대천무장은 작게 한숨 쉬고 자신이 앉아있던 상석을 밀어냈다.
이내 수결을 맺고 작은 영패를 들어 입을 달싹여 선문을 외웠다.
잠시 후, 어딘가로 전송된 그녀를 반기는 것은 작은 동굴이었다.
은은한 불빛이 사방에 자리해 녹음진 반딧불이 나다니고, 선초가 절로 발광하는 아름다운 동굴.
잠시 그곳을 감상하며 걷자 작은 호수가 나왔고, 그 호수 위에는 붉은 실 하나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호수 밑바닥에 본래 자리하던 수많은 붉은 실이 끊어져 잠겨 있음을 보노라면 왠지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오셨습니까 대천무장.”
누군가가 그녀를 맞이했다.
“예, 여쭐 것이 있어 다시 찾아왔습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천무장은 여인의 안내에 따라 길을 거닐었다.
서서히 불빛이 사라지고 깜깜한 어둠이 시야를 잡아먹었다.
어느새 소리도 들리지 않고 감각조차 사라져 자신이 길을 걷는 것인지 아닌지조차 희미해질 때 즈음.
[만났느냐.]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옥구슬 같은 목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만났습니다. 일러주신 대로의 자질과 그릇을 지닌 사내였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그 무엇도 느껴지지도 보이지도 않는 곳이다. 이런 곳에 잠시라도 더 있다가는 정신이 나갈 것만 같은데… 그녀는 지난 천 년간 이곳에 있었다.
[앞으로 천 년.]“선살전을 말씀이십니까.”
[그 날에는 수계의 원선태사들도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선계의 그들도 움직일 수밖에 없지.]그게 뭐 어쨌다는 것일까.
궁금했으나 대천무장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눈독 들이는 놈이 생길 것이다. 이미 한 놈, 아니 두 놈이 있지.]“…그렇다면.”
[내가 관여하면 특이점이 생긴다. 만나서는 아니 돼.]지독한 말이다. 그녀의 말은 즉.
[그를 도와라. 그것을 위해 널 떼어 낸 것이니.]죽으라는 소리나 진배없었다.
* * *
문무각의 주인.
문무관장의 침소에는 그가 아닌 웬 소녀가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천범이 영 아니꼽게 보고 있었는데, 이유는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소녀가 곤씨 세가의 혈통인 곤사비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하다하다 저 핏덩이를 납치해 자신의 욕정을 채우려고….”
한동안 조용하더니 기회 잡았다는 듯 화란이 나타나 재잘거렸다.
“저는… 이제 감당할 수 없습니다! 흑! 한껏 재미 본 노리개는 이제 흥미가 떨어지셨으니 당연하지요! 예! 당연히 헌 것보다는 새 것이 좋고! 늙은 것보다는 파릇파릇한 게 좋겠죠!”
“아… 조용히 좀 해라.”
“이제는 변명도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전 이제 무섭습니다. 산군의 여성편력이 이리 두루두루 넓을 줄은… 아무리 그릇이 커도 이리 대접만 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어허, 거참….”
그만하라 혀를 찼으나 오히려 신이 난다는 듯 입을 쉬지 않는다.
“이 꼴을 산비님께 보여드렸어야 했는데… 아, 아니죠. 어차피 그분이야 겉으로는 다 이해한다는 얼굴 해 놓고 뒤에서 피눈물을 흘리시는 분이니 보여줘 봤자 재미있지는 않겠습니다.”
“초아가 그랬던가?”
“산군의 부인 분들이야 워낙 마음이 넓으시니 대개 그렇겠지요.”
화란은 생각났다는 듯 박수를 치며 히죽 웃었다.
“천유 아씨께 당신 아버지가 이런 파렴치한 놈이다! 라고 말흔드므…!”
그것만은 못 참겠는지 천범이 화란의 볼을 잡았다.
그녀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요. 입이냐. 요 입. 이 요망한 입이 그리 방정을 떠는 게냐.”
찰싹찰싹 찰지게도 때리니 놓으라 발버둥을 친다.
천범은 은근슬쩍 쪽 입을 맞추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팔짱을 꼈다.
“이번만 봐드리지요.”
한 방에 화인지 무엇인지가 풀린 화란은 그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얘도 참 세상 모르게 잘도 자는군. 생각이 없는 건지 긴장을 못하는 건지, 애초에 왜….”
자신에게 곤사비를 건넸는지도 잘 모르겠다.
‘일단 이야기를 듣는 게 빠르겠지.’
정황상 어디서 납치한 건 아닐 터.
아마….
“곤가에 무슨 일이 생겼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자신에게 곤사비를 건넬 이유가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대천무장이 보낸 것이니.
픽.
천범이 금빛 기운을 곤사비에게 튕기니 슬며시 눈을 뜬다.
“뭐… 어라?”
일어나자마자 천범의 얼굴이 있어서일까. 곤사비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듯하다.
“일어나라. 듣고픈 게 있으니.”
전과 달리 경어는 없었다.
상황과 위치가 바뀐 지 오래다.
“네깟 게 감히 누구에게…!”
허나 곤사비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모두 너 때문이야! 네가 내 정혼자 앞에서… 아무튼 다 너 때문이야!! 돌려내! 우리 가문 돌려내!!”
왠지 이렇게 될 거 같기도 했다.
일단은 달래고 후에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겠으나….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천범도 곤 가주에게라면 몰라도 그 딸 녀석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개억지를 부려 사씨 세가와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었던 놈이다.
별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없다.
“네 이년! 감히 누구 앞이라고 말을 함부로 놀리느냐! 이분은 네깟 년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니 예를 갖추거라!”
돌연 보다 못한 화란이 따끔하게 소리친다. 그녀의 기백에 놀란 곤사비는 덜덜 떨면서도 할 말은 한다.
“뭐? 그래봤자 상선 주제에….”
아직 정신 못 차렸나 보다.
“어허! 이분은 통천 수궁의 종4품 문무관장 어르신이다!”
“종, 종4품? 문무관장? 뭐야 그건. 처음 듣는데…정말로 그런 직책이 있다고? 아, 아니 애초에 이제 막 등선했다던 상선이 어떻게 종4품이 될 수 있는….”
곤사비는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다 답을 냈다.
“거짓말! 내가 또 네놈의 잔꾀에 속을 줄 알아!?”
천범은 귀찮아졌는지 품에서 문무관장을 뜻하는 영패를 내보였다.
영패를 보자마자 아무리 철딱서니 없는 계집애라도 상황 파악을 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저를 이리 납치하시면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안색이 파리해지고 손발을 덜덜 떨었다.
그때였다.
덜컹, 문이 열렸다.
“소란이 났기에… 와 보았습니다.”
주결경이었다.
“곤사비 영애시군요.”
“아, 결경 언니?”
아는 사이인 듯하다.
“언니가 왜 이곳에… 아니, 여기는 대체 어디에요?”
“이곳은 문무각입니다. 문무관장께서 배정받은 거처이지요. 사비 영애야말로 이곳에는 웬일이십니까?”
“그걸 저도 잘… 일어나 보니 이곳이었던지라.”
이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범에게로 쏠린다.
“대천무장께서 건네주셨다.”
본래는 원신이지만 어차피 명을 내린 게 그녀이니 그게 그거다.
“그랬군요. 저도 소식은 들었습니다. 많은 고초를 겪으셨겠죠.”
주결경이 대강 알겠다는 듯 말했다.
“뭔가 알고 있는 게 있느냐.”
“곤씨 세가는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랬던 모양이다.
“곤가에 관련된 모든 게 불타고… 웬 환수가 나타나 풍비박산이 났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그러자 곤사비의 낯빛이 새하얗게 변한다.
사실이 맞는 듯하다.
“넌 어찌 살아남은 게냐.”
범이 물으니 답하기를.
“곤가가 습격당하던 날, 대피하던 도중에 갑자기 누군가한테 납치당했습니다. 하여 깨어나 보니 이곳에 있게 된 거라서 철썩 같이 저… 아니, 문무관장께서 절 해코지하려고 한 건 줄 알았습니다.”
“헛소리를! 이분께서는 아무리 그릇이 넓다 해도 너처럼 어린 아이에게 음욕을 품으실 분이 아니다!”
아직도 호통 치는 재미에 빠졌는지 화란이 버럭 소리쳤다.
곤사비는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는지 울먹거리며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다.
‘주결경 때문에 보낸 거였나.’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으리라.
허나 그리 달갑지 않다.
괴한의 습격.
곤가의 멸문.
벌써부터 다른 가문을 털어먹기 시작한 모양이다.
제일 우선된 것은 곤씨 세가.
가주 말고는 마땅한 향선이 없고 그 자제 또한 철없는 어린아이니 치는 것 정도는 문제가 없었겠지.
곤가의 재물을 털어먹고, 가보인 영화비를 얻을 수 있다면 응당 천번 만번 저질러도 수지가 맞는다.
‘허나 대천무장이 개입했을지는 그 들도 몰랐겠지.’
아마 곤가만이 아닐 것이다.
이번에 가주가 죽어 힘이 약해진 곤, 교, 후 가문 모두가 해당된다.
‘교가는 괜찮겠고.’
후가도 아직은 괜찮지 않을까 싶다.
곤가와 달리 다른 쪽은 자식도 많고 친인척도 많다 들었으니.
‘어쨌거나 대천무장에 내게 이 아이를 보낸 건 보호해달라는 뜻이겠지.’
역시 암만 생각해도 귀찮은 녀석을 받아버렸다.
주약과의 내기를 날로 먹을 생각에 신나서 봉인구인 줄 알면서도 제대로 파악할 생각을 못 했다.
‘나도 아직 멀었구나.’
허나 멀뚱멀뚱 바라보는 곤사비와 주결경은 아직도 자신에게 시선이 향해있다. 절로 한숨이 나오지만 어쩔 수 없다.
곤 가주와 약조한 것도 있으니.
“방 하나를 내주게. 편히 쉴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고, 소문이 새어가지 않도록 잘 단속해야 할 것이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곤사비. 네 가문이 멸문당했으니 이제 널 영애 취급하는 자는 세상에 없을 거다. 나부터가 그리 하지 않을 거고 문무각에서 지내는 동안은 편히 있어도 좋다. 허나,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것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지. 이곳에서 지내고 싶다면 너도 일해라. 결경의 일을 돕다 보면 자연스레 배울 수 있겠지.”
오대세가의 명문 규수에서 아무것도 없는 단순한 소선이 되었으니 처지가 딱하기도 하다.
허나 이리 하는 것인 더 빨리 현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게 곤사비에게 더 좋을 것이니.
“쉬고 싶으니 그만 물러가라.”
이내 주결경과 곤사비가 사라지자 화란이 냉큼 다가왔다.
“또 왜.”
“데리고 계실 겁니까?”
“사정이 딱하니 내칠 수도 없지 않더냐. 게다가 저 아이는 모르겠지만 잔잔경정도 속에서 곤 가주와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런 자의, 아비의 부탁이니 모른척하기 어렵지.”
기왕 이렇게 됐으니 신선 구실 정도는 하게 만들어주어야 후에 후회가 남지 않으리라.
다행히 아직 그의 머릿속에는 곤 가주가 남긴 가문의 비전과 비술 등이 의식 덩어리로 남아있다.
자세히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곤가의 비술 중에는 천범의 날개로도 쓸 수 있는 풍신통이나 기타 쓸 만한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것을 익히기 위해서는 곤씨 세가 혈통의 도움이 필요했다.
짬이 날 때마다 전해주며 때가 되면 그녀를 통해 곤가의 비술을 터득하는 일도 나쁘지 않다.
“가문까지는 내가 어쩌지 못하니 나머지는 그 아이가 할 일이지.”
“근데 산군.”
“왜 또.”
“산군 이제 곧 휴가 가시잖아요. 그러면 그때는 어떡합니까?”
“아.”
맞다, 휴가가 있었다.
한 달의 적응 기간을 거친 후, 받는 휴가는 일종의 포상 휴가다.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가 금의환향하여 피로감을 푸는 데 있다.
그렇기에 범도 상서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려 했었다.
“대천무장한테….”
다시 되돌려줄까 했으나 그녀 또한 사정이 있으니 자신에게 넘긴 것이 아니겠는가.
“귀찮네, 거참.”
내버려두고 다녀오자니 그 사이에 영화비를 노리는 괴한이 들이닥칠 거 같아 불안불안하다.
‘괴한이 아무래도 오대세가중 하나나 둘이다 보니….’
통천 수궁이라도 안심할 수 없다.
“개판이구만 완전.”
놓고 갔다가 문무각에서 실종되거나 죽어버리면 괜히 잠자리가 뒤숭숭하지 않겠는가.
“데려가는 수밖에 없나….”